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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08. 2022

평생 번 돈을 모두 쏟아부은 발명품이 쓰레기가 되어도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으로 중영 사전을 완성해내다.

205번째 대가의 이야기.


1895년 푸젠(福建) 성 룽시(龍溪)의 평화(平和) 현 남부 판자(坂仔)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허러(和樂)였고 중학교 때는 위린(玉霖)이라 불렀다. 대학 입학 후에는 위탕(玉堂), 1925년 이후 위탕(語堂)이라는 이름을 썼다. 아버지는 상인 출신의 목사였다.


소학교부터 기독교학교를 다니며 서양문화의 세례를 받았고, 자신의 집에 살았던 미국인 전도사의 영향을 받아 12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1912년 17살 때 상하이 세인트 존스 대학에 입학하여(1916년 졸업) 광범위한 독서에 탐닉했고, 칭화 학교(칭화대학의 전신)에서 영어교사로 일하며 그즈음부터 중국 전통문화와 고전 지식을 집중적으로 쌓았다.


고향 마을 처녀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가 실명한 할아버지를 돌봐야 한다고 고수하는 바람에 고향을 떠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별해야만 했다. 대학 시절에도 여대생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그의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여대생의 부모가 반대하여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부모의 권유로, 상하이 세인트 메리 학교를 졸업한 랴오 추이펑과 1919년 유학을 떠나기 직전 결혼했다.


칭화 학교에서 유학 보조금을 받아 하버드대학에서 비교문학 석사학위를 받았지만 이후 보조금이 끊어지면서 학업을 지속하기 어려워지는 곤란을 겪게 되자, 프랑스로 건너가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독일 예나대학에서 한 학기를 마친 뒤 라이프 리치 대학으로 옮겨 1923년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베이징대에서 비평과 언어학을 가르쳤고, 1925년에는 베이징 사범대학 강사, 베이징 여자 사범대학 교수 및 교무처장이 됐다. 그는 이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도 학생들의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깃대와 벽돌을 들고 경찰들과 싸웠다. 경찰은 부랑아들을 고용하여 학생들에게 돌을 던지게 하여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때 나는 내 야구 솜씨를 발휘할 기회를 많이 가졌다.”

중국에서 태어나 동양을 대표하는 지성인으로 손꼽히며 노벨문학상의 후보로까지 지명되었던 문필가이자 소설가이자 언어학자였던 우리에게는 임어당으로 더 익숙한 린위탕(林語堂)의 이야기이다.


중국에서 학부를, 미국 하버드에서 비교문학 석사를, 독일의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언어학 박사를 받았으며 프랑스에서 중국 노동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다양한 학문 과정을 통해 광범위한 독서와 경험으로 다채로운 글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1930년대부터 중국어 외에도 영어로 글을 쓰고 발표했다. 1936년 뉴욕으로 갔고, 외국 독자들에게 중국을 소개하는 <생활의 예술>(한국에는 <생활의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출간)이 그다음 해에 미국, 영국, 캐나다에서 출간되었다. 이후에도 대외에 중국을 알리는 작업을 계속하여 중국 고전을 영어로 번역하였고, 1972년에 그의 최고 업적이라 자부하는 현대 중영 사전을 만들었다.

1926년에 푸젠 성 하문(厦門) 대학 문과 주임교수로 옮겼지만 이듬해 1927년 3월 우한(武漢) 정부 외교부장 천유런(陳友仁)의 비서로 초빙 받아 한 때나마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같은 해 9월 우한 정부가 소멸한 이후 상하이로 옮겨 이후에는 쭉 문필가 생활로 일관했다. 귀국 후 1920년대 말까지 그는 루쉰이 주도하여 1924년 창간된 주간지 <어사>(語絲)를 무대로 활동했다. 그는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배워서 여유가 생기면 벼슬이나 하려는 생각을 갖고 글을 쓰는 이들이 싫었다. 우리는 매 개인이 모두 자신의 진심에서 우러나는 말을 해야지 남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 스타일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어사>를 우리 마음에서 솟아나는 소리와 말이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공원으로 여겼다.”


