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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18. 2022

라이벌에게 밀려 죽을 위기에 추방까지 당했지만,

자기 세대가 아닌 자기 가문을 역사에 새긴 인물로 남다.

211번째 대가의 이야기.


1389년 초기 그리스도교 성인으로 추앙받는 고스마와 다미아노의 축일인 9월 27일에 태어나, 자신이 의뢰하는 그림이나 자신을 기념하는 그림에 고스마와 다미아노를 자주 등장시켰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의 카말돌레 수도회 수도원 학교에서 독일어와 프랑스어, 라틴어를 배우고 히브리어, 그리스어, 아랍어도 익혔다고 전한다.


이후 다른 부유한 피렌체 가문의 자제들과 함께 당대의 주도적인 학자인 로베르토 데 로시에게 수업을 받았으며, 로시의 지도와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수도원의 토론 모임으로 고전 학문과 고전적 이상을 존중하면서 인간의 삶에 관심을 가져 자연스럽게 인문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


20대 초반에 아버지인 조반니의 동업자인 조반니 데 바르디의 장녀 콘테시나 데 바르디와 혼인해 바르디 궁으로 이사하면서 각 방에는 메디치의 표상을 눈에 띄지 않게 장식했으며, 3년 이상 로마 지점을 경영하면서 가끔 피렌체를 방문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티볼리에 있는 저택에서 보냈다고 한다. 베네치아에서 뒷수발을 해주던 마달레나라는 노예 소녀와 동침해 카를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를 얻게 된다.


한동안 사업상 로마에 체류하여 가문의 경쟁자들이나 피렌체의 적대국들의 질시를 모면할 수 있었지만 피렌체로 돌아온 이후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미누토 포폴로에 대한 지지도로 알비치 가문의 의혹을 불러오게 되었다.

피렌체 공화국의 지배자이자 메디치 가문의 수장으로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의 뒤를 계승하여 유럽에서 메디치 가문이라는 이름을 모든 이들에게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던 결정적인 메디치 가문의 총수로 불렸던,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Cosimo di Giovanni de' Medici)의 이야기이다. 그는 사후 파테르 파트리아이(국부;國父)라고 불렸다.


사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14세기 초부터 직물 교역을 통해 부를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반니 디 비치가 은행업을 크게 일으키면서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이 되었다. 조반니 디 비치는 정치적으로는 평민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힘써 신망을 얻었다. 코시모 메디치는 그런 조반니 디 비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막대한 부와 함께 사업 수완도 물려받은 그는 유럽 전역으로 활동 무대를 넓혔다. 교황청의 막대한 자금도 코시모의 은행이 운용했고, 유럽의 많은 군주들이 코시모의 은행을 통해 자금을 융통했는데 그것을 기반으로 훨씬 더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의 기반을 다지고, 엄청난 부를 쌓아 메디치 가문을 유럽의 정점에 올린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긴급 위원회인 전쟁 위원회의 10인의 일원으로 활약하면서 1429년 루카 시와의 전쟁에 알비치 가문의 지휘 아래에 참전했으며, 알비치 가문의 지휘 아래에서는 피렌체 군대가 이기기는 힘들 것이라는 견해를 드러냈다.


전쟁이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1430년 가을에는 불리하면서 막대한 비용이 드는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하면 안 된다는 의견과 함께 다른 이들에게도 전쟁 위원회에 참여할 기회를 줄 것으로 주장하면서 피렌체로 떠나 베로나로 갔다.


1432년 가을에는 또다시 피렌체를 떠나 베로나에 가서 무젤로 지방의 일 트레비오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서 수개월간 머무르면서 피렌체 은행에 있는 막대한 재산을 로마와 나폴리 지점으로 신중하게 이동시켰으며, 주화 꾸러미들을 산 미니아토 알 몬테의 베네딕토회 은둔 수도자들과 산 마르코의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에게 맡겼다. 무젤로에 머무르고 있을 때 9월 첫째 주에 피렌체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아 1433년 9월 4일에 피렌체로 귀환했으며, 알비치 가문이 퍼뜨린 악성 소문 때문에 7일에 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에 갇히자 시뇨리아 궁의 감옥에서 독살 위험을 구실로 식사는 바르디 궁에서 조달받았으며, 경비원 페데리고 말라볼티는 코시모에게 동정적이라 방문객을 상대로 여러 전언과 뇌물이 오고 갈 수 있었다.

