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른백산 Aug 03. 2020

미군부대 들어가는 어른은 멋있는 어른이었다

미군은 어디든, 주둔지를 미국으로 만든다 01

간부를 제외하면 평균 학력이 낮은 미군들이 득시글 대고 한 집 넘어 한 집이 허물 어가는 가난한 동네. 기반 시설의 대부분이 한국인을 위한 것도 아닌지라 얼핏 삶이 바닥을 쳤을 것 같지만 또 완전히 그렇지만은 않았다. 미군부대 정문 앞에서 사는 게 나쁘지 않은 때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일자리 같은 것이 그렇다. 오늘은 미군부대에서 일하던 사람들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내가 서울로 일자리를 얻어 상경한  어느덧 3. 우리 가족은 여전히 평택에 살고 있다. 다만 우리가 살던 미군기지 앞 동네는 노후화된 건물, 젊은이들의 이주 등으로 심각하게 슬럼화 된 상태라 더 이상 살기가 어려웠으므로, 어떻게든 떠나야 했다. 삼십 년 넘게 살아온 동네를 한 순간 떠나기란 쉽지 않았지만. 심적인 문제 말고 금전적 현실도 걸림돌이었다. 그러다 다행히 평택 배밭 일대가 신주거지로 선정되고 아파트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우리도 임대주택 한 자리 신청할 수 있었다. 이제 거리상으로도 미군부대와 한참은 떨어진 곳이니 미군부대와 영영 작별이겠구나 생각을 했었는데 가족 모임마다 미군부대 현황에 대해 한 번씩 이야기를 하게 되니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구나 싶었다. 우리 매제가 미군에 고용된 한인 노동자라서 그랬다.


네이버에서 [주한미군 노동조합]이라는 키워드로 뉴스를 검색해보면 가장 오래된 결과로 1990년 [철수 미 공군부대, 한인 근로자 생계대책 요구]라는 기사가 나온다. 4천 명에 육박하는 한인 노동자들이 무급휴직에 내몰렸던 올해 4월의 뉴스처럼 말이다. 이번에는 다행스럽게도 미지급되었던 인건비를 한국 정부에서 일괄 지급하는 것으로 문제가 타진되었지만 한 두 해 반복되어 온 문제가 아닌 만큼, 앞으로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는 총 9천 명 정도의 인력이 미군부대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게 비정규직까지 포함된 산출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만만치 않은 규모인 것은 확실한 듯하다. 이번에 용산 미군기지가 평택 미군기지에 합병되면서 전체 과반에 가까운 약 4천 명 정도가 평택 미군기지에 메인 신세가 되었는데. 정규직 4천 명이면 거의 기아나 현대자동차 급은 되는 것 같다. 아주 단순히 생각을 해봐도 우리 동네를 '미군부대가 먹여 살리는 동네'라고 평가한 것은 조금도 과한 점이 없어 보인다.

미군부대로 가는 길. 좌우로 동서양(?)의 문화 교류가 돋보인다.


미군부대에 일을 다닌 사람이 당장 몇 명이 떠오른다. 먼저 정규직으로 미군부대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 매제. 비교적 근래의 일이니까 제외하고, 우리 태권도 관장님 이야기를 할까 한다. 관장님은 선이 굵은 외모를 가지고 계셨지만 80년대 홍콩 무비스타가 생각나는 동그란 헤어스타일을 고수하는 묘한 분이었다. 만화도 공태랑이나 더 파이팅 같은 격투기 만화만 즐겨보는 천상 무술인이었다. 그래도 지금 태권도장을 차리는 학사 출신의 관장님들과는 다른 전통 무술인으로 우리가 겨루기 같은 걸 하다가 발목이 삐면 자신의 침구세트를 꺼내 손수 집도(?) 해주시고는 했다. 관장님 침은 신기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찔리는 건 무서웠지만. 재미있는 특징이 하나 더 있다. 영어 프리토킹이 가능한 어학 실력자라는 사실. 라운드 킥, 프런트 킥, 킥킹, 숄더 디펜스. 간혹 동양 무술에 매력을 느낀 장교들이 근방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사용하는 우리 태권도장을 다니고는 했다. 장교들이 올 때마다 우리는 두 개 국어로 동작 설명을 들어야만 했다. 가끔은 우리말로는 간단히 설명하고 영어로는 공을 들여 한참 설명하는 게 불만이 고는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영어로 동작을 정확히 설명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터이니 그 나름의 고초가 있었겠구나 싶기도 하다.


