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대표의 사무실 문을 들어서려는 산의 앞에 대표가 보이지 않고 거대한 산 같은 남자의 등이 보였다.
“어! 산이 왔니?”
“네. 대표님 어디...”
“죄송합니다.”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남자가 책장 뒤쪽으로 뒷걸음질을 쳐서 공간을 열어주었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 덩치였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의 거대한 몸집에 거대한 정장 슈트는 거의 산이가 서너 명이 들어갈 정도의 사이즈였다.
그가 자리를 비켜주자 겨우 자리에 앉아 있는 대표와 그의 곁에서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낯익은 얼굴의 예쁜 여자가 커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산입니다. 잘 아시죠? 워낙 이 녀석이 인기가 많아서요, 하하하!”
대표가 특유의 너스레를 떨며 여자에게 웃어 보였다.
“인사드려. 산이도 TV에서 많이 봤지? 워낙 유명하셔서 거의 연예인 수준이시다. 그 유명한 안 교수님이시다.”
“아, 안녕하세요.”
산이는 그 낯익은 얼굴이 그제서야 교수라는 호칭과 함께 매칭 되어 떠올랐다. 요즘 토론 프로그램부터 예능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워낙 많은 프로그램에서 정신과 상담을 통해 사람들을 교정해주고 사람들의 생각을 분석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신경정신과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존재로 불려 다니는 스타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저는 왜....?”
“왜긴 녀석아! 니가 워낙 바쁜 몸이라고 하니까 직접 만나러 우리 사무실에 오신 거지.”
대표가 안 교수에게 눈을 찡긋거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래. 우리 산이 요즘은 잠은 잘 자고? 별 스트레스는 없고?”
“네. 전 늘 잘 자고 잘 지내요.”
“반가워요. 안 소진이라고 해요. 정말 잘 생겼네. 한번 보고 싶어서 내가 대표님에게 자리를 좀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나도 한국에 막 왔을 때 길거리 캐스팅을 좀 받긴 했었는데, 산이 씨 보니까 역시 연예인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싶네요. 우리 서로 바쁘니까 조용히 얘기할 수 있는 공간으로 좀 옮길까요?”
“네? 왜, 왜요?”
산이가 영문을 몰라하며 주춤거리는데, 문에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매니저 한석이 고개를 쏙 내밀며 대표에게 보고했다.
“대표님. 연습실 하나 조용하게 세팅 마쳤습니다. 바로 이동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오케이! 산아! 선생님이 조용히 너랑만 얘기를 좀 하고 싶어 하신다고 하니까 워낙 귀하신 몸인데 너 만나겠다고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조금 시간 좀 내어드려라.”
“네?”
“갈까요, 그럼?”
안 교수가 자리에 일어서자 책장 쪽에 거대한 몸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말없이 스르륵 미끄러지듯 그녀의 뒤를 따랐다. 산은 한석의 손에 잡히듯이 끌려가서 가장 안쪽에 있는 조용한 녹음 연습실 공간으로 들어갔다. 마치 꾸며놓은 것처럼 의자와 테이블이 새롭게 세팅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 앉으세요.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그냥 얘기만 좀 하러 온 거니까요.”
안 교수가 특유의 작고 귀여운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산을 향해 웃었다.
“그럼 저는 나가 있겠습니다.”
정면으로는 문을 나가지 못해 몸을 틀어서야 밖을 나갈 정도의 넓은 어깨의 남자는 의외로 유연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미끄러지듯 문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았다.
“무슨 얘기를 하신다는 건지...”
산이가 계속 부담스럽다는 듯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겨우 자리에 마주 앉았다.
“자아, 이제 내 눈을 좀 볼래요? 산이 씨랑 아이컨택 좀 한번 해볼게요. 가만히 내 눈을 좀 봐줄래요?”
갑자기 앉아서 자신을 응시하는 안 교수의 눈을 보는 순간 그녀의 눈이 검은색으로 바뀐다 싶었는데 어느 순간 파란색으로 뒤집히고 다시 여러 가지 색깔이 뒤섞인다 싶었는데 까무룩 해지며 정신을 잃었다.
“자아, 이제 내가 셋을 셀 거예요. 그럼 깊은 잠에 듭니다. 그리고 당신은 조용한 정자에서 나와 차를 마시고 있을 거예요. 하나, 둘, 셋!”
“어?”
