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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아론 Feb 25. 2016

이토록 뜨거운 결핍

자기만의 기준이 확실하고 그걸 충실히 따르는 사람만이 가진 매력이 있다.

계획이 난무하는 새해 시즌에는, 말간 종이에 원하는 것을 하나둘 적다 보면, 처음의 희망찬 마음이 무색하게 욕심이 흘러넘친다. 몸은 하난데, 이루고 싶은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너무 많다. 그래도 어쩐지 그것들을 다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새해가 주는 못된 선물이다. 생각난 김에 작년에 적어둔 계획을 찾아 읽다 보니 내가 무엇으로부터 이렇게 벗어나려 했나 싶은 기분이 든다. 1년이 지난 지금의 목표들이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게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꼴만 돼버렸다. 아, 인생무상이여.     


매년 반복됨에도 지치지 않고 새해 계획 따위를 세우고 있다는 건 모두가 그렇듯 더 나은 삶, 더 행복한 삶을 원한다는 뜻이겠다. 사전에 따르면, 행복이란 건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를 말한다. 만족은 행복의 1순위 요소다. 하지만 만족으로 가득 찬 생은 과연 어떨는지. 루이제 린저의 책 ≪생의 한가운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나의 생활이 얼마나 기분 좋게 매일 매일이 똑같이 흘러갔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나의 나날은 아무 장애도 없이 질서 있게 과거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과거는 미래와 마찬가지로 평화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가졌고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은 원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불쾌함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이렇게 평온으로 가득 찬 삶을 꿈꾸고 있는 걸까? 아마 아닐 거라 믿는다. 원하는 것을 가지고, 가질 수 없는 것은 원하지 않는 일상. 그 현명함이 되레 우리를 살아가는 삶이 아닌 살아지는, 혹은 사라지는 삶으로 끌고 갈 테니. 책에서 ‘나’로 통칭되는 화자는 주인공인 니나 부슈만의 언니로, 며칠 동안 그녀 집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지켜보게 된 그녀의 모습을 서술한다. ‘야생적인 무엇’을 가지고 눈에 띄는 모습을 하지 않아도 모두가 돌아보는 니나에 대해 언니는 말한다.      


“니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극단을 요구했고 그것을 타인으로부터도 요구했다. 니나하고 살기는 쉽지가 않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니나처럼 자신의 부족한 부분에 매달리는 사람, 혹은 그런 부분을 찾아내고야 마는 기질이 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결핍형 인간’이라고 혼자 속으로 명명한다. TV며 책이며 온갖 매체에서 ‘긍정적 사고의 힘’을 이야기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늘 부정의 씨앗을 품고 있다. ‘잘 될 거야!’, ‘난 해낼 수 있어!’가 아니라 ‘안 되면 어떻게 하지?’, ‘난 왜 안 될까?’가 앞선다. 무조건 잘 될 거라는 긍정적 생각과 달리, 부정적인 생각의 장점(?)은 ‘왜’ 혹은 ‘어떻게’를 고민하게 만드는 데 있다.


일이 잘 안 됐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하는 사람은 최선이 아닌 차선, 만약의 경우엔 차악이라도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나쁜 수’에 대해 생각해둔다. ‘왜 안 되는가’로 괴로워하면서도 그것을 놓지 않는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에 도달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 부분만 놓고 본다면 ‘성공하는 ○○ 방법’ 중 한 항목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핍형 인간의 마지막 열쇠는 다른 데 있다. 그들의 ‘부족한 부분’이란 오로지 자기 기준에 따른다는 것. 좋은 집, 비싼 차, 훌륭한 스펙이 아니라 나만이 원하는 ‘어떤 것’에 매달린다는 것이다. 설사 그게 주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일지라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 그 ‘어떤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라도 말이다.     


“이런 감정을 가져본 일 없어, 언니는? 여태까지 애착하고 있던 무엇이 갑자기 지긋지긋해진 일이? 하루도 참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거야. 모든 것이 전과 꼭 같아. 방도, 집과 거리도. 그런데 갑자기 우리에게 그것이 변한 것같이 보이고 밉고 참을 수 없이 쓸쓸하고 적의에 찬 것으로 보여. 그러면 우리는 떠나야 하는 거야. 그럼 일각도 지체 없이 떠날 때가 온 거야. 자기도 모르게 우리는 벌써 이 모든 물건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끌어내어 간 거야.”      


이렇게 말한 니나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가방 하나만 들고 떠나버린다. 오래도록 인연을 이어왔던, 사랑하는 사람이 그녀를 찾아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번번한 일자리나 살 곳이 정해지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결핍형 인간에게 결핍은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어쩌면 모든 결단의 중심엔 자기 자신이 있고, 그것을 완전히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 불가피한 기질일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을 번역한 전혜린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는 거다. 타지에서 가난과 싸우며 공부하고 글을 쓰던 그녀의 유고집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에 담긴 일기들은 무섭도록 뜨겁다. “나의 생활을 시작하면 곧 등장할 내 속의 속물을 미리 공포스럽게 혐오하고 멀리 하자. 언제나 언제나 너 자신이어야 한다. 아무 앞에서도 어디에서도…. 우리의 일회성을 명심하고 일순간을 아끼자. 미친 듯이 살자”라든가 “매일 매일이 마개를 잃은 지 오래되는 사이다같이 맛없이, 흥분 없이, 열정 없이, 비약 없이 흘러가고 없어지는 것일까? 인공적으로라도 열정을 만들고 싶다” 같은 문장들이 빼곡하다.     


나는 니나나 전혜린처럼 멋진 사람이 아니라, 그런 삶이 너무 위험하게 느껴진다.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종종 내게서도 결핍형 인간의 조각을 찾곤 한다. 주변에서도 결핍형 인간의 조각을 가진 사람을 자주 발견하고, 그때마다 마음을 빼앗긴다. 처음엔 내가 어떤 기준으로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지 몰라 스스로도 어리둥절할 때가 있었다. 멋진 옷을 입고 번듯한 얘길 하는 사람보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한테 매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런 사람이 주변에 차곡차곡 쌓여가던 어느 날 깨달았다. 무직이든, 중2병이든, 남들은 이해 못할 취향을 가지고 있든, 아니면 일에 완전 빠져있든, 오타쿠 기질이 충만하든 간에 자기만의 기준이 확실하고 그걸 충실히 따르는 사람만이 가진 매력이 있다는 걸. 그들에게 결핍은 내면의 소리를 따라가게 만드는 일이고, 나는 그들의 지난하고 괴로운 여행을 지켜보는 게 즐겁다. 그리고 나 역시도 자기 자신을 꼭 쥐고 나아가는 생의 강렬함을 위해 어떤 고단함도 견디어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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