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교수, 아니 홍길동께서만 나에 대해서, 혹은 우리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착각하시는 건 아닌가? 어차피 감출 게 없다고 생각해서 각시탈을 쓰지 않고 이 공간에 나타나신 거 아닌가 말이지?”
승환이 지지 않고 미미한 미소를 띠며 자신들 도발한 여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이제까지 읽지 못해 낸 사람은 양반밖에 없었으니까 말이죠.”
안 교수라고 불린 여자가 승환의 말에 안경을 만지며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녀의 눈이 까무룩 뒤집히는 것 같더니 파란색으로 그리고 다시 검은색으로 그리고 다시 여러 가지 색이 뒤섞이는 것처럼 보였다.
“양반처럼 내 속을 읽지 못하게 하는 것까지는 못해도 그 정도의 최면에 넘어갈 정도의 수준은 아니니 애써 나를 테스트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명색이 취조실에 앉혀놓은 능구렁이 같은 친일파들 노려만 보더라도 그 속내를 모두 읽어내는 검사이니 말이야.”
“흥!”
그녀가 다시 안경을 만지던 손을 내리고 시선을 바꿔 잠들어있는 산과 스님 탈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활빈당에 스님만 들어오게 되어도 지금만큼 전력의 차이가 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왜 그렇게 비뚤어진 거지? 당신이 입양녀로 미국에서 자라고 공부해놓고서도 한국 국적을 부득불 유지하겠다고 소송까지 불사했던 그 과거와 역시 무관하지 않은 이야기인가?”
승환이 자신에게 시선을 피하는 안 교수에게 슬쩍 떠보듯 물었다.
“다 아는 척하지 말아요. 당신이 그깟 서류 정도로 뭘 안다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거죠?”
승환의 예상대로 그녀의 날카로운 반응이 바로 그녀에게서 튀어나왔다.
“이렇게 강경 일변도로 그들을 자극하게 되면 활빈당에게도 득 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쯤은 알 텐데 왜 그렇게까지 위험한 도박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된다는 거지.”
“당신들에게 이해를 구한 적 없어요.”
“최소한 우리와 함께 하는 탈의 영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승환이 그녀의 곁에서 언제든 움직여 그녀를 보호할 듯 날렵한 기미를 보이는 각시탈과 오른쪽 끝에 서 있는 할미탈을 보며 물었다.
“이 나라는 독립투사들을 버렸어요. 나라를 위해 명예와 목숨과 자신이 가진 그 모든 것들 바친 이들에게 이 나라가 해준 건, 아무것도 없었단 말이에요. 그 후손들이 지금 어떻게 사는지 아나요? 전혀 독립운동이라고는 상관도 없이 살던 이들이 그 조상의 이름을 팔아 국회의원이나 앵벌이 식으로 임명직에 몇 명 올라 호가호위하는 것으로 그 수많은 이름 없는 독립투사들의 설움을 보상할 수는 없어요.”
그녀의 말에는 뜨거운 분노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설움이 있었지만, 예의 설명하는 목소리는 차분하고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직접 그 보상을 친일파들에게 받아내기라도 하시겠다는 건가? 수십수백 년이 지난 후에?”
“내가 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폭탄을 안고 있는 십 대 사춘기 소녀 같나요? 그래요. 그랬던 적이 있긴 했었네요. 하지만 나는 각시탈과 함께 하면서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어요. 바로 홍길동이죠. 우리 활빈당이 한국에서 이런 일을 벌이기까지 도대체 몇 년간의 준비가 필요했다고 보죠?”
그녀가 다시 승환에게 도발적인 물음을 던졌다.
“당신이 얼마나 오래된 원한을 가지고 있고, 대한민국 정부라는 것이 얼마나 나라 노릇도 못하고 이제까지 친일파들에게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렸는지 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 역시 이 나라의 녹을 먹는 공무원 짓을 하면서 그들의 면면을 박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하회탈들의 영혼이 하나의 뜻을 가지고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활빈당의 생각은 다르다는 건가?”
“웃기는 소리 하고 자빠져 앉아 있네.”
멀리 떨어져 소녀를 차분히 토닥이고 있는 줄 알았던 할미탈이 어느 사인가 선비 탈의 곁에 가서 구부정한 몸으로 고개를 들어 키가 훤칠한 선비 탈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희가 뭘 했냐? 양반이? 선비가? 니들이 세상이 이지경으로 돌아가고 우리 조상네들이 그렇게 핍박받고 보상은 고사하고 누명 쓰고 해외로 쫓겨나가 소진이나 우리 불쌍한 이연이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뭘 해줬냐? 이 지경이 된 것이 친일파 놈들만의 잘못이더냐? 우리가 왜 니들과 함께 하지 않는지 아직도 모르는 게냐?”