알비치 가문의 리날도 델리 알비치가 그에게 반역죄를 선고하여 사형시키려고 들자, 곤팔로니에레 구아다니에게 뇌물로 1,000 플로린을 먹여 투표권을 마리오토 발도비네티에게 위임하게 하였고, 마리오토에게도 뇌물을 먹여, 이러한 뇌물과 함께 무젤로에서 그를 석방시키기 위한 군대가 모집된다. 그렇게 동생 로렌초 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사촌 아베라르도와 함께 재판을 받아 10년간 파도바로 추방된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렇지만 유배 길에서 칭송을 많이 받아 페라라에서 후작 집안의 융숭한 대접을 받거나 파도바에서 권력층으로부터 영빈 대우를 받았으며, 파도바에서 2달간 지내다가 베네치아에 있는 동생 로렌초 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와 합류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아 산 지오르지오 마지오레 수도원에 정착해 도서관 건립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했다.


또한 자신이 위임했던 피렌체의 건축 작업이 잠정적으도 중단되자 베네치아까지 동행한 건축가 미켈로초 미켈로치에게 건물 설계를 맡겼으며, 베네치아에 머무르면서 피렌체의 정세에 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자세히 들었다.


코시모가 떠난 이후 피렌체는 막대한 자본 유출로 재정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결국 그의 추방령을 철회하라는 여론이 높아졌다. 피렌체에서 알비치 가문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1434년 늦여름 무렵에 밀라노의 용병이 피렌체의 군대를 격파하자 반정부 감정이 격화되면서 메디치 가문 사람들이 정부 의회를 장악했다.

당시 용병부대가 승리한 산마리노 전투

1년 만에 유배령이 철회되었으며, 9월 28일에 출발해 베네치아 병사 300명의 호위를 받아 피렌체로 귀환하면서 알비치 가문을 추방했다. 1년 만에 피렌체로 돌아온 코시모는 자신의 뜻에 맞게 법과 제도를 정비하여 권력 기반을 다졌다.


알비치 가문을 추방하자 수년간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표면적으로 부유하고 관대하면서도 친근한 은행가 행세를 했으며, 정치, 외교적인 업무가 나오면 무조건 떠맡거나 국가의 경제 정책을 지도했다. 시에서 누구보다 더 높은 이율의 세금을 내면서도 다른 신중한 부자처럼 부채를 강조하면서 납세 가능한 수입을 축소시켜 정확한 재산액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3번만 곤팔로니에레에 선출되어 가식이나 허세를 피해 말보다 노새를 타고 다녔다.


국가 안보와 조세 제도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콘실리오 마지오레’라는 위원회를 새로 조직하면서도 루카 피티를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시켰으며, 1439년에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의회가 페라라에서 문제가 생기면서 동생 로렌초의 설득과 페라라에서 역병이 생기자 피렌체에서 공의회를 열고 위신이 높아졌다. 피렌체 공의회에서 결정된 화합은 얼마 안 가 깨졌지만 시의 무역업에 도움이 되거나 그리스 학자들이 피렌체로 몰리면서 고전 문서, 역사, 미술, 철학에 대한 논의가 촉발되었다.

보티첼리의 <(메디치가의)메달을 든 남자의 초상>

피렌체 공화국의 30년 동안 외교 정책을 통제해 중요한 일을 메디치 궁에서 결정했으며, 외국 대사들은 종종 궁을 오가 임무를 착수하기 전에 무조건 코시모를 방문했다고 한다. 밀라노에 대한 적대 정책을 부적절하게 여겨 피렌체인들을 설득했으며, 재정적인 문제로 고생하던 이탈리아의 군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자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피렌체 납세자들에게 추가 보조금을 받도록 해주어 정치, 외교적 영향력을 발휘해 1450년 3월에 밀라노 공작이 되는데 도움을 줬다.


