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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11. 2022

매독에 걸려 고생하다가 인후 결핵으로 죽음을 맞았지만,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전설로 기억되다.

206번째 대가의 이야기.


1782년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무렵부터 만돌린과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으로 음악 교습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디서나 반년이 채 지나기 전에 스승의 실력을 따라잡는 놀라운 재능을 선보였다. 그의 재능을 일찌감치 눈치챈 그의 부친은 베토벤의 부친처럼 아들에게 하루에 10시간씩 혹독한 연습을 시켰다.


그 결과 그는 14살인 1795년에 처음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1799년 17세의 나이에 이미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바이올린의 거장으로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연주회와 교습으로 젊은 나이에 상당한 명성과 부(富)를 거머쥐게 된다.


그는 고난도의 다양한 연주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유명해졌지만, 일각에서는 기존의 경건하고 진지한 음악이 아닌, 경박한 잔재주를 피워 이목을 집중시킨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는 바이올린 한 대로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모방하는가 하면, 갖가지 동물의 울음소리를 재현해서 감탄을 자아냈다.


활이 아니라 나뭇가지로 연주하는가 하면, 현을 한두 개만 걸고 연주하고, 심지어 악보를 거꾸로 올려놓고 연주하는 등, 그의 놀라운 실력을 증언하는 일화들은 기상천외한 것들이 적지 않다. 처음에는 그의 어마어마한 명성을 반신반의하던 관객들조차도 한두 곡만 듣고 나면 모조리 그의 팬이 되어 열광할 정도의 매력을 여실히 증명해주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역사상 최고로 꼽히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19세기 바이올리니스트의 상징이며, 낭만주의를 예고했으며 비르투오소의 시대를 연 최초의 연주가로 일명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린 인물,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의 이야기이다.


그는 명실공히 자타가 공인한 19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군림했고, 바이올린, 비올라, 클래식 기타 연주자임과 동시에 작곡가이자 지휘자 역할까지 최고 수준으로 해낸 인물로 인정받는다.

파가니니는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성에서 동거를 했는데, 이 기간 동안 연주회도 열지 않고 사람들과 만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애인 살해죄로 투옥되었다는 괴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기간에 안 좋아졌던 건강을 회복하면서 하모닉스나 중음 주법, 스타카토 등의 새로운 바이올린 주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1804년 22세 때 출생지 제노바로 돌아와 다음 해부터 다시 연주활동을 개시하여 이전보다 더한 극찬과 칭송을 받았다. 그 명성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누이동생에게 초대되어 보케리니의 출생지 루카의 궁정 가극장에서 3년간의 지휘 생활을 보냈다.


1808년 26세 때부터 1828년의 46세까지 20년간에 걸쳐 밀라노,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으며 종전의 바이올린 개념을 훨씬 초월한 천재적 재능을 뽐내며 청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명성은 이탈리아 이외의 각지로 퍼져나가 파가니니의 이름은 온 유럽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1828년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국외 연주 여행을 하였다. 3월 말 빈에서 있었던 연주회는 미증유의 대성공을 거둬, 파가니니의 이름을 팔아 상점마다 '파가니니 스타일'이라는 양복·모자·장갑·구두 등이 여기저기 팔리며 그의 인기를 확인시켜주었다. 이듬해 1829년 베를린에서도 이러한 성공을 거둔 파가니니는 독일 각지를 순회한 끝에 폴란드로 갔고 또 1831년엔 파리, 이어 영국으로 건너가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박수로 환영을 받았다. 1832년 가을, 5년에 걸친 연주 여행으로부터 귀국하여 북이탈리아의 파르마에 정착하였다.


말년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왕복하면서 연주 활동을 하는 한편 프랑스의 악보 출판상에 자작의 작품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파가니니가 요구하는 인세가 너무 높아 출판은 순조롭게 진척되지 않았고, 결국 그러한 이유로 파가니니의 생전에 출판된 작품은 극히 적었다. 더욱이 출판된 작품이 적은 것은 파가니니가 자기 연주 기법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의 성향과도 관계가 깊다.


1834년 1월 파가니니는 신진 작곡가로 세상의 주목을 끈 베를리오즈를 파리에서 만나 자신의 비올라를 위한 비올라 협주곡의 작곡을 의뢰했다. 하지만 완성된 작품은 파가니니의 기대만큼 비올라의 역할을 화려하게 다루지 않았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아 파가니니는 연주를 거절했고, ‘이탈리아의 해롤드’라는 곡명으로 다른 사람의 연주에 의해 초연되었다.