노기 어린 걸쭉한 할미 탈의 일갈에 선비 탈은 가만히 할미탈을 응시할 뿐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스님 탈 자체로 갇혀가면서까지 아이를 지키겠다는 주지스님에게 당신들의 위험한 일에 동참하라는 압박은 조금 심한 것 아닌가? 필요하다면 우리가 언제든 협력해서....”
승환이 설명을 다 끝내기도 전에 안 교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아니라는 듯이 까딱까딱 흔들며 말을 막았다.
“아니. 당신들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인간의 본성에 친일파들이 가진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기에는* 충분한 동기로 작용했어. 인간의 썩어빠진 불균형은 약으로나 상담으로 조절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회 전체를 좀먹는 것들에게는 역시 도려내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게 우리의 결론이에요. 우리는 그들을 죽이거나 인명피해를 내겠다는 것도 아니잖아요. 누군가 내 기자회견을 보고 활빈당을 ‘21세기 디지털 독립군’이라고 부르더군요. 최소한 진실을 알지 못하는 우매한 국민들에게 그간 그들이 누구에게 기만당해 개돼지 소리를 듣고 사는지는 알려줘야 한다는 게 우리의 방식이에요. 더불어 산이 같은 피해자가 또 나오지 않길 바라는 효과는 부수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함부로 우리 산이에 대해서 다 아는 것처럼 굴지 마라.”
“왜 이래요? 스님도 산이 상담할 때 내 이야기를 모두 들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스님에게 생각할 시간을 드린 거고... 이연이와 할망의 분석에 따르자면, 그들도 이제 용병을 본토에서 불러왔으니 우리에게도 전력의 충원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특히 우리는 청일점으로 공격력에서 선비 못지않은 스님의 파괴적인 능력이 아주 필요한 상황이거든요.”
“각시나 그 위에 있는 꼬마 아가씨도 할망이나 안 교수의 뜻과 같은가?”
승환이 아직 한 마디도 입을 떼지 않은 각시탈과 한쪽 끝에 앉아서 가만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여자 아이를 향해 물었다.
그들은 동시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는 이미 뜻을 같이 하기로 했다는 결연한 다짐의 표시였다.
“우리 쪽의 선생님께서는 행여 활빈당의 활동이 일본의 것들과의 전면전을 통해 피해를 입을까도 우려하시지만, 더 큰 우려는 하회탈을 다루는 이들이 어떤 이유에서건 행동을 함께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우리 내부의 균열로 이어질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무리해서 그대들과 만나고자 했던 것이고, 굳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가 옳다고 끝까지 가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대들이 도의를 넘어서지 않는 범위라면 2진에서 활빈당의 활동을 서포트할 의향이 있다. 그러니 더 이상의 분열이나 편 가르기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와 선생님의 모든 의견이다.”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얼씨구나 하고 도와준다니 감사하다고 넙죽 엎드릴 줄 기대했나 보죠?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선비나 양반이나... 게다가 영혼과 일체화된 각시와 할망에게 그 일체화된 이들과 뜻을 같이 하냐고 묻는 멍청함까지 겸비하시고...”
“됐다. 나는 아직 양반이나 다른 쪽의 존재를 만나보지 못했지만, 그가 하는 말에 어느 하나 잘못된 구석이 없다. 그렇게 삐뚤어진 심보로 모든 것을 튕겨낼 필요는 없지 않느냐?”
스님 탈이 안 교수의 비아냥거림에 제동을 걸었다.
“만약 우리가 당신의 제안에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적으로 돌아서게 되는 건가요?”
안 교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비 탈의 앞에 있던 할미탈이 지팡이를 선비의 턱 밑으로 들이대며 위협적인 태도를 취했고, 바로 각시탈이 사라지는 듯한 움직임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승환의 뒤로 나타나 언제고 그의 움직임을 제지할 수 있음을 동작으로 보였다.
“이렇게까지 막 나가야 하겠나?”
승환이 전혀 위축됨이 없이 고개를 들어 안 교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앞서 부드럽지만 날카롭기만 하던 이전의 표정과는 달리, 아주 잠시였지만 위압감이 흐르는 묘한 표정으로 일그러지는 듯 보였다. 심기가 불편해진 듯한 말꼬리와 함께 선비 탈 역시 고개를 살짝 돌려 자신을 노리는 듯 지팡이를 들이대고 있는 할미탈을 내려다보았다.
“뭐냐? 해보겠다는 게냐?”
