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쳤던 수많은 행복들을 소중히 모아왔다면 지금 나는 충분히 행복할 텐데
“처음엔 이 영화가 나랑 잘 안 맞는다 싶었어요.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미소 같은 친구가 있다면, 걱정은 되겠지만 결국 마음속으로 부러워하게 될 거라고요. 대단하다, 부럽다, 하고.”
“미소를 보고 현실적이지 않다는 사람이 많은데, 전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고, 거기에 만족하고 더 이상 바라지도 않잖아요. 그것보다 현실적인 게 있나요?”
“직장, 결혼, 집, 돈, 전형적 가정… 미소의 친구들은 보편적인 기준에 따라 살려고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미소보다 행복해보이지 않더라고요. 어쩌면 미소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성실하고, 좋은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몰라요.”
영화 <소공녀>를 보고 여러 사람들과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감상도 의견도 분분하고 다양했다. 주인공인 미소는 “위스키와 담배, 그리고 한솔이(남자 친구)만 있으면 돼”라고 심플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가사 도우미 일을 하지만 돈이 없어서 난방도 안 되는 한 칸짜리 월세 방에서 산다. 해가 바뀌면서 담뱃값과 월세가 동시에 오르자 미소는 큰 결심을 한다. 집을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20대 초중반에 함께 밴드를 했던 멤버들의 집을 찾아가며 하루하루를 여행하듯 산다.
“집은 없어도 취향은 있어!”라는 카피 덕분에, 나는 영화를 보기 전까지 취향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내용이라 넘겨짚었다. 삶이 힘들어도 위스키와 담배에 대한 취향은 변하지 않고, 더욱 확고해지는 주인공이 나오는, 그런 성장영화 아닐까? 그 착각은 영화가 시작한지 얼마 안 돼 바뀌었다.
미소가 찾아간 친구들은, 추억이라는 접점을 제외하면 저마다 몹시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잦은 야근을 버티고 승진하겠다는 의지로 회사 휴게실에서 직접 링거를 주사하는 친구, 요리도 못하는데 고시생 남편과 시부모님을 위해 매일 식사를 준비하고 집안일을 하는 친구,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해 매달 100만 원을 10년 동안 갚아야 하는 일도 감수했는데 결혼 며칠 만에 파혼당한 후배, 돈 많은 남편을 만나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친구, 결혼을 위해 미소를 감금하는 일도 불사하는 선배와 선배의 가족들….
네 삶은 스탠다드가 아니라고, 사랑하는 것만 생각하며 사는 게 삶이 염치없지 않느냐고, 몇몇 친구들을 비롯한 세상은 미소에게 자꾸만 다그친다. 하지만 크게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미소의 모습이 오히려 그들보다 행복해 보이는 건 왜일까? 모두가 추구하는 집, 돈, 직장, 안정적인 삶이 아니라 위스키나 담배, 그리고 연애 ‘따위’에 행복을 느끼는 미소가 잘못된 걸까?
처음에는 “미소가 왜 그렇게 사는지 의아하고 답답했어요. 걱정도 됐고요”라며 우려 섞인 감상을 꺼내놓은 사람도, “돈부터 버는 게 먼저 아닌가요? 집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요” 하고 답답함을 먼저 내세웠던 사람도,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갈수록 조금씩 시선을 바꿔가는 게 느껴졌다. 사회적으로 추구‘해야만’ 한다고 주장되는 것들이 우리의 행복을 막아서고 있다는 생각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그때 누군가 최근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았다며 입을 열었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동안 성당에서 천주교 교리를 공부해야 하는데, 그 과정의 일부로 수녀원에 가보았다고 했다. 거기 계신 수녀님들은 자신의 일을 선택하지 않고, 주어진 일에 사명을 가지고 묵묵히 따른다고. 식사를 준비하는 일을 배정받은 분들은 매일 식사를 준비하고, 바닥 청소를 배정받은 분들은 매일 청소를 하시는 것이다. 제일 기억에 남는 분은 수녀원 입구 관리실을 지키는 수녀님이었다고 했다.
“그곳을 지키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자 기쁨인거죠. 그분들께 중요한 것은 오로지 종교이며, 그분들의 기쁨은 신을 따르는 일이니까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미소를 떠올리면서, 나는 깨달았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행복 앞에서 ‘이것이 행복을 느껴도 될 만한 것인지’ 의심하고 재단한다는 것을. 이 행복을 다른 사람들도 인정해줄지, 너무 작고 사소해서 남들에게 말하기 애매한 행복은 아닌지, 행복을 마주칠 마다 그런 바보 같은 고민을 해왔다는 것도.
그래서 길을 가다 발견한 작은 행복을 흔쾌히 주워 마음을 채울 수 없었던 것이다. 어딘가에 더 큰 행복이 있을 것 같아서, 이보다는 더 그럴싸한 행복이여야 할 것 같아서. 어딘가 더 나은, 더 커다란 행복이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걸음을 재촉했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 마음으로는 멀리 가면 갈수록 지칠 뿐이다. 지쳐서 주저앉게 되면, 바닥에 쓰러지게 되면, 그때서야 깨닫는다. 그동안 마주쳤던 수많은 행복들을 소중히 모아왔다면 지금 나는 충분히 행복할 텐데. 행복은 로또에 당첨되는 것처럼 오는 게 아니라, 100원, 200원 모아 묵직해진 돼지 저금통을 한 번씩 끌어안을 때처럼 오는 것이구나. 찾아오는 게 아니라 쌓아가는 것이구나.
그날 긴 대화 끝에 사람들은 각자 무언가를 다짐한 얼굴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또한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고, 행복한 순간에 놓치지 않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자고 마음먹었다. 미소처럼 “난 이것만 있으면 돼” 하고 단언할 용기는 아직 없지만…. 귀여울 정도로 작은 행복도, 오늘도 내일도 반복되는 행복도, 지나치지 않고 자꾸 말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어제 마신 와인이 좋았어. 별 생각 없이 고른 영화가 아름다워서 행복했어. 지금 이 글을 마감해서 너무 행복해!’ 이렇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