프란체스코를 원조한 일로 네리 카포니, 잔노초 마네티 등 피렌체 사람들의 반발을 샀지만 베네치아는 레반트 지방 때문에 서로 충돌한 문제와 지중해 동부 지방을 소유하면서 투르크 족과 적대적인 입장에 있으면서도 상호 이득이 되는 무역 관계를 즐겨 믿을 수 없다는 점을 주장했으며, 베네치아가 나폴리 왕과 동맹을 맺으면서 코시모의 정책에 반대하면서 베네치아 대사들이 밀라노와의 동맹을 항의하자 이들에게 정부의 공격자라 비난했다.


7월에 밀라노와 동맹국 협정을 맺어 이 협정으로 베네치아와 독일 황제가 동맹을 제안하면서 나폴리와 베네치아에서 피렌체 상인들을 추방하거나 동로마 제국 황제가 피렌체 상인들의 특권을 모두 철회했으며, 이에 맞서 베네치아 지점을 철수해 밀라노에 새 지점을 열면서 동방 무역에 관련된 담당자들을 불러 그리스인들이 철회해 간 피렌체 상인들의 특권을 투르크 족에게 대신 승인받았다.


또한 피렌체의 전통적인 우방인 프랑스와 교섭해 1452년 4월에 몽틸레투르에서 피렌체나 밀라노가 공격하면 원조할 것과 스포르자의 밀라노 공작을 인정하는 것을 약속받았으며, 그 보답으로 샤를 7세가 나폴리를 공격할 경우 피렌체나 밀라노가 방해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이 조약에 베네치아, 나폴리가 반발해 프랑스가 영국과의 문제로 정신이 없는 동안 동맹 관계를 해체하기 위해 피렌체, 밀라노에 전쟁을 선포하자 코시모는 피렌체인들의 반발을 사 병석에 눕게 되었으며, 뒤늦게 프랑스군이 개입한 데다가 1453년 투르크 족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투르크족의 위협이 보이자 피렌체, 밀라노, 교황, 베네치아가 연합체를 구성하면서 평화가 찾아왔다.

평화가 찾아왔지만 시민들이 적대적인 발언을 하거나 200여 개의 훌륭한 가문들이 형편이 나빠져 세금을 내기 위해 소유물까지 팔 정도인 데다가 새로운 세금까지 부여되자 코시모는 그들에게 돈을 모두 빌려줬으며, 관련자들이 모두 만족할 때까지 부채 상환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발표한다.


대중의 인심을 얻기 위해 물가가 올라 불평하는 이들에게 많은 양의 곡식을 배급했다. 베네치아는 투르크 족에 고전해 제지를 당하면서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했으며, 피렌체의 동맹인 밀라노의 프란체스코는 밀라노 공작으로 인정받거나 나폴리도 평화 협정에 승인하면서 코시모의 선견지명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이외에 토스카나 의사의 아들 토마소 파렌투첼리를 후원했다가 볼로냐 주교를 역임해 교황 니콜라오 5세로 등극하자 메디치 도서관 확장에 대해 여러 충고를 받거나 그를 존중해 융자 부탁을 받으면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했다가 파렌투첼리가 교황이 되자 상호 이익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1458년에 니콜라오 5세의 친구인 교황 비오 2세가 즉위한 이후에도 교황청과의 관계를 지속하면서 1469년에 교황 비오 2세를 만나 유대를 돈독히 했다. 이 즈음 그는 통풍에 걸려 고생하기 시작한다.


메디치 가문이 이름을 날린 것은 다만 금융업을 기반으로 한 정치적 영향력뿐이 아니었다. 일반인들이 메디치가를 들어본 것은 모든 문화 예술의 후원자 역할을 한 가문으로 르네상스 예술사에서 늘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예술계에 대한 후원을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수십 년 간 나는 돈 벌고 돈 쓰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돈 쓰는 것은 돈 버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즐거움을 안겨준다.”


코시모가 돈 쓰는 즐거움을 느낀 것이 바로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대리인들을 시켜 유럽, 근동을 헤매면서 희귀본, 귀중본, 원고들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사 모으거나 자신의 도서관에 엄청난 돈을 퍼부으면서 자신이 소장하는 형태 이외에도 피렌체 자체에 치장했다. 1437년에 코시모에게 큰 빚을 진 니콜로가 죽자 800권의 장서가 그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종교 관련 서적을 산 마르코 수도원에 기증했지만 나머지는 모두 코시모 개인이 소장하였다.


