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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07. 2022

소아마비에, 교통사고로 죽을 뻔하고, 남편의 바람까지

세계가 인정한, 멕시코를 캔버스에 옮긴 여성화가로 인정받다.

204번째 대가의 이야기.


멕시코 혁명(1910) 3년 전인 1907년, 멕시코 시티 근교 코요아칸에서 헝가리계 유태인 혈통이며 독일에서 이민 온 아버지와 인디오, 스페인 혈통의 어머니의 네 딸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재혼이었던 터라 위의 두 언니는 어머니가 달랐고 어머니에게 그녀는 첫 아이였다. 그녀는 자신을 혁명의 딸로 여겨서, 출생증명서와 달리 자신의 생일을 3년 후인 혁명일로 여기고 살았다.


이 혁명은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보다 7년이나 앞서는 것으로 디아스 독재정권의 지나친 노동자와 농민 착취에 항거하여 일어났다. 때문에 그녀가 성장하던 시기는 혁명의 열기가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가 출생 직후 병이 나서 원주민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는데, 그런 기억은 그가 자신을 멕시코인으로 여기는 정체성의 근거가 됐고, 작품 <유모와 나>(1937)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사진작가였던 아버지는 무뚝뚝했지만 총명한 셋째 딸을 유난히 아꼈다. 그래서 어린 그녀에게 철학, 고고학, 음악, 미술 등 여러 분야를 공부할 수 있도록 늘 칭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아버지에게 사진기 다루는 법도 배우고, 아버지를 도와 수정 작업 등도 관여했는데, 이는 사실적이고 세밀한 칼로의 초상화에 대한 접근법에 밑거름이 되었다.


1913년 6살에 척추성 소아마비로 9달간 집에 있어야 했다. 가는 오른쪽 다리를 가리려 양말 여러 켤레를 겹겹이 신고, 오른쪽 굽이 높은 신발을 신었으며, 긴 치마의 멕시코 의상을 입곤 했다. 걸을 수 있게 되자 재활 훈련의 일환으로 자전거, 롤러스케이트, 수영, 복싱, 레슬링 등을 두루 섭렵했는데, 모든 것을 정력적으로 해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이 사건을 계기로 또래들과 달리 성숙하고 우울한 내면을 갖게 된 것이었는데, 겉으로는 더욱 천방지축으로 굴었다.


그녀는 멕시코 독일계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후 1922년 멕시코 국립 예비 학교(Escuela Nacional Preparatoria)에 입학한다. 입학시험에 합격했을 때 가장 기뻐한 사람은 역시 아버지였다. 당시 전통은 가장 똑똑한 아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위험한(?) 곳에 딸을 보내는 것을 여의치 않아했지만 아들이 없던 아버지는 자신의 좌절된 학자의 꿈을 이루고자 딸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녀는 의과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5년 과정을 등록했다. 당시에도 그림에 흥미는 있었으나 장래로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로, 멕시코 민중 벽화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으로 유명해졌으나, 교통사고로 인한 신체적 불편과 남편의 문란한 사생활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고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작품으로 승화시켰고,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우상으로 떠오르며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프리다 칼로 데 리베라(Frida Kahlo de Rivera)의 이야기이다.


초현실주의 화풍으로 유명했지만, 자신은 정작 “나는 결코 꿈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나의 현실을 그릴뿐”이라며 초현실이라 불리는 것을 거부했다.


거울 속의 자신을 관찰하며 고통을 이겨냈고, 자신과 관련된 소재들을 즐겨 그렸기 때문에 그림 중 자화상이 많다. 143점의 회화 작품 중 1/3 가량인 55점이 자화상이다.

멕시코 시티 중앙에 위치했던 국립 예비 학교는 당시 멕시코 최고의 교육기관이자 혁명 이후 행동주의, 개혁주의, 분노, 열정이 지배하는 도가니의 한가운데였다. 당시 진보적인 교육부 장관이었던 호세 바스콘셀로스의 정책 덕에 그해 여학생 입학이 처음으로 허용되어 프리다가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 전교생 2000명 중 여학생은 35명이었다. 프리다와 동급생들은 멕시코 최고의 수재들이자 문제아였고, 장차 멕시코의 주역들이었다.


