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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15. 2022

수도자가 되겠다고 해놓고 사랑을 만나 환속하였지만,

그 사랑과 신념을 위해 자신의 하나 된 삶을 완성시키다.

210번째 대가의 이야기.


1478년 런던에서 유명한 법률학자이자 판사였던 요한 모어(Joanne More, c.)의 아들로 태어났다. 저명한 법조계 집안의 자녀답게 어려서부터 사립학교에 다니며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13살이 되던 해에는 켄터베리 대주교이자 영국의 대법관이었던 존 모튼(John Morton, c.)의 집에서 시종 노릇을 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갑자기 집이 망하거나 해서가 아니라, 당시 문화에서는 유력자의 집에서 시종 노릇을 하며 인맥을 넓히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교육과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당대 잉글랜드의 가장 대표적인 유력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모튼은 재기가 넘쳤던 그를 무척 아꼈고, 그가 르네상스의 가르침을 배우도록 적극 지원해주기도 했다. 나아가 옥스퍼드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추천해주며 그의 후원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1492년부터 옥스퍼드에서 고전 교육을 받기 시작한 그는 단 2년 만에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숙해졌다. 하지만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뛰어난 법학자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 존 모어는 아들을 런던으로 다시 불러 전문적인 법학 교육을 받도록 권유했다. 그 역시 집안의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던 터라 법학 공부에 흥미를 느끼고 당연한 것이라 여기며 법학전문학교에 진학한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Loncoln's Inn’에서 법률 교육을 받았다. 그의 인생에 매우 중요하고 영향을 많이 준 에라스무스를 만난 것도 이곳에서였다. 그는 법률을 공부하면서 당시 영국에서 부상하던 인문주의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에라스무스와의 만남은 그의 이러한 관심을 더욱 고무시켰던 사건이었고 그 둘은 평생 우정을 유지하였다.


그런데 뛰어난 법률가가 될 거라던 주변의 확신도 잠시, 그는 금욕주의에 깊이 빠져들면서 흡사 수도사의 삶을 몸소 실천하기 시작한다. 거친 옷을 입고, 간소한 식사를 하는 것은 기본이고, 고행을 하겠다며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고 다니기까지 했다. 1502년경에는 아예 수도원 옆에 살면서 수도사의 삶에 적극 동참했으며, 이 생활이 2년 넘게 지속되자 그는 신실한 수도원지기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잉글랜드 헨리 8세 시대의 법률가이자 정치가로 개신교(성공회)와 기독교의 성인이었으며 철학에서는 가톨릭 인문주의자로 이름을 떨쳤고, 우리에게는 <유토피아>의 저자로 잘 알려진 토머스 모어(Thomas More)의 이야기이다.


인문주의자로 덕이 높고 평판이 높은 인물이었다는 평을 받았으며, 기사 작위를 받고 국왕의 비서와 하원의장을 거쳐 왕국 재상(Lord High Chancellor)에까지 올랐던 인물이기도 하다. 왕국 재상은 권력이 워낙 막강해서 비리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원래는 가족이 없는 성직자만 왕국 재상에 임명했는데, 모어는 가족이 있는 일반 신도로서는 최초로 임명될 정도로 청렴했다는 평을 받았다.

오랫동안 수도사가 되겠다며 고행의 삶을 살았던 모어의 꿈을 날려버린 것은 그보다 10살 어렸던 17살의 아름다운 소녀 제인 콜트(Jane Colt)였다. 1505년, 제인과 사랑에 빠진 모어는 수도사의 꿈도 져버린 채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된다. 


모어는 너무도 사랑하는 아내와 모든 시간을 함께 하고자 했고, 스스로 문학과 음악 선생을 자처하며 일상생활 전부를 공유했다. 모어는 제인이 좋은 교육을 받기를 바랐고, 둘 사이에 태어난 3명의 딸과 1명의 아들에게 좋은 교육을 해줄 수 있는 현명한 어머니로 성장하기를 꿈꿨다. 