1920년대 린위탕은 언어학자이자 문예평론가로서의 면모가 강했지만, 30년대 이후부터는 산문가, 번역가로서 중국 문화를 서양에 소개하는 일에 주력했다. 1936년 8월 린위탕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을 무대로 전업 문필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미국 이주에는 작가 펄 벅의 권유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린위탕은 이미 1935년에 미국에서 출간한 <내 나라 내 국민>으로 미국 독자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었고, 1937년에 내놓은 <생활의 예술>(영어 원제는 The Importance of Living.)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미국에서 린위탕은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는 글을 자주 기고했고 1940년과 1943년에 잠깐 귀국해 강연했지만, 중국 문예계에서의 영향력은 크지 못했다. 그는 <경화연운>(1939), <풍성학려>(1941), <당인가>(1948), <주문>(1953) 외의 많은 소설과 <소동파전>(1947), <노자의 지혜>(1948), <장자>(1957), <측천무후>(1957) 등 중국 문학, 사상, 고전 관련 책도 발표했다. 그가 발표한 책만도 중문, 영문을 합쳐 50여 권에 달한다.

1954년에는 싱가포르에 화교들이 세운 난양(南洋) 대학 교장(총장)으로 추대되었지만 학교 측과의 마찰로 반년 만에 그만두었다. 1967년 홍콩 종원(中文) 대학 연구교수로 초빙되어 <당대 한영사전> 편찬 책임을 맡아 1972년에 출간했고, 1975년 <경화연운>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린위탕은 30년 넘게 미국에서 살았지만 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고 집도 사지 않았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미국 국적을 취득하라 권했지만, 이곳은 내가 뿌리를 내릴 곳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집을 사지 않고 월세를 내며 살았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앞서 설명했던 바와 같은 자신의 다국적인 학문적인 과정과 삶의 경험을 통해 서양과 동양의 비교를 깊이 있는 성찰과 통찰을 통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글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것은 그가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영어 공부를 통해 외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 서양의 지식을 받아들인 동양인이라는 포지션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가 대학을 가서야 중국의 고전을 제대로 접하고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포인트이다. 특히 그가 어려서부터 중국 고전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점은 나중에 교류했던 루쉰과도 차별점을 갖는다. 특히 가족과 함께 도미한 이후 30년이나 뉴욕에 살면서 서양의 한 복판에서 이방인으로서 중국을 서양에 소개하는 글에 중심을 둔 문필 생활을 했다는 점 역시 그의 글이 갖는 특징을 만들어낸 자양분과도 같은 환경이고 경험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가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을 통해 대략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중국은 실천을 중시하고 서양은 추리를 중시한다. 중국은 정을 중시하고 서양인은 논리를 중시한다. 중국철학은 천명을 따라 마음의 평안을 얻는 임명안심(立命安心)을 중시하며, 서양인은 객관적인 이해와 해부를 중시한다. 서양은 분석을 중요하게 여기며 중국은 직감을 중요하게 여긴다. 서양인은 지식 추구에 중점을 두고 객관적 진리를 추구한다. 중국인은 도의 추구를 중시하여 행동의 도를 추구한다.

<동서 사상의 차이> 중에서


중화 민족을 서양 국가와 비교해보면 진취성이 모자라고 보수적이며, 용감하고 의연한 정신이 모자란다. 반면 인내심이 매우 깊다. (…) 중국 문화는 정적인 문화고, 서양 문화는 동적인 문화다. 중국은 음(陰) 위주이고 서양은 양(陽) 위주다. 중국은 정(靜) 위주고 서양은 동(動) 위주다.

<중외의 국민성> 중에서


많은 서양인들에게 린위탕은 중국과 서양을 비교하면서 특히 중국 문화의 특징을 입담 좋게 해설해주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가 펼친 중서(中西) 문화 비교론은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얼핏 보면 재미있고 설득력 있는 듯 하지만, 중국과 서양의 문화적 특징을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단순하게 대비시킨다는 비판도 받는다.


우리가 현재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인 ‘물질의 서양과 정신의 중국,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서양과 보수적이고 정적인 중국’이라는 통념적인 이분법이 자리 잡게 하는 데 린위탕의 역할이 컸다는 비판적 지적도 있으며, 그러한 이분법에 대해 이른바 오리엔탈리즘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읽어낼 수 있다.


그래서 린위탕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재치, 위트, 유머, 풍류, 그리고 인생에 대한 여유로운 관조가 돋보이는 산문가이자 중국과 서양 문화의 가교(架橋) 구실을 한 동양을 대표하는 지성이라는 좋은 평가도 있지만, 반대로 중국의 복잡 다난한 현실에서 사실상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하여 한가로운 글이나 쓰며 미국에서 한 세월을 보낸 한량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격동하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국의 현실과 미래를 고민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당시 중국의 많은 학자, 작가, 사상가들에 비하면 린위탕은 분명 사회에 그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고, 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국과 서양의 문화를 비교론적 시각을 일반인들에게 흥미롭게 제시하며 설명하였고, 인생의 여유와 운치가 물씬 묻어나는 특유의 산문으로 일가를 이룬 문필가였다.