사회 분위기만큼이나 학교 내부에도 급진파와 극보수파 등 여러 정치적 분파들이 치고받았고, 교내 출판물로 치열하게 싸웠다. 프리다도 여러 동아리에 들었는데, 그중 으뜸은 ‘카추차스(Cachuchas)’였다. 프리다는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대하는 카추차스의 분위기를 무척 좋아했다. 카추차스는 남학생 7명과 프리다를 비롯해 여학생 2명으로 구성되었고, 직접 정치에 관여하진 않았지만 바스콘셀로스를 추종하는 등 낭만적 사회주의를 신봉했다.


그들은 명석한 두뇌로 학교 내 개혁을 선동하고 상식을 뛰어넘는 돌발행동 테러로 교실을 무질서로 빠트렸다. 예컨대, 당나귀를 타고 복도를 지나가거나, 개를 폭약으로 감고 불 붙여서 복도에 풀어놓았다.


특히 안토니오 카소 교수를 꼰대라 생각해서 무척 싫어했는데, 골탕 먹이겠다고 벼르다가, 대강당에서 교수의 진화론 강의가 있던 날, 연단 바로 위 창문에 15cm가량의 폭죽을 설치하고 밖으로 20분짜리 도화선을 밖으로 빼놨다. 그러자 강의하는 도중에 폭죽이 터져서 유리조각, 돌멩이, 자갈이 교수 머리 쏟아졌는데 교수는 괴팍한 학생들에 익숙했던지 아무 동요 없이 툭툭 털고 계속 강의했다고 한다.


물론 카추차스는 늘 그렇듯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는데, 미리 정해진 멤버가 설치 후 강의실에 착석하고 전혀 관계없는 다른 멤버가 일을 개시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칼로는 여러 가지로 사고를 치고 다니긴 했지만 성적만큼은 우수했다. 특히 머리가 워낙 좋아 교과서를 한 번 읽고 다 암기해버렸고 일설에 의하면 퇴학 통고를 받자마자 장관 바스콘셀로스에게 직접 항의서를 보냈는데, 장관이 여자애 하나 못 다루냐면서 교장에게 복학시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프리다 칼로는 그 길로 책상을 박차고 학교를 나섰다고 한다.

이 무렵에 멕시코 벽화의 거장이던 디에고 리베라와 만나는데, 당시 리베라는 학교의 벽화 작업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1925년, 그녀가 18살이던 해, 당시 남자 친구였던 알레한드로와 함께 본가인 코요아칸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큰 교통사고가 나서 대수술을 받게 된다. 이 사고로 칼로는 왼쪽 다리 11곳이 골절되고 오른발이 탈골되었으며 요추, 골반, 쇄골 등의 부위가 골절되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심각한 중상을 입게 된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의사들은 아무도 그녀가 다시 걸을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했다. 칼로는 꼬박 9개월을 전신에 깁스를 한 채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녀는 이 사고로 자신은 ‘다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고 표현했다. 아무것도 꿈꿀 수 없는 시간들이 칼로를 덮쳤다.


이 사고로 칼로는 죽을 때까지 하반신 마비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고 세 차례의 유산, 그리고 끝도 없는 고통스러운 수술로 평생을 보내야 했다. 이 사고 이후 그녀가 받은 수술은 총 35번으로 이 35번에는 소아마비와 사고의 여파로 인해 받은 척추 수술 7번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교통사고의 여파는 매우 심각했는데, 사고가 일어날 당시 부러진 철근이 그녀의 허리 부분을 관통했는데 하필이면 자궁을 크게 다쳐 오랫동안 생리 불순에 시달렸다. 또한 아이를 간절히 원했으나, 사고로 자궁의 기능이 상당히 저하된 탓에 임신을 해도 유지하지 못하고 모두 유산하는 후유증을 겪어야만 했다.

