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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14. 2022

진정 두려운 것은 젊음 따위가 아니다.

올바로 부단히 정진하는 것만큼 두려운 것은 없다.

子曰: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後生이 두려울 만하니 〈後生의〉 장래가 〈나의〉 지금만 못할 줄을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40, 50세가 되고도 알려짐이 없으면 이 또한 족히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이 장은, ‘後生可畏(후생가외)’라는 고사성어로 유명한 장이다. 그 내용은 ‘젊은 후학(後學)들을 두려워할 만하다.’는 뜻으로, 후진(後進)들이 선배(先輩)들보다 젊고 기력(氣力)이 좋아, 학문(學問)을 닦음에 따라 큰 인물(人物)이 될 수 있으므로 가히 두렵다는 말로 쓰이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이 문구에서 지정했던 ‘후생(後生)’은 앞서 세 장에서 논했던 안회(顔回)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했는데, 그것은 안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배우는 자들에게 있어 그 후배들을 통칭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데 큰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장에서 방점이 찍힌 부분은 고사성어가 된 부분이 아니다. ‘그러나’라고 내가 원문에서 괄호에 넣은 뒷부분에 있다. 40, 50이 되고도 알려짐이 없으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말은 단호하기 그지없다. 그 의미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공자께서 “後生(후생)은 나이가 젊고 힘이 강하여 충분히 학문을 쌓아 기대할 수 있으니, 그 형세가 두려워할 만하다. 그의 장래가 나의 오늘날만 못할 줄을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혹 스스로 힘쓰지 못하여 늙음에 이르도록 세상에 알려짐이 없다면 족히 두려워할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을 말씀하여 사람들을 경계해서 그들로 하여금 제때에 미쳐 학문에 힘쓰게 하신 것이다.


이 장에서 공자의 말은 당연히(?) 선배의 입장에서 한 말이다. 치고 올라오는 젊고 스마트한 후배들이 나를 금세 따라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바로 뒤이어 40,50이 되고도 알려짐이 없으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단호하게 잘라 말한 것은 배우는 자들에 대한 강한 권계가 담겨 있는 말이다. 즉, 이 말을 하기 위해 앞에 말(후생가외)을 한 것이지 앞의 말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붙어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가르침의 방점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에 대해 이미 파악한 증자(曾子)는 다음과 같이 이 부분에 대해 설명한 것을 주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증자가 말씀하길, “50세가 되어도 善(선)하다고 알려지지 못하면 영영 알려지지 못한다.” 하셨는데, 이 뜻을 서술한 것이다.


이 주석에서 증자는 알려짐을 자칫 ‘유명세’로 오독하고 오해할 것을 우려하여 명확하게 ‘善(선)하다고 알려지지 못하면’이라고 콕 짚어서 언급한다. 즉, 능력이 있다거나 신분이나 지위가 올라가 유명해지는 것 따위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젊고 능력 있는 후배들은 두려워할 만한 하지만, 정작 그렇게 젊고 정력적인 후배라 할지라도 그들이 수양을 통해 자신의 자질을 다스려 선함을 갖추었다는 평판을 받을 정도의 경지에 오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두려워할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후배들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닌, 바로 지금 배우는 자들에 대해 완곡한 형태로 돌려 일침을 가한 것이다.


결국 이 장의 가르침이 선배의 입장에서 하소연하는 내용이 아닌 ‘후생(後生)’이라고 일러졌던 현재 배우는 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방향을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그 의미를 파악한 윤씨(尹焞; 윤돈)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의 가르침을 정리한다.


“젊어서 학문을 힘쓰지 않아 늙어서 세상에 알려짐이 없다면 또한 끝장인 것이다. 그러나 젊어서부터 전진하는 자는 그가 지극한 경지에 이르지 못할 줄을 어찌 알겠는가. 이는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


이 마지막 주석은, 이 장에서 궁극적으로 공자가 보여주려고 했던 바의 최종 행간을 고스란히 길어 올려 보여준다. 첫 번째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사자성어에 한한 것으로 한정적인 의미였다면, 주자의 해석을 통해 이 장의 방점이 뒤에 있다는 것, 그리고 증자의 해설을 통해 그것이 ‘알려짐’이 신분이 높아지거나 위정자에게 간택되어 등용되는 따위의 출세가 아닌 선(善)한 실천과 행실로 인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선행을 한다는 것은 좋은 일을 하거나 기부를 한다거나 하는 선행을 좁은 의미의 선행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증자가 말한 선행이라는 것은 공자가 가르침에서 누누이 강조한 평생을 배우고 익히며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하려는 노력과 그것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옴을 의미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선행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오해할까 싶어 배우는 자들을 위해 윤 씨가 마지막 주석에서 확장된 세 번째로 종결해준다.


