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포도 재배와 와인 산업이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었으나, 미사에 필요한 포도주를 조달하기 위하여 성당이나 수도원에서 포도나무를 재배하여 명맥을 유지하였고, 곧 빠르게 부흥하였다. 오히려 수도원과 성당의 끊임없는 개량 덕분에 퀄리티 면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룬 시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도원의 풍부한 노동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포도 재배와 포도주 생산이 가능하였으며, 고품질의 와인을 생산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여 관련 지식을 축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수도원에서는 대량으로 와인을 생산하여 의식에 필요한 분량을 제외한 나머지를 판매하여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포도주 판매에 이윤이 남게 되자 과학적인 방법들을 연구 및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역에 따라 다른 맛을 가진 와인들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와인은 중세 유럽에서 남유럽의 전유물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북서유럽에서는 귀족 집안조차도 평소에 와인을 물처럼 마시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와인은 보통 귀한 손님이 방문할 경우에 내는 고급 만찬의 일부였으며, 귀한 손님을 호위하며 따라온 기사들의 경우는 대부분 그 식사에서 와인을 마시지 못했다. 계급과 중요도에 따라서 특별한 자에게만 차별적으로 내놓는 사치품의 일종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보르도 등 남유럽에서는 와인을 물처럼 마실 수 있었다. 평민들도 값싼 저급 와인들에 한해서 일반적인 음료수처럼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프랑스는 12세기 이래로 보르도 지역과 부르고뉴에 포도 플랜테이션이 형성되어서 영국, 네덜란드 등 지역에 대규모로 수출했다.
프랑스 와인의 명성이 높은 것은 이런 역사적 맥락이 있으며, 반면 스페인과 이탈리아 와인은 생산량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저평가받는 것은 국제 수출보다는 자국에서 서민들과 부자들을 가리지 않고 마신 역사적 배경이 관련되어 있다.
유럽의 와인은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까지도 전해지긴 했고, 꽤 고급품 대접을 받았긴 했지만 그다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 수입산이라는 이유로 매우 비쌌고, 기존 곡주의 영향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제조법의 방식이 달라 갈피를 못 잡았기 때문이다.
후한(後漢) 대에는 포도주를 뇌물로 바쳐서 주자사가 된 인물이 있어서 후대의 소동파까지 시로 조롱했는데, 이건 포도주가 뇌물로 사용될 정도로 당시 희귀성을 가진 사치품에 해당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이다. 이백(李白)을 포함한 시인들의 시들로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진 당 대 이후의 포도주 제조 시도에는 포도와 쌀을 섞어서 만들려고 한 흔적이 보인다. 즉 포도로만 만든 포도주는 모조리 서역 수입산. 이백(李白)의 시에도 포도주에 맞는 술잔은 유리잔이라고 하고 있는데, 유리 역시 대표적인 수입 사치품이었다.
결국 고급품의 이미지가 확고해져서 이후 포도만으로 발효시켜 마신다는 것을 발견한 뒤에도 곡주처럼 그 영향력을 확대시키지 못했다. 포도주를 만들어 마셨던 중앙아시아권과 접한 중국이 이 지경이니 한반도나 일본은 말할 것도 없는 상황. 일본의 경우 전국 시대부터 남만인(포르투갈인)이나 홍모인(네덜란드인) 등 서양에서 온 상인이나 선교사들에게서 정말로 어쩌다 입수하여 귀한 것을 조금씩 마시는 정도였으나 사실상 과시용 사치품이나 다름없었고, 역시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다.
4. 근대
16세기 이후부터는 와인 자체에 대한 소비가 증가하고, 상류층은 고품질 와인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신대륙 발견으로 와인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17세기 남아프리카, 18세기 호주와 미국 서부까지 전파되었다. 19세기에는 필록세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어 와인 산업이 침체되기도 하였으나, 농업 기술 발전, 경제 발전, 교통수단 발전, 국제화 등으로 더욱 발전하고 있다.