메디치 가의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피렌체 전체와 인근 지역의 교회, 수도원, 자선 단체의 건축, 복원, 장식에 힘을 쏟았는데 어김없이 그 모든 건물과 치장물들에 자신의 자취를 확실히 남겼다. 예컨대, 아르테 델 캄비오가 임명한 4인 위원회의 일원인 코시모는 기베르티를 은행가의 수호자인 성 마태오를 조각하는 일을 위촉했다.


바르디 궁에서 증개축된 두오모 광장의 아버지 조반니의 저택으로 이사하면서 건축가인 미켈로초 미켈로치를 고용해 메디치 팔라초와 무젤로에 새 별장을 지었으며, 전원생활을 즐겨 시간이 날 때마다 피렌체를 떠나 일 트레비오나 카레지의 별장에서 독서를 즐기면서 포도가지를 자르거나 올리브와 아몬드 나무를 키우며 시골 사람들과 가깝게 대화했다고 한다.


도시로 올라와 시골에서 들은 속담이나 우화를 인용해 자신의 대화를 더욱 풍성하게 하거나 카레지에서 방해받지 않고 친구들과 대화를 나눴으며,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몬테베키오 별장에 불러 같이 지내면서 식사하거나 체스를 즐겼다.

파리의 피렌체 유학생을 위한 대학을 복원하거나 예루살렘의 산토 스피리토 교회를 수리해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을 증축했으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를 후원해 주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이 완성되는데 도움을 주었다.


1436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이 거의 완성되자 피렌체에 와 있던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간청으로 4만 두캇에 이르는 거액을 지불해 1437년에 미켈로초가 산 마르코 수도원을 새로 건축하게 했다.

카레지의 별장에서 떠날 생각이 없었지만 문제가 발생해 역병이 돌면 은둔하거나 무젤로의 시골 사람들을 그의 가족에 더 가까이 귀속시킬 수 있도록 더 먼 곳에 별장을 마련하고 싶어해 1451년에 카파지올로에 미켈로초의 설계로 새 별장을 건축했다.


몇 년 후에 아들 조반니가 미켈로초를 통해 벨칸토로 알려진 별장을 재건축하려고 하자 그 주변에 땅이 경사가 심하면서 돌이 많아 농사에도 소용없기 때문에 전망의 목적으로 돈을 너무 많이 허비한 것에 못마땅했지만 1463년에 완성하게 된다.


피렌체 공의회로 수많은 그리스 학자가 몰리면서 학자들 가운데 제미스토스 플레톤의 강의를 경청해 플라톤 연구를 위한 아카데미를 세워 연구에 정진하려고 했지만 플레톤이 고향이 돌아간 데다가 다른 일로 바빠지자 한동안 그 계획은 연기되었으며, 몇 년 후 주치의 아들인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양자로 삼았는데, 그가 플라톤에 열의를 갖고 있는 것을 알고 연구 자금을 마련해줬으며, 나중에는 몬테베키오라는 별장을 제공해 피치노가 그리스어를 공부해 플라톤의 글을 라틴어로 번역할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1456년에는 그리스 학자 요한 아르기로포울로스를 불러 피렌체로 이주시켰으며, 피치노가 나이가 들고 학식이 높아지자 몬테베키오의 별장에서 인근 카레지 별장으로 불러 단둘이서 만나거나 때로는 여러 친구들과 철학적 문제를 밤늦게 토론했다고 한다.


조각가 도나텔로(도나토 디 니콜로 디 베토바르디)에게 직접 일감을 주거나 친구들에게 추천해 일감이 떨어지지 않도록 배려했으며, 도나텔로가 다른 후견인들과 관계가 좋지 못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중재했다. 도나텔로가 허술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자 어느 축제날에는 말끔한 복장과 붉은색 외투나 모자를 선물로 줬으며, 도나텔로가 노쇠해서 일할 수 없을 때 카파지올로 근방의 메디치 소유지에 작은 농장을 주었다가 농장에서 생기는 문제 때문에 싫증을 내자 도나텔로가 농장에서 나오는 수익금만 받아가도록 조치해주었다.