워낙 인기가 폭발했던 지라 연이어 진행되었던 순회 연주회는 결국 파가니니의 건강에 치명타가 되었다. 젊은 시절에 걸린 매독이 평생 완치되지 않았고, 수은 치료법으로 인한 부작용까지 더해지며 그의 몸은 처참하게 망가졌다. 관객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값비싼 입장료를 매기고, 무리한 일정도 마다하지 않은 덕분에 한 재산 모아놓은 파가니니였지만, 말년에 가서는 투자 실패로 인해 그중 상당 부분을 날려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후두 결핵으로 인해 목소리조차 잘 나오지 않자, 그때부터는 아직 어린 외아들이 늘 곁을 지키며 대변인 역할을 해 주어야 했다. 만신창이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파가니니는 요양을 위해 들른 니스에서 꼬박 7개월 동안 앓아누웠다.


그렇게 베를리오즈와 만날 무렵부터 파가니니는 건강이 악화돼서 연주 활동이 뜸해졌으며 1840년 5월 인후 결핵으로, 지중해 연안의 도시 니스에서 14세 된 외아들 아킬레 파가니니가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58세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에게 유일한 혈육으로 임종을 지켰던 아들은, 젊은 시절 문란하게(?) 살던 그가 소프라노 가수인 안토니아 비앙키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킬레였다. 파가니니는 늘그막에 아킬레를 데려와 극진히 아껴주었고 10살이 갓 넘긴 아들에게 마음껏 살라면서 좀 더 너에게 잘 대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자주 말해줬다고 한다.


아들을 맡으면서 막장 인생을 좀 자제해서인지 제법 많은 재산을 남기기도 했다. 사망 당시 아들이 어린 14살이었으니 아들을 맡아줄 사람이나 재산 상속 등 모든 준비도 철저하게 하여 아들은 파가니니가 죽어서도 큰 고생 없이 잘 자랐고,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파가니니가 외아들인 아킬레를 데려와 키우게 되면서 마음을 잡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일화가 있다. 당시 연주여행에 아킬레를 혼자 놔두지 않고 꼭 데리고 다녔는데 숙소로 호텔이 아닌 펜션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는 어린 아들에게 집처럼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 사랑과 관심 덕분이었는지 아들인 아킬레는 아버지를 무척 존경했고 게다가 파가니니는 아킬레가 귀족이 되게끔 자신의 팬인 귀족들에게 부탁도 많이 했다고 한다. 심지어 아들을 귀족이 되게만 해준다면 그 귀족에게 가서 공연도 싸게 해 준다고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결국 아버지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아킬레는 귀족이 되어 남작 작위와 같이 영지도 하사 받았다. 그러한 끈끈한 부자간의 사랑 때문에, 아킬레는 존경하던 아버지를 생전 원하던 대로 죽으면 고향 성당 무덤에 묻어달라는 분부를 평생 동안 지키려 했다. 자신이 못하면 후손들에게 대를 이어 이 분부를 지키고자 했다고 한다.

역사상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손꼽히는 파가니니지만 음악사적 평가는 의외로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그가 작곡가로서보다는 연주가로 더 뛰어난 실력을 보였고, 악보 출판보다는 즉흥 연주를 더욱 중시했으며, 자신이 만들어낸 연주기법을 비밀로 붙였으며, 자신의 음악을 악보로 남기는데 적극적이지 않았던 데다가 제자도 '시보리' 한 명뿐이었던 탓에 그만이 보여줄 수 있었던 특유의 바이올린 연주 기법을 후대에 전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지적된다.


물론 개성 넘치는 비르투오소(명인)의 시대를 열고 낭만주의를 예고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당대에만 해도 진지한 음악가로서 파가니니의 진면목을 파악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난이도로 유명한 그의 <24개 카프리치오>의 악보를 본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들조차 “이건 도저히 실제 연주가 불가능한 수준이다”라며 입을 모았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이다.


리스트가 복잡한 기교를 요구하는 많은 곡을 남겨서 전공자들을 애먹였던 것처럼 그런 리스트의 비르투오소 성향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파가니니도 당시 기준으로 파격적인 기교를 담아낸 음악들을 남겨 전공자들에게 악명이 자자하다.

 

바이올린 혼자 반주와 연주를 동시에 소화하는 구성의 음악도 선보였으며 음의 이동도 상상을 초월하고, 손에 많은 부담을 주는 피치카토, 두 가지 음을 연주해야 하는 걸로도 모자라 3도부터 10도까지 다양한 화음이 곡에 등장한다.


