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Apr 12. 2022

몸이 안 좋아 2년이나 침대생활을 하고 연일 실패했지만

자기 꿈을 포기하지 않고 ‘로켓 공학의 아버지’로 인정받다.

207번째 대가의 이야기.


188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우스터 시에서 태어났다. 신체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동생이 있었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 그 역시 몸이 허약해 감기와 기관지염을 달고 살았다. 그래서 어린 시절 침대에 누워 공상을 하는 시간이 많았다. 심지어는 고등학교를 들어가기 직전 2년 동안이나 병상에 누워 꼼짝도 못 하며 지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공상을 현실로 만들고 싶어 했다. 아버지가 침대에 누워만 있던 그를 딱하게 여겨 사다 준 허버트 조지 웰스의 과학소설 <우주 전쟁>을 읽으며 그는 자신의 꿈을 찾게 된다. 그의 꿈은 자연스럽게 우주를 날고 싶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실제로도 그는 과학 실험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는 비행에 매료되어 연이나 기구로 실험을 하기도 했다. 건강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2년 늦게 들어간 고등학교를 1904년에 수석으로 졸업했고 덕분에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했다. 그가 졸업식 답사에서 했던 이야기는 이미 그가 미래에 이룰 그의 꿈을 향해 있었다.


“불가능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어제의 꿈은 오늘의 희망이며 내일의 현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물리학자, 로켓 개발자이자 ‘현대 로켓 공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로버트 H. 고다드(Robert Hutchings Goddard)의 이야기이다.


그는 1914∼1916년 로켓 비행 기초이론을 세우고 조그마한 고체연료 로켓으로 실험을 하였으며, 1926년 그의 첫 액체연료 로켓을 발사하였다. 로켓을 무기가 아닌 우주에 관한 인류의 지식을 넓히는 수단으로 사용해야 한 것으로 유명하다. 현대 로켓 과학의 시대는 그의 연구에서 모두 출발하게 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더드는 대학에서 공학과 물리학을 공부했다. 그 시절 그는 자이로스코프를 써서 비행기 안정성을 향상시키는 방안에 대한 글을 써서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지에 투고하기도 했다. 박사학위를 받고 프린스턴 대학의 특별연구원이 된 그는 진공관 개발 연구를 하는 틈틈이,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로켓의 비행과 관련된 수학적 문제들, 즉 로켓과 추진제의 무게와 분출되는 가스 속도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몰두했다. 1916년 고더드는 클라크 대학의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도 자신의 교수 연봉 1000달러 등 사재를 써가며 실험과 연구를 계속해나갔다. 그는 모든 운동에는 작용과 반작용이 있다는 뉴턴의 법칙을 이용하면 로켓을 진공에서도 날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로켓의 노즐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분사 가스의 힘은 마치 총구멍에서 빠져나가는 탄환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로켓 속의 화약이나 추진제가 연소하면 로켓은 탄환이 총구멍을 빠져나가는 것과 똑같은 힘으로 날아간다. 뒤를 향해서 뿜어나가는 가스가 로켓을 앞으로 전진시키는 추력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 공간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문제 될 리 없지 않은가?”


1914년에는 스미스소니언 협회의 도움으로 로켓 모터의 개발에 착수했고, 1916년에는 우선 고체 추진제를 사용한 실험기를 제작해 비행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엔진 속의 고압력에 견딜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두꺼운 재료를 사용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기체가 너무 무거워서 기대했던 만큼의 성능을 내지는 못하였다.

1917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군에 지원했다. 그가 한 일은 로켓을 군사적인 용도로 사용할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연구는 그럭저럭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결과가 나올 무렵 종전이 되면서 중단되었으며 모두 취소되었다. 


이때의 연구 결과는 훗날 바주카와 무반동총의 추진체 기술로 응용되어 모든 현대적인 대전차 로켓의 기반이 되었다. 1919년에는 달 비행의 가능성에 대해서 집필한 <극한 고도에 도달하는 방법>이라는 논문을 스미스소니언 협회를 통해 발표했다.