그러나 그렇게 행복했던 그의 첫 번째 결혼생활은 1511년에 갑자기 끝나고 말았다. 그가 수도자의 삶을 포기할 정도로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제인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모어는 자신의 비통한 마음도 잠시, 아이들에게 좋은 어머니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곧 재혼했다.


모어의 두 번째 부인은 앨리스 미들턴(Alice Middleton, c.)이라는 부유한 미망인이었다. 이미 전 남편과의 사이에 3명의 여자아이를 두고 있던 앨리스는 심지가 굳고, 야심이 큰 사람이었다. 앨리스는 자신의 아이들은 물론 모어가 데리고 온 4명의 아이들을 무척 잘 키웠으며, 비록 행복하기 그지없던 이전 결혼생활만큼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주도했다.


앨리스와 모어의 결혼 생활이 비교적 행복하지 않았다는 표현을 한 이유는, 서로에 대한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티가 너무도 났다는 기록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주변 사람들을 재밌게 해주는 것을 즐겼던 스타일이었는데, 서로의 방식이 달랐던 탓에 상대방을 끝내 인정하며 융화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모어는 앨리스의 외모에도 별로 만족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두고 “내 아내는 진주도 아니고, 소녀도 아니다”라고 평가한 바 있는데, 이는 자신의 아내가 ‘예쁘지도 않고, 젊지도 않다’는 불만 섞인 표현이었다. 한편 앨리스 역시 모어에게 이렇다 할 정치적 야심이 없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실망한 바 있었는데, 당시 모어는 첫사랑의 죽음으로 인해 삶의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여전히 제인과의 결혼 생활을 잊지 못했던 모어는 앨리스와의 결혼 생활보다 자신의 큰 딸 마가렛의 교육에 더욱 애정을 쏟았다. 모어는 아들과 딸에게 동등한 교육을 시켰는데, 그중에서도 마가렛은 라틴어와 그리스어 실력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모어는 이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으며, 마가렛 역시 아버지를 무척 사랑했다. 훗날 모어가 런던탑에 갇혀 있을 때나, 그가 사형을 당했을 때에도 가장 먼저 찾아가 문제를 수습한 사람이 바로 큰딸 마가렛이었다.


모어는 결혼한 나이에 법조계에 이어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영국 의회에 진출한다. 그러나 모어의 공직생활은 시련을 맞는다. 헨리 7세(Henry VII)가 행한 전제정치의 하나였던 과도한 특별세가 모어의 반대로 삭감되자, 헨리 7세는 격노하여 토머스 모어의 아버지를 런던탑에 가두고, 모어에게는 벌금형을 부과하였고 끝내 모어의 공직을 박탈시켜 버렸다. 


하지만 그는 제인과의 행복한 생활 중이었던 터라 정치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어차피 정치적 야심도 없던 그라서 미련 없이 정계를 떠나버렸고, 변호사 생활에 열중했다. 이러한 그를 다시 정치계로 끌어낸 사람은 다음 왕위를 계승한 헨리 8세(Henry VIII)였다.

헨리 8세(Henry VIII)의 초상화

1510년부터 모어는 런던시의 고위 행정관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그는 정직하고 능력 있는 행정관으로 명성을 얻었다. 1514년에는 추밀원의 일원으로 들어갔으며, 당시 잉글랜드 최고의 외교관이었던 토머스 울지(Thomas Wolsey)와 함께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외교 업무에 동참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은 모어는 1521년에 정식으로 작위를 수여받고, 재무부에 자리 잡게 된다.


헨리 8세의 개인 비서이자 조언자였던 모어는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점차 확대해갔고, 외교업무를 전담함은 물론 왕과 신하들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그는 왕과 울지 사이를 조율하는 핵심인물이었으며, 매일같이 헨리 8세, 캐서린 왕비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밤늦게까지 토론하곤 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며 능력 있고 유머러스한 모어를 유난히도 좋아했던 헨리 8세는 모어가 어려운 임무를 손쉽게 해결해가는 과정에 감탄하곤 했으며, 모어를 깜짝 방문하여 놀라게 하기를 즐겼다고 전한다.