아무튼 우리 관장님은 평일에 우리들을 가르치고 주말이 되면 미군부대를 왕래했었다. 미군부대 병사들에게 태권도를 지도하신다나. 별로 숨기는 일이 없이 이야기해주고는 하셨는데 그게 나에게는 영 딴 세상 이야기만 같았었다. 우리 태권도장은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2층에서 쿵쾅대느라 1층 눈치를 안 볼 수 없던 셋방살이를 청산하고 1층 단독 건물을 지어(!) 최신식 시설로 이사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다 체육관을 물려받을 직전 제자도 남지 않게 되고 어린이들마저 점점 없어지는 통에 결국 문을 닫기는 했지만. 관장님은 그 이후에도 미군부대 강습은 꾸준히 나가셨다. 덕분에 우리 동네 빌라를 처분하고 평택 시내로 이사 가셨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계셨는지 잘 모르겠다.


활주로. 전시상황에 항공기를 띄우기 위해 부대 바깥으로 길게 빼놓은 길이다. 그렇다. 80년대부터 우리 동네에는 이렇게 넓은 길이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중학교까지 열심히 다니던 우리 교회, 목사님이. 초등학생 시절에는 같은 동네에 산다는 이유로, 목사님 자녀들과 호형호제하며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울며 겨자 먹기로 다니기 시작한 게 오랜 인연이 되었다. 90년대 중반에만 해도 별로 좋지도 않던 우리 동네에 어린이들은 얼마나 많았던지 30평도 채 되지 않는 좁은 교회에 전도사님 두 분, 사모님과 목사님, 그리고 열명 가까운 어린이들, 다시 열 명 남짓의 어른들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여름이면 여름 성경학교를 한다고 수영장도 가고, 어깨 부딪혀 가면서 요구르트 꽁무니를 열심히 빨아먹었었는데. 그 즐거움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천상의 목소리를 자랑하던 우리 성가대원이 하나 둘 빠져나가고 급기야는 목사님 자녀 둘, 그리고 나와 내 동생만 남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어린이부 예배를 드리는 대신 지루하고 긴 어른 예배를 함께 드렸는데 아마 그때가 나의 종교생활 암흑기가 아니었나 싶다.

별로 크지도 않은 동네에 큰 교회가 어찌나 많은지. 높은 건물 옥상에 서면 으리으리한 교회당, 붉은 십자가가 두 블록에 하나씩은 보였다. 어느 날, 예의 그 으리으리한 건물이 우리 교회 길 건너편에 보란 듯이 생겼다. 어린이 성도를 버스에 태우고 다니며, 픽하면 야광 십자가 목걸이 따위로 손쉽게 전도하는 엄청난 교회였다.(나도 십자가를 받고 싶어서 간 적이 있었다. 거기 전도사님은 내가 길 건너편 교회에 다니는 애라는 걸 알아보더니 야광 목걸이도 주지 않고 다음부터는 오지 말라고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새로 생긴 큰 교회 반대편에 우리 교회만큼 작은 교회가 하나 더 생겼다. 몇 해 지나지 않아 목사님은 우리 교회를 정리하고 인근 농촌지역으로 개척교회를 만들어 떠났다.


교회를 그만 다니기 시작한 뒤에도 관계는 끊어지지 않았다. 목사님은 친하게 지내던 형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놀러 가서 종종 인사도 드리고 했는, 어느 날인가 미군부대에 일을 하러 가기 시작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군부대 내부는 상상하기 어려운 곳이었으므로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미군부대 일을 시작하면서 집안의 풍경이 조금 달라졌다. 침대, 탁자와 같은 단순한 형태의 가구부터 과자, 빵 같이 간단한 식품까지 군데군데 미군의 흔적이 베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새 물건이 생길 때마다 형이 자랑하고는 했는데 아닌 척은 했지만 내심 부러웠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동네에서 '미제'는 꽤 좋은 물건에 속해있었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나도 한 달가량 미군부대에서 일을 했다. 2015년? 6년 즈음으로 앞에 두 이야기에 비하면 아주 근래의 일이다. 원래는 미군부대에서 일할 계획은 전혀 없었고, 돈이 조금 필요하던 차에 인력사무소에 나가게 되면서 우연히 왕래하게 된 경우였다. 이유인즉, 미군부대가 확장공사를 개시하면서 공사 진행을 한국의 건설사에게 맡겼었는데 그 하청의 하청의 하청을 일일 알바로 참가하게 된 것이었다.



2편에서 이어서 쓰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 많던 혼혈 친구들은 다 어디 갔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