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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련한 지배자

엄마 곁에서 엄마 생각을 한다

by Swimmer in the Forest

'폭싹 속았수다'의 광례와 애순, 애순과 금명으로 이어지는 엄마 이야기를 보고 있을 때 안절부절못했다. 왜냐면 이 드라마를 엄마랑 함께 보았기 때문이다. 1막을 엄마와 함께 보았고, 2막은 꼭 따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 곁에서 볼 용기가 안 났다.


잘 피해 다녔는데(?) 2막 마지막 부분을 엄마랑 같이 봤다. 그래서 집중하지 못했다. 하필 애순이 유학을 떠나는 장면일 게 뭐람. 애순은 왜 집을 팔았담. 그러면서 왜 저렇게 행복해한담.


대학 시절, 엄마에게 어학연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그냥 스쳐가듯 얘기했다. 친구들도 많이 가고 한다고. 엄마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고 그러려니 했다. 우리 집 형편에는 불가능한 것은 내가 더 잘 알았지. 방학-학기 할 것 없이 열심히 과외해서 생활비는 내가 벌었다. 학비는 장학금을 받은 단 한 학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학자금 대출로 마련했다. 대학교 입학 전, 첫 학기 학비부터 대출을 받아야 했는데 그때는 내가 미성년자였고, 반드시 부모님과 함께 은행에 가서 여러 개의 서류를 작성하고 사인하고 해야 하는 절차였다. 그때, 그것이 너무나 창피하고 싫어서 울 것 같았다. 왜... 왜 나는 대출받아... 오빠 등록금은 내주고...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이 너무 창피했다. 아무도 나에게 너는 학비를 집에서 그냥 대주었니 아니면 대출받았니 그런 것을 물어보지도 않는데 나는 그것이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그다음 학기부터였나, 내가 법적으로 성년이 되고 나서였나, 여튼 그 이후에는 인터넷으로 신청하고 처리되었다. 대출이란 것이 별거 아니라는 것은 조금 나이 든 이후에 깨달았다.


그러다가 엄마가 어느 날 어학연수를 가라고 했다. 갑자기? 왜? 진짜로? 어떻게? 머릿속에 물음표가 백만 개였다. 엄마가 지인과 대화를 하다가 요즘에는 다들 어학연수를 가는 거라고 했나 보다. 엄마는 그런 것을 잘 몰랐기 때문에 다들 가는데 내 딸만 못 가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은 그게 아닌데... 어학연수는 가는 사람이 있고, 가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은데... 내가 지나가며 얘기했던 어학연수 이야기와 겹쳐져서 엄마는 불안했던 것이다. 내 딸만... 내 딸만... 이런 마음이었겠지.


나는 눈을 딱 감고 떠났다. 나는 그때까지 해외는커녕 제주도도 가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곁에서 나를 떠나보낸 적 없던 엄마는 내가 안전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곳에 머물게 하기 위해 정말 큰돈을 썼다. 그리고 자주 내 목소리를 듣고 싶어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아니 모른 척했지만 나의 부모님은 나를 보내기 위해 소중한 것을 팔았고, 나의 생활비를 대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한량 같던 아빠가 내 연수를 기점으로 달라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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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란 무언가. 몇십 년을 넘게 키웠는데 또 내어주고 내어주고 해야 하는 존재. 엄마 아빠는 몰랐겠지. 아직까지 내가 독립하지 않을 줄은...


시도 때도 없이 훌쩍 떠나는 나. 여행으로 출장으로 많이도 싸돌아 다녔다. 내가 번 돈으로 떠나고 새로운 세상을 보고 즐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왜 엄마 생각은 못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엄마에게 방콕을 같이 가자고 했다. 엄마는 너무 좋아하면서도 걱정했다. 엄마를 데리고 여기저기를 다녔다. 싸우기도 싸우고, 감정도 상하고, 신경질도 많이 냈지만 엄마는 그때를 되돌아보면 좋은 기억만 이야기한다. 그때 그게 너무 좋았지. 우리 딸이 나를 유람선을 태워줬지. 최고로 좋은 마사지를 받았지. 그 수영장 너무 좋았지. 하면서.

가족여행 다녀오면 힘들고 지쳐서 '다시는 안 가',라고 생각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다. 행복한 엄마를 보는 것.


나를 위해 내어 주고 내어 주는 동안, 엄마의 무릎은 망가졌다. 오래 걸을 수 없다. 어느 날은 오래 걷지 않아도 다리 통증이 너무 심해서 움직일 때마다 악 악 소리를 낸다. 운동을 하고 약을 먹어야 조금은 편하게 걸을 수 있다. 여행 프로그램을 보면서 "저기는 너무 많이 걸어야 해서 엄마는 힘들어~"라고 하면, 갈 수 있다고, 운동하고 준비하면 된다고 씩씩하게 이야기한다. 함께 걸을 때 내가 무거운 것을 들고 있다면 내 손에서 빼앗아서 본인이 들고 가려는 엄마. 엄마의 뒷모습을 보는 것이 요즘 들어 유난히 마음 아프다.


엄마. 나를 가장 사랑하는 나의 가련한 지배자.



** '나의 가련한 지배자'는 이현주 작가가 쓴 책의 이름이다. (아마도) 팟캐스트 책읽아웃을 통해 책을 알게 되어 읽어 보았다. 엄마 곁에서 엄마 이야기를 읽는 것이 힘들어 조금 숨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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