할미탈이 지팡이를 선비 탈의 턱에 더 치켜올리려는 순간 선비의 길고 다부진 몸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승환의 모습도 각시탈의 빠른 동작에 잡히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반대편에 다시 나타난 승환이 손에서 붓을 들어 하얀 벽에 슥슥하고 그림을 그렸다. 방문 같은 한옥집 대문이 그려졌고 먹으로 그려진 검은 그림은 이내 실제 문이 되어 승환이 문을 잡자 밖으로 통하는 공간이 열렸다.
“경고와 조언은 오늘 여기까지다. 다음에 만날 때는 이렇게 젠틀한 방식만으로 대해주지 않는다.”
승환이 문으로 선비와 함께 나가고 문을 닫자 다시 문이 사라지고 흰 공간으로 메워졌다.
“듣던 대로 기분 나쁜 건방짐이네요.”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안 교수가 다시 스님 탈의 앞쪽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지난번 상담에서 제가 산이를 통해서 했던 이야기는 스님에게 했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미 저의 이야기를 다 들으셨으니 오늘 자정 저희가 하려는 일에 힘을 보태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그 일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에 스님이 해주셨으면 하는 일이 많습니다. 지금 보신 것처럼 선비도 그렇고 그 도통 알 수 없는 양반도 그렇고 저쪽은 방상씨까지 합류한 상태라고 하니 말입니다.”
“방상씨...?”
스님 탈이 움찔하고 그녀의 질문 끝을 되돌려 받았다.
“잘 아실 겁니다. 우리 하회탈의 조상 격으로 불리는 존재입니다. 할망이 가진 힘과 이연이가 가진 힘이 겨우 합쳐져서 우리가 영을 불러내고 다룰 수 있긴 하다고 하지만, 방상씨는 본래부터 그 능력을 관할하는 신이었다고 불리는 존재이니까 말이죠. 스님도 불가(佛家)에서 수행을 하셨던 분이셨으니 본래 스님이 가지고 있던 능력과는 별개로 산이의 능력이 융합되면서 새로운 능력을 갖게 되셨을 겁니다. 물론 아직 그 능력에 대해서는 저쪽에서는 아무런 짐작도 못하고 있을 겁니다. 저야 상담을 통해 산이에 대해 그리고 주지스님에 대해 다 읽은 입장이라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활빈당에는 스님의 존재가 큰 힘이 될 겁니다.”
“으음...”
“산이가 계속 스님과 한 지붕 세 가족으로 스님 탈과 주지스님의 몫까지 짊어지고 공간을 빌려준 채 지내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충분히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설득력 있는 그녀의 설명에 스님 탈이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듯한 모습을 보일 즈음이었다.
“하, 할아버지.”
잠들어놓았던 산이가 다시 꿈틀거리며 꿈을 꾸는지 손을 내밀며 할아버지를 불렀다.
“너무 그의 머릿속에 공간을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도 너무 오래 분리된 상태도 있었고... 이제 돌려보내야겠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소녀가 뜻 모를 말을 안 교수에게 던졌다.
“알겠어. 스님. 오늘 자정 전까지입니다. 이곳으로 10시 전까지는 오셔야 합니다.”
안 교수가 작은 메모 같은 것을 스님 탈의 손에 쥐어주면서 하얀 공간이 눈부신 빛으로 가득 차는 듯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야! 여기서 자고 있으면 어떡하냐? 한참 걱정했잖아. 피곤해도 잠은 차에 가서 자던가!”
막 생생한 꿈을 꾸고 일어난 듯한 산이의 얼굴을 보며 매니저 한석이 한심하다는 듯이 구시렁거렸다.
주)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
쉽게 말해 ‘나쁜 돈이 좋은 돈을 몰아낸다.’는 뜻인데 영어로는 ‘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다. 16세기에 영국에서 활동했던 16세기 영국의 금융업자이며 상인으로서 엘리자베스 여왕(Queen Elizabeth I)의 고문이었던 토머스 그레셤(Thomas Gresham)이 한 말에서 유래하여 ‘그레셤의 법칙(Gresham’s Law)’이라고 부른다.
‘악한 돈’이란 ‘좋은 돈’보다 일정한 액면가치에 있어서 더 작은 자금 가치를 갖는 것이다. 이 법칙은 특히 개인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가정하는 경제학에서 많은 법칙의 예로서 초기의 원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본래는 경제학에서 나온 개념이지만, 예컨대 학교에서 불량학생이 모범생을 금세 나쁜 방향으로 물들이는 것 역시 그레셤의 법칙으로 설명하기도 하면서 사회학적 용어로 외연이 확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