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트박하 Aug 17. 2021

아름다운 이별이란 뭘까.

정말 그런 게 있기는 할까.






    삶에서 이별은 불가피하다. 이별뿐만이 아니더라도 삶에는 피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옛말은 이제 즐길 수 없으면 피하라는 말로 비꼬아 더 자주 사용되지만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즐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즐길 수 없는 일은 피할 수 없다. 이별 또한 피할 수도, 즐길 수도 없다.


    지나가면 다 추억이 되고 잊히고 빛도 바래 감정은 희미해진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건 그냥, 통증이나 고통에 무던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익숙해지는 것이다. 이 정도의 아픔은 감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몇 번이나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어떻게 나를 괴롭히고 어떻게 아프게 할 것인지 알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덜 아픈 것도, 상황이 나아진 것도, 괜찮아진 것도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에 대해 ‘괜찮다’라고 말하곤 한다. ‘괜찮아지고 싶다’보다는 타인을 안심시킬 수 있는 말이니까.     


    사건은 문장이 되고 어떤 문장들은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고인다. 이별은 사건이 되고, 무수히 많은 문장이 태어난다. 소중한 존재일수록 이별은 고통스럽다. 더 잘해줄 수 있었는데. 더 많이 시간을 할애하고, 더 많이 관심을 가지고, 더 많이 선물을 보내고 등등의 후회, 자책, 원망. 왜 그러지 못했을까. 왜 사소한 일을 제쳐 두고 먼저 달려가지 못했을까. 왜 우리가 영원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까. 당연히 떠나는 순간이 온다. 남겨진 존재는 그 순간을 품고 살아가야만 한다. 소중한 만큼. 소중했던 만큼. 유일했던 만큼.

   

    충분히 잘 해줬던 걸까, 나는.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누구도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을 계속 곱씹게 된다. 함께였던 시간을 돌이키면서 왜 그 순간을 더 아끼지 못했을까, 하는 의미 없는 자책을 한다. 언젠가는 이렇게 묻는 것도 지치게 되겠지. 그러나 그 순간이 와도, 자기 합리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어쩔 수 없었어, 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식일 것이다. 소중하고 유일한 존재가 나를 떠나간다면.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 좋은 말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할 필요 없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다가올 수밖에 없는 미래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 우리는 대비를 해야 하고, 나름의 준비가 필요하다. 충격적인 진실은 빨리 깨달을수록 좋다. 이후의 행동 방향을 고민할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나이 많은 이들 중에서 미리 자신의 관을 짜 두고, 묻힐 자리를 봐 두는 것이 오히려 안심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사후에 자신이 어떻게 될지를 미리 알아 두고 만약의 일이 생겨도 준비가 되어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구나, 하고 안심하는 것이다. 그게 또 효심 깊은 행동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단다. 요즘에는 의학이 발달하고 건강을 챙기는 다양한 방법이 늘어나면서, 문화가 바뀌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불길하다고 여겨지는 것 같지만.     


    당연히 언젠가 반드시 나를 찾아올 일.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미리 슬퍼하는 것. 무엇이든 정도 이상이면 해롭다. 과하지 않으면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소중한 존재가 나를 떠날 것이라고, 그때 나는 분명 많이 후회하고 많이 울 거라고. 지고하고 당연한 사실을 문득 떠올린 순간 나는 무력해졌다. 이제 와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무엇을 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아서. 그저 마주하고, 감당하고, 받아들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거라는 사실이, 진실이 나를 엄습했다.     


    혹은, 내가 저지른 어떤 사소한 일 때문에 이 소중한 존재와 이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내 잘못으로 보다 이르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상상하고, 느껴보았다.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지금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괜찮아질 것이다, 라는 생각으로 안심하고 버틸 수 있지만, 언젠가는 이 빈자리를 영원히, 평생 감당해야 할 순간이 올 것이다. 나는 그 순간, 괜찮을 수 있을까?     

    버틸 수 있을까?     


    혹은, 내가 느끼는 슬픔이 온전하고 순수한 상실을 위한 걸까? 내가 자신을 가엾게 여기고 있지는 않나? 떠난 존재의 빈자리보다, 내가 느낄 슬픔이나 상실감이 더 중요할까? 살아 있는 존재가 죽은 존재보다 우선 되어야 할까? 죽음은 성스럽고 무의미하다. 훼손되어서는 안 될 미지의 영역은, 어쩌면 그저 소멸일지도 모르고 그러니 우리는 살아가는 자에게 더 집중해야 할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나, 살아있는 존재. 하지만 우리는 슬픔을 걷잡을 수 없다. 무엇으로 나를 위로할 수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정말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거라고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까. 아주 오래 걸리지 않을까. 죽을 때까지 그 순간이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유일하기에 대체될 수 없는 소중한 존재의 상실을, 반드시 겪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나는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일로 상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생각은 전염되었다. 내 곁에 있는 모든 소중한 존재는 모두 각자 유일하고 그래서 나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더 상실과 이별을 겪게 될 것이다.     


    나에게는 납득하고 받아들일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의 감정을, 기분을 적어 놓는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지만, 피할 수도 즐길 수도 없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주 오래 생각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을 수 있을까. 만약 무너진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걸 생각하는 게, 소중한 존재와의 이별을 퇴색시키는 건 아닐까. 온전한 슬픔은 아름다울까. 얼마나 울어야 증명할 수 있을까. 사랑을, 소중함을, 아픔을. 마음을 증명하는 방법은 뭘까.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네가 없어서 너무 힘들어, 라고 말할 수 없으니까 곤란하다.     


    지금의 시간을 얼마나 소중히 여겨야 이별이 덜 힘들까. 이별을 덜 힘들어하는 방법을 찾는 게, 소중함을 덜어내려는 발버둥처럼 보일까. 동반자살로 사랑을 증명한 사람들의 심정이 어쩌면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이별을 택하느니 차라리 함께하겠다는 그 순간의 마음을, 어쩐지 알 것도 같다. 나 역시 함께 떠나는 상상을 몇 번이나 했다. 혹은, 내가 먼저 떠나거나. 비겁한 짓이지만,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나를 덮치기 전에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건 소중한 존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뒤집어씌우는 일이 되겠지. 알고 있다. 한편으로는, 내가 그만한 존재일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역시 알고 있다. 섣불리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많이 겪으면 익숙해질까. 계속 되풀이하면 능숙한 대처법을 깨우칠 수 있을까. 두렵다. 내구성 시험을 하다가 완전히 파손되어버리면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아름다운 이별이란 뭘까. 정말 그런 게 있기는 할까. 계속 생각하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를 보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