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Apr 14. 2022

귀족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훈장을 강탈당하고서도

적군이 존경감을 표할 정도의 카리스마를 가진 장군으로 기억되다.

209번째 대가의 이야기.


1891년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하이덴하임에서, 중산층의 교육자였던 아버지와 다정다감했던 어머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성질이 순하고, 피부가 매우 희어서 백곰이라고 불렸었다. 그의 유년기, 학교의 교장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지만, 성장하면서 장난기가 많아진 아들은 공부에 열성을 보이지 않은 탓에 성적은 나빠져만 갔고, 부자간의 관계는 사춘기에 이르면서 더욱 악화되어만 갔다.


그러던 중 그가 당시 유행하던 비행기와 글라이더에 열광해 항공역학과 수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마침 수학을 좋아하던 아버지와 협력하며 극적으로 관계가 호전되었다. 물론 관계의 호전과는 상관없이 성적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방황하던 사춘기에 글라이더, 비행기, 비행선 등에 빠진 그는 비행선을 제작하는 공장에 기술자로 취직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교육자인 부친은 아들이 그저 기계를 수리하고 제작하는 엔지니어로 사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대신 육군 장교가 될 것을 권유했다. 그렇게 합의를 본 부자간의 합의(?)에 따라 군인을 직업으로 삼기로 한다. 


엔지니어를 지망했던 젊은이답게 그는 처음에는 공병, 그다음에는 포병에 지원했으나, 부친의 추천서 내용이 영 별로였던 점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모두 떨어지고 만다. 결국 마지막인 1910년 당시 18살에 왕실 보병 사관후보생으로 지원하고 마지막으로 겨우 보병으로 군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보병 장교로 임관하기 위해 군사 교육을 받던 중, 그는 언어학을 전공하던 루셰 마리아 몰린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사랑에 빠졌고 결혼했다. 이때 이들이 만난 곳은 당시 독일 제국령이던 단치히였다. 훗날 폴란드 침공 당시 총통 호위를 맡던 그는 침공에 대해 대외적으로는 독일의 영광 회복을, 사적으로는 아내와 만난 곳을 되찾는 기회로 여겼다. 


그런 반면에 아내를 만나기 전 10대 과일장수 ‘발부르가 슈템머’와 잠시 연애를 하면서 얻은 사생아로 ‘게르 트뤼드’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가 거두어 키우긴 했으나, 평생 자신을 삼촌이라 하고 아버지라는 사실을 감췄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독일 국방군 육군의 장군으로 최종 계급은 육군 원수였던, 연합군 사이에서는 ‘사막의 여우(Wüstenfuchs)’라는 별명으로 악명을 떨치며 상대를 공포에 떨게 했던 전투의 귀재, 우리에게는 ‘롬멜 장군’으로 유명한 본명 에르빈 요하네스 오이겐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의 이야기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을 이끌며 연전연승했던 ‘독일의 전쟁 영웅’이었다. 특히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에게는 크나큰 두려움의 대상이자 때로는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다. 전쟁사에 남을 그의 능력과 업적과는 별개로 그는 나치 독일 히틀러의 충성스러운 부하 장군이었다는 이유만으로,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끊어야 했던 비운의 군인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롬멜은 육군 보병 소위로 참전했다. 서부전선에서 저돌적인 지휘로 활약하던 롬멜은 넓적다리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부상투혼을 발휘하며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는다.


1917년 알프스 산맥 위 마타주르 산의 이탈리아군의 요새를 공격한 카포레토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그로 인한 훈장을 받아야 했으나 평민 출신이라는 황당한 이유로 롬멜이 아닌 엉뚱한 귀족 출신 장교에게 수여되었다. 