한국에도 고려 말 <근제집>, 16세기 <수운잡방>, 17세기 <동의보감>에 쌀과 포도로 빚은 포도주 양조법이 실려있다. 이렇게 포도만이 아닌 쌀을 추가했던 이유는 동아시아권에서 주로 먹는 포도 종인 캠벨이 양조를 하기에는 당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 와인의 경우 부족한 당도를 보충하기 위해 발효 전에 정확히 계량된 만큼의 설탕을 추가한다. 앞서 공부했던 바와 같이, 술의 발효란 기본적으로 당이 알코올로 바뀌는 과정을 의미한다.
근대라고 칭하는 이 시기는 파스퇴르의 술에 관련된 연구와 더불어 현재 우리가 마시는 종류의 와인이 탄생한 시기이다. 중세에 마시던 와인과 19~20세기 이후 마시게 된 와인은 다른 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차이를 갖고 있다. 발효에 대한 비밀, 오크통이나 숙성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제조법의 표준화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1920년대에는 역사적 사건들 때문에 큰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귀족 사회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런데 당시까지 러시아 황실 및 귀족 집단은 이 포도주의 중요한 수요처였다. 이 수요처가 사라지면서 포도주 수요가 급감하였다. 게다가 미국에서 금주법을 시행하고, 결정적으로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포도주 시장은 오랫동안 침체에 빠진다.
5. 현재
일본에선 과거 버블 경기 시절을 통해 와인이 부의 상징으로 떠올랐고, 그래서 와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름난 와인을 농장째로 싹쓸이하는 졸부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갑부가 아닌 일반인들도 룸살롱 등지에서 로마네 콩티에 돈 페리뇽 로제를 섞은 폭탄주(?)를 마시며 허세도 심심찮게 목격되기도 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버블이 빠진 뒤에 죠 아라키의 <소믈리에>, <소믈리에르> 같은 만화를 시작으로 <신의 물방울> 등을 통해 와인에 대한 지식이 높아지고 와인 소비 형태가 다양화되기 시작한다.
한국은 일본보다 좀 늦게 발동이 걸린 편이다. 머루로 담그는 머루주는 리큐르에 가까운 물건이고, <산림경제>, <증보산림경제>, <임원경제지> 등에 포도, 쌀, 누룩으로 포도주를 담그는 양조법이 기록되어 있긴 하나 이를 유럽 등지의 와인과 같은 술로 보기는 힘들고, 유럽의 와인이 들어온 것은 개항기 이후이다.
여담으로 한반도에 처음 와인을 소개한 이는 헨드릭 하멜이다. 하멜은 제주도에 표류했을 때 제주 목사에게 포도주와 은잔을 뇌물로 바쳐서 환심을 사려고 했던 사실이 있었는데 포도주를 맛본 조선 관리들은 그 맛에 몹시 감탄하여 포도주를 모조리 마시고 나서 기분이 매우 좋아져서 네덜란드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해줬다고 한다. 아마 당시 제주 목사와 관리들이 기록상으론 유럽의 와인을 맛본 첫 번째 한국인이 그들이었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 하겠다.
일제강점기 때는 극소수의 사치품이나 다름없었고, 독립 이후에도 한동안 마찬가지였으며 대중들에게 와인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로 볼 수 있다. 2004년~2008년 정도에 걸쳐 한국 와인 시장은 매년 수십 % 씩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그래서 떠오르는 신흥 시장으로 외국의 주요 와이너리 오너들이 저마다 한 번씩 한국을 찾아와 프로모션 행사를 갖는 일도 많았다.
웰빙 열풍 때 웰빙 식품의 하나로 각광을 받게 되는데, 이른바 폭탄주로 대표되었던 음주 문화의 개선과 양주나 소주보다 알코올 함량이 낮은 저도수 주류 섭취 권장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와인 붐을 일으키며 일반인에게 와인문화를 자리 잡게 하는데 한몫을 하게 된다.
하지만 2008~2010년에 걸쳐 그 거품이 크게 꺼지게 되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로는 환율의 급격한 상승이다. 1,300~1,400원 하던 유로화는 1,700~1,800원을 넘게 뛰어올랐고, 이는 고스란히 유럽산 와인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로는 국제 경기 경색. 미국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비우량 장기 신용 대출) 붕괴 사태와 PIGS의 재정 악화 등으로 국제 경기에 적색 신호등이 켜지면서 사치품에 해당하는 와인 수요가 급감하게 되었다. 세 번째는 수입사의 난립과 출혈 경쟁에 따른 유통 질서 교란이다. 와인 시장이 성장하며 너도나도 수입사를 세워 중소 수입사가 난립하게 되고, 여기에 LG, 신세계 등 대기업까지 가세했다. 이 과정에서 출혈 경쟁과 연이어지는 세일로 인해 수익성이 악화되었다.
