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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13. 2022

이름 없는 셰르파라고 잊힐 수 있는 인생이었지만,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양보할 수 있는 진정한 산악인으로 인정받다.

208번째 대가의 이야기.


1914년, 셰르파족이 초모룽마라고 부르는 에베레스트 산 인근 네팔 쿰부(Khumbu)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출생에 관해 네팔의 쿰부에서 셰르파족의 일원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티베트의 카르타 계곡에서 티베트인으로 태어났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키우던 야크들이 병으로 죽어 가족의 생계가 위협받게 되자 그의 가족은 네팔의 타멜로 옮겨 한 셰르파 집안에서 하인 생활을 하게 된다.


출생일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도 없어, 정확한 생일도 몰랐다. 다만, 그가 이후 부모님이 챙겨주었다는 생일에 대해 기억하는 날씨와 곡물들로 미루어 보아 5월 말쯤으로 여겨진다. 후에 그는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한 5월 29일을 생일로 스스로 정했다.


그의 본명은 ‘남걀 왕디’였으나, 어린 시절 융포사(絨布寺)의 창설자인 응아왕 텐진 노르부(Ngawang Tenzin Norbu)의 충고에 따라 이름을 바꾸었다. 그렇게 바꾼 '텐징 노르가이'라는 이름은 '부유하고 행복한 신도'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아버지는 야크 목동이었고, 형제 대부분은 유아시절에 사망하여, 그는 13명의 형제 중에서 살아남은 열한 번째 자식이었다.


그는 12살 때 가출하여 5,806m 높이의 낭파라 고개를 넘어 자신이 태어난 카르타로 갔었지만, 그곳의 사원에서 2주간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와 다시 남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해야 했다. 그리고 1930년경 마을 친구들과 함께 다시 한번 가출하여 인도 다르질링으로 갔다. 그곳에서 1년을 머문 뒤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다시 몇 개월 뒤 다르질링으로 떠나, 19세의 나이에 인도 서벵골 주 다르질링의 투 송 부스티(Too Song Bhusti)에 위치한 셰르파족 집단에 정착하였다.

네팔에서 태어난 네팔, 인도의 산악인이자, 수필가, 여행 안내인으로, 1953년에 뉴질랜드의 산악인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함께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의 등정에 성공한 것으로 유명한 이른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셰르파(네팔의 산악 인도인)였던 톈징 노르가이(तेन्जिङ नोर्गे शेर्प; Tenzing Norgay), 본명 남걀 왕디(Namgyal Wangdi)의 이야기이다.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실제 에베레스트 등반 이후에 정상에 오른 사진이 영국인 힐러리가 아닌 텐징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이 의아해하였다. 분명히 같이 올랐음에도 누가 가장 먼저 정상을 밟았느냐는 취재진들의 집요한 질문에 힐러리는 물론 텐징 본인도 약속한 듯 함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텐징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힐러리의 겸손한 태도가 이 사건으로 많이 회자되기도 하였다.


네팔인으로 워낙 유명했지만 말년에는 인도에서 살면서 사업도 하고 가르쳤기에 인도에서도 국적을 내줘 네팔-인도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텐징은 1932년부터 본격적으로 등반대에 셰르파로 참여하고자 했지만, 연줄이나 경험마저 없어 그것도 생각처럼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1935년 에릭 십튼이 이끄는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여할 수 있었고, 해발 7천 미터 지점까지 올랐다. 십튼은 셰르파 2명을 추가 모집할 때 찾아온 20명의 셰르파들 가운데 텐징을 선발한 이유를 이렇게 회고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경험 많은 이들을 선발했지만, 웃음이 매력적인 텐징 노르가이라는 이름의 청년에 왠지 끌렸다.”


십튼의 판단으로 텐징은 정식 셰르파로 데뷔하게 된다. 이후 여러 차례의 등반을 통해 텐징은 많은 등반가들과 원정대 사이에서 성실하고 인간성 좋은 셰르파로 명성을 쌓아갔다.


1930년대 무렵에, 텐징은 영국 원정대에 고지대 운반인으로서 참여하여 북부 티베트 쪽에서 에베레스트 산 등정을 세 차례 시도하였다.