결국 롬멜은 훗날 다른 마을을 점령하고 나서 프러시아 최고 권위의 푸어 르 메리테 훈장이 부당하게 다른 장교에게 수여됐다는 사실에 대해 진정서를 제출하고 기어코 훈장을 받아낸다. 하지만, 그는 결코 첫 훈장을 빼앗긴 기억을 잊지 못했다. 이 전선에서 귀족 출신 장교들의 부조리와 부패를 겪은 롬멜은 이들에 대한 경멸을 훗날 그대로 폰(von)이 붙은 국방군 수뇌부에 대한 경멸로 이어졌다고 하는 학자들의 분석도 있다.

이후 다른 전투에서 독일 육군 진지를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진지의 병력 대부분이 사망한 상태에 적군에 포위되었음을 알고 후퇴를 감행했고 성공해냈다. 또한 적군에게 일체의 정보를 넘기지 않기 위해 전사자의 시체를 생존자들이 들고 가게 하는 등 이와 비슷한 기타 여러 일화들은 현대에 와서도 군 교육에 사용된다.


또한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롬멜의 보병 전술>이라는 책을 서술하는데, 주요 내용은 적이 우세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철저히 준비를 갖추고 기습적인 맹공을 연속하면 무찌를 수 있다는 실전의 경험이 녹아들어간 내용이었다. 


주로 보병 수비에 대해서는 후퇴 후 적의 전력 분산을 활용해 재역공을 가하는 형식을 강조했으며 이 책은 현재 미국 육군사관학교 추천도서목록에까지 들어가 있으며 보병 교리로 수업에 어느 정도 반영이 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전후 롬멜은 대위 계급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에 잔류, 바이에른 지역에서 경비대대 장교로 복무했다. 그러던 중 공화국이 대공황으로 휘청거리며 사회적 혼란이 일어났다. 나치당의 돌격대와 공산당 행동대원들의 시위가 나날이 격해지고 양측 간의 혹은 타 집단에 대한 폭력 시위가 급격히 증가하자, 공산당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사격하라는 주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물대포로 시위를 진압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휘하 장교들에게 “군은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라며 자신의 신념을 따르라고 명령한다. 이러한 롬멜의 신념은 2차 대전 말기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이 성공하고, 독일 본토가 위협받을 위기에 처하자 화평론자로 변하는 바탕이 된다.


그러다 1933년 히틀러의 집권과 함께 팽창하기 시작한 국방군 내에서 두각을 드러내 포츠담 육군사관학교의 교관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후 롬멜은 히틀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되고, 폴란드 침공 당시 전선을 시찰하는 히틀러를 호위하며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보여 보병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새로 편제 중이던 제7기갑사단의 지휘관으로 부임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롬멜은 기동전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강력한 주장을 하였고, 기계화부대의 운용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했고, 이러한 준비와 노력은 훗날의 전장 속 활약의 밑거름이 된다. 사실 폴란드 침공 초기 때까지만 해도 롬멜은 승전의 가장 큰 기여자는 기갑, 기계화 부대가 아닌 항공 전력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히틀러를 호위하게 되면서 접하게 된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갑 운용에 감명을 받은 것을 계기로 롬멜은 기갑 부대에 더 관심을 두게 된다.


프랑스 침공 때 롬멜은 제7 기갑 사단장으로 복무했다. 침공이 시작되자 롬멜은 전격적으로 프랑스로 진격해 구데리안보다 더 빨리 뫼즈 강을 도하했다. 이때 롬멜의 부대는 제2호, 3호 전차의 최대 속도를 가정한 이동 범위보다 더 멀리 이동하는 등 상식을 뛰어넘는 기동력을 보여 프랑스군에게 ‘귀신 부대’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롬멜은 당시 특유의 밀어붙이기 지휘 패턴을 보여주었는데 뫼즈 강을 도하하기 위해 도하작전, 수송대 편성 등을 직접 나서서 지휘하며 최전선에서 동분서주하고, 결국 한 개 보병대대를 직접 지휘하기 시작해서는, 포탄이 사방에 작렬하는 가운데 7 기갑의 분견 부대는 결국 강을 건넜다.