1509년에는 런던의 상사와 안트웨르펜 상인 대표들 간의 협상과정을 통하여 통상문제 전반에 관한 역량을 인정받았고, 1510년 9월부터 1518년 7월까지는 법률 무역 관계 업무를 청산하고 런던의 민선 행정관 대리로 일했으며 공평무사한 판관이자 빈민의 보호자로서 런던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모어는 종교 문제에 있어서도 헨리 8세의 가장 중요한 조언자였다. 모어는 1521년에 헨리 8세를 대신하여 마틴 루터에 대항하는 반박문을 보냈다. 


이에 교황은 헨리 8세를 크게 칭찬했고, 이후 모어와 루터 사이에 상호 비방문이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모어는 루터에게 “너의 썩어빠진 입에서 나는 입 냄새에 구역질이 난다”는 글을 보냈고, 루터 역시 모어에게 “돼지, 머저리, 거짓말쟁이”라는 욕설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모어는 이 과정에서 감정이 상했는지, 신학적으로 더욱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오직 가톨릭 교회만이 단 하나의 교회이며, 이 전통과 실행은 온전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루터와 개신교를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악한 세력으로 지목했다. 

그의 시각에서 개신교는 이단이었으며, 교회와 사회의 안정을 파괴하며 ‘전쟁을 부르는 놈’ 들일뿐이었다.


심지어 모어는 본인이 직접 나서서 개신교도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기도 했다. 대법관직을 수행하면서 모어는 6명의 개신교도 화형에 적극적으로 임했으며, 수십 여명에 달하는 개신교도를 자기 집 지하에 가두어두었다는 제법 믿을만한 근거를 가진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직접 채찍을 들고 고문에 임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모어 스스로는 그러한 이야기를 부정하곤 했다. 하지만 어쨌든 모어의 이러한 태도는 <유토피아>에 묘사된 종교적 관용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렇게 뛰어난 능력은 물론 국왕과의 친분을 발판 삼은 모어는 결국 1529년 대법관의 자리에까지 오르며, 런던의 제빵사였던 할아버지와 법률가였던 아버지 가문의 둘도 없는 자랑거리가 된 것이다. 이는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헨리 7세에 눈 밖에 났던 법률가치고는 상당한 성공이었다.


1529년 마침내 왕국 재상(Lord High Chancellor)에 임명되었다. 이는 헨리 8세가 캐서린과 이혼하기 위해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탄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추기경이었던 토머스 울지를 재상에서 파면시키고 그 자리에 측근인 토머스 모어를 앉힌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혼사건에서 모어는 중립을 지켰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지만, 토머스 크롬웰이 등장하면서 사태가 급변했고 더 이상 중립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돈독했던 헨리 8세와 모어의 우호적인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무어와 입장을 같이해오던 헨리 8세가 돌연 입장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 균열의 원인이었다. 헨리 8세는 점차 교황권을 부정하기 시작했고, 영국 교회의 수장이 자신임을 외치기 시작했다.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듯, 이 문제는 헨리 8세와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 앤 볼린과의 재혼과 맞물리며 여러 신하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헨리 8세의 오른팔이었던 토머스 울지마저 이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실각했으니 당시 상황은 그 누구도 예견할 수 없는 혼돈의 소용돌이 그 자체였다.

1529년 울지가 실각한 이후 대법관 자리에 오른 모어는 일단 헨리 8세와 왕실 측근들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화해도 잠시, 헨리 8세가 점점 더 교황권을 부정하면서 이 둘 사이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헨리 8세와 교황의 충돌이 점차 심해지자, 모어는 헨리 8세보다는 교황을 더욱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어는 헨리 8세가 여태껏 부정해오던 마틴 루터 세력의 간접적 지원 속에 교황을 부정하려는 것에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아가 모어는 헨리 8세 스스로 교회의 수장이 되려는 것을 ‘전제 군주’가 되려는 행동이라 보았고, 이것이야말로 나라의 평화를 깨는 행동이라 판단했다. 