심지어 네 가지 음을 동시에 연주해야 하는 쿼드로플 스톱까지 등장하는데 이런 기교들을 그저 단순히 할 줄 아는 수준이 아니라 곡에 방해가 되지 않게 '잘' 소화해야 한다는 것부터가 연주자의 실력이 엄청나게 높은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서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은 물론 현대 전공자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천재성을 따라잡지 못해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들라크루아가 그린 그의 초상화

신기에 가까웠다는 그의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 영상이나 공연 실황이 녹음되어 있지도 않아 현재로선 알 길이 없지만, 당시 그의 연주를 직접 들었던 이들의 증언과 당시 기사 등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그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막연하게나마 짐작해볼 수 있는데, 당대 다른 연주자들에 비해 그의 연주에 대한 평가는 가히 판타지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빈 공연 직후,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 E장조>에 관해 논평한 어느 신문 기사를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의) 연주를 들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한들, 무감각한 철자와 죽은 단어의 나열, 그저 해독 불능의 상형문자에 불과할 것이다.”


파가니니에게 영향을 받은 작곡가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리스트, 브람스, 망고레 등 여러 유명한 작곡가들이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하고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이 가운데, 1832년 직접 파가니니의 연주를 라이브 공연으로 들어본 리스트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는 기록까지 있는데, 당시에 상황에 대해 회상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수십여 년이 지나도, 난 그때의 여운을 잊지 못한다. 그때, 나는 파가니니 연주를 듣고 눈물이 계속 나왔고 나는 죽어도 저 사람의 연주 실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 누가 저 사람을 바이올린 연주로 앞선단 말이냐!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라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저 사람이 바이올린을 한다면 나는 피아노로서 파가니니가 되겠다!라고 다짐해 피아노로 미치도록 매달려 왔다.


이처럼 수많은 거장들에게 영향을 줬을 뿐만 아니라 듣는 이를 거품 물고 쓰러지게 만들 만한, 기교로만 따지면 바이올린 분야에서 피에트로 로카텔리 이후 참 오랜만에 나타난 희대의 천재였다. 그의 연주는 기교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매력이 있어서 그를 좋지 않게 보던 사람들도 그의 연주를 듣고 난 후에는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엘리자 보나파르트는 그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기절했다고 한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의 현을 두 개만 사용하는 곡을 선보이자, 엘리자는 “그럼 하나로만 연주할 수도 있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영감을 얻은 파가니니는 정말로 G 현 하나로만 연주하는 곡을 만들었는데, 그의 평생을 따라다닌 괴소문이 바로 거기서 비롯되었다. 즉, 파가니니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G현은 젊은 시절 그가 목 졸라 살해한 애인의 창자를 꼬아 만든 줄이라는 소문이었다.


그의 신기에 가까운 실력 때문에 퍼진 괴소문은 끝이 없었다. 파가니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탁월한 실력을 얻었으며, 바이올린 활을 움직이는 것은 그가 아니라 사탄이라는 루머가 마치 사실처럼 퍼져나갔다. 이런 소문이 어찌나 파다했는지 교회를 중심으로 파가니니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공연 때마다 관객들은 혹시 무대 어느 한 구석에 정말 악마가 숨어 있는지 보려고 눈을 크게 떴으며, 파가니니가 지나갈 때마다 정말 악마 특유의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걷는지 보려고 시선을 집중했다. 소설가 스탕달과 작곡가 리스트도 이런 소문을 마치 사실인 양 언급했고, 시인 하이네는 공연 중에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이 감겨 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고 단언했다.


심지어 관객들이 집단으로 히스테리를 일으킨 적도 있다고 하니 파가니니가 말년에 루머에 시달린 데에 기교도 기교지만 이 점이 크게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오죽하면 그가 연주하면 밤에만 나타나야 할 유령들도 그가 연주만 하면 나와 감탄하고 춤추거나 울었다는 이야기도 나왔고, 심지어 악마도 감격해 울거나 너무나도 푹 빠져 춤추었다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였다.


평생 헛소문에 시달리며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오명을 얻은 파가니니였기 때문이었을까? 죽음조차도 그에게 곧바로 안식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생전의 악평 때문에 사후에는 더욱 혹독한 루머로 인해 매몰찬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망 당일, 그러니까 1840년 5월 27일부터 시작된 그의 사후 수난은 무려 수십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모두가 듣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증언을 파가니니에게서 억지로 끌어낸 카파렐리 사제는 니스의 주교를 찾아가 자신이 들은 사실을 전했고, 교회 측에서는 곧바로 이 유명한 음악가에게 조의를 표하기 위해 치던 조종을 중도에 모두 멈추도록 지시했다.