뫼즈 강을 건넌 롬멜은 ‘옹에’라는 마을로 진격을 시작했는데 진두지휘를 위해 휘하 연대장의 지휘 전차인 3호 지휘 전차를 빼앗아(?) 타고 가다가 대전차포 매복에 걸려 피격되고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기어코 옹에를 손에 넣는 성과를 거둔다.


제7기갑사단은 마침내 벨기에 국경의 연장 마지노선에 도착하는데 집단군 사령부는 이 요새선에 대한 ‘공격 대기’를 명령했지만, 롬멜은 사령부에 자기 참모만 남긴 채 전차 연대를 이끌고 전진하기 시작한다. ‘제한 조건’을 달고 있던 문서가 도착했을 때 롬멜은 이미 전장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진격한 끝에 드디어 그의 부대는 아헨에 도착한다. 이후 프랑스 육군 전차부대와 부딪혀 승리를 거두면서 그 여세를 몰아 쪽의 랑드르시로 돌격, 롬멜이 “항복하라!”고 하자 그곳에 주둔한 프랑스 육군은 독일 돌격대를 대군이라 착각하고 그대로 항복해버리고 만다.


마침내 제7기갑사단은 유류와 탄약 고갈로 랑드르시에서 전진을 멈췄다. 롬멜이 최전선에서 앞만 보고 달려온 거리만 무려 50km 가까이 진군한 것이었다. 정작 롬멜 자신이 직접 지휘한 기갑연대만 돌진했을 뿐, 군단장 명령에 인해 명령 문서를 받아 남은 병력은 아직 요새를 넘지도 않은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결국 롬멜은 사령부로 되돌아가기로 결심하고,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험을 시작한다. 롬멜은 자기 지휘차와 3호 전차 한 대만을 호위용으로 붙여 사령부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는데 그 3호 전차가 도중에 퍼져버렸고 결국 롬멜의 지휘차만 후방 50km의 거리를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때 그가 돌아가는 그 지역에는 롬멜의 기갑연대에 우회당해 교전조차 못 해본 전력이 그대로 남아 온전한 프랑스 육군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롬멜은 요새지대를 피해 가며, 뭔가 많아 보이는 행군 중인 적에게 지휘 장갑차 혼자 다가가서 당당하게 적 지휘관에게 “항복하라!”고 외쳤으며 프랑스 육군들은 너무도 당당한 그의 기세에 눌려 전부 낚여(?) 항복했고 심지어 이런 그의 작전(?)은 몇 차례나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허세가 연달아 성공할 수 있던 이유는 당시 프랑스 육군의 통신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정도의 엉망이었고, 그나마 상황에 대한 정보 연계도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저 악명 높은 적 육군의 장군이 갑자기 정면에서 튀어나와 “항복하라!”고 당당히 압박하니, 이미 독일 대군에 의해 포위당한 상황이라고 지레 쫄아버린 프랑스 군 장교들의 항복이 이어졌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적의 장군씩(?)이나 되는 자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자기 차 한 대만 끌고 와서 자신들에게 이렇게 당당히 항복을 요구할리는 없을 것이라는 기본상식을 롬멜이 모두 무시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그렇게 롬멜은 다시 아헨에 도착했는데 사단 참모는 나머지 부대를 이끌고 그제서야 아헨에 도착하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종결된다. 롬멜의 장갑차 뒤에는 프랑스 육군 트럭 40대 안에 항복해서 끌려온 포로가 가득 타고 있었다. 롬멜은 이러한 전공으로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맹진격을 거듭하던 도중, 롬멜이 지휘하는 제7기갑사단은 아라스에서 역습에 나선 영국 육군의 전차들과 마주치기도 했는데, 이때 상대편 전차의 방어력이 뛰어나 50대 이상의 독일 전차가 순식간에 파괴당하게 되자, 사단장인 롬멜은 자신이 직접 루프트바페 방공포병 부대의 8,8cm FlaK를 끌고 와 적 전차들을 모두 제압하는 살벌함을 시연하기도 했다. 


