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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아론 Oct 26. 2016

마카롱도 인생도, 결국은 다 맛있어요

이런 나와 저런 나의 차이는 의외로 작고, 생각보다 둘 다 나쁘지 않아요


사실 우리는 아무 맛도 아니다. 립스틱을 바르지 않은 입술은 핫핑크도 레드도 피치도 아니고 ‘그냥 입술색’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너무 고민 마세요. 이런 나와 저런 나의 차이는 의외로 작고, 생각보다 둘 다 나쁘지 않아요.  


   

화장하면 단번에 예뻐지는 여자들이 있다. 늘 부럽다고 생각한다. 나는 화장을 해도 예뻐지지 않는다. 단지 ‘달라질’ 뿐이다. 아이라인을 얼마나 진하게 그리는지, 립스틱과 볼터치를 어떤 색으로 하는지에 따라 이미지가 약간씩 바뀐다. 물론 누구나 그런 효과(?)를 노리고 화장을 하겠지. 내 경우에는 예뻐지진 않는다는 (슬픈) 특수 사항이 있을 뿐이다.     


화장대 앞에서는 외형뿐만 아니라 마음가짐 같은 것도 조금씩 바뀌게 된다. 리퀴드 아이라이너로 깔끔하게 눈매를 그리고 옅은 빨간 립스틱을 바를 때는 오늘 마쳐야 할 업무나 이뤄야 할 작은 성과들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핑크색 블러셔를 바르거나 속눈썹을 바짝 올려 잡을 때는 좋아하는 사람이 떠올라서 마음이 부드러워지기 마련이다.      



‘음식으로 화장을 한다면 마카롱이 좋겠다.’ 어느 날 화장대 앞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마카롱의 알록달록하고 고운 색감이라면 화장대 한 칸을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옅은 분홍, 노랑, 힘이 빠진 초록, 다정한 아이보리와 짙은 갈색까지. 밀가루가 들어가지 않고 오로지 계란 흰자와 설탕, 아몬드로만 만들어졌단 사실도 마음에 든다. (크림은 제외) 어쩐지 피부에 좋을 것 같다. 그렇다고 진짜 얼굴에 바를 건 아니지만. 만약 마카롱으로 화장을 한다면, 그건 얼굴보다 마음 상태를 미묘하게 바꾸는 것이 되겠지. 그날 만날 장면이나 함께할 사람을 떠올리면서 치르는 맛있는 의식 같은 게 상상된다.     


싫어하는 사람을 만날 때는 유자 맛을 선택할 거다. 안 좋아하니까. 그런 단순한 이유를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유자에서 느껴지는 그런 상큼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러니까 좋아하지 않는 사람 앞에서 가장 나답지 않은 모습을 한다는 건 일종의 인간관계적 보호색을 띄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런 내 모습을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다. 그건 진짜 나와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싫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유자 맛 마카롱을 먹을 염려는 안 해도 된다.     


만나기만 하면 비관주의 폭죽을 빵빵 쏘면서 둘만의 대화 축제를 여는 친구 X와 만날 때는 얼그레이 마카롱이 좋겠다. 은근한 달콤함 뒤에 숨어 있는 씁쓸한 향이 제격이다. 은은한 베이지 색도 멋스러워서 좋다(우린 멋스럽기엔 너무 말괄량이들이긴 하지만). 업무가 많거나 회의가 있는 날엔 피스타치오 맛, 중요한 인터뷰가 있는 날엔 장미 맛을 골라야지. 피스타치오의 어른스러운 초록빛과 의외로 깊이 있는 맛을 조금이라도 닮을 수 있을지 모른다. 사실 장미 맛 마카롱은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터라 조금 망설여지지만, 어쨌거나 맛보면 잊을 수가 없다는 점이 끌린다. 인터뷰는 단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나기 마련인데 좋든 나쁘든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다면 그걸로 괜찮지 않을까. 만약 단 한 번의 로맨틱한 만남을 준비한다면 올리브 오일 마카롱을 꺼낼 예정이다. 오일로 만들어진 필링은 잼이나 크림과 다르게 순식간에 혀로 스미는 느낌이다. 강렬하다. 달고 고소하고 짭짤하기까지 한 그 맛은 머릿속에 정리가 안 되서 오히려 몰두하게 만든다. 그 맛, 대체 뭐였을까. 이런 질문이 문득 문득 떠오른다. 한 번의 만남으로 족한 로맨스라면 나를 그렇게 떠올려주는 것도 좋겠다.      



누굴 만나고 어떤 상황에 놓이느냐에 따라 사람은 조금씩 모습을 바꾼다. 화장하든 옷을 갈아입든 마카롱을 골라먹든,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그 차이가 클 수도 있다. 저 사람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과 이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모습이 좀 많이 다를 수도 있다. 자기 자신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도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사람도 있는 걸.     


그런 것을 큰 고민으로 품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관계 사이에서 길을 잃는 건 쉬운 일이니까. 내가 원래 딸기 맛이었나 솔티 캐러멜 맛이었나. 아니, 코코넛 맛이던가? 우왕좌왕 하다가 바삭바삭 부서진 마음의 부스러기를 보면 안타깝다. ‘어떤 게 진짜 나인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갈수록 오히려 진짜 나는 멀찍이 도망간다. 사실 우리는 아무 맛도 아니다. 립스틱을 바르지 않은 입술은 핫핑크도 레드도 피치도 아니고 ‘그냥 입술색’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너무 고민 마세요. 이런 나와 저런 나의 차이는 의외로 작고, 생각보다 둘 다 나쁘지 않아요. 블루베리 맛이든 헤이즐넛 맛이든 마카롱은 마카롱이고 결국엔 맛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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