만년의 그는 타이완과 홍콩을 오가며 생활했지만 타이베이 교외 양음산 기슭에 세낸 정원이 딸린 저택에서 은거하기를 좋아했다. 1971년 큰딸이 자살한 뒤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고 급격히 병약해졌다. 1974년 타이완 문화계가 열어 준 80세 생일 파티 이후 외부 생활을 사실상 마감하고 1976년 82세를 일기로 홍콩에서 세상을 떠나 양음산 기슭에 묻혔다.

자아, 여기까지가 당신이 기존의 자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린위탕의 인생이다. 도대체 그의 인생 어느 부분이 실패라고 할 것이며, 그렇게 격동하는 중국을 외면하고 살며 미국으로 이주하여 현실과는 유리된 글을 쓰는 것으로 소일한 그의 인생이 어떻게 이 시리즈에 등장할 수 있느냐고 의아해하다 못해 따질 수 있겠다.


그런데 이제 대가들의 삶을 200여 명이 넘게 살펴보았으면, 당신이 적당히 인명사전이나 위인전을 통해 보았던 그들의 약력에는 그들이 겪었던 좌절과 고난들이 모두 생략되었다는 것 정도는 이제 이해할 때도 되지 않았나?


지금부터 그의 수많은 실패 중에 가장 뼈아팠을 실패 한 가지를 소개한다.


그의 작품이 미국에서 인기를 얻어 당대 유명 작가였던 펄벅의 권유로 미국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을 때, 그리고 이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던 그 30여 년간의 미국 생활에서 그는 그 많은 돈을 집도한 채 사지 않고 어디에 썼을까? 결과부터 그 돈은 다 날리고 심지어 빚까지 졌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그는 미국인들이 알파벳으로 타자기를 사용하는 것에 매력과 질투를 동시에 느꼈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지금은 병음이라고 하여 알파벳으로 입력을 그나마 하고 있지만, 한자의 특성상 한자를, 영어처럼 활자화하여 타자기로 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대로 된 한자 타자기를 제작하는데 자신의 공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이걸 제작하기 위해 차이나타운을 뒤져서 활자 제작공과 타자기를 실제로 만들 수 있는 타자기 수리공 및 기계 제작가를 찾아내서 하나하나 직접 제작에 들어가게 된다.


사실, 린위탕은 미국으로 가서 직접 제작에 돌입하기에 앞서, 그러니까 타자기를 만들기 전에 ‘도대체 한자를 어떻게 한자를 빨리 찾아서 자판 안에 다 넣을 것인가?’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출간한 책들이 히트를 치게 되면서 어느 정도 실현할 수 있는 돈을 마련할 수 있게 되자 이제 본격적으로 개발에 들어간다.


사업가도 아니었지만, 사업적인 기질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이 고지식한 글쟁이는 중국어 타자기를 개발하겠다고 생각하고는 투자자를 모집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이 벌어 모은 돈을 모두 올인하여 연구와 제작에 들어간다. 하나하나 새로 부품을 설계하고 연동시키면서 들어간 세월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 사이 2차 대전이 지나갔고 결국 2차 대전이 끝날 무렵에서야 완성품이 나왔다.

명쾌타자기의 내부 구조사진. 뒤쪽의 원통에 기본적으로 7000자를 넣었고, 이후 확장 가능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9만자까지 확장가능했다.

한자를 사용빈도수대로 나눠서 6면의 통에 배열하고 그 한자를 우선적으로 찾아서 타자를 칠 수 있는 방식이었는데, 타자기 위쪽에 현재의 액정 스크린 비슷한 주사선 스크린을 넣어서 글자를 찾는 방법을 빠르게 하는 등 현재 컴퓨터에서 중국어를 입력하는 방법과 상당히 유사한 방법이었다.


린위탕의 둘째 딸, 임태을이 직접 타이피스트가 돼서 열심히 연습해서 분당 50개 정도의 한자를 입력할 수 있는 상당한 수준의 결과물이 나오자, 린위탕은 흥분한 마음으로 특허까지 등록하게 된다.