대구경 대공포의 화력을 응용한 이 작전은 당시 전쟁에서 상당히 유효한 작전의 모범으로 인정되면서, 이후 독일군은 대전 내내 88mm 대공포를 대전차용으로 변용하여 사용하게 된다.


그만의 임기응변이라고도 하기 조금 그런 것이, 이 88mm 대공포는 개발 당시부터 대전차용으로 쓸 수 있도록 철갑탄이 이미 개발된 상태였다. 단, 소련에서 KV-1을 만나기 전까지는 기존의 고폭탄으로도 충분히 전차를 격파할 수 있으므로 몇 개 되지도 않는 비싸고 귀했던 철갑탄을 사용할 일도 그리 많지 않았다. 


화포 자체의 수량 부족 및 대부분의 대공포가 공군 소관이라 소속 자체도 달라서 사실상 이때 발상의 전환을 통해 용도전환을 하려면 여러 절차와 준비가 필요했다. 실제 그 대공포를 운용하는 대공포병도 지상목표를 사격했던 경험조차 없다는 점까지 감안한다면 롬멜이 했던 임기응변은 그만이 해낼 수 있었던 과감한 변용이자 발상의 전환은 분명한 것이었다.


프랑스 침공에서 극적인 활약으로 일약 독일 육군 최고의 저명인사로 떠오른 롬멜은 그를 주연으로 하는 전시 선전영화 <서부의 승리>가 그를 위해 특별 상영되는 등, 인생 최고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이때의 영광은, 이후 그의 전설을 만들게 되는 또 다른 무대로 가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프랑스 점령 후, 독일은 소련을 침공하려는 계획을 하게 되는데, 이때 이탈리아가 뜻하지 않게 아프리카에서 영국군에게 대패하면서 독일에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문제는 이 시기에는 소련 침공 작전 준비가 대부분 진행된 상태라, 빼낼 수 있는 병력이 얼마 없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런 이유로 독일군은 소수의 기계화 부대와 유능한 장군 한 명을 보내는 것으로 아프리카에서 완전히 이탈리아가 축출당하는 것만 막는 선에서 마무리지으려 했는데, 그때 파견된 그 한 명의 장군이 바로 롬멜이었다. 롬멜은 아프리카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정찰기를 타고 영국군 지역 상공을 면밀하게 정찰하며 전황을 파악한다.


당시 영국군의 상태는 이탈리아군을 추격하는 데만 집중되어 조직적인 전투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당시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을 몰아붙이는 와중에 그리스에 독일군이 침공하면서 그리스 방위라는 정치적 이유로 2개 사단이 차출당해 실제 전력자체도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다.


영국군의 상황이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롬멜은 아직 수송선에서 병력이 제대로 하차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바로 반격을 개시한다. 제대로 반격할 병력이 없다는 말에 롬멜은 트럭과 경차량에 나무판자를 덧대어 전차 모양만 나게 만들라고 지시하고 이들을 끌고 가는 무식하다고 비난받을만한 과감함을 발휘했는데, 놀랍게도 이 작전은 어이없게도 대성공을 거두고 만다.


이미 주력 지상 병력을 처칠의 명령에 따라 억지로 그리스에 파견했다가 상당수 잃게 되면서 약체화되어버린 영국 육군은 지휘관 교체로 방어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허술하기 그지없는 독일 육군의 공격에도 손쉽게 격파당하고 만다. 이후 사실상 아프리카의 전쟁은 롬멜 대 영국군의 전쟁이 되어 영국군으로부터 그는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기 시작하면서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 이 무렵 그를 주제로 삼은 <우리의 롬멜>이라는 군가가 만들어지기까지 한다.

영국군에게 롬멜은 정말로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군인으로서 존경할 만한 인물이기도 했다. 처칠조차도 때때로 롬멜을 언급하며 ‘까마귀 무리 속 단 한 명의 진짜 군인’이라는 식으로 경외감을 표할 정도였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닌 그의 인도적인 군인다운 행동 때문이었다. 