이에 1530년 모어는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 취소를 요청하는 편지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고, 헨리 8세는 자신의 뜻에 반항하는 모어를 고립시키고자 교황을 지지하는 잉글랜드 내 성직자들을 숙청해버렸다.


헨리 8세와 모어는 표면상으로는 여전히 친하게 지냈으나, 헨리 8세는 점차 모어의 수족을 잘라나갔다. 모어 본인의 명예와 영향력은 유지되는 듯했지만 그 주변 사람이 계속 숙청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모어는 건강을 이유로 사임을 요청했다.


사임 당시만 해도 둘은 서로를 걱정하는 듯 헤어졌다. 1533년 헨리 8세는 첫째 부인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볼린과의 결혼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은 이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고 분노한 헨리 8세는 영국과 교황청의 관계 단절을 시도했다. 


헨리는 항소법을 제정하여 로마 교황청으로 이송되던 이단 고소 문제를 자신의 소관 아래 두었고,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 대신 앤 볼린과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에게 왕위를 계승한다는 왕위계승법을 통과시켰다. 헨리 8세는 신하들에게 그들이 왕위계승법을 따를 것이라는 서약을 요구하였고 나아가 1534년 영국 교회의 최고 결정권자는 로마 교황청이 아니라 영국 국왕 자신임을 공표하는 수장령과 이를 법률적으로 보호하는 반역법을 제정하였다.

1533년 모어가 앤 볼린의 왕비 대관식 참석을 거부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결정적으로 갈라졌다. 사실 모어는 자신의 불참이 그렇게까지 문제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헨리 8세에게 앤 볼린을 왕비로 인정하겠다고 이야기했으며, 왕의 행복과 새로운 왕비의 건강을 빌어준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어의 정적들은 대관식 참석 거부를 빌미로 모어에 대한 모함을 늘어놓았고, 이러한 모함의 일환으로 모어는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비록 증거 불충분으로 곧 풀려나기는 했으나, 그의 몰락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1534년 4월 13일,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모어는 앤 볼린을 왕비로 인정하는 의회 선언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는 앤 볼린의 아이가 왕위 계승권을 갖는다는 왕위계승법(Act of Succession)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왕위계승법에 대한 서약을 거부하고 묵비권을 행사한다. 


왜냐하면 앤 볼린의 아이가 국왕이 될 경우 로마 교회의 잉글랜드 교회에 대한 영향력이 완전히 끊기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모어는 크롬웰에 의해 잡혀 런던탑 감옥에 수감되었고 처형까지 15개월을 보내게 된다. 절친이던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과 큰 딸 마가렛이 여러 차례 찾아와 회유를 독려했으나 모어는 끝내 자신의 신념을 굽히려들지 않았다.

모어는 재판에서, “의회가 인정한 왕의 권능에 대해 그는 악의적이고 반역적으로 행동했다.”는 공소 이유에 대하여, 모어는 “반역은 말이나 행동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 침묵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재판 과정에서 모어는 적극적인 항변을 행사한다. 항변과 재항변이 이어지고 공격과 수비의 논리 싸움은 당시 상당한 이슈가 되었다. 모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법조문 하나, 문구 하나에 매달리는 위대한 법률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그가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법률가로서 법적 논리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친구가 크롬웰 편에 서서 위증을 하자, 상황은 크게 불리해졌다. 그 위증으로 인해 반역죄로 사형 판결을 받던 순간, 그는 재판관들에게 "여러분들이 지금은 이 땅에서 재판관으로서 나를 정죄하지만, 나중에 우리가 하늘에서 다시 만나 영원한 구원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할 것입니다."라는 말로 통렬히 풍자해 버린다.