영화<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중에서

사실 소문이 퍼진 그가 눈을 감던 날의 진실은 이러했다.


그의 경이적인 연주 실력 때문에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대가로 얻은 것'이라는 소문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퍼져있는 상황에서 파가니니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입장이었다. 그즈음 카파렐리라는 사제가 그를 찾아와 곧 지옥으로 향할 죄인에게 마지막으로 영혼이 구제될 기회를 제공하겠다며 그를 찾아온다.


인후 결핵을 앓고 있어 침대에 누워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던 그에게 사제가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당신의 바이올린에는 어떤 비밀이 있기에 그토록 놀라운 선율을 내는 것이오?”


죽음의 고통에 시달리던 음악가는 그저 손짓만 했다. 아무 대답도 하기 싫으니 제발 나가 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물러서기는커녕 한층 더 집요해지는 사제의 질문에 마침내 환자도 짜증이 났던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이렇게 말해버리고 만다.


“그 속에는 악마가 숨어 있소.”


그렇게 속삭인 다음, 그는 갑자기 바이올린 쪽으로 손을 뻗었다. 순간 사제는 비명을 지르며 그 집에서 뛰쳐나갔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악마와 결탁했다는 그 바이올리니스트가 본인의 입으로 그 사실을 시인했다며 떠벌리고 다녔다. 존경받는 직업(?)이던 성직자의 증언이라서 그랬던 탓일까? 그 소문은 그간의 구구한 추측에 대한 확증으로 여겨졌으며, 아무런 검증이나 의심도 없이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갔다.


당시 사실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굳이 죽음을 앞두고 파가니니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마도 그의 생애를 통해 보였던 그의 개성 넘치는 성향으로 보건대, 더 이상 구구절절 아니라고 부인하고 설명해도 들어주지 않은 이들을 향한 비아냥이었을 확률이 크다는 추측을 해본다.


파가니니는 고향인 제노바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했고, 그의 후원자인 디 체솔레 백작은 긴 여행 동안 부패를 막기 위해 의사를 시켜 그 음악가의 시신을 방부 처리했다. 하지만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의 유해를 받아줄 수 없다는 교회 측의 반대로 시신은 제노바로 가지 못하고, 수년간 타향에 머물러 있었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의 시신을 둘러싸고 갖가지 소문이 무성해지자, 백작은 이 불운한 음악가의 유해를 자기 소유인 어느 작은 섬의 동굴에 숨겨 놓았다.


사후 4년 뒤인 1844년에야 그의 시신은 니스를 떠나 제노바로 돌아갔지만, 역시 교회 측의 반대로 인해 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지하 납골당에만 임시로 안치될 수밖에 없었다. 파가니니의 시신이 영구 거처를 얻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876년의 일이었다.


아들 아킬레가 수없이 청원과 뇌물 공세를 펼친 끝에, 파가니니의 시신은 마침내 지하 납골당에서 나와 교회 묘지에 정식으로 묻힐 수 있었다. 부친의 임종을 지켜보던 14세의 소년은 이미 50세의 중년이 되어 버렸다. 사망한 지 무려 36년이 지난 뒤에야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는 비로소 대지의 품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파가니니는 성실하고 도덕적으로 존경받을만한 음악가는 아니었다. 말년에는 도박에 손을 댔다가 빚을 져서 가지고 있던 바이올린을 처분해야만 하는 상황에까지 처했었는데 한 사람이 파가니니 이외의 사람이 연주하지 않게 한다는 조건으로 과르네리를 넘겼고, 그 바이올린은 실제로, 파가니니의 '내 바이올린, 내 영혼을 이제부터 영원히 제노바에 기증 하노라'라는 유언에 따라 이탈리아 제노바 시청에서 보관 중이다.