대치 중이던 영국군 야전병원에 식수가 떨어졌다는 소문이 들리자 장갑차에 백기를 달고 식수를 전달해 주기도 했고, 언제나 최전선에서 부하 장병들과 함께 했기에 식사조차도 장갑차를 타고 달리는 중에 장병들과 함께 통조림 같은 전투식량으로 때우기가 십상이었다. 이탈리아 육군 장교들이 사막에서도 하얀 식탁보를 깐 테이블 위에 와인과 화려한 식사를 놓고 먹던 당시 상황과 비교하면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적에게 존경받을만한 진정한 군인의 모습이었다. 


늘 일선 장병들과 함께하다가 잠깐 안 보인다 싶으면 어느새 정찰기를 타고 적군 진지 위로 날아가는가 하면, 아군 진지 위로도 비행하며 항상 전장의 변화를 살피는 면밀함과 부지런함을 보여 아군은 물론 적군마저 그의 존재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

롬멜이 아프리카에서 타던 차

그러한 신출귀몰한 그를 괴롭힌 것은 적군보다 오히려 보급품의 부족과 무능력하기 그지없던 이탈리아 육군이었다. 이탈리아 육군은 머릿수만 많았을 뿐 전의와 능력이 바닥이어서 그의 발목을 잡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무능한 이들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아리에테 사단과 리토리오 사단을 포함한 이탈리아 육군 제20군단은 나름 그에게 큰 힘이 되는 유일한(?) 이탈리아 군이었다.


게다가 중요한 진격을 감행할 때마다 연료와 탄약이 크게 모자라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당시 독일 육군 3개 사단에 대해 이탈리아 육군은 6~7개 사단으로, 이들의 총 보급 소요는 독일 육군과 비슷하거나 더 많았다. 그런데 정작 이탈리아 육군의 보급품 운반용 차량은 독일 육군의 절반도 되지 않고 그나마 성능도 나빠 고장률이 매우 높았다. 


더구나 독일군조차도 차량은 실제 소요의 절반을 조금 넘는 정도밖에 갖고 있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니 진격을 하면 할수록 보급은 점점 어려워졌고, 결국 후퇴를 결정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이런 상황 때문에 롬멜은 언제나 보급에 불만을 제기했으며, 국방군 총사령부는 그런 롬멜의 불평을 받아들여 대소련전으로 병력과 물자가 소모되어가는 마당에도 아프리카 군단에 의외로 많은 양의 보급품을 보내주었다.


결국엔 롬멜도 거칠고 긴장된 생활의 연속으로 인해 병을 얻어 본토로 돌아가게 된다. 롬멜이 아무리 강인한 체력을 가졌다고는 하나, 북아프리카 사막의 혹독한 환경은 그를 정신적으로 한계까지 몰아붙인 것이다. 


그가 아프리카를 떠난 사이 엘 알라메인에서 영국의 대반격이 시작되고, 급하게 돌아왔던 롬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히틀러의 명령마저 무시해버리면서 병력을 최대한 온존하며 퇴각하기 시작한다. 이후 영미 연합군의 모로코 상륙으로 튀니지에 갇혀버렸고, 총통을 직접 만나 병력 증파를 요청하러 독일로 갔지만, 히틀러의 요구로 그는 요양을 위해 남게 되고 아프리카 방면군 사령관은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 육군 상급 대장으로 교체된다. 이는 이미 대세가 결정되었으며, 여기서 롬멜이 포로라도 되면 심각한 위신 손상이 올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실제로 아르님 장군은 분전을 펼쳤으나 결국 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에게 항복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항복 전 아르님은 롬멜이 자신에게 인계하고 간 지휘 트럭 맘모스를 직접 소각하며 오열했다고 한다.