깁스를 한 채 침대에 누워 두 손만 자유로웠던 칼로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다. 부모는 그녀를 위하여 침대의 지붕 밑면에 전신 거울을 설치한 캐노피 침대와 누워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젤을 마련해주었다. 누워서 운신할 수 없었던 칼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관찰하고 또 관찰하며 스스로의 모습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녀가 평생을 두고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였다. 칼로는 자화상에 대해 “나는 너무나 자주 혼자이기에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에 나를 그린다”라고 말했다.


걷기 위한 수 차례의 수술 끝에 칼로는 기적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은 그녀를 평생 동안 괴롭혔다. 척추의 고통은 그녀에게 새로운 꿈을 꾸게 하였다. 병상에 누워 그림을 그리는 동안 칼로는 자신의 운명이 그림에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기에 그림을 정확히 평가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칼로는 리베라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칼로는 사회주의 사진작가인 티나 모도티를 통해 리베라를 만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재능과 열정을 평가받고 싶어 했다.


사실 우연히 스치긴 했지만, 사고를 당하기 1년 전 학교에 작업을 왔던 디에고 리베라와는 만난 적이 있었다. 디에고는 그녀와의 첫 만남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이후 그녀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녀의 태도는 얼핏 봐도 남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위엄과 자신감이 있었고, 눈동자는 야릇한 빛을 뿜었다.

그녀는 아직 어린아이처럼 귀여웠으나, 어딘가 모르게 꽤 성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당신이 작업하는 모습을 보면 방해가 되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천만에, 꼬마 아가씨. 오히려 영광이지”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에게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나자, 질투심에 불탄 루페는 여자애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루페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더 화가 난 루페는 뒷짐을 지고 뚜벅뚜벅 걸어가 여자아이를 쏘아보았다.

여자아이는 표정만 굳어질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루페가 노려보자 여자아이 역시 말없이 루페를 노려보았다. 루페는 무척이나 놀란 눈치였고 오랫동안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이윽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말했다. “저 애 좀 봐! 저렇게 어린애가 자기보다 크고 어른인 여자를 겁내지 않잖아. 난 왠지 저 애가 맘에 들어.” 여자아이는 세 시간쯤 있다가 “안녕!”이라는 인사를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났다.

기둥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이 그였고, 그의 이름이 프리다 칼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1년 후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가 나의 아내가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칼로의 그림을 본 리베라는 “프리다의 작품에서 예기치 않은 표현의 에너지와 인물 특성에 대한 명쾌한 묘사, 진정한 엄정함을 보았다. (…) 잔인하지만 감각적인 관찰의 힘에 의해 더욱 빛나는 생생한 관능성이 전해졌다. 나에게 이 소녀는 분명 진정한 예술가였다”라고 평했다. 리베라는 화가가 되겠다는 칼로의 결심을 굳혀주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사랑이 싹텄다.

당시 디에고에 대한 사랑을 프리다는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묘사했다.


“나의 평생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1929년 8월, 22세의 칼로는 그녀보다 21년 연상인 리베라와 결혼을 했다. 이미 두 번이나 결혼한 적이 있는 리베라와 칼로의 결합을 사람들은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이라고 했다.


당시 멕시코를 대표하는 천재화가의 반열에 올라있던 리베라의 아내로서 칼로는 만족하는 듯이 보였다. 멕시코 공산당 입당과 탈당을 같이 했으며 함께 사회운동에 나섰고 그의 그림을 위해 기꺼이 모델이 되었으며 영감을 주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한 남자의 아내로 사는 조용하고 행복한 삶은 칼로와는 먼 것이었다. 이미 수많은 여성편력을 가지고 있던 리베라는 결혼 후에도 외도를 멈추지 않았다. 남편 리베라로 인해 칼로는 질투와 분노를 넘어선 고독과 상실감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만 했다.