제트 추진을 이용하면 지구의 중력권을 벗어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속도인 이탈 속도를 얻을 수 있다는 이론이 담긴 이 논문에 미국 언론은 의외의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기사의 헤드라인 제목을 ‘현대의 쥘 베른, 달로 가는 로켓 발명’이나 ‘새로운 로켓으로 달 여행을 꿈꾸다’라고 뽑은 신문들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현실적인 구현화를 하기까지에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가장 먼저 자신의 구상을 현실로 만드는데 필요한 로켓 제작 기술을 개발해야 했다. 그리고 로켓을 빠른 속도로 추진시켜 줄 연료도 문제였다. 처음 그가 사용한 것은 고체연료였다. 고체연료는 단순하고 비용도 적게 든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실험은 늘 실패했다. 더 이상의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1920년부터 그는 클라크 대학, 미국 해군 등의 지원을 받으며 고체연료 대신 연소 조절이 쉽고 열효율이 높은 액체연료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물론 액체연료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러시아인 치올콥스키와 루마니아계 독일인 헤르만 오베르트 역시 액체연료를 이용하는 로켓을 연구하고 있었다. 


고더드는 연료 탱크 두 개를 만들어 하나에는 가솔린을, 그리고 다른 하나에는 액체 산소를 채운 다음 두 물질을 혼합시켜 점화시키기로 했다. 몇 번의 예비 실험도 마친 상태였다.


1920년 1월 <뉴욕타임스(NYT)>의 사설에서는 다음과 같은 논설위원의 글이 올라오며 그의 실패에 치욕적인 조롱을 가했다.


‘고등학생 수준의 기초 지식도 갖추지 못한 과학자.’
1926년 3월16일, 매사추세츠 주 오번 인근 한 농장 들판에 설치된 발사대에 첫 액체연료 로켓을 설치한 고더드

절치부심 그는 다시 6년을 준비하게 된다.


1926년 3월 16일, 모든 준비가 끝났다. 고더드는 매사추세츠 주 오번 인근 한 농장 들판에 설치된 발사대에 첫 액체연료 로켓을 설치했다. 발사대의 골격은 중간 크기의 수도관으로 만든 아주 간단한 구조물이었다. 드디어 고더드의 조교가 로켓의 점화기에 불을 붙이고 몸을 피했다. 


잠시 후, 로켓은 하늘로 힘차게 날아올랐다. 로켓은 고작 높이 41피트(12.5미터)를 날아올라 2.5초 동안 184피트(56미터)를 비행했다. 노즐의 하단부도 타버렸다. 어찌 보면 실망스러운 결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1903년 라이트 형제의 첫 비행기가 난 거리가 고작 36미터였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충분히 고무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인 결과였다. 게다가 바닥에 떨어진 로켓은 얼음과 눈 속에 처박혀서도 ‘아주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고더드와 조수들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어쨌든 그는 역사상 최초로 액체연료 로켓 발사에 성공하였다. 넬이란 별명으로 불린 이 로켓의 비행 장면은 고더드의 아내가 카메라에 담을 계획이었지만, 필름이 떨어지는 바람에 사진은 남기지 못했다.

그 후로도 연구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가 하는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지 못했다. 로켓 발사 실험 중 주민들의 항의로 경찰이 출동해 실험 중단을 명령하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소수나마 있었다. 그는 대서양 횡단에 성공한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 구겐하임 재단 등의 지원을 받아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뉴멕시코 주 로즈웰로 가 새로운 연소 방법과 정밀한 유도 장치를 고안해가면서 실험을 계속했다. 그리고 실험이 거듭될수록 로켓의 비행 거리와 높이는 높아져 갔다. 1935년 5월 31일에는 음속보다 빠른 속도로 로켓을 쏘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고더드의 로켓 연구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그 사이 독일은 엄청난 위력을 지닌 V-2 로켓을 개발해 실전에 투입했다.


