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발놀림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기억하는 대로 보법(步法)을 진행하다 보니 어설프긴 했지만, 공간이 접히듯 몸이 앞으로 쑥쑥 나가 있는 것이 느껴졌다.
‘10개의 활이 날아온다고 했지?’
목소리가 들렸던 어둠의 중앙으로 나가면서 세찬이는 방상이나 삼별초의 도움 없이 혼자서 그에 맞서기로 마음먹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슉-
감각이긴 했지만, 아주 간발의 차이이긴 했지만 활은 세찬이에게 닿지 못하고 스치듯 상처를 입힐 뿐이었다.
‘치잇! 이렇게 가다가는 나만 지쳐.’
거리가 줄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활은 연속해서 방향과 상관없이 사방에서 날아오고 있었는데 눈앞의 어둠에는 다가간 만큼 상대가 멀어지는 것 같다는 느낌으로 간격이 줄어드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왜? 생각처럼 안되나 보지?”
목소리의 주인공이 세찬이의 생각을 읽고 있는 듯 비아냥거렸다. 상대에게 힘으로 맞설 생각은 물론 아니었다. 방위에 맞춰 상대로 인식되고 있는 쪽의 부적을 찢거나 떼어내어 진법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슉-
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던 세찬이가 다시 몸을 날렸다.
슈욱-
활 세 개가 정면과 측면에서 날아와 세찬이의 몸에 박혔다.
푹-
“우욱!”
“왜? 화살이 10개로 끝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나는?”
“이, 방상이, 아니, 삼별초만 있었어도...”
분했지만 몸에서 힘이 빠지며 세찬이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눈을 감기 직전 세찬이의 앞으로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짐작되는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와 가만히 팔짱을 끼며 숨이 사그라들어가는 세찬이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끝이 없어요, 고운님.”
부네가 땀을 흘리며 숨이 가빠지는 고운이를 엄호하며 빠르게 외쳤다.
“헉헉. 이렇게 많은 식신을 한꺼번에 쓸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이렇게 많은 식신은 우람이나 회광이라면 몰라도... 아!”
말을 하다 말고 양쪽에서 튀어나온 팔이 고운이의 양팔을 잡았다. 손에 들고 있던 푸른빛을 내던 활이 바닥에 떨어지며 사라지고 말았다.
“고운님!”
부네에게 달려드는 수많은 손을 보며 고운이가 움직이지 못하는 채로 눈을 감고 외쳤다.
“알았어요. 이제 다 알았다구요. 그만하셔도 알아들었어요.”
순간, 고운이를 잡고 있던 손과 부네에게 달려들던 수많은 손들은 순식간에 가루처럼 공중에 화하며 날아갔다. 그리고 어둠의 양쪽 네 군데에서 똑같은 모습을 한 존재가 가운데 쓰러져 있던 고운이와 그녀를 부축하는 부네에게 다가섰다.
“어떻게 알았지?”
네 쌍둥이처럼 똑같은 모습의 똑같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고운이였다. 부네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일어나는 고운이가 가뿐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이건 어차피 저 혼자 깰 수 있는 진이 아니라는 걸 몸으로 깨닫게 하려는 거잖아요!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상대했던 게 제가 할 수 있는 바로 그 위의 단계의 저라는 걸 보여주시려는 것도 잘 알았다구요. 우람이와 세찬이의 힘이 필요해요. 제가 어떻게 하면 두 친구들과 힘을 합쳐 저를 더 강하게 만들어 부네에게 보호를 받는 게 아니라 부네를 보호해줄 수 있는 거죠?”
말하고 있는 고운이는 담담한 듯 보였지만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고, 고운님.”
“부네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지난번 엄마와의 수련을 통해 나는 내가 훨씬 더 강해진 존재가 되었다고, 그래서 하회탈의 영혼을 부리는 전사로서 부족함이 없는 첫 단계를 내디뎠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게 착각이라는 걸 지난번 싸움으로도 알게 되었던 거구, 미안해 부네. 부네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나를 생각해서 말하지 않았던 거잖아. 내 자존심에 상처를 줄까 봐...”