프리다는 디에고와 여러 작품 활동을 했지만 디에고의 여성 편력으로 2차례의 이혼과 재결합을 했다. 과거에 겪었던 사고의 후유증은 매우 심각해서 그는 평생 아이를 원했지만 모두 유산했다. 칼로는 리베라의 아이를 낳고 싶었지만 교통사고로 다친 그녀의 몸은 아이를 품지 못했다.


몇 차례의 유산은 '모성을 가진 여성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절망감을 더해주었다. 리베라와 아이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그림으로 승화되기 시작했다. 칼로는 멕시코 전통 속에 고독과 고통을 녹여내어 그 어떤 미술 범주에도 들지 않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냈다. 일부 유럽의 예술가들은 그녀의 그림을 당시 유행하던 초현실주의 걸작이라고 평했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녀는 자신의 그림이 초현실주의나 그 어느 범주에도 들지 않는다고 그러한 평가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리베라의 수많은 여성편력을 인내했던 칼로였지만 그녀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리베라의 외도는 여동생 크리스티나와의 관계였다. 남편과 여동생으로부터 동시에 배신당한 칼로는 리베라의 성실한 아내 역할을 그만둬 버렸다. 그녀는 남편을 떠나 자유롭게 여행을 하였으며 조각가, 사진작가 등의 애인을 두기도 하였고 동성과 사랑을 나누기도 하였다. 별거하는 동안 칼로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 가뜩이나 좋지 않은 건강마저도 악화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방황하는 육체에 비해 정신은 더욱더 리베라에게 집착했다. 리베라를 증오하면서도 떠나지 못했고 사랑하면서도 가까이 가지 못하는 상황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다만 한 순간, 칼로에게 남편 리베라를 대신할 만한 강렬한 만남이 있었다. 상대는 스탈린에게 쫓겨 멕시코로 망명 온 트로츠키였다. 레닌이 죽은 후 당의 노선을 놓고 스탈린과 대립하던 트로츠키는 1927년 당에서 제명되고 1929년에는 소련에서 추방되었다.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를 전전하고 있던 트로츠키를 멕시코로 부른 것은 리베라였다. 리베라는 당시 대통령이던 카르데나스에게 청하여 트로츠키 부부가 멕시코로 망명할 수 있도록 적극 주선하였다. 그리고 트로츠키 부부의 거처로 칼로의 친정집인 ‘푸른 집’을 제공했다.

트로츠키 부부와 함께

칼로는 트로츠키라는 이 지치지 않는 시대의 혁명가에게 매료되었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경외에 가까운 감정이었을 것이다. 트로츠키 또한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고 강렬한 개성을 가진 칼로에게 이끌렸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연인이었다는 의견도 있고 단순한 동지애에 그쳤다는 의견도 있다. 그것이 애정이었든 우정이었든, 칼로가 트로츠키에게 선물한 자화상 속 그녀의 모습은 밝고 신선하며 당당한 분위기를 풍긴다. 리베라에 얽매여 있었을 때 그린 어두운 분위기의 자화상과는 사뭇 다르다. 그림으로 표현된 칼로의 감정은 분명 연모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은 오래가지 못했다.