위의 사진에서 알 수 있듯, 초기 그의 로켓은 작고 기본적인 구조밖에 없었지만 로켓이 56미터밖에 날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로켓의 구조에 있었다. 현재의 로켓과는 달리 위의 1호 로켓은 노즐이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로켓이 직진으로 쏴 올릴 방법이 없었기에 무거운 연료 탱크를 아래에 둬서 무게추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노즐에서 나오는 추진력이 연료통에 방해를 받아서 추력이 급감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추력과 무게중심, 그리고 수직으로 날아갈 수 있도록 균형을 잡는 일은 고다드의 일생의 두고두고 큰 과제로 남았고 액체연료-액체산소-노즐의 순서로 무게중심을 잡는 데는 성공했지만 수직으로 날아가게 하는 문제는 이후 대서양을 횡단해서 일약 대스타가 된 찰스 린드버그가 후원하고 조언을 주고받고 나서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이미 그때쯤에는 2차 대전으로 고다드의 연구는 관심 밖이었고 이러한 고다드의 연구를 고스란히 흡수하여 탄생한 로켓이 아이러니하게도 적국 나치의 군사용 미사일인 V2 로켓이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고다드의 연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해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시 미국은 로켓의 가치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했고 일부 언론은 이를 두고 고다드를 비방하기도 하였다. 거기다 고다드 자신부터가 상당히 내성적이고 작업도 대중에게 공개하는 대신 동료들도 모를 정도로 혼자서 묵묵히 진행하는 스타일이었다. 과학자로서의 옹고집만이 있을 뿐 언론을 활용하는 쇼맨십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은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그나마 소수의 연구자들은 고다드의 연구가 가진 가치를 이해하였지만 결국은 소수였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고다드를 생전에 그를 무시했던 언론은 아폴로 11호 이후에 뒤늦게나마 해당 기사를 정정하지만 사과도 아닌 데다 이미 그는 죽은 이후였다. 결국 미국은 독일의 패전 이후 영입한 베르너 폰 브라운이 중심이 되어서 그제서야 로켓을 개발하게 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고다드의 연구에 가장 큰 혜택을 입은 것은 미국의 적국인 나치 독일과 베르너 폰 브라운이었다. 암 투병 중에도 수거된 V2를 면밀히 살핀 고다드는 V2에 자신이 고안한 설계 방식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베르너 폰 브라운도 고다드의 실험이 자신이 V2를 개발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단축시켜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소련의 스푸트니크 위성 발사에 사용된 로켓도 역시 폰 브라운의 V2를 기반으로 제작되었으니 미국 연구자가 고안한 로켓을 잘 활용한 것은 자국의 보물이 가진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던 미국의 적국들이었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더드는 1945년 8월 볼티모어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3세였다. 아쉽게도 그는 자신이 로켓이 되어 지구 대기권을 벗어나 우주로 날아감으로써 오랜 꿈이 실현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의 콘스탄틴 치올콥스키이나 독일의 베르너 폰 브라운과 함께 현대 로켓의 선구자란 평가를 받게 된다. 그는 다단로켓을 포함해 모두 214개의 특허를 획득했다. 그중 83개는 생전에 획득한 것이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아폴로 11호(오른쪽)가 성공적으로 발사된 다음 날인 1969년 7월 17일, 49년 전 로버트 고더드를 폄하한 사설(맨 위)에 대해 정정기사

1966년, 미국 정부는 특허를 침해한 데 대한 보상으로 고더드의 아내에게 100만 달러를 지급했다. 그리고 1920년 고등학생도 알만한 내용으로 지식조차 없다며 고더드에게 지독한 혹평을 가했던 <뉴욕 타임스>는 닐 암스트롱이 달에 발을 딛기 사흘 전인 1969년 7월 17일, 고더드에게 사과하는 글을 다음과 같이 게재하였다.


“좀 더 진전된 탐구와 실험 결과 17세기 아이작 뉴턴의 발견이 확실히 증명되었으며, 이제 대기 중에서와 마찬가지로 진공에서도 로켓이 작동한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확립되었다. 뉴욕 타임스는 실수를 후회한다.”


앞서 간단하게 설명하긴 했지만, 그는 수많은 실험을 그것도 자기 사비를 털어가며 아무런 지원도 없이 시작했다. 로켓 실험을 할 때마다 엄청나게 큰 소리가 발생해 소방서에 신고를 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던 <뉴욕타임스>에서는 ‘달을 향해 로켓을 쏘았으나 실패하여 공중에서 폭발했다.’라는 식의 비아냥거리는 가짜 뉴스에 준하는 기사까지 내면서 그를 비아냥거렸다. 결국 그 지역 안에서 고더드의 로켓 실험은 공식적으로 금지당하고 만다.