하지만 악기는 써 주어야 소리가 유지되기 때문에 Mario Trabucco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정기적으로 연주해 주고 있으며 악기 제작자 등, 여러 관리 위원들이 관리해주고 있다. 또 5년 주기로 10월 12일에 Premio Paganini라는 콩쿠르가 열리는데 이 콩쿠르 우승자에게 여러 부상, 또 녹음 기회와 함께 과르네리 캐논으로 연주를 할 수 있는 특권을 준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파가니니는 몇 개의 악보도 남긴 클래식 기타 연주자이기도 했다. 기타를 공식적으로 남들 앞에서 연주한 적은 없었는데, 바이올린처럼 압도적인 연주를 보여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그는 다섯 살에 바이올린을 잡았을 때부터 천재성을 드러냈었다. 거기에 더해 그의 아버지의 살인적인 레슨과 지도방식으로 인해 이미 10대에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수준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일찌감치 자신의 출중한 능력으로 얻은 재능에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수많은 여성편력을 보였고 그로 인해 매독에 걸려 평생을 건강문제로 시달려야만 했다. 엄청난 수입이 있었지만 도박에 빠져 그 재산을 탕진하고 매번 맡빠진 독에 물 붓는 식의 연주생활이 반복될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 끝에 얻은 아들을 자신의 곁으로 데려오게 되면서 그는 정신을 차리게 된다. 그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오명(?)을 얻게 된 것도 그것이 오명이 아닌 자신의 마케팅 전략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 당시에는 기교가 만만찮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워낙 많아서 크게 두각을 나타낼 수 없자 그가 <파우스트>를 보고 악마의 콘셉트를 마케팅의 일환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미 주제페 타르티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 기교를 얻었다는 소문이 당시에 퍼졌던 걸 보면 그런 식의 스토리텔링을 통한 마케팅이 제법 유행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소문에 어울리는 인간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정도의 탁월한 실력을 갖춰야만 가능한 것이니, 그가 출중한 연주 능력에 비해 인성과 행적이 엉망인 예술가였다는 점에서 ‘악마의 재능’이란 꼬리표가 아주 유효하게 맞아떨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젊은 날들을 그렇게 방탕하게 지낼 때는 그런 소문이 없다가, 정작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마음을 잡은 즈음부터 악마에게서 재능을 얻은 것이라는 소문이 퍼진 것은 타이밍이 절묘하다. 그는 방탕한 생활을 접고 아들을 데리고 연주여행을 다니면서 자신의 건강상태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지 아들의 미래를 위한 경제적 배려를 충분히 해두기 시작한다.


우리는 젊은 시절 자신의 피나는 노력과 탁월한 재능으로 반짝 빛났다가 방탕함과 부도덕한 행실로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는 숱한 예술가들을 보아온 바 있다. 예술가뿐만 아니다. 정치가가 그러하고, 교육자가 그러하며, 사업하는 사람들은 발에 채일 정도로 부지기수이다. 어려서부터 혹은 젊어서부터 부단한 노력과 고생을 하여 정점에 오르지만, 결국 그것을 겸손하게 지키고 더 발전시키고 자신을 조절하지 못한 채 무너져버리는 경우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의 리즈시절을 인정받지 못하고 비아냥을 받을 뿐이다.


오히려 처음엔 그리 주목받지 못했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무던히 노력하여 뒤늦게 꽃을 피우고 인정을 받아 그간의 고생을 보답받는 이들의 삶이 대중들에게 인정받고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최근에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탁월한 능력을 보이더라도 인성이 안 좋다는 이유로 대중의 외면을 받고 이른바 ‘퇴출’되는 경우도 적잖게 본다.


연예인들이나 예술가들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내가 전설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의 롤러코스터 인생을 당신에게 소개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그를 기억하게 만드는 그 흉악한 소문은 그의 방탕했던 젊음의 그림자였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제 홀아비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아버지로서 그가 마지막 어린 아들에게 남겨줘야 하는 유산이기도 했다. 그가 예순도 되기 전에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던 14살 아들을 눈앞에 두고 눈을 제대로 감을 수야 있었겠는가?

당신이 그의 화려한 연주곡을 들으며 그저 전설로만 알고 화려한 멋진 삶을 살았을 것만 같은 그는, 젊은 날의 방탕함을 후회하고 반성하며 어린아이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며 이것저것 배려를 하는 시간을 보냈다.


흔히들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한다. 맞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자신이 감내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신이 지금 당신의 인생이 꼬였다고 생각하거나 당신만 실패에 허덕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봐라. 속 시끄럽지 않은 사람이 없고, 고민이 없는 행복하기만 한 가정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고 행복을 찾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의 차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 원인 자신에게 있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고쳐나가는가 그렇지 못한가이다. 그 작지만 중요한 차이가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다른 사람에게 하소연하기 전에 다신 스스로에게 물어봐라. 당신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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