“고운님.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아니. 우리에겐 시간이 없잖아. 그리고 365일이나 함께 밥 먹고 자고 지냈던 엄마가, 아니 사부님이 보시게 되면 이 한심한 딸의 모습에 실망하실 거야. 자아, 제가 우람이와 세찬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뭔지 알려주세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함께 하며 더 강해져 갈 수 있는지...”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네 방향에서 왔던 네 명의 고운이가 펑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로 화하고 그 자리에는 짚으로 만들어 부적으로 감싼 인형에 툭하고 떨어졌다.
“아주 바보는 아닌 것 같구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대가 말했다.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된 것 같으니 제대로 보물 찾기를 해보기로 하지.”
“이얏!”
붉은 주먹이 다시 붉은 주먹과 부딪히며 두 걸음이나 뒤로 밀렸다.
“후욱후욱!”
벌써 100합은 넘게 기술을 걸었지만, 상대는 우람이의 공격은 물론이고, 백정 회광과는 협공도 아무렇지도 않게 날려버렸다. 지난번 대결했던 복싱은 아니었지만, 두려운 것은 상대에게서는 호흡의 흐트러짐이나 힘이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하지?”
힘은 힘대로 들고 호흡이 모두 흐트러졌다. 몸에서 힘이 거의 모두 빠져나갈 것 같다는 위기감에 다시 주먹을 들어 올릴 힘마저 빠져버렸다는 생각이 들 즈음 회광의 몸이 희미하게 사라져 버릴 듯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엄습했다. 상대의 붉은 주먹이 바람을 가르며 정면으로 날아온다는 것을 느꼈지만 도저히 피할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 맞았던 복부의 한방 때문에 호흡이 흐트러진 탓이 컸다.
‘모든 걸 힘만으로 해결하려 들지 말거라.’
그 짧은 순간, 사부의 목소리가 울리듯 귀와 가슴과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쓰러지듯 주먹에 얼굴이 닿으려는 찰나 상대의 주먹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한참을 기다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주먹은 자기 얼굴에 닿지도 않았다. 자신의 움직임도 함께 둔해진 것인지 죽을 때가 되어서 주마등이 스치는 것은 아닌지 정신이 퍼뜩 들었다.
느린 주먹을 피하겠다고 몸을 움직이며 고개를 옆으로 치우자 동시에 슬로우 모션이 풀리듯 상대의 주먹이 귀 옆을 부웅-하는 소리와 함께 스쳐 지나갔다.
‘어? 뭐지?’
순간이었지만, 묘한 자신의 움직임에 우람이가 스승의 일갈을 다시 되새겼다.
‘힘이 다가 아니라고 하셨지? 움직임. 자연의 움직임.’
스승의 가르침이 떠오르자 몸이 다시 가벼워진 느낌마저 들었다.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천천히 그 거대한 복서가 했던 것처럼 몸을 움직여보기 시작했다.
“맞아. 수양버들은 결코 부러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하던 우람이의 몸이 춤사위로 변해서 앞으로 뒤로 비틀거리듯 음악을 타기 시작했다. 흡사 탈춤놀이에서 보이는 춤사위와 비슷했지만, 순간 멈칫하며 우람이의 발이 허공을 가르며 어둠의 한 지점을 콱 찍듯이 공기를 갈랐다.
팡-
사부가 보여줬던, 자신은 결코 할 수 없다고 느꼈던 공기의 파열음이 어둠의 공간에서 터졌다.
“얼쑤! 이제 알았다. 사부님이 말씀하신 이유극강(以柔克剛; 부드러운 것으로 강한 것을 이긴다)*이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팔까지 자연스럽게 펼치며 마치 신나는 춤사위에 빠진 사람처럼 우람이가 재주를 피우듯 회광의 어깨를 넘어 공중제비를 돌아 날아 차기를 날리니 폭죽이 터지듯 공중에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고운이와 부네가 보여준 물의 흐름이란 이런 거였어.”
우뚝 선 우람이와 회광의 앞에 어둠이 걷히며 짚으로 만들어 부적에 둘러싸여 있던 인형이 화르륵 불타 올랐다.
“이제 조금 감이 왔나 보군. 너의 사부가 수백 년 후의 서양 복싱에 당했다고 하면 너는 다시 수련동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게다.”
앞에서 선비탈의 존재가 걸어 나오며 회광과 우람이를 보며 말했다.
