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상씨의 탈> 3부 –20

열. 화살 묶음은 부러지지 않는다. - 하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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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잠이 든 거였을까?’


꿈인지 아니면 이곳이 지옥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잘 잤는고?”


하얗고 깨끗한 한복을 입은 사람의 형상이 희끄무레하게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여, 여긴...?”


눈을 비비고 다시 주변을 둘러본 세찬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공간.


그 공간의 가운데 침대처럼 불룩 솟아 있는 공간에 자신이 누워있었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나마 그 불룩 나와 있던 공간도 사라져 버렸다.


“바, 방상아?


도복 같은 깔끔한 한복을 입은 방상씨의 탈이 지긋이 세찬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어났으면 이제 움직여야지. 죽은 줄이라고 안 게냐?”


“어떻게 된 거야? 이게?”


“으음. 설명이 복잡하니 간단하게 한 번만 설명해준다, 잘 듣거라. 지난번 저승에 다녀오고 난 이후, 너의 몸은 보통 사람의 것과는 다르다고 한번 설명해준 적이 있지? 기억하느냐?”


“응. 그건 뭐... 대강”


“내가 현세에 몸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너의 영력이 아주 많이 소진되는 일이고 너의 영을 소진시키는 일이라 함부로 세상에 나갈 수 없다는 것도 기억하겠구나?”


“뭐, 그것도 대강...”


“허어! 이 녀석 하곤. 대강이 아니라. 그건 네 생명과 관련된 일이니 그리 가볍게 그러냐고 받아칠 일이 아닌 게야. 여하튼, 그리하여 내가 제대로 된 힘의 천만분의 1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인 게지, 지금은 말이야.”


“그래서 내가 너를 불러낼 수도 없는 거고, 나오지도 못했다는 거야?”


“그렇지. 그러나...”


방상씨가 말꼬리를 길게 끌었다.


“그러나?”


궁금한 듯이 세찬이가 그의 말꼬리에 꼬리를 달며 되물었다.


“지금 이곳처럼 연옥(煉獄)*을 끌고 올 수 있다면 이 공간에서는 네가 영력을 쓰거나 빌려주지 않더라도 내 공간처럼 편하게 운용할 수 있도록 염라와 담판을 짓고 오는 길이었다.”


“염라? 내가 아는 그 염라대왕의 염라?”


“응. 뭐 일단은, 사람들이 아는 그 염라...”


“그럼 나는 아까 화살을 맞아서...”


“에헤! 이 어리석은 녀석 하곤. 네가 죽으면 내가 깃들 곳이 없는데, 내가 너를 죽이려고 활을 쏠 리가 있겠느냐?”


“그럼 나는 어떻게...?”


“지난번처럼 저승을 들락거릴 수 있는 사람의 영혼은 없는지라, 내가 특별히 연옥의 공간을 조금 떼어 너를 좀 성장시키는 공간으로 쓰겠다고 담판을 짓고 나서 생각해보니, 네 말처럼 연옥에도 결국 인간이 들어올 수 없다는 걸 깜빡할 뻔했지 뭐냐?”


“후우!”


답답한 듯 세찬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너의 혼을 가지고 오되, 육체를 함께 끌고 올 수 있는 이중장치를 만들어야만 했지. 아주 귀찮은 일이었다. 그리고 저승에 있던 장영실에게 회혼시(回魂矢)를 만들어달라 하여 내가 널 이곳에 아무런 문제 없이 끌어올 수 있었던 게야.”


“회혼시(回魂矢)?”


“뭐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영혼을 육신과 일체화시켜 영혼의 형태이지만 육체에도 똑같은 생로병사 희로애락이 모두 느껴질 수 있는 상태로 이어지게 하는 화살인 셈이지. 그러니 지금 네 육신의 일부는 그 선비 녀석이 만든 공간에 있고, 영혼의 전부와 육신의 대부분에 연결된 부분은 지금 이곳 연옥 수련장에 와 있는 셈인 거지.”


“복잡하네. 그러니까...”


“내가 복잡하니 잘 새겨들으라 하지 않았더냐?”


“그러니까 나는 지금 내 육체에서 떠난 영혼은 아니지만, 너를 마음대로 불러낼 수 있는 공간에 와서 함께 수련을 할 수 있는 상태인 거라는 거지?”


“뭐 딱 맞는 설명은 아니다만 대강 비슷하다. 중요한 것은!”


“응?”