1535년 7월 1일, 사형 선고를 앞둔 마지막 재판장에서 모어는 죽음이 두려웠던지 국왕이 교회의 수장임을 인정하려는 듯한 말을 내뱉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재판정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모어의 정적이었다. 그 누구도 모어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고, 단 15분 만에 모어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제서야 모어는 “그 어떤 세속적 인간도 교회의 수장이 될 수 없다”며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5일 후, 공개적인 처형 당시에 그는 군중을 향해 “나는 왕의 충실한 종 이전에 하느님의 종으로 죽는다.”라고 선언했다. 죽을 때까지도 유머감각을 잃지 않아서, 사형 집행인에게 자기 수염은 반역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잘려나갈 이유가 없다면서 수염을 잡아 빼고 최후엔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반역죄로 처형당한 모어의 머리는 런던 브리지에 한 달 이상 걸려있었고, 그의 딸 마가렛이 뇌물을 주고 나서야 간신히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토머스 모어의 죽음에 대해 “눈보다도 순결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영국은 과거에도 그리고 이후로도 그가 지닌 천재성을 다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라며 그를 애도했다. 그의 죽음에는 초인적 영웅의 무용담도, 전투적인 투쟁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유머와 해학, 그리고 인간적인 매력 덕분에 후대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사실 헨리 8세를 대신하여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세력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국왕이 교황으로부터 칭찬받는데 공을 세웠던 모어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돌연 개신교로 개종하여 로마 교회를 부정하라는 헨리 8세의 요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마틴 루터와 논쟁하는 과정에서 신학적 보수성이 더욱 강화된 모어는 헨리 8세의 갑작스러운 개종을 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심지어 마틴 루터 세력과 손을 잡고 교황을 압박하는 헨리 8세의 태도에 정치적 환멸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검소한 생활태도와 뛰어난 능력, 위트 있는 말과 원만한 인간관계로 일구어낸 성공적인 정치가로서의 커리어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모어는 본인이 오랫동안 추구했던 ‘반 전제 권력, 반 종교개혁’을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사형당한 실패한 정치인인 셈이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의 캐릭터는 각종 연극으로 재생산되었고 이로 인해 ‘유머 넘치는 원칙주의자’로 각인되면서 영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한 학자들의 재평가를 감안하여 1886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시복(복자가 됨)되었고, 그가 죽은 지 40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193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법률가의 수호성인으로 인식되었다. 


축일은 6월 22일. 또한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공식적으로는 ‘정치가와 공직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성 토마스 모어(Saint Thomas More)라고 부른다.




내가 오늘 토머스 모어의 삶을, 그 눈물겨운 실패의 삶을 당신에게 소개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그저 <유토피아>의 작가로만 기억할 뿐 그가 이루려고 했던 진정한 변화와 개혁에는 관심조차 없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그가 1516년에 라틴어로 쓴 소설의 제목이자 소설 내에 등장하는 가상의 섬나라 이름이다. 원제목은 <최상의 공화국 형태와 유토피아라는 새로운 섬에 관한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한 대단히 훌륭한 소책자 (Libellus vere aureus, nec minus salutaris quam festivus, de optimo rei publicae statu deque nova insula Utopia)>이다.

이 책을 집필했던 시기는 그가 토마스 울지와 함께 유럽 전역의 외교 사절로서 말 그대로 세계를 누비고 다니던 시절에 그 경험과 자신의 이상을 토대로 집필된 것이다. 그 제목만 알뿐 제대로 읽은 이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인 이 작품을 자세히 읽다 보면, 그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갔으며, 그가 지향했던 세계가 막연한 이상의 세계가 아닌 500여 년이 지난 현재에 맞닿아 있는지를 확인하고 놀라게 된다.


