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때부터 함께였더라도, 마지막까지 더 잘 사랑할 수 있도록 애쓰는 것
어렸을 적 나는 내 동생 전다론을 미워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초등학교 2학년부터 4학년까지 전다론을 미워했다. 그 감정을 기억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당시 내 일기장을 보면 동생을 꽤 미워했던 걸 알 수 있다. 나는 프로 일기러라 초등학생 때부터 혼자 일기를 쓰곤 했는데, 그 안엔 날 것의 감정들이 가득하다. 다론이는 나보다 4년 늦게 태어났으니, 9살인 나에게 미움을 받기 시작했을 때는 5살 즈음이였을 것이다. 아마도 말을 배우고 의사 표현을 하면서 나의 질투의 대상이 됐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유치원에서도 막내인 5살과 초등학교 2학년인 9살의 차이는, 부모님이 보기에는 꽤 컸을 테다. 언니로써 양보를 해야할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소심한 분노(!)에 가득차서 일기를 적어내려가곤 했다. 자기 아이스크림을 먹다 말고 내가 먹던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졸랐다가, 내 것을 가져가고 난 후에 다 먹지도 않고 버렸던 에피소드에서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채로 ‘전다론은 나쁜 년’이라고 썼더라. 아니 그깟 아이스크림이 뭐라고….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질투와 시기의 감정이, 유일하게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쿠키가 요미를 괴롭힐 때다. 쿠키는 요미보다 일년 정도 늦게 우리 집으로 왔고, 나이도 한 살 반정도 더 어리다(추정). 토실토실한 요미에 비해 날씬한 쿠키는 몸무게도 2-3키로 정도 덜 나간다. 당연히 몸집도 작다. 하지만 그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쿠키가 요미를 이긴다. 쫄보 요미는 누가봐도 서열 2위고, 언제나 위풍당당한 것은 쿠키의 몫이다.
처음에는 고양이들에겐 고양이의 세계가 있으니 크게 신경쓰지 말자고 생각했다. 요미는 혼자있는 걸 더 좋아하고 쿠키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니, 쿠키만 내 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하지만 언제부턴가 정반대의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요미도 내 곁에 있고 싶은데, 애교 부리고 만져달라고 하고 싶은데, 쿠키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쓸쓸히 혼자 있어야 하는 상황인 건 아닐까.
그렇게 눈에 밟히기 시작하니 요미의 작은 애교에도 응징(!)을 가하는 쿠키가 보였다. 처음에는 그런 장면을 목격할 때마다 쿠키를 혼냈다. 너어…! 형한테 그러면 안 되지! 그러면 쿠키는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양 억울해하면서 앵앵 울었다. 하지만 금세 가서 요미를 또 괴롭혔다.
이게 아닌가? 그 다음에는 투닥투닥 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쿠키를 불렀다. 이름을 듣고 쪼로록 달려오지만, 모든 고양이가 그렇듯 ‘바로’ 달려오진 않았다. 요미를 내키는 만큼 괴롭힌 후에야 오는 식이었다. 효과가 없었다. 그렇다면 마음 상한 요미를 감싸주는 걸로 해볼까. 싸우는 것 같으면 얼른 가서 쿠키를 못 본 척하고 요미를 쓰다듬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미 쿠키 때문에 잔뜩 날이 서있던 요미는 오히려 화들짝 놀라며 달아났다. 아, 이런….
지금까지 다양한 방법을 써봤지만, 정확한 정답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쿠키에게는 쿠키에게 맞는, 요미에게는 요미에게 맞는 방식으로 둘 사이를 중재하려고 노력한다. 무작정 혼내는 게 아니라 양쪽으로 좀 더 공평한 애정을 쏟으려 애쓴다. 질투를 하는 쿠키를 안아서 달래고 난 후, 진정된 요미에게 다가가 서운해졌을 마음을 토닥여준다.
고양이들의 애교도 질투도 결국엔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테니까.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누군가를 살뜰하게 챙기는 것이 부족한 나를, 쿠키와 요미가 연습시키고 있는 것만 같다. 가족 관계에서, 친구 사이에서, 사회 생활에서… 마음의 불균형이 일어나지 않도록 두루 주변을 살피고 챙길 수 있도록. 이런 것도 연습이 필요한지, 예전에는 미쳐 몰랐다.
그러고보면 내가 어렸던 시절, 부모님의 상황도 이해가 간다. 부모님도 그 모든 관계가 처음이였으니까. 당연히 서툴 수 밖에 없었던 거겠지. 다행히 동생과 나는 둘도 없이 가까운 자매 사이로 자랐다. 몇해 전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로 엄마는 동생과 나를 공평하게 대하는 것, 그래서 둘 중 누구도 서운하지 않는 것에 마음을 많이 쓰신다. 가족과의 관계도, 반려 동물과의 관계도 당연한 것은 없다. 날 때부터 함께였더라도, 마지막 날까지 더 ‘잘’ 사랑할 수 있도록 애쓰고 연습하는 날들. 우리 앞에 그런 날들이 차곡히 쌓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