방상씨의 갑작스러운 강조에 세찬이가 귀를 쫑긋하며 집중했다.


“이제 내가 가진 힘들을 어떻게 운용하는가에 대해 이 연옥 수련장에서 익히게 될 것이다. 네 수련의 정도에 따라 내가 세상에 나가 내 힘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이고, 네가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나는 너와 하나가 되어 내 힘을 온전히 밖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음. 그럼 내가 지금부터 뭘 하면 되는 거지?”


“지난번 삼별초 대장에게 기초의 기초 정도만 익힌 셈이니, 오늘부터는 내 방식대로 기초를 다지도록 하겠다. 지금 밖의 선계 공간에서도 비슷하게 백정과 부네가 물아일체의 수련을 시작하였으니 너도 이제 네 힘이 부족하다고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보호받아야 할 지경은 벗어나야 하지 않겠느냐?”


“좋아. 시작하자.”


“좋다, 그 자세. 울지나 말고. 나는 선비 녀석처럼 느기작거리며 여유를 부리는 선생님도 아니고 삼별초 대장처럼 네 사정을 봐줘가면서 가르칠 만큼 여린 성격도 아니니 단단히 준비하거라. 미리 말해두지만, 이곳에서 다치거나 죽는다는 것은 너와 연결된 육신에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알겠어.”


세찬이가 대답을 마치고서는 입술을 앙 다물고 두 눈에 의지를 불태웠다.


슈슈슈욱---


세찬이가 자세를 잡기가 무섭게 하얗게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는 공간에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디선가 무서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세찬이에게 공격이 날아들었다.



한편, 선비에게 부여받은 두 가지 임무 중에 한 가지를 이뤄내겠다며 우람이와 고운이는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우람이는 폭포가 쏟아지는 호수의 위에 불로 만들어진 듯한 불타는 지반 위에서 회광과 함께 등을 맞대고 정좌를 한 채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조금만 더 높이...”


“아니 너무 높다.”


회광의 경고가 나오기가 무섭게 불의 지반은 균형을 잃고 다시 우람이는 호수에 풍덩하고 빠져버렸다. 회광은 물 위에 자연스럽게 서서 호수 안에 손을 넣어 다시 우람이의 목덜미를 잡아 수면 위로 들어 올렸다.


“조금만 더 하면 알 것도 같은데, 아! 미묘하게 잡히질 않아.”


회광에게 목덜미가 잡힌 채 물이 흠뻑 빠진 쥐처럼 젖은 우람이가 계속 골똘한 표정으로 구시렁거렸다.


“중요한 것은 내 호흡에 맞추려 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하나의 호흡을 정해놓고 그것에 맞춰야 하는데, 자꾸 서로의 호흡에 맞춰주려고 하다 보면 어긋나는 것 같다.”


“말은 알겠는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네. 한번 다시 해보자.”


“좋다.”


회광은 다시 손을 돌려 태극모양을 그리며 작은 불의 지반을 만들고 그 위에 우람이를 살포시 내려놓으며 함께 다시 등을 맞대고 정좌했다.



고운이는 고운이대로 정자 밑 절벽의 앞쪽에 불기둥에 휩싸여 땀을 뻘뻘 흘리며 불길이 안으로 들이치지 못하게 살얼음의 기운으로 뻗치며 둥근 원을 만들고 등 뒤의 부네와 나란히 서서 눈을 지그시 감고 불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천천히 부네의 몸이 물로 화하는 듯 형체가 투명해지면서 그 안으로 흡수되듯이 고운이의 몸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들리시나요?’


부네의 전음(傳音)이 온몸으로 가볍게 울렸다. 그리고 아까 72번째의 실패를 했을 때의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고운이 자신도 합장하고 있던 손을 천천히 양쪽으로 벌리며 호흡을 다시 가다듬었다.


‘물 안에 있지만 숨을 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불 안에 있지만 또한 그 불에 불탈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선비가 아까 던져준 실마리인지 화두인지 모를 그 말의 의미가 조금씩 구체적으로 마음 안에 흘러들어오는 듯했다.


‘내가 불을 안고, 불이 나를 안고, 그렇게 서로를 보완해줘야 하는 거야. 불과 물이 하나가 될 수는 없지만, 물이 불을 끄고, 불이 물을 없애는 상극이 아니었던 거야’


깨달음이 오듯 부네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처럼 한꺼번에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마치 부네의 품 안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부네가 자신이고 자신이 부네가 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눈을 뜨니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불길이 바닥에 원을 만들던 살얼음과 함께 절반을 뒤섞이며 태극의 문양을 만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전혀 다른 모습의 고운이가 파란 비단이 펄럭이는 옷자락을 흩뜨리며 머리가 길어져서 훨씬 성장한 모습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우.... 이거구나! 두 가지 숙제는 두 가지가 아니고 하나였던 거였어.”