도나텔로

조반니 다 피에졸레에게는 산 마르코의 성당 회의소와 회랑 벽 등에 프레스코화를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성당 회의소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 대한 조언과 도움을 주면서 메디치 방의 프레스코화의 주제로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추천했다. 1455년에는 관절염과 통풍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냉소적이면서 신랄해졌으며, 1458년에는 미켈로초에게 차남 조반니를 위해 피에졸레 기슭에 메디치 별장을 건축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니콜로 니콜리, 포지오 브라치올리니, 레오나르도 부르니, 암브로지오 트라베르사리, 카를로 마르수피니 등 당시 피렌체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랑 친했으며,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니콜로의 영향을 받아 성장하자 수집을 시작했다. 포지오가 사용한 필체로 자신의 책들을 모두 필경시켰으며, 레오나르도와는 인문학 교우였다.


당시 건축가, 조각가, 화가들의 사회적 위상은 높지 못했다.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예술가라기보다는 수공업 장인(匠人)에 가까운 처지였다. 그러나 코시모는 그런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고 넉넉하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이 남긴 많은 작품들 가운데 상당수가 코시모와의 인연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예컨대 미켈로초가 건축한 메디치가의 저택 팔라초 메디치 리카르디는 15세기 이탈리아 건축의 걸작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트라베르사리는 겸손하고 성자 같았기에 코시모가 매우 존경했다고 하며, 트라베르사리와는 코시모를 위해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전 작품의 불순한 내용까지 모두 번역해 줄 정도였다. 코시모는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레에 있는 트라베르사리의 방을 자주 방문했으며, 카를로와는 인문학 교우로 카를로가 코시모의 모친의 장례 연설문을 써줬다고 한다.


코시모는 자선사업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예루살렘 성지 순례자들 가운데 병든 이를 구제하기 위한 병원을 세웠고, 피렌체 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단체를 세워 후원했다. 매년 성탄절과 부활절에는 별도로 거액을 기부했다. 피렌체시의 종교 행사를 비롯한 각종 행사에도 코시모의 후원이 뒤따랐다. 피렌체 시민들 가운데 어떤 형태로든 코시모의 기부, 자선, 후원의 덕을 보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물론 이러한 자선활동을 두고 피렌체 시민의 우호적 여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전략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피렌체 시민 사이의 좋은 평판이야말로 메디치 가문 권력의 기반이자 정당성이었으며, 그것은 결국 막대한 부를 아낌없이 쓰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죽기 몇 년 전에는 시뇨리아가 코시모를 카포 델라 레푸블리카(공화국의 지도자)라 불렀으며, 1461년에 손자 코지미노, 1463년에 아들 조반니를 차례로 잃고는 1464년에는 통풍, 관절염 이외에도 방광염으로 자주 고열이 나 고통을 겪다가 그해 여름 8월,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는 ‘파테르 파트리아이(국부)’라고 부르자는 법령이 통과되어 그의 묘소에 새겨졌으며, 죽기 전에 어떠한 허세나 과시 없이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지만, 그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묘소는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코시모가 세상을 떠난 1464년 이후로도 1737년 지안 가스토네 대공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 시대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가 피렌체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이루었고, 토스카나 대공(大公) 코시모 1세 때는 피렌체가 유럽 굴지의 강국 토스카나 대공국의 수도로 성장했다.

메디치가의 인물들

메디치 가문은 레오 10세, 레오 11세, 클레멘스 7세 등 세 명의 교황을 배출했고 코시모 1세의 딸 마리아 데 메디치가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비가 되는 등, 유럽 여러 나라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


지금으로 치면 엄청난 재벌에 이미 아버지 대에 금융업으로 재벌 2세였던 그의 삶에 무슨 대단한 실패가 있으며 무슨 고난이 있어 그것을 극복했느냐는 철없는 소리를 하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당신이 막연하게 이름만 들었을 이 300년 전통의 메디치 가문을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 오늘 코시모의 삶을 들고 왔다.