이 소설은 “그가 들려준 모든 것에 다 동의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그럼에도 유토피아 공화국에서 시행되는 것 중에서 아주 많은 것이 우리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도 시행되었으면 좋겠다.”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하루 6시간 노동, 지방자치제, 공유경제, 공공 주택, 안락사, 사형제 완화, 종교의 자유, 남녀평등교육 등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는 이 작품은 현대에 오히려 시사하는 바가 더 크다 할 것이다. 예컨대, 책에서 언급된 기본소득제의 개념은 <유토피아> 세상에 나온 지 500여 년이나 지난 2016년에 스위스에서 국민투표까지 실시될 정도로 현실성 있는 제안이었다.(결과는 부결되었다.)

잘 나가는 법률가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가문의 희망이던 젊은이가 갑자기 수도자의 삶을 살겠다고 철저한 금욕생활을 하다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정도의 첫사랑을 만나면서 4명의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첫사랑의 죽음으로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방황하면서도 첫사랑을 그리며 아이들의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재혼했고,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한 정무적 능력을 필요하던 국왕의 추천으로 정계에 진출한다.


그렇게 그는 국왕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유럽을 누비며 더 넓은 세상을 경험했고 자신의 신념에 더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된다. 그리고 소설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담았고, 실제 정치에서 그 신념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자신의 사사로운 욕망을 위해 아집을 부린 국왕에 의해 결국 참수되어 세상을 마치게 된다. 그가 그의 신념을 굽혔더라면 그리고 처세에 능한 사람이었더라면 그는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욕의 세월을 연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이 단지 자신의 욕망을 더 쟁취하기 위한 정치적인 싸움의 패배에서 온 것이 아니기에 그는 마땅히 성인으로 불릴만한 삶을 살았다 할 것이다. 그를 죽이라고 했던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국왕이었지만, 정작 실제로 그의 사형을 부추기고 도왔던 이들은, 구차하게 신념이고 뭐고 영욕의 삶을 살고자 했던 이들이었다.

외눈박이 나라에서 두 눈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받는 삶을, 그 고난을 겪어보았기에 나는 지금 당신이 그런 일을 당하고 억울해서 어디에 하소연하지도 못하고 냉가슴을 앓고 있음을 이해한다. 그들은 말한다. 그 신념 따위가 밥 먹여주냐고, 그저 한번 눈 찔끔 감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당신은 뭐가 그렇게 독야청청한 삶을 살아서 우리를 그렇게 벌레로 만드냐고 그 벌레들이 당신을 공격하고 비난하고 호시탐탐 등에 칼을 꽂겠다고 으르렁거릴 것이다.


개의 밥을 빼앗아 먹으려는 사람은 없음에도 그 개들은 자기 밥그릇 근처에 가면 으르렁거린다. 그래서 사람이 아니라 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소 힘겹고 그냥 나도 눈 한번 찔끔 감고 그들과 엉켜서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영욕의 삶을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라 이해한다. 


하지만, 당신이 그런 짐승으로 변신(?)하는, 그런 나락으로 번지 점프하는 결정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왜냐하면 그런 어리석은 결정으로 당신의 신념을 꺾을 정도였다면 굳이 지금까지 당신이 그렇게 힘겹게 그들과 달리 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중간에 변절(?)하고 그들과 엉켜 오히려 그 이전의 모습을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가 막힌 짓거리를 하며 영욕의 삶을 더 누리는 것들도 적지 않은 시대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말자.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는데, ‘쟤도 그러는데요?’라는 대답을 하는 쓰레기 수준으로 내려가는 삶은 결코 당신이 지향했던 삶이 아니지 않은가?


토마스 모어가 목이 잘려나가기 직전에 웃으며 농담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유머러스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고수할 수 있는 당당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당신의 하나뿐인 삶을 당신의 자식들에게는 물론 당신을 세상에 낳아주신 부모님과, 누구보다 당신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삶을 살지 말라.


토마스 무어의 삶이 실패인 듯 실패 아닌 이유를 그의 이야기를 통해 가슴에 새기는 하루가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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