히틀러와 함께

그 후 롬멜은 잠시 동안 이탈리아 방위사령관을 역임하다가 유럽지역에서 연합군의 상륙을 막는 대서양 방벽을 방어하는 B집단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때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대의 방어능력을 상당히 향상시켰다. 하지만 이때 롬멜은 하필이면 연합군의 상륙 당일 폭풍우가 치는 것을 보고 특별한 일이 없을 것이라 판단 착오를 하고 아내의 생일파티에 참석하러 떠나서 당일 전장이 아닌 본국인 독일에 가 있었다.


천운이 독일에게서 떠났다고 설명하는 호사가들이 많은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노르망디는 날씨가 험하기로 유명하여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전날까지 실제로 엄청난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쳤다. 


기상대에서도 6월 6일 당일은 날씨가 매우 안 좋을 것이라 예보했고, 날씨가 이렇게나 안 좋으면 연합군의 상륙이 불가능하다고 현지 지휘관의 대다수가 판단했고, 롬멜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안심하고 아내의 생일파티에 가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일기예보는 틀렸고, 승리의 여신은 히틀러의 독일을 떠나 연합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게다가 당시 히틀러를 포함한 독일 수뇌부들은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은 벨라루스와 서부 우크라이나의 겨울 동안 얼어붙은 땅이 봄철에 녹아 진흙탕으로 변하는 시기가 끝나는 6월 말에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는 소련군의 공세와 보조를 맞추어 실시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이 6월 초에 개시될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롬멜의 귀국은 당연히 허가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롬멜의 부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개 당시 독일군 지휘부의 공백을 초래했다. 사령관 롬멜의 부재중 B집단군 사령부를 책임져야 할 참모장 한스 슈파이델은 갈팡질팡하다가 이렇다 할 방편을 마련하지 못했고, 연합군의 상륙 이후에도 롬멜은 7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돌만 육군 상급 대장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러던 중 돌만 장군의 갑작스러운 자살 이후 공석이 된 사령관 자리에 파울 하우서 SS 상급 대장이 임명하게 되는데 그는 그것을 맹렬히 반대했다. 독일군이 팔레즈 포위망을 탈출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야전 지휘관이 하우서 장군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그의 판단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준다.


1944년 7월, 롬멜은 전선 시찰을 나가던 중 연합군 공군기의 공격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영국과 미국의 특수부대가 롬멜 암살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사고로 인해 암살 작전은 취소되었다고 한다.


이후 부상을 치료하던 와중에 발생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관련성이 제기되면서 히틀러의 미움을 사고 결국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1944년 10월 14일, 히틀러는 SS를 동원해 그의 자택을 은밀히 포위하고 연락선도 차단한 다음 국방군 장교 둘을 보내 베를린으로 출두해 자신을 변호하던가 재판에 회부되던가 명예롭게 죽던가 세 가지의 선택권을 강요했다. 국민적 영웅인 그가 암살에 관련되어 재판과 처벌을 당하는 것은 정권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절대 좋지 않다고 여겨 가족의 안전을 보장하고, 공식적으로는 영웅의 죽음으로 국장을 치르겠다는 계산이었다.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세 번째 옵션을 택한 롬멜은 아내와 아들에게 그의 결심을 설명하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 후 아프리카 군 원수 정복을 차려입고 SS 장교가 탄 메르세데스 차량에 동승해 돌아오지 못할 길을 나섰고, 그가 차량 안에서 사망하자 짜여진 각본대로 병원으로 이송시켜 게슈타포에 매수된 의사가 사인을 심장마비로 처리했다.


이후 장례는 약속대로 국장으로 치러졌으나 히틀러를 포함한 나치 고관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롬멜의 묘지

전쟁사나 군대를 모르는 여성들에게마저 롬멜의 이름은 낯설지 않을 정도로 그의 유명세는 히틀러의 장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긍정적이라는 특이한 현상을 낳았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보여준 군인으로서의 신념과 그에 걸맞은 행실로 인한 어찌 보면 당연한 평가였다.