1937년 1월 망명한 후 ‘푸른 집’에 기거하던 트로츠키는 그 해 7월 서둘러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 서로에게 끌리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추스르기 위한 트로츠키의 이성적 판단이었던 것 같다. 1년 후 칼로는 뉴욕과 파리로 전시 여행을 떠났고 트로츠키는 1940년 스탈린이 보낸 킬러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트로츠키와의 만남 이후 자신에게서 마음이 일시적으로 떠나버렸던 칼로에게 배신감을 느껴서인지, 아니면 당시 열애 중이던 미국 여배우와 결합하기 위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칼로를 오래 붙잡고 있던 리베라는 1939년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리베라의 수많은 외도와 배신을 참아가면서도, 자신도 다른 사람과 애정을 나누면서도, 언제까지나 리베라의 곁에 있고 싶어 했던 칼로의 바람은 무너졌다. 이혼을 받아들이고 칼로는 분노와 상실감에 피폐해져 갔다. 비록 질투와 배신감에 온 몸을 떤다 하더라도 리베라의 곁이 아니면 자신의 삶은 어둠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즈음 늘 그녀를 괴롭혔던 척추의 고통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몇 차례의 대수술을 했지만 그녀의 육체는 계속 무너져 내렸다. 이혼한 지 1년 후 미국에서 수술을 마친 칼로에게 리베라가 다시 찾아왔다. 그들은 경제생활과 성생활을 함께 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재결합했다. 리베라와 두 번째 결혼 후의 삶은 겉으로는 비교적 평온했다.


고향 코요아칸에서 앵무새와 원숭이, 개를 기르며 칼로는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림을 계속 그렸고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쳤다. 뉴욕과 파리 전시 이후 국제적으로도, 국내에서도 명성이 쌓여갔다. 리베라의 독특한 아내가 아닌 화가 칼로의 입지도 확고해졌다. 리베라의 외도는 여전했지만 그건 이제 아무런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다. 지옥과도 같은 육체적 고통이 그녀를 내리찍어 오로지 자신의 척추와 그림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이미 그녀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1940년대 말부터 건강이 악화된 칼로는 결국 오른쪽 다리를 잘라내야만 했고 몇 차례의 척추 수술은 실패를 거듭했다. 칼로는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서 지내야만 했으며 휠체어에 기대 간신히 앉아있을 수 있었다.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칼로는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에 서너 시간씩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리고 1948년 멕시코 공산당에 다시 입당한 뒤 사회적인 관심과 참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녀의 정치적 성향은 말년에 그린 그림들에 표현되었다.

미술관이 된 칼로의 '푸른집'

1953년 멕시코에서는 처음으로 칼로의 개인전이 열렸다. 그녀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리베라와 친구들이 열어준 전시회였다. 일어나 앉지도 못하게 된 칼로는 침대를 그대로 전시회장으로 옮겨 개막식 축하연에 참석했다. 그녀는 누운 채로 전시회를 보러 온 군중들 앞에서 노래하고 마시며 함께 기뻐했다.


1년 후인 1954년 7월 칼로는 ‘당신을 빨리 떠날 것 같다’면서 한 달 여 남은 결혼 25주년 기념 은혼식 선물을 리베라에게 먼저 주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 칼로는 폐렴 증세의 악화로 고통과 고독 속에서 보낸 47년의 슬픈 생을 마쳤다.


사망하기 8일 전 수박들의 단면을 통해 자기 인생의 고통스러웠던 면을 승화시킨 <Viva la Vida>라는 그림을 유작으로 남겼다. 그녀의 일기 마지막에는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 글로 일부 사람들은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칼로가 죽고 1년 후 리베라는 그녀가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살았던 코요아칸의 ‘푸른 집’을 나라에 기증했다. 그녀의 집은 이제 칼로를 기리는 미술관이 되어있다.

그녀의 유작, <Viva la Vida>

그녀는 죽은 지 20여 년이나 지나서야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면서 다시 한번 세계인들에게 재발견되어 주목을 받게 된다. 그녀의 그림이 표현하는 솔직 담백한 여성성과 섹슈얼리티를 후세의 페미니스트들이 높이 평가한 것이다. 내가 오늘 그녀의 삶을 당신에게 소개하는 것은 어쭙잖은 페미니스트들에게 포장된 내용을 반복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늘 돋보기를 대고 들여다본 그녀의 삶을 보라. 이게 어디가 페미니즘이며 어디가 여성으로서의 삶을 강조한 것인가? 그녀는 그저 당당한 한 사람의 자존감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낸’ 것이다.