네 번째 이유는 이 시기에 사케가 인기를 끌며 붐이 일어난 것. 이 시기 와인 동호인 상당수가 사케로 넘어가며 ‘고급주’라는 인식 속에 붐을 일어났으나 이 사케 붐도 2~3년 정도 반짝하다가 2011년 엔화 가치가 폭등하면서 사케 수입 가격이 급등하자 거품처럼 사그라들어버렸다. 그렇게 흐름을 돌고 돌아갔다.
관세, 주세, 교육세, 부가세를 포함하여 총 세율 68%에 이르는 높은 세금, 또한 관련 법령에 의해 규제에 묶여있어 면허제로 되어있는 주류 판매망과 수입사-도매-소매로 이어지는 다단계의 유통 경로에서 들러붙는 업자들 마진이 우리나라가 와인 값이 (외국에 비해) 비싼 원인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한동한 폭발적 성장세를 구가하던 와인 시장이 급랭하게 된 것은 관세/유통의 문제보다는 환율과 국제 경기의 영향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와인 붐이 휩쓸고 지나간 후 거품이 빠지면서 경쟁력이 약한 중소 수입사들이 자의 반 타의 반 정리되면서 시장이 재편되었고, 와인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하면서, 와인의 유통망 역시 그간 쌓은 경험을 통해 와인문화의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지는데, 결정적으로 FTA가 체결되자 저렴하면서도 질 좋은 신대륙 와인이 수입되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변화와 더불어 와인에 대한 인식이 다른 나라에서도 그렇듯 그냥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사람이 찾아 먹는 술로 점점 변해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보통 술이라기보단 비싼 술의 이미지를 많이 갖고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와인이 일반적으로 서민의 친구로 인식되는 희석식 소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싸고 고급스러운 이미지 위주로 홍보가 이루어진 것, 운송비 등의 문제로 일정 가격 이상의 와인만 수입하는 것이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만 원 내외에서도 충분히 맛있는 와인을 구할 수 있음에도 시장의 분위기는 고급화 이미지를 버리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와인에 대해 지나친 환상을 가지고 허세를 부리는 와인 스노비즘에 빠진 허풍꾼들이 와인문화를 아는 척하는 바람에 와인에 대한 몰이해와 환상은 더해져만 갔다. 그 역풍으로 와인 자체를 터부시하고 부유층 아니면 된장녀들이나 마시는 술이라고 폄하하는 부류들도 적지 않게 생겨났다.
종교적 의미에서의 와인(포도주)이 갖는 위치
가톨릭에서는 미사 중의 성체성사 때, 사제가 물과 포도주를 섞어 마신다. 성체성사의 의미는 최후의 만찬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특별한 미사 때는 신자들에게도 나눠주는데 이를 양형 영성체라고 한다. 주로 화이트 와인을 사용하는데, 얼룩이 남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도 한몫했지만, 사실 여기에는 종교적인 이유가 숨어 있다. 가톨릭에서 축성된 포도주, 즉 성혈을 옷자락에 흘렸을 때는 비누나 세제를 사용하지 말고 얼룩이 없어질 때까지 세탁한 뒤에 그 물을 모조리 마셔야 한다. 레드 와인일 경우에는 이게 감당이 안 되므로 화이트 와인을 쓰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한국 천주교의 경우 롯데주류에서 제조하는 마주앙을 미사주로 사용한다. 포도 수확기인 매년 8월 말에서 9월 초에 롯데주류 경산공장에서 미사주 축복 미사를 거행한다. 원래는 두산그룹 산하 두산주류 BG에서 생산하던 것인데 두산그룹에서 두산주류 BG를 롯데그룹에 매각하여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교황청의 인증을 받은 것이며 미사용으로 따로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 소매점에서 구매할 수는 없다. 다만 신부가 친한 신자들에게 선물로 주는 경우는 가끔씩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