하지만, 공부도 못해 성적이 안 좋아 지원한 모든 군대에서 거부당하고 보병 사관학교에 겨우 진학하고 귀족 신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귀족 장교들에게 치여가면서도 그는 결국 연합군을 궤멸시킬만한 유일한 독일군 장군으로 적군은 물론 아군에게까지 존재감을 과시하는 인물로 인정받는 위치까지 올랐다.


대개 그의 맹활약상에만 포커스를 비춘 자료들을 보면, 그가 왜 그렇게까지 파격적이고 적극적으로 행동해야만 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왜 일반 사병들에게는 그렇게 자상했으면서도 장교들에게는 혹독했는지 행간의 설명이 없다. 오늘 그의 삶을 당신에게 소개하는 이유는 바로 그 행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 그가 신념이라는 것을 만들어나가는 데에는 언제나 계기가 있다. 이유 없는 극적 변화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는 말이다. 그가 어렵게 군 장교가 되었는데 자신의 공을 귀족 장교에게 빼앗기면서 그가 느낀 것은 자신의 전공을 확실하게 전장에서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이었을 것이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단순히 전공을 세우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지는 바보 같은 장교는 없다. 그저 그가 전공에 눈이 멀었다면 혈혈단신으로 적군이 그득한 곳을 혼자서 진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그 타이밍이 적기였기 때문이고, 그 타이밍을 놓치게 되면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국가원수의 명령에 따라야 할 군인이던 그는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운이라고는 하지만, 전쟁이 한창이던 상황에서 날씨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전장을 떠나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결정을 내린 것은 분명히 그의 판단 미스였다.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을 더욱 신중했어야 했고, 그간 쌓아왔던 노력과 노고를 그렇게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전장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되었다. 그 작은 판단 미스는 그의 삶을 한순간에 모두 무너뜨리고 말았다.


어렵게 노력하고 성공한 자리에 오른 당신에게 ‘이 정도 했으면 이제 괜찮지 않나?’라는 안일함은 언제든 찾아든다. ‘나만큼 고생하고 노력해서 이렇게 일군 사람도 없지.’라는 자부도 좋지만 그것이 오만으로 변하는 것은 한순간이다. 중요한 것은 차곡차곡 올려쌓은 삶도 단 한순간의 나태함과 오만함으로 나락에 처박힐 수 있다는 것이다. 전장의 군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의 삶 자체가 전쟁이라는 것은 굳이 내가 여기서 강조하지 않더라도 당신이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미 나는 늙었다고 마치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돈을 버는 경제행위를 하지 않으니 이제까지 번 것을 까먹으며 적당히 소일하며 산다는 안일함에 빠지는 순간 당신의 육신은 물론이고 정신마저도 팍삭 늙어버릴 것이다.

죽기 직전까지, 당신이 당신의 인생을 반추하며 손에 있는 것을 모두 놓아버리고 편안하게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당신은 노력을 경주해야만 한다. 그것은 젊다고, 아이들이 어려서 들어갈 돈이 많다고 더 해야 하고 아이들이 다 커서 크게 돈 들어갈 일이 없다고 늦춰지고 하는 따위의 범주가 아니란 말이다. 


지금 당신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당신은 살겠다고 바둥거리지 않겠는가? 삶은 그런 것이다. 당신의 숨이 붙어있는 그 순간의 마지막까지 당신은 결코 해이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이제까지 지난한 삶을 살아온 스스로의 삶에 대한 존중이고 그 노고들이 헛된 것으로 휘발되어버리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신중함이다.


아직 살날이 훨씬 더 많은 상황이라면 그것은 더더욱 그러하다. 10년 정도라 하더라도 아이가 태어나 열 살이 될 때까지의 시간은, 그 아이가 평생 살며 갖춰야 할 기본을 습득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당신이 그저 유유자적 느기작작하며 보낼 시간이라고 삶을 낭비하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라마지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름 없는 셰르파라고 잊힐 수 있는 인생이었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