텐징은 또한 인도 아대륙의 다양한 지역의 등정에 참가하였다. 1940년대 초반엔 현재의 파키스탄 지역에 살았는데, 등정 중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 난다 데비 이스트(Sunanda Devi)가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1947년에 텐징은 에베레스트 등정에 참가하였으나 실패했다. 텐징 노르가이는 캐나다인 얼 덴먼(Earl Denman), 셰르파 앤지 다와(Ange Dawa)와 함께 에베레스트 산 등정을 위해 티베트 지역에 불법으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등정은 에베레스트 산의 6,700m 지점에서 불어 온 강한 폭풍 때문에 실패하였다. 덴먼은 등정을 포기하였고 세 명 모두 안전하게 귀환하였다.


1952년 5월 텐징은 스위스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여해 레이몽 랑베르(Raymond Lambert)가 이끄는 스위스 원정대와 함께 정상 등반조로 나서 정상 3백 미터 아래까지 진출했지만, 체력이 바닥난 끝에 8,595m 지점에서 되돌아서야 했다. 1953년의 9차 영국 원정대가 이러한 경험을 갖춘 텐징에 큰 기대를 거는 것은 당연했다. 당시 영국 원정대 대원 숫자는 13명. 서양에서 가장 불길하게 여기는 숫자였다. 대장 헌트는 텐징을 셰르파 우두머리이자 대원으로 임명함으로써, 불길한 숫자 13을 피했다.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 8,848미터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영국 측량국장 조지 에베레스트에서 따온 이름), 현지어로 초모룽마(티베트) 또는 사가르마타(네팔) 정상에 세계 최초로 두 사람이 올라서게 된다. 뉴질랜드의 양봉가 출신 산악인이던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그 주인공이었다.


존 헌트 대령이 이끄는 영국 9차 원정대 소속 2차 정상 등반조였다. 359명의 셰르파들이 10톤 이상의 장비와 식량을 운반하는 대규모 원정대였다. ‘1차 정상 등반조는 영국인이어야 하며,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 이전에 등반에 성공해야 한다’는 명령이 그들에게 떨어졌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텐징 노르가이

뉴질랜드 출신 힐러리는 1차 등반조에 낄 수 없었다. 그러나 1차 정상 등반조는 실패했다. 힐러리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에반스와 보딜런이 해낸 일에(에베레스트 남봉 도착) 감탄했지만 솔직히 한편으론 안도감을 느꼈다. 그들은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할 일이 남아 있었다.”


1차 등반조의 실패 경험은 '마지막 캠프를 가능한 한 높은 곳에 만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어 그 경험이 2차 등반조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 정상 등반조 편성 때 텐징은 셰르파 한 명이 끼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헌트 대장은 힐러리와 텐징으로 2차 등반조를 편성했다.


이들이 하산한 후 사람들의 관심은 둘 중 누가 먼저 정상을 밟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헌트는 “그들이 팀으로서 함께 정상에 도착했다”라고 말했고 힐러리와 텐징도 팀을 강조했지만 사람들은 그런 대답에 만족할 줄 몰랐다. 텐징은 사람들이 제기하는 어떤 의혹에 대해서도 무시하였으나, 힐러리가 정상에 가장 먼저 발을 디뎠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에베레스트 산에 두 번째로 올랐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면, 나는 앞으로 부끄러운 마음으로 살 것이다.”

그러한 일화 끝에 힐러리는 나중에 그날의 진실을 이렇게 밝혔다.


오전 11시쯤 정상 바로 밑에 먼저 도착한 것은 텐징이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최초 등정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텐징은 지쳐서 뒤에 처진 힐러리가 올 때까지 정상 바로 아래서 30분을 기다렸다. 그리고 힐러리가 먼저 정상을 밟았다. 잠시 숨을 고른 뒤 악수를 청하는 힐러리와 힐러리의 어깨를 감싼 채 등을 두드려주는 텐징은 그의 딸이 준 색연필을 정상에 묻었다.


정상에 15분간 머물며 찍은 사진에는 텐징만 등장한다. 텐징에 대한 감사와 존경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설도 있지만, 텐징이 카메라를 작동할 줄 몰랐기 때문이라는 힐러리의 “그곳은 텐징에게 카메라 작동법을 가르쳐주기에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다.”라는 설명이 제법 설득력을 갖는다. 피켈에 영국, 네팔, 인도, 그리고 UN 깃발을 단 텐징의 사진은 세계 등반 역사의 기념비적 사진이 되었다.