하지만 이 작은 실패는 가짜 뉴스가 화제를 불러오면서 정말로 관심 있는 이들의 연구자금을 받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그는 새로운 실험장을 그 연구자금으로 만들어 연구를 본격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실패라고 좌절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실패는 생각지도 못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마케팅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고더드는 언론 플레이를 하지 못했지만, 그 해프닝들은 결국 그의 연구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알아봐 주는 이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결과가 되었고 그가 6년 동안 연구를 준비하여 제대로 된 액체연료 로켓 실험을 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해준 것이다. 


물론 어떤 위인전이나 어떤 자료에서도 이런 이야기들은 나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이나 기자들이 기사에 쓰는 것들은 죄다 힘겨운 실패를 딛고 일어선 대단한 성공이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어렵게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다는 현실적이면서도 중요한 이야기들은 늘 기록에 빠져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사례만 보더라도 당신은 당신의 실패를 혹은 당신의 고난을 그저 안 좋은 것만으로 여겨 좌절하고 힘겨워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무언가에 정진하다 보면 뜻이 있는 곳에 어떤 식으로든 길은 열리기 마련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라 하겠다.


자신이 꿈만 좇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그것이 아무도 이루지 못한 미래에 이룰 꿈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아무도 미리 이뤄놓아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그 처음을 해내야 선례라는 것이 생긴다. 그 처음 테이프를 끊는 사람의 과정은 결코 그리 녹녹하지 않다. 힘들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그것을 이뤄냈던 고더드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도 조국이던 미국에 인정을 받지 못했다. 아니 대놓고 비아냥거림을 당할 뿐이었다. 대단한 연구결과를 가지지도 않은 이들이 연구자금을 턱턱 받아내고 성과를 내지 못하고 뭉개는 현실이 당시에나 지금에나 만연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런 오지랖도 없어서 내내 힘겨워하고 실험 한 번 하는 것에서도 눈치를 보고 힘겨운 한 걸음 한 걸음을 떼야만 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연구결과가 오히려 독일 쪽에서 원용된 것을 보면서도 아무런 손을 쓸 수 없었고 그 기술들이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에서야 로켓 기술의 신기술을 열었다는 것을 보지도 못했다. 늘 말했지만, 살아 있을 때 누리지 못하는 행복은 죽어서 아무리 내 작품이 비싸게 팔리고 내 가치가 높아져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입장에서 그러한 것이고, 현대 로켓 기술은 그의 기술을 자양분으로 하여 결국 저 콧대 높은 <뉴욕타임스>의 사과를 받아낼 정도로 훌륭하게 꽃 피웠다.


당신의 노력이 당신이 죽고 난 뒤 몇 년이나 있다가 꽃을 피울 것이라는 앞선 고민은 할 필요도 없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당신의 신념이 쉽게 무너져버리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이 수많은 실패들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종국에 마지막 한 번의 성공으로 앞의 수많은 실패가 실패가 아닌 시행착오로 변해버린다는 점만 잊지 않고 있으면 된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당신의 꿈, 그것을 위한 당신의 노력은 결코 모래성처럼 무너져 파도 속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노력은 결코 당신은 배신하지 않고 그대로 쌓인다. 당신이 마지막의 그 한 번의 성공 앞에서 포기하는 순간 당신이 쌓아놓은 그 노력과 공로는 다른 후발 주자의 자양분으로 고스란히 옮겨진다. 당신이 바로 그 앞에서 포기하여 당신의 공로를 다른 사람의 앞에 가져다주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되길 응원한다.

당신은 지금까지 잘해왔다. 그러니 조금만 더 참고 견뎌 앞으로 나아가라.


다 왔다는 것을 하늘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아는데, 당신만 모르고 있을 수 있다.


이제까지의 당신의 노력도 존중하지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당신의 그 신념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격한 응원을 보낸다.

매거진의 이전글 매독에 걸려 고생하다가 인후 결핵으로 죽음을 맞았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