선비탈은 나란히 앞에 선 우람이와 고운이를 보며 말했다.
“지금 세찬이는 내가 배치했던 진에서 빠져들어 다른 어떤 공간에 빨려 들어가 버렸다. 내가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라 내가 파해(破解)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차피 너희들이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다는 결론이다. 너희들도 느꼈겠지만, 너희가 수련했던 수련동의 공간은 이 선계(仙界) 공간과 뿌리가 같다. 그러니 너희가 수련했던 것처럼 영압을 높여 수련 강도를 높일 수도 있지. 하지만, 이제 그런 수련은 너희에게 의미가 없다. 너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완벽하게 수련해야만 한다. 세찬이가 갇혀 있는 공간이 어디인지 어떻게 열 수 있는지에 해답도 너희에게 달려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자아, 이걸 부러뜨려봐라.”
선비탈이 활을 하나 우람이의 앞에 내밀었다.
“저를 뭘로 보고 이러시는 거예요? 내참!”
우람이가 단단해 보이는 활을 쥐고 바로 힘을 모아 단번에 부러뜨렸다.
“자아, 그렇게 힘이 세다면 이것도 부러뜨릴 수 있겠구나.”
“네?”
우르르르
선비가 팔을 앞으로 휘두르며 도포자락을 휘젓자 활이 열댓 개 우람이의 앞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 이건... 한번 해볼까?”
떨어진 활을 주섬주섬 모아 한 묶음으로 들어 올리고는 손에 움켜쥐기도 힘든지 안절부절못하다가 우람이가 다시 내동댕이치며 말했다.
“씨이! 이걸 한꺼번에 어떻게 부러뜨려요?”
“우람아! 이거.... 이순신 그...”
고운이가 우람이를 보며 뭐라고 말하려는데 선비 탈이 고운이를 보며 말했다.
“맞다. 충무공(忠武公)*의 이야기로 너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 단생산사(團生散死;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지. 하지만 이건 절전(折箭)*이라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다. 분명히 내가 충무공이 어려서 이야기해줬던 이야기로 원조는 바로 나에게서 나온 것이지.”
“그러니까 우리도 뭉쳐야 한다는 거죠?”
“그래. 보기보다 그렇게 둔한 녀석은 아니로구나. 아까 사부의 택견을 떠올린 것을 보면 말이다.”
“어, 어떻게 사부님이 그걸 가르쳐주신 걸 아세요?”
“네가 평소에 얼마나 불필요한 힘과 동작을 가지고 있는지, 온몸에 힘이 모두 빠지고 나서야 그게 생각났다는 걸 기억해내거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너희들이 지금부터 깨우쳐야 할 두 가지는 바로....”
노자(老子)의 말이다. 달이 차면 지듯이, 만물은 성(盛)하면 반드시 쇠(衰)하기 마련이다. 즉 물극필반(物極必反)하고 세강필약(勢强必弱)하는 것이 불변의 자연법칙이다. 노자는 유약(柔弱)이 강강(剛强)을 이기는 이치로서 천하를 허정(虛靜)으로 돌리고자 했다. 《노자》 〈미명편(微明篇)〉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유약이 반드시 억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 물고기가 깊은 못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심오한 도리를 함부로 사람에게 내 보여서는 안 된다 [柔弱勝剛强 魚不可脫於淵 國之利器不可以示人].
충무공(忠武公)
나라에 무공을 세워 죽은 후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은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 대표적 인물에 이순신(李舜臣), 김시민(金時敏), 남이(南怡), 정충신(鄭忠信)이 있는데 여기서는 가장 유명한 이순신을 의미한다.
절전(折箭)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는 화살을 부러뜨린다는 의미로 사용된 고사성어이다.
북사(北史) 토욕혼(吐谷渾) 왕 아시에게는 20명의 아들이 있었다.
아시는 어느 날 아들들을 모아 놓고 화살 하나씩을 손에 쥐고 부러뜨리도록 했다. 물론 쉽게 부러뜨렸다.
아시는 다시 화살 열아홉 개를 쥐고 한 번에 부러뜨리도록 했다.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이 이야기는, 힘을 합치면 어려운 일도 해낼 수 있지만 혼자서는 하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하는 고사성어로 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