‘지금의 수련 정도로는 이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 5분 여가 고작이에요.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으로 전달되는 전음으로 부네의 생각을 듣고 나니 생각보다 금방 지쳐간다는 느낌이 확 왔다. 그 상태의 고운이는 생각이나 판단 역시 이전의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후우!”


어느 순간 지쳐 앞으로 툭하고 쓰러지며 고운이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으신가요, 고운님?”


“하아 하아!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 그런데 부네와 하나가 되는 기분은 너무 상쾌해지고 좋았어. 이제 한번 되었으니까 다시 할 수 있을 거야. 잊기 전에 빨리 다시 해보자.”


“이얏홋!”


막 다시 일어서려는 고운이에게 멀리 호수 전체의 수면에 불과 물로 그려진 태극이 물기둥과 함께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우람이 녀석도 깨우친 것 같은데? 우리가 뒤쳐질 수 없지.”


두 사람의 모습을 정자 위에서 바라보던 승환의 얼굴이 미미한 미소가 스몄다.


“생각보다 정말 습득이 빠른 아이들이군. 세찬이는?”


뒤를 지키고 서 있던 선비탈이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그 방상씨니까 말이야. 아무리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고는 하지만, 한 달 정도가 한계일 듯한데.... 각시탈 쪽에서 무리한 작전을 펼치지나 않았으면 좋겠군.”




“늦어!”


퍼억-


“우욱!”


세찬이가 강한 타격을 받고 다시 공중으로 몸이 뜨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치잇!”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느릿느릿 움직이는 탓에 생각과 움직임이 영 맞지 않았다. 분명히 피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사이엔가 보이지 않는 공기 덩어리 같은 것들은 여지없이 몸에 닿았다. 하나를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방향에서 온 것을 동시에 피할 수는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배고픔도 없었고, 갈증도 없었다.


“지금 그렇게 많이 공격을 당해 피해가 누적되면 결국 지금은 떨어져 있지만 네 육신에 그대로 그 피로와 상처가 누적된다는 걸 명심하거라.”


“알아. 안다구.”


방상씨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세찬이에게는 6단계나 올린 상태로 바닥에서 보법(步法)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도록 물컹거리는 유도체로 바꾸기까지 했던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연타로 날아오는 영파(靈派)를 한꺼번에 세 개까지 피하는 단계로 들어섰다.


‘알긴 뭘 알아, 이눔아. 너같이 한꺼번에 이렇게 타고 올라오는 놈은 내가 수천 년 만에 첨이구만.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이러다가 천상계에 이런 놈이 나왔다고 말이나 안 들어갈는지 걱정이네.’


세찬이는 안간힘을 쓰고 버텨냈다. 제주도로 가서 삼별초 대장과의 수련을 하면서도 수차례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 끊임없는 대련과 체력단련, 보법, 그리고 영압을 최대치로 유지하는 법을 익힌 것이 도움이 되긴 했다. 하지만, 숨을 쉬는 것에서부터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전혀 나아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자 분해서 눈물이 자꾸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 중학생이 되었고 방상이 앞에서도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더 이상 싫었다.


자신만이 우람이나 고운이처럼 탈의 존재조차 마음대로 불러내지 못하는 것도 싫었고, 자신의 기운이 아닌 삼별초들의 기운을 빌어서 싸우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특히 요전번처럼 펜던트를 잃어버리거나 떨어뜨리는 경우는 언제라도 생길 수 있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자신이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세찬이는 설마 자신이 전혀 진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연옥 수련장의 단계가 계속 난이도를 급속하게 올려가면서 자신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수련에만 집중했다. 세찬이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방상이에게는 보이기 시작한 기운의 힘이 이제 세찬이의 몸에 오라처럼 타오르기 시작하며 색을 바꾸고 있다는 점도 세찬이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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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연옥(煉獄)


이 세상에서 죄의 벌을 다 치르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 불로 죄를 정화(淨化)하고 단련받는 곳.

가톨릭의 개념이나 여기서는 저승과 현세의 중간 공간을 의미하는 의미에 한정되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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