산이 잠깐 눈을 깜박였다고 생각했는데, 산은 물이 졸졸 흐르는 경치 좋은 시냇가의 정자에서 차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자신의 앞에 앉아 가만히 잔에 차를 따라주는 안 교수의 복장이 가지런한 한복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우리 방금... 연습실에 있지 않았었나요?”
“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구요.”
안 교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으며 차를 권했다.
“조용히 우리 둘만 얘기할 수 있으면 해서 이쪽으로 불렀어요, 내가.”
“아, 네.”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은은하게 좋은 향이 올라오는 차를 마시며 좋은 공기가 폐로 가득 들어오는 것 같아 산의 기분도 안정되고 훨씬 편안해졌다.
“원래 동자승이었었다고 들었어요.”
“네? 아, 네. 그렇죠.”
“그런데 어쩌다가 아이돌이 된 거예요?”
“연습생 시절까지 길게 연습하고 고생한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저는 사실 아이돌이 되겠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지금 이런 시골 산속에 있는 절에 제가 어려서 어머니가 주지스님에게 저를 맡기고 떠나신 이후에 주지스님이 저를 키워주셨어요.”
“그러셨구나. 좋았어요? 그 시절은?”
자연스럽게 그녀가 차를 마시며 물었다.
“네. 주지스님이 저처럼 부모님이 안 계신 친구들을 동자승 학교처럼 키워주셨어요. 부모님이 계신 친구들도 있기는 했는데, 저처럼 아예 찾아오는 부모님도 없는 경우는 드물었거든요. 그래도 좋았어요. 아침 공양을 준비하는 것도 좋았고, 주지스님과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고 가끔 졸기는 했지만 참선을 하는 것도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고 좋았어요.”
“그랬군요. 그런데 어쩌다가 동자승을 그만두게 된 거예요?”
“그만두겠다고 해서 그만둔 건 아니구요.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면서 늘 하시던 말씀이 그거라서 그거 하나라도 들어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산을 내려오게 되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할아버지가 원하시다니?”
“아, 주지스님이 연세가 많으셔서 저는 그냥 할아버지라고 불렀어요. 할아버지는 늘 그러셨거든요. 제가 중이 될 운명이 아니니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면 산을 내려가서 환속하라고. 아직 정식으로 승적에 입적시킨 것도 아니니까 수양한다는 생각으로 같이 살다가 언제고 할아버지가 타계하시면 속세로 내려가라고 하셨었거든요.”
“왜 할아버지는 그러셨을까요? 스님이 되었어도 산이 씨는 참 잘 지냈을 것 같은데...”
계속 편하게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웃음 진 표정으로 이야기하던 산이 불편한 듯한 표정을 잠시 짓는 듯하다가 이내 편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불편하면 이야기하지 않아도 돼요. 나도 편하게 옛날이야기 하나 해줄게요.”
“옛날이야기요?”
“네. 옛날에,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에 독립군이라는 게 있었다는 거 알아요?”
“네. 학교에서 배웠어요. 일본의 압제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찾기 위해서 힘쓰셨다는 분들...”
“네. 맞아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라고 계셨어요.”
“네. 들어봤어요, 존함은.”
“그러셨구나. 반갑네요. 산이 씨가 기억해줄 정도로 유명하시다니... 그분은 원래 아주 유명한 노내미집의 귀한 아들이었어요. 당시에는 양반과 상놈이 없어진 시대라고는 하지만, 이전에 그 집안에 있던 사람들은 따로 분가하지 않고 계속 그 집안에 모시던 양반들을 모시고 지냈었죠. 그 집안일을 하던 도산 선생님이 어렸을 때부터 키워주신 분들이 그 집에서 함께 살았죠. 그런데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평안도에 있던 노내미집*에도 힘겨운 시대가 도래했죠. 그러던 중에 도산 선생님은 우리 민족이 배워야 한다고 하셨어요. 도산 선생님의 부모님을 모시던 두 부부는 도산 선생님이 어렸을 때부터 그분을 키우고 도와줬던 분들이라 계속 함께 했었죠.”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사람처럼 안 교수가 조곤조곤 편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도산 선생님은 자신이 직접 과격한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걸 늘 안타까워했지만, 정작 그걸 더 불안해했던 건 그분을 키워내고 보좌하던 부부였지요. 그렇게 미국 유학까지 다녀와서 늠름한 청년이 된 것을 누구보다 기뻐하셨었죠. 그즈음에 김좌진 장군 등과 교류하면서 제대로 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준비 중에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졌어요. 그때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 경찰과 군인들의 총에 도산 선생님을 도망치게 하다가 부부 중에서 아내가 총을 맞아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어요.”