텐징은 당시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그것은 난생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그토록 거칠고, 경이롭고, 장엄한 광경을 다시는 못 볼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내가 느낀 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나는 산을 사랑했고, 에베레스트를 사랑했다. 평생을 기다렸던 위대한 순간에 나의 산은 바위와 얼음뿐인 생명 없는 대상이 아니라, 따뜻하고 친근하며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텐징에게 그것은 무려 7번째 등정 시도였다. 텐징은 인도와 네팔에서 찬사를 받았으며, 그는 부처나 시바의 화신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새로운 여왕의 즉위와 함께 세계 최고봉 등정이라는 경사를 맞이한 영국인들은 열광했다. 윈스턴 처칠이 전보를 보내 축하했고 힐러리와 헌트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텐징은 조지 훈장을 받았다.

이를 두고 인종차별적인 불공평한 처사라는 비난이 이어지기도 했지만, 텐징은 세계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각국 언론의 취재 경쟁이 벌어진 것은 물론 네팔, 티베트, 인도 등 텐징의 국적을 둘러싼 갑론을박마저 이어졌다. 네팔 사람들의 텐징에 대한 열광은 대단했다. 텐징은 네팔의 자존심을 세운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카퍼레이드에 참가하고 네팔 국왕의 환대를 받았다. 이런 급작스런 변화가 텐징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많은 것들이 정치와 국적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산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곳에서 생명은 너무 현실적이어서, 죽음도 너무나 가깝다. 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나중에는 정치와 논쟁과 나쁜 감정이 움트기 시작한다. 에베레스트에서 하산하자마자 내게 닥친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내 인생의 38년 동안 내 국적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도인이건, 네팔인이건, 티베트인이건 그것이 대체 무슨 상관인가?”


6월 말 영국으로 돌아온 원정대는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힐러리와 원정대장 존 헌트를 기사(Knighthood)에 서임하였고, 텐징에게는 조지 메달(George Medal)을 수여했다.

그리고 다시 텐징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1952년 원정을 함께 했던 랑베르와 만나 융프라우를 올랐다. 스위스 등산 재단 측 인사들이 텐징에게 인도 다르질링에 등반학교를 세우자는 제안을 했고, 인도 수상 네루가 학교 설립을 적극적으로 도와 1954년 11월 4일에 히말라야 등반학교가 설립됐다.


텐징은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 이후 다시 에베레스트에 오르지는 않았고 다르질링에서 히말라야 등산 학교의 현장훈련 감독관을 지냈으며, 간혹 강연회나 행사에 초청되거나 인터뷰에 응하고 방송에도 출연했다. 만년에는 인도 정부의 지원이 줄어들어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우울증에도 시달렸으며 폐렴으로 고통받기도 했다.


1978년, 그는 히말라야 트레킹을 위한 텐징 노르가이 탐험회사(Tenzing Norgay Adventures)를 설립하였다. 이 탐험 회사는 2003년부터 텐징의 아들이자 1996년에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등정한 잠링 텐징 노르가이(Jamling Tenzing Norgay)에 의해 운영 중이다. 1986년 ‘설산(雪山)의 호랑이’로 불리던 그는 뇌출혈로 쓰러져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텐징은 읽고 쓰는 법을 배운 적이 없으나, 몇 가지 언어를 말할 수 있었다. 그의 모국어는 셰르파어였으나 네팔어에 능통했고, 그 밖에도 영어, 힌디어, 티베트어와 인도 아대륙에서 쓰이는 몇몇 언어에 대한 실용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생사를 함께 하며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았던 힐러리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나는 나 자신을 한 번도 영웅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텐징은 예외였다. 그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그는 미천하게 출발해서 세상의 정상에 올랐다.”

먹고살기 힘들어서 형제들은 대부분 죽어나가는 열악한 환경에서, 도저히 그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말이 가출이지 도망을 두 번도 넘게 쳤던 소년은 다시 집으로 갈 곳이 없어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당연히 제대로 학교를 다닐 수도 없었으니 쓰고 읽는 것을 배우지도 못했다.