그리고 미국의 유명 타자기 회사에 초대장을 발송하고 발명 발표회를 멋지게 열 생각으로 준비를 시작한다. 당당하게 초대장에 ‘저명 작가 린위탕 중국어 타자기를 발명하다’라고 적어 보내면서 타자기의 이름도 명쾌하게 문제를 해결한 것과 같이 ‘명쾌(明快)’라 이름 짓고 중국 전역에 자신이 발명한 타자기로 중국어로 글을 출간할 미래에 대한 부푼 꿈에 차 있었다.


린위탕은 발표회에 모인 미국 유수의 타자기 회사의 수많은 관계자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보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고 그 화려한 막을 올렸다. 하지만, 정작 현장에서 타자기는 고장을 일으켜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았고, 기대에 차서 모였던 관계자들은 ‘그럼 그렇지’를 연발하며 비아냥 섞인 웃음만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겨우 급히 제작자를 다시 불러서 다시 고치고 재확인까지 하고서 수리를 끝낸 다음날 다시 시연회를 열게 된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이 하나의 발명품으로 대박이 날 수 있을 기회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중국시장은 사람 수로 인한 시장의 거대함 때문에 모두가 사용하는 아이템이라는 전제하에 계산을 하게 되면 이익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게 된다. 그 점을 강하게 어필하여 린위탕은 1946년 그해, 미국의 저명한 회사와 로열티 계약까지 맺게 된다. 이제 중국에 출시할 일만 남은 것이다.


1946년. 바로 그해 국민당이 중국 공산당과의 내전이 터져버리고 만다. 로열티 계약하며 사인한 이름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장제스가 ‘공산당을 공격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내전이 터졌는데 타자기를 풀 여유는 있을 리 만무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1949년에 그 내전에서 최후의 승자는 마오쩌뚱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에게 돌아가게 된다.


내전이 발발하고 내내 가슴 졸이며, 압도적인 승리를 예상하던 국민당의 장제스가 승리하게 되면 다시 시장이 열린다며 기대하던 린위탕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최후의 승자가 마오쩌둥이 되면서 중국과 미국과의 관계는 끊어져버렸고 죽의 장막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그렇게 그간 벌어놓은 모든 돈과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은 중국어 타자기, ‘명쾌(明快)’는 ‘명쾌하게’ 린위탕의 평생 과업이 박살 났음을 확실하게 확인시켜주었다. 이때 친우였던 박진주 여사에게 돈 때문에 손 벌렸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하면서 박진주 여사와의 관계도 엉망이 되어버렸고, 이후 대만에 갈 때까지 그는 여기저기 압박받는 상황에 몰려 도망치듯 대만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위에 간략하게 기술했던 싱가포르의 화교 대학교 총장 부임했다가 불과 반년만에 쫓겨나는 나오게 된 이유도 바로 장졔스주의자라는 사상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흘러 린위탕의 둘째 딸 임태을이 중국어판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주필이 돼서야 다시 아버지의 평생을 바쳤던 발명품이 미국 타자기 회사에 있었다는 생각을 해내고 해당 회사에 연락을 하지만, 회사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답변 한 줄을 보내온다.


“지난달에 폐기해버렸습니다.”


아마도 제대로 된 흐름을 맞았더라면 중국어의 한자 입력 시스템의 론칭을 수십 년은 앞당겼을 명쾌 타자기는 특허청에 제출했던 도면 몇 개. 린위탕과 그의 둘째 딸이 프로토타입을 연습하는 사진 몇 장 외에 그 어떤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이 타자기는 그냥 묻혀버리고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을까? 그렇지 않다. 물론 린위탕에게 라이센스를 산 회사에서는 프로토타입 제품뿐 아니라 설계도면까지 깡그리 폐기해 버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즉, 복원품조차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진 것이었다. 발명자이자 개발자였던 린위탕도 이 설계도는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저 키보드 모형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린위탕은 이 키보드 모형과 개발을 위해 중국어를 배열했던 경험을 토대로 자신이 최고 업적으로 여기는 <현대 중영사전>(1972년작)을 만드는데 녹여낸다. 그가 타자기의 키보드 배치를 고민하는 동안, 그 연구를 통해 강희자전 식이 아닌 다른 한자 분류체계를 만드는데 큰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인생의 수십 년의 노력과 그가 작가로서 번 돈이 전부 들어간 타자기의 실패는 그의 인생 이야기 어느 부분에도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자살한 그의 큰 딸 이야기에 대해서도 그렇고, 정작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겨웠을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 어떤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 <인생에 실패한 대가들의 이야기> 시리즈가 다른 위인전과 다르다는 것이다.(이미 소개한 대가들이 200여 명이 지났음에도 다시 이 구조를 상세히 설명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글을 쓰는 이들이 자신의 모든 삶을 글 속에서 보여주지는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삶의 경험이 녹아들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진솔된 자신의 삶에 대한 고백으로 이어진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실패로 인해 좌절했던 대가들의 삶이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대가들의 글에서도 찾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