젊어서는 무던히 배우고 익힘에 노력해야 하는데 그 노력은 젊어서부터 시작되어 꾸준해야만 나이가 들어서 겨우 일정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이고 그 경지에 오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높은 지위에 발탁되는 것이 아닌 자신이 배우고 익힌 학문을 실천을 통해 세상에 내어 보여 그것으로 알려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후생을 두려워할 만하다는 두려움의 정체를 명확하게 해주는 설명에 다름 아니다.

제대로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현대 해설서의 저자들이 말하는 것과 고사성어에 한정되어 멋대로 의미를 축소하는 이들의 오독처럼, 후배들에 대해 두려워할 만하다는 것은, 나를 따라잡을까 봐 혹은 나보다 더 나을까 봐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내가 그보다 더 낫지 못할까 봐 내 노력이 부족할까 봐 그리고 그 노력이 중간에 끊기거나 포기하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이것이 공자의 필법이고 당신이 제대로 <논어>를 새겨야 하는 이유이다.


공자는 이 짧은 문구를 통해서도 후생이라는 표현을 써서 처음 후배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듯 하지만, 결국 자신이 선배의 입장에서 후배를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배우는 자들이 후생이며, 결국 나도 이전에 후생이었기에 내가 지금 이전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뒤따라오는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경지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그 노력을 계속 부단히 이어나가고 있는가에 대한 자기반성이며 자기 고백에 다름 아닌 것이다.


카메라 워크로 보자면, 이 장은 처음엔 나이 든 스승이 된 자신이 나이 어린 후배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 같아서 가만히 그 카메라의 앵글을 따라가는데, 결국 그 카메라는 창가를 보는 듯한 스승의 눈에 비친 자신의 젊은 당시의 모습, 그리고 찬찬히 확대되어가면서 그 눈동자에 담긴 현재 자신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지극히 감각적인 장면을 구현해 보여주는 장이기도 하다.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기에, 제자들을 양성하는 것이 내 본업이다. 20여 년이 훌쩍 지났으니 이미 초창기 가르쳤던 제자들은 이미 40대가 훌쩍 넘은 녀석들이 많다. 그들은 사회에 나가 저마다 자신의 특성을 살려 자기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어느새 사회 중진이 되어 이 사회를 지탱하고 이끄는 연배가 되어 있다. 


조금 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학생들이 최근에 와갈수록 하향 평준화되어가고 있다는 논평을 한 적이 있다. 읽는 책의 양이 턱없이 부족해져가고 있으며, 고전을 읽는 것에 인색하고, 꾸준히 무언가를 단련하는 것이 없어져가는 세태가 반영되면서 그들의 생각이 짧아지고 사고가 얕아지며 문해력이 떨어지고 오독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하향평준화와는 별개로 과학의 발달과 기술의 발전으로 그들은 엄청난 양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전자기기를 운용하는 것에 익숙하여 자신이 내재적으로 갖추지 못한 정보를 주변기기(?)와 네트워크 방식을 활용하여 상당히 빠르게 많은 양의 업무를 그 이전에 비해 더 세련된 방식으로 매듭짓기도 한다. 

예컨대. 예전에는 일일이 수작업을 했어야만 하는 일도 지금은 아주 간단하게 몇 번만의 클릭으로 정보를 취합하고 그것을 정리하여 결과물을 도출하는 것까지 더 빠르고 정확하게 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장단점을 모두 고려하여 판단했을 때, 그들이 두려울 정도로 발전했고 일정 경지에 올랐는가에 대해 자문해본다면 내 경우에는 그 대답이 바로 ‘하향 평준화’인 셈이다. 왜 내가 이전보다 훨씬 발달한 과학기술의 총아들에게 꺾여진 그래프라고 평가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할 말이 적지 않지만 그 부분에 대한 논평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자.


오늘 이 장을 공부하면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현재의 ‘후생(後生)’들이 두려워할 만한 존재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라 이 장의 본질이라고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이 당신이, 그리고 우리가 두려워할 만한 존재로 인식되고 언급될 정도의 노력을 경주하여 지금의 위치에 서 있는가에 대한 반성을 하기 위한 것이다. 

반성이라고 아예 못 박고 시작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한 것이다. 배우고 익히는 자는 부단히 노력해야 만한다는 명제와 더불어 그렇게 공부한 자들의 선한 알려짐이 많아진다는 것은 사회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작금의 사회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나도 알고 모든 이들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 표현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워낙 때가 탈대로 타고 자기 진영의 잘못을 후벼 팔 생각은 하지도 않으려는 관계로, 탐탁하게 보이지 않는 아침 라디오를 진행하는 뚱뗑이 털보가 내내 파란당의 후보를 지지하면서 자신의 라디오 방송과 유튜브 방송에서 그의 무리들과 입을 모아 이렇게 외쳤었다.


