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주방 수전이 고장 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호스에 연결되어 있던 수전 헤드가 댕강 부러지면서 헤드의 고정부가 호스 연결부 안에 남아 헤드도 호스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설거지할 일을 만들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싶어 일단 며칠 두었는데 생각보다 싱크대를 쓸 일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유튜브를 켜서 주방 수전 교체 영상을 쭉 살펴보았다. 그리고 딱 적당한 영상을 발견했다. 철물박사TV님의 싱크대 호스 교체 방법!
영상을 살펴보니 교체가 어려워 보이지는 않아서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수전 교체하는 아저씨를 불러 출장비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니, 영상에 나온 아저씨처럼 뚝딱 수전을 고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싱크대 하부장을 열어 일단 쟁여둔 주방세제와 세탁세제를 끄집어냈다. 덩그러니 드러난 수전 호스들이 보였다. 그러니까 너트를 풀고 호스를 분리해서 잡아 뺀 다음 새 호스로 교체만 하면 된다는 거지. 신발장에서 랜치를 꺼내왔다. 이김에 공구함을 하나 구비할까 고민했다. 아니야 자꾸 다른 길로 새면 안 돼.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 벽에 붙어있는 냉수, 온수 밸브를 잠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을 틀어보니 물이 나오지 않았다. 밸브가 완전히 잠겼다는 뜻이었다.
다시 랜치를 잡아들어 혼합 호스 끝에 달린 너트에 물렸다. 아니 근데 안 된다...? 영상에서는 그 부분 설명할 때 5초도 안 걸렸어! 너무 금세 지나가서 손가락으로 조심히 재생바를 밀어서 찾아야 할 정도였다고! 갑자기 다시 출장비를 내는 내 모습이 상상이 됐다. 이번엔 네이버를 켰다. '주.방. 호.스. 교.체.하.는. 법.'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기입하고 검색 버튼을 눌렀다.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지식인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너트와 주방 호스가 물려있는 부위에 물이 새서 녹이 슬면 잘 풀리지 않는다는 답변이 달려있었다. 좌절했다. 삼십 분가량 큰 몸을 하부장에 밀어 넣고 혼자 끙끙대느라 지쳤다. 하지만 이렇게 포기할 순 없었다.
쿠팡을 켰다. '펜치'를 검색해서 제일 그럴 듯 해 보이는 녀석을 바로 주문했다. 집에 있던 작은 펜치는 너무 작은 나머지 은행 한 알도 제대로 깨부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다시 공구함을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었다. 오늘은 주방호스에게 졌지만 내일은 지지 않으리라. 새벽 배송이 될 펜치를 기다렸다. 다음 날 출근할 때 보니 현관문 앞에 펜치가 와 있었다. 쿠팡 봉투를 집어 들어 현관 안으로 던졌다. 이따 보자. 결의를 다졌다. 퇴근 후 어떻게 호스를 분리해 낼 것인가 하루종일 상상했다.
그리고 퇴근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신발장에서 목장갑을 꺼냈다. 집에 왜 목장갑이 있냐 물으신다면 많이 알려고 하면 다친다고 대답해 드릴 수 있겠다. 하부장을 열었다. 어제 씨름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펜치가 하부장 안에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다시 현관으로 가 쿠팡 봉투를 우악스럽게 잡아 찢었다. 조악한 포장의 펜치가 아무런 완충재 없이 덩그러니 들어있었다. 오히려 좋아. 펜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조금 더 컸다. 무슨무슨 영화에서 사람을 고문했던 장면에서 봤던 것과 비슷했다. 장갑을 끼고 탁탁 박수를 쳤다. 왠진 모르지만 목장갑을 끼면 꼭 그런 행동을 했다. 태생부터 건달일까.
랜치를 너트에 물리고, 호스를 펜치로 단단히 잡고 비틀었다. 펜치를 다루는 건 처음이라 자꾸 호스에서 미끄러졌다. 그래도 이내 호스를 단단히 잡을 수 있었다. 이미 여러 번 실패한 터라 손이 저릿했다. 모든 걸 힘으로 해결하려는 단순 무식함... 호스가 드디어 조금씩 돌아갔다! 연결부가 조금 헐거워졌길래 손으로 얼른 돌려서 혼합 호스에서 분리해 냈다. 안에 고여있던 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전날 저녁에 팝콘을 담았던 그릇을 얼른 아래에 받쳤다. 드디어 호스를 분리했다. 순간적으로 현타가 왔다. 그냥 몇 만 원 내면 편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구조적으로 너트를 푸는 게 아니라 아래 호스를 돌려 뺐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쨌든 성공했으니 다행이지만.
호스에서 무게추를 분리하고, 영상에서 본 대로 위로 잡아 뺐다. 그리고 쿠팡에서 주문해 둔 새 주방 호스를 다시 수전 구멍으로 밀어 넣어 아래 혼합 호스와 연결했다. 쓸모를 잃은 펜치와 랜치가 하부장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무게추를 새 호스에 연결했다. 그리고 역시 쿠팡에서 주문해 둔 필터 헤드를 새 주방 호스에 연결했다. 그리고 냉수, 온수 밸브를 적당히 열고 물을 틀어보니 물이 잘 나왔다(당연)! 원하는 만큼 물이 흘러나오도록 수도 밸브를 더 열어두고 수전 수리를 마쳤다. 뿌듯했다. 나중에 누가 주방 호스 고장 났다고 고쳐달라고 부탁하면 고쳐주리라 마음도 먹었다(?). 비로소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다음 날 일어나니 펜치를 틀어잡고 있던 왼손에 통증이 느껴졌다. 괜히 주방에 가서 물을 틀어 새 주방헤드에서 쏴아아- 하고 물이 쏟아지는 걸 확인했다. 고쳐진 수전대신 방아쇠수지증후군을 얻었지만 뿌듯했다. 그리고 새삼 세상 참 좋아져서 유튜브 영상 하나 보고 수전을 쉽게 고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수전 수리 후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