프리다 칼로가 그녀의 작품에 대해 유럽의 평론가들이 초현실주의라고 호평한 것에 대해 거부한 것도 유럽의 초현실주의는 유럽의 모더니즘에서 잉태된 것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생각하는 자신의 그림 세계는 자신만의 정신세계와 그 근간을 이루고 있는 ‘멕시코’라는 전통에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화가가 되기 위해 정식으로 그림을 공부한 경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그림은 기댈 곳이었고 자신을 위로하는 유일한 행위였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과정 그 자체였다. 그래서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계속해서 마주했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냈던 것이다. 또한 어느 정도 그림이 익숙해졌을 때 그녀는 그림을 자신의 이상을 이루는 방식으로 활용했다.


멕시코 정부의 집권자들은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 멕시코 대중을 교화하고, 계몽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벽화 운동을 활용했고 디에고 같은 이들에게 작업을 지시했던 거였다. 그들의 본질적인 목적은 정치적 교화에 있었지만 벽화 운동은 미술가들에게 있어 멕시코적인 상징, 민중들의 이미지에 대한 탐구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 모든 과정을 읽고 있던 프리다 칼로는 그림을 정치적 내용보다는 개인적이고 멕시코의 전통에 뿌리를 둔 내용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 승화시킨 과도기적 화가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 인물이었다.


6살의 소아마비, 18살에 대형 교통사고, 30여 차례가 넘는 수술, 죽음까지 이른 병마, 남편의 끝없는 여성편력, 세 차례의 유산, 불임 등 50도 되지 않은 그녀의 삶은 어느 한순간 편안할 틈이 없었을 정도로 부대끼고 또 부대꼈다. 그러나 그녀가 붓을 손에 잡은 순간 그녀의 그러한 반복된 고통과 절망들은 자연스럽게(?) 수많은 작품의 오브제로 화했다.


당신이라면, 당신의 고통을, 당신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변환시킬 수 있었겠는가? 그녀는 그것을 해냈다. 그저 조그맣게 개인적으로 소심하고 소소하게 한 것이 아니라, 당당하고 활력 있게 그녀의 삶 전체를 에너지로 연소시켜가며 제대로 그림을 배우고 공부한 그 어떤 화가보다 강렬하게 그려냈다.


글을 배우지 못한 이가 글을 쓰고 어느 정점을 통과하여 전문작가의 수준까지 글을 쓸 수 있기까지의 과정은 글쓰기를 단련해보지 않은 일기 수준의 브런치 글쓰기 정도만 끄적거린 이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림 역시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그저 독학으로 전문적인 화가들이나 평론가들의 인정을 받을만한 수준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적당한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수준이 아니란 말이다.


육체의 장애가, 정신의 피폐함과 그 고난들도 그녀의 극복 의지를 가로막지 못했다. 손끝에서 발끝까지 어느 하나 잘못된 곳이 없는 멀쩡하고 건강한 몸을 부모님께 받은 당신이 그것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고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게으름을 피우고 적당히(?) 조금 움직여놓고 그것을 노력이랍시고 실패니 좌절이니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얼마나 부끄럽고 쪽팔린 일인지 알고나 떠들란 말이다.


당신보다 훨씬 더 힘겨운 조건에서, 당신이라면 벌써 접시물에 코를 박았을 그 절망의 끝에서도 보이지 않는 희망을 찾아내고 만들어내겠다고 이를 악물고 ‘살아냈던’ 그녀의 삶을 보며, 당신이 지금 징징거리는 것이 얼마나 같잖은 투정이고 어리광인지를 깨달으란 말이다.

당신의 삶을 온전하게 만들어줄 사람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당신이 꿈꾸는 어느 한순간 자고 일어났더니 신데렐라가 되는 말도 안 되는 판타지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당신의 손으로 하나부터 차곡차곡 만들고 이뤄내지 않고서는 당신이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없단 말이다.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이 짧은 한 번뿐인 인생을 그렇게 대충 어영부영 살다가 끝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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