“이번에 투표 한번 잘못하게 되면 그 5년으로 인해 다시 암흑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으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대선에 표를 던져라.”


그의 이중잣대나 타의 모범이라고는 쓸데가 하나도 없는 언행들로 인해 굳이 인용할 가치까지야 없지만, 그 말은 어제 새로운 당선인이라는 이가 장관들의 인선을 발표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털보 뚱뗑이의 말이 현실이 되었다는 논평을 공식적으로 내놓은 사람은 맨날 철수만 하던 자의 앞에 나와 세상을 바꾸는데 한 힘을 보태겠다던 대학교수였다.

나름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지성인의 사회참여와 비판적 역할을 적절히 해왔다는 평가를 듣다가 이번에 맨날 철수만 하는 이에 대한 지지선언과 함께 정치판에 투신하는 것으로 그간 쌓아왔던 사람들의 그나마 가지고 있던 호감을 모두 깡통으로 바꿔버린 그 교수의 말이었다. 그는 심지어 후보 확정 이전에 극적인(?) 단일화에도 한몫 단단히 했던 이였다.


“박근혜와 이명박 정부 때의 사람들이 그대로 다시 다 돌아왔다.”


나는 그의 이러한 논평이 더 어이가 없었다. 그럴 줄 몰랐단 말인가? 대학교수라서 세상 물정에 어두워 그저 위기감에 단일화를 해야 한다고 아무말대잔치를 해주며 다 들어주겠다고 했던 말을 그냥 믿었단 말인가? 그렇게 통찰력을 강조했던 사람이? 도가철학을 공부했기에 정말로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 맞다고 믿었던 걸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저런 어린애 같은 투정 섞인, 저따위 논평을 볼멘소리처럼 이제사 그 쪽 편에 서있는 상태로 할 수 있단 말인가?


돈은 많이 벌어두었으나 정치에 어떻게든 끈을 달고 싶어 하며 맨날 철수만 하는 철딱서니 없는 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렇게 인문학의 통찰력을 강조하며 제자들에게 제대로 된 통찰력을 갖추라고 가르쳤던 이가 상대가 바로 이렇게 말을 바꿀 것이라는 사실조차 예견하지 못하고 그 얼토당토않은 단일화에 기치를 세우고 공신 노릇을 했단 말인가?

나라가, 그리고 사회가 퇴보하는 것은 한순간이다. 대한민국은 상당히 많은 발전의 기회가 있었다. 정치 알력을 내세우고 자기 주머니를 채우겠다며 붕당정치를 하지 않았더라면 나아졌을 기회가 있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인 판단을 먼저 내세우며 쇄국정책 따위로 세계화 대신 고립화를 선택하며 다시 한번 그 기회를 놓쳤고, 그렇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의 힘으로 빛을 되찾았지만, 친일을 했던 이들을 말끔하게 소탕할 기회를 그들과의 협의와 합리적이라는 구차한 변명으로 덕지덕지 장판 테이프 부치듯이 그 밥에 그 나물을 돌려왔다. 


그런데 그 역사를 반복하면서도 잘못된 것을 깨닫지 못하고 매번 기회가 올 때마다 사욕(私慾)을 이기지 못해 총칼을 든 군바리가 정권을 잡고 그것을 규탄하겠다며 나선 양심이라는 자들이 다시 정치판에 뛰어들며 별반 다르지 않은 꼬락서니를 다시 재연출해냈다.


단순하게 원인을 정치적 판단이니 사욕(私慾)이니 하는 것으로 표현하긴 했지만, 학자들의 표현에 의하면 상당히 복잡한 권력구조와 알력이 얽혀 벌어진 일이라고도 설명한다. 하지만, 세상에 가장 복잡한 것은 가장 단순하게 해결할 수 있다. 잘못된 자들이 잘못을 인정하도록 벌하고, 실수로 잘못한 것이 있다면 역사적 교훈을 통해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 단순한 진리를 이행하지 못하여 지금 이 나라는, 사회는 퇴보하는 길을 성큼성큼 걸어 나가고 있다. 그들에게 사회나 국가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짧은 생에서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최대 행복을 그들만의 리그에서 누릴 수 있으면 된다는 안일함에 푹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작태를 보며 혀를 끌끌 차는 당신들 중 절반은 그들에게 그럴 수 있는 힘을 불과 한 달 전에 주지 않았던가? 어리석은 대학교수가 징징거리는 논평을 내놓는 것과 지금 당신이 혀를 차는 것은 내가 보기엔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내 눈이 잘못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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