“저런...”
듣고 있던 산이가 자신도 모르게 몰입하여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리고 다시 도산 선생님이 미국으로 일본군을 피해 떠나실 때였어요. 그때까지 도산 선생님을 따르고 보필하던 홀아비가 자기 딸아이를 미국길에 오르던 도산 선생님에게 맡기게 된 거죠. 원래 보낼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마지막으로 도산 선생님이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간다는 소식에 일본군의 앞잡이를 하던 독립군의 첩자들이 도산 선생님을 죽이러 왔다가 도산 선생님인 척하던 홀아비를 죽이게 된 거였어요. 그렇게 친일파 첩자들이 자신을 죽이러 왔다가 홀아비를 죽이고 도산 선생님을 죽였다고 일본에 보고했기 때문에 도산 선생님은 편안하게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지만, 도산 선생님 입장에서는 부모가 모두 일본에 죽임을 당한 어린 그들의 딸을 도저히 두고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 여자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시게 된 거죠. 그런데 그 여자아이가 영어도 한 마디 못하면서 도산 선생님의 양녀가 되어 미국에 가면서 꼭 가지고 갔던 게 있었대요. 엄마를 잃은 딸아이와 홀로 된 아버지가 독립군 내에 친일파 첩자들이 있는 것을 알고 도산 선생님을 도피시키고 자신이 변장하고 죽을 준비를 할 때, 딸아이에게 그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가보를 꺼내 주었었다고 해요. 그걸 마치 테디베어 곰인형처럼 꼬옥 안고 미국길에 올랐다고 해요.”
“그러면 그 여자 아이는 도산 선생님의 양녀로 미국에 함께 떠나 살게 된 건가요?”
“네. 하지만. 미국에서의 도산 선생님의 독립운동은 그치지 않았어요. 결국 여자 아이는 오렌지 농장에서 혼자서 남게 되었고, 그 길로 도산 선생님과 헤어지게 되었지요. 도산 선생님은 다시 상하이 임시정부와 결탁했고, 독립운동을 했다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잡혀 5년이나 감옥생활을 하고 나와 학교를 하시다가 아주 비참하게 고문을 당하고 돌아가셨어요.”
“그러면 그 여자아이는...?”
산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 여자아이는 그렇게 미국에서 안 씨 성으로 살면서 자신을 지켜줄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어려서부터 보아왔던 독립운동에 평생을 몸 바쳤다고 해요. 그렇게 새로운 미국의 독립군 집안에 또 생겨난 거죠.”
“그렇군요.”
“산이 씨의 어머니가 산이 씨를 버렸다고 생각했던 적 있었죠?”
안 교수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어 질문을 던지자 산이가 당혹스러워하며 놀라 되물었다.
“네?”
“아니에요. 자기가 낳은 아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는 어머니는 없어요.”
“그건...”
“그 일에 대해서 주지스님이 산이 씨의 기억을 봉인해버렸어요. 산이 씨가 너무 힘겨울까 봐 그러셨을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아세요?”
“지금 이게 도산 선생님을 따라 미국길에 오르던 아이가 꼬옥 안고 있던 대대로 이어져오던 그 집안의 가보였어요. 부모님 모두가 독립을 바라며 도산 선생님을 지키다가 순국하신 어른들의 피가 서린 보물이죠.”
어디서 나왔는지 고운 비단에 쌓인 함이 하나 나왔다.
“산이 씨도 이런 장면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죠?”
“네. 할아버지가 남겨주신 그 함이랑 똑같이 생겼어요, 이거.”
“맞아요. 만든 사람이 같거든요. 이건 선택된 사람들만이 열 수 있게 만들어져서 그렇지 못한 자들은 결코 열 수 없게 되어 있죠. 그런데 산이 씨는 그 안에서 산이 씨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죠?”
“네! 그걸 어떻게....”
“나도 우리 할머니한테 그 얘기를 전설로만 듣다가 상자 안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열었거든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상자 안의 존재가 우리를 찾아낸 거죠. 수백 년에 걸친 세월을 기다리다가 말이죠.”
가만히 산이가 상자를 만지려는데 상자가 툭하고 뚜껑이 옆으로 흘러내리듯 열렸다.
“어?”
안은 비어있었다.
“안이...”
뭐라고 말하려고 산이 말하려는데 산의 앞에 각시탈이 가만히 웃는 얼굴로 산이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