내가 멋짐이 폭발하기만 하는 위인전의 구도를 피해서 그들이 겪었을 수많은 좌절과 실패를 당신에게 돋보기를 들이대고 소개하는 이유는, 그들도 당신과 똑같이 실패에 힘들어하고 좌절에 아파했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사전은 큰 딸이 자살하고 난 이듬해 세상에 나왔다. 그 말은 그가 사전작업에 몰입하고 있었을 시간에 그의 딸은 계속해서 죽음을 생각하는 힘겨운 삶의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큰 딸의 자살 이후, 그가 느꼈을 삶의 좌절과 허망감은 이후 그가 칩거하여 다른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80이 넘게 살았지만, 40대에 자신의 자서전을 쓸 정도로 그는 자신감에 차 있었고, 자신이 중국의 어떤 지성인보다 서양에 대해 잘 알고 다양한 나라에서 공부하고 많은 지식과 경험을 습득하여 앞서가고 있었다고 자부했다. 앞서 설명한 타자기에 대한 발명에 대한 포착도 그 의식의 바탕에서 출발한 것이라 추정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다.


내전때문이든 그의 경영인으로서의 감각이나 능력 부족이든 그는 실패했다. 그의 딸이 자살하는 것조차 막지 못한 무기력한 아버지라는 자괴감에 빠져야만 했다. 이 지난한 과정들을 보고서 그 어느 누가 그의 삶이 화려하게 성공만을 걸어왔고, 사회에서 유리되어 혼자서 탱자탱자 취미 지향이나 언급하는 삶이었다고 동경할 것이냔 말이냐?


당신의 삶이 당신의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당신이 마음먹은 대로 인생이 술술 풀린다면 그 어느 누가 고생하며 성공을 위해 노력할 것인가? 실패와 좌절이 없는 과정은 성공 자체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라면 힘겹게 고민하고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힘겨워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그러니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힘겨움과 고난과 고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고 당신이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거쳐나가야 할 자연스러운(?) 통과제의 같은 것이다. 다만 가장 큰 차이는 그것을 견디고 이겨내서 그 위에 올라 당신이 지나온 그 힘겨움이 지나고 나니 별 것이 아니라고 내려다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느냐, 결국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저 그 앞에서 무릎 꿇고 다른 쪽으로 돌아가서 그곳이 어떻게 생긴 곳이었는지조차 확인하지 못하게 되는가에 차이를 만들 뿐이다.


당신이 굳이 내가 힘겨웠을 그 지점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꼭대기에 올라 웃으며 다시 볼 필요가 없다고,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말이다. 당신이 계단을 통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고속으로 꼭대기까지 쉽고 빠르게 올라갈 수 있는 우연한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당신이 그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아슬아슬한 줄에 매달려 그 기계를 만들고 테스트하고 계단을 통해 수차례 오르락내리락하는 과정을 통해 완성된 것이다. 그 과정을 모두 알고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은 엘리베이터가 갑작스럽게 고장 났을 때 당황하지 않고 어떻게 계단을 사용해서 그 위기를 타계해야 할지를 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모르고 우연히 올라탄 엘리베이터가 편하고 좋은 것만을 희희낙락하던 자는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에 그 어떤 대처도 하지 못하게 된다.

당신의 삶은 언제나 돌발 상황의 연속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다면, 언제 있는 돌발 상황에서도 당신은 해결점을 찾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더 나은 방식과 더 나은 무언가를 또 얻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당신은 지금 어떤 준비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고 있는가? 그저 지쳐 쓰러져 아프다고 징징거리고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얼른 깨닫고 가던 길을 향해 시선을 거두지 마라.


진정한 복서는 펀치를 눈뜨고 맞는다.

용감해서가 아니다.

바로 다음 날아올 펀치를 '또' 맞지 않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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