하지만 당시 주변의 분위기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기에 부끄러워할 겨를(?)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산을 타거나 셰르파 전문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즉, 그는 자신이 직업을 선택할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분위기에 휩쓸려 셰르파가 되었다.


셰르파는 그의 존재 이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면에 등장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네팔에 가서 등정을 해본 전문가들은 셰르파의 존재가 얼마나 필수적인지에 대해 인식한다. 그들이 단순히 길을 안내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전에도 그의 이후에도 셰르파가 주목을 받거나 인정을 받은 사실은 없다. 그렇기에 텐징을 인정하고 존경의 뜻을 표했던 힐러리 경이 빛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삶이 주목받는 주인공의 삶이 아닐 수 있다. 아니 어찌 보면 당신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은 주인공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한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든 영화를 보든 주인공은 한정되어 있다. 누구나 주인공을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주인공을 한다고 해서 그 드라마나 영화가 모두 주목받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한 명 한 명 엑스트라에서 보이지 않는 스탭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삶 역시 존중받아야 할 하나하나의 가장이고 누군가의 사랑이고 누군가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라는 의미이다.

당신이 너무 안간힘을 쓰며 모든 것을 움켜쥐고 주인공이 되겠다고 발버둥 치지 않더라도 당신이 어느 순간 주목받을 순간은 반드시 온다. 특히나 당신이 꾸준한 노력과 부단한 시도를 해왔다면 그 기회는 반드시 올 수밖에 없다. 그저 기다리는 자에게 그런 순간이 오지 않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시도해서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고 연구하고 다시 도전하는 당신에게 위에 올라설 기회가 오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힘들 것이다. 매일같이 그 고산지대에서 살며 익숙한 셰르파였던 텐징마저도 7번째의 시도 끝에 에베레스트를 정복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7번째에 에베레스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긴 바 있다.


“나는 적을 물리치는 병사의 기력이 아니라, 어머니 무릎에 오르는 아이의 사랑을 갖고 매번 산을 찾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말은 에베레스트에 있다.”


산은 대자연의 살아있는 증거물이다. 인간에게 도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산을 오르겠다는 사람에게 방해를 하거나 내치지도 않는다. 그거 산을 오르는 이들이 실패니 성공이니 자신들이 정한 기준으로 그것을 끝까지 올랐는지 오르지 못했는지를 통해 실패와 성공을 나눌 뿐이다. 산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의견을 제시하지도 특별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뜻이다.


당신에게 인생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일 수 있다. 하지만, 부자든 가난한 자든 성공한 자든 실패한 자든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는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누군가에게 그 시간은 노력으로 꽉 차 있을 수 있고, 누군가에게 그 시간은 오만하고 방탕함으로 소진하고 허비하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이뤄내고 하는 꿈을 향해 가는 길은 산을 오르는 일처럼 아주 힘들고 누구도 응원해주지 않으며 지루하고 때로는 위험하지 그지없을 것이다. 어느 순간 발을 한번 잘못 딛는 것만으로도 이제까지 걸어 올라왔던 그 길을 다시 걸어야 할지도 모르고, 뼈가 부러지고 얼음 골짜기의 틈에 빠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죽음을 맞게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산에 오른다. 당신이 산을 등정하는 전문 등산가는 아니지만 당신 역시 인생을 등반하는 등정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왜 당신에게 사느냐고 묻는 것은 산을 오르는 이들에게 왜 산을 오르냐고 묻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당신이 보내는 시간들은 차곡차곡 쌓여 당신의 발밑에 쌓여 당신을 위로 올릴 수도 다시 밑으로 끌어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당신의 등정이, 그리고 정상에 오르겠다는 그 신념과 의지가 당신을 좀 더 단단하고 필요 없는 힘을 뺄 수 있는 경지로 이끌어 줄 것이다.


넘어질 수도 있고, 미끄러질 수도 있다. 하지만 몇 번 그런 일을 겪는다고 해서 다 접고 삐져서 산을 내려오는 사람이 없듯이 인생의 고난이, 실패가 당신이 인생을 끝내거나 인생을 돌이키고 싶을 만한 일은 못된다는 것이다.

당신이 정상에 올라, 영광을 누리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걸어 올라온 그 길을 보며 스스로에게 대견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이기를 바란다. 당신에게는 이미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사랑하는 셰르파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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