그의 아버지가 금융업으로 이미 대단한 부를 쌓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세월이 수십 년 수백 년이 흐른 뒤 역사적으로 어떤 가문이나 어떤 기업을 평가할 때 그 전성기, 정점이 언제인지를 보는 것은 어리석은 분석일 수 있다. 왜냐하면 결국 그 정점이나 전성기는 누군가가 먼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만들어놓은 것을 그저 누릴 뿐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의 경우 실제 정점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코시모의 손자대에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모든 정치적 기반과 자본과 무엇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평판을 만들어놓은 사람이 바로 코시모였다.


우리가 이 시리즈를 통해 이미 살펴보았던 마키아밸리는 일찍이 코시모 메디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 바 있다.


“그는 사려가 깊고 중후하며 예의가 바르고 덕망이 넘쳤다. 고통과 유배와 신변 위협을 겪으면서도 관대한 성품으로 모든 정적을 누르고 사람들의 인기를 모았다. 부자이면서도 생활 모습은 검소하고 태도는 소탈했다. 당대에 그처럼 정치에 통달한 이는 드물었으니, 그는 변화무쌍하고 복잡한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실제로 코시모는 정치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수백 년이 지난 지금 그가 보여준 기업가로서 보여준 사회를 움직이고 정치가들을 움직이는 ‘진정한’ 정치는 이미 그의 시대에 만개해있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관직을 자주 맡지 않음으로써 정치적 야심이 크지 않은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정적들은 물론 시민들에게도 충분히 연출하는 현명함을 구사했다. 그러나 피렌체의 중요한 모든 결정은 코시모가 막후의 실권자로서 좌지우지했다. 당시 피렌체 사람들은 코시모를 ‘무관의 제왕’으로 여기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코시모의 저택 안에서 전쟁과 평화가 결정되고, 누가 공직을 맡을 것인지 선택된다. 그는 공식적인 칭호만 제외하면 사실상 왕이다.”


코시모는 결코 아버지의 경영방식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메디치 가문에서 믿을 만한 이들을 유럽 각지로 보내 지점을 열었다. 몇 년 사이 지점은 피사, 밀라노, 바젤, 제네바, 리옹, 아비뇽, 브뤼주, 안트베르펜, 런던 등 당시 유럽의 주요 10여 개 도시에 설치되었다. 이 지점들은 상품교역도 담당했다. 코시모는 자신의 공장에서 생산한 직물제품을 유럽은 물론 중동 지역에까지 수출하고 향신료, 설탕, 견과류를 수입해 큰 이윤을 남겼다.


게다가 그는 이미 당시부터 현대의 그룹형 경영을 구현했다. 유럽 전역에 걸친 사업 네트워크를 당시의 취약한 통신망으로는 충분히 커버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그는 스스로를 공동 투자자로 자리매김하고, 현지 공동 투자자들에게 자율권을 보장했다. 대신 자신은 전략적 결정이나 사업성과에 대한 평가, 사업상 중요한 인물을 만나는 것 등에 몰두했다.


이러한 경영 방식에 대해 오늘날의 많은 경영학자들이 현대 대기업의 형태가 이미 완성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들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명의 또는 동업자 명의로 되어 있는 10여 개 기업의 대주주 구실을 했고, 그 기업들은 모두 법적으로 독립된 회사 형태를 취했다. 특히, 능력 있는 직원을 파격적으로 후대하는 것도 그의 경영방식의 특징이었다.


예컨대 그는 피렌체 은행 하급 서기로 일을 시작한 조반니 아메리고 데 벤치를 최고 직위까지 승진시키면서 사실상 동업자로 대우해주며 그를 우대해주었다.

재벌 2세나 3세가 그저 부모대의 재산을 이어받아 뭉개고 앉아 있는 한국의 재계 모습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이 당신의 눈에도 보이는가?


당신이 재벌 2세나 3세가 아닌데 코시모의 인생은 전혀 다른 세계 이야기 아니냐며 관심 가질 일이 아니라 생각하는가? 그러니 당신이 자꾸 실패하고 고만한 물에서 진흙탕 발장구 쳐가며 헤매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안 드나?


 자본금이 많은 재벌 2세만이 세상을 경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임에도 은행 하급 서기였던 자가 그의 눈에 발탁되어 동업자의 신분까지 인정받고 올라섰다는 내용은 눈에 보이지 않는가? 결국 당신의 인생을 어디에 놓는가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당신은 어떤 식으로 세계를 경영해나갈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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