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얼마예요?”
“군고구마요?”
“네...(울먹울먹)”
“이천 원”
오른손을 조심스레 꺼내 한쪽 어깨에 맨 에코백을 뒤적여 본다. 노트, 핸드크림, 펜, 핸드폰, 이력서... 유일하게 지갑만 사라졌다.
“으아앙으앙ㅇ--------흐흑흑흑... 으앙...”
이천 원~ 이-천--원~ 이--천---원---- 소리는 비좁은 골목 벽면을 튕겨 튕겨 그 아이의 눈물을 떨구었다. 오늘따라 하늘은 빙수를 끝도 없이 갈고 또 갈아 온 세상을 설빙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이 흩날리는 빙수 덕에 흐르는 눈물은 얼음 되어 양쪽 볼에 찰싹 들러붙어 '울 맛'을 똑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천 원이 비싸서 그리 슬피 우는 거요?”
“흑, 휴, 아닙니다.. 그냥 돈도 없고, 고구마도 못 먹고, 춥고.. 또..”
“아이고, 거야 쉽지. 자 여기 가져가시오, 고구마 그냥 하나 줄게”
“아닙니다.. 전 고구마가 먹고 싶은 건 아니에요”
“뭔 소리요? 아깐 고구마가 먹고 싶다믄서”
“하, 모르실 거예요. 제가 오늘 겪은 일들”
“당연히 모르지, 내가 신도 아닌데~”
“...”
“이 고구마 가지고 가요~ 난 신이 아니라 그쪽이 뭔 일 있었는지 모르겠지마는, 고구마 먹고 힘내슈, 힘이 될라나 모르겠네?”
‘오늘 저 또 취직에 실패했어요. 왕년엔 잘 나가던 사람인데. 왜 이리 취직이 힘든 건지.. 이젠 벌써 무급휴가로 백수 된 지 5개월 째에요.. 뭐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살고 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암튼 이번엔 될 거라 믿었는데. 엄청 준비했는데.. 친구의 회사에 면접을 봤는데 망친 것 같아요.. 나도 그 친구만큼 잘하는데. 잘할 수 있는데.. 왜? 왜 안 된 걸까요? 첫 단추부터 잘 못 꿴 걸까요? 내가 너무 급해서 두 부서에 모두 지원서 낸 것이 잘 못 된 것일까요? 아님 친구 추천으로 지원서 냈다고 말한 것이 흠이 된 것일까요? 주대 없이 너무 휘둘려서 일까요? 그것도 아님 그냥 내 전문성이 부족한 걸까요? 내가 너무 급한 것인가요? 대체 왜 때문일까요?’
머릿속에서만 팽팽 소용돌이치는 문자들은 눈알로 튀어나올 지경이다. 하지만 끝끝내 말을 삼키고 그대로 어두운 골목길로 저벅저벅 눈 밟으며 집으로 향한다.
사정없이 휘갈 리던 눈발들은 어느새 잠잠해지고 새하얀 잔디밭에 희희낙락 떠드는 애들의 귀여운 소리를 꽃처럼 꽂아두었다. 새빨갛게 언 포동포동한 솜사탕 손으로 눈을 왕창 집어 아빠에게 뿌리는 아들내미, 퍽! 하고 노점상 아저씨의 고구마통을 조준해 버렸다.
“악! 깜짝이야”
옆에서 고구마를 사려던 한 30대, 덕분에 집 나간 정신을 다시 되찾았다.
“아저씨, 고구마 주세요”
“네~ 이천 원이요~”
“잠시만요”
검은색 숄더백을 뒤적여본다. 핸드폰, 파우치, 명함지갑, 립스틱, 핸드크림.. 지갑을 회사에 놔두고 왔다.
“앗, 죄송해요.. 제가 지갑을 회사에 두고 와서요~ 담에 살게요.”
“네~ 방금 아가씨도 지갑 없어졌다고 그러더니, 아가씨도 그러네? ㅎㅎㅎ 담에 봐요~”
“아, 네네~”
“아, 그냥 하나 가져갈래요? 단골인데.. 오늘 첫눈도 오고 아까 그 친구한테도 고구마 줬으니 그쪽한테도 하나 선물할게요”
“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전 내일 사러 올게요~”
“네~뭐 그렇게 하셔요~ 그럼. 담에 봐요”
‘네~ 내일 봐요. 아저씨. 근데 오늘 전 고무마 받을 자격 있는지 모르겠어요. 꼰대 짓을 한 것 같아요. 내가. 한 친구를 봤는데 그 친구의 입장을 생각도 안 하고 가르치려 들었죠.. 상황이 상황인지라 급한 건 알겠는데 휘둘려서 이곳저곳 선택하지 말라고 조언을 하고.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기회가 되면 다시 보자고. 세상에서 제일 못할 짓 - 희망고문을 심어주는 짓, 누굴 가르치려는 짓을 한 것 같아요. 난 진짜 그의 상황을 이해했을까요? 그 조급한 마음을 진심으로 느끼려고 했을까요? 꼭 되고자 하는 간절함을 따뜻하게 봤을까요? 첫 취업을 하던 나도 한때는 그랬었는데 왜 이제야 그 아이가 떠나고 나서야 어린 내 모습이 떠오르는 걸까요? 난 어른이 된 게 맞을까요? 내가 너무 무뎌진 걸까요? 시간을 되돌려도 그 아이를 붙잡진 않겠지만 조금은 더 따뜻한 마음으로 공감해 주고 보내줄 수는 있지 않았을까요? 어느 날 꼰대가 된다고 해도 당황하지 않고 멋진 꼰대가 되고 싶었는데, 갑자기 꼰대 레벨 10-최종관문을 도장깨기 한 것 같은 이 갑갑한 기분 어쩜 좋을까요?’
차마 아저씨에겐 시선을 주지 못하고 고구마를 뚫어지게 보며 문자들을 머릿속에서 튕겨냈다. 고구마는 답을 줄는지..
그날 밤 눈싸움을 즐기며 뛰놀던 아이의 발자국은 어른들의 깊숙한 발자국에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모든 발자국들은 오가는 자동차 바퀴에 또 점점 형태를 잃어갔다.
이튿날 아침, 모든 눈들은 사라져 버렸다. 감쪽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