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Apr 15. 2022

다 알아듣고도 모른 척하는 놈이 가장 나쁜 놈이다.

못 알아듣는 놈은 모자란 것이니 어쩌겠는가?

子曰: “法語之言, 能無從乎? 改之爲貴. 巽與之言, 能無說乎? 繹之爲貴. 說而不繹, 從而不改, 吾末如之何也已矣.”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예법에 맞는 바른 말은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잘못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완곡하게 해주는 말은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실마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기뻐하기만 하고 실마리를 찾지 않으며, 따르기만 하고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내 그를 어찌할 수가 없다.”

이 장에서는 ‘法語(법어)’와 ‘巽言(손언)’이라는 다른 사람에게 하는 조언의 형태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가르침을 화두처럼 던져주는데, 한 가지는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조언해야 할 지에 대한 현명한 전달 방식에 대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조언을 내 공부와 수양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수용의 측면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렇다면 주자가 이 장에 대해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에 대해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法語(법어)’란 바르게 말해 주는 것이요, ‘巽言(손언)’이란 완곡하게 인도해 주는 것이다. ‘繹(역)’은 그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法言(법언)은 사람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바이므로 반드시 따른다. 그러나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외면으로만 따르는 것일 뿐이다. 巽言(손언)은 마음에 어긋나거나 거슬리는 바가 없으므로 반드시 기뻐한다. 그러나 실마리를 찾지 않는다면 또 은미한 뜻의 소재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간혹 현대 해설서에서는 ‘法語(법어)’를 진심을 담은 직언으로 ‘巽言(손언)’을 그저 듣기 좋은 말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현대적 의미에서 표면적으로만 이해를 한 것이니 이 장의 전체가 담고 있는 뜻을 모두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예컨대, ‘巽言(손언)’을 그저 듣기에만 좋은 비위를 맞춰주는 말이라고 해석하게 되면 그 의미가 갖는 가치가 떨어질뿐더러 굳이 그 안에서 찾을 실마리라는 것이 있을 리가 없는데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 장의 의미를 찾을 길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저 현대적인 관점에서 듣는 이들의 마음에 어긋나거나 거슬리지 않는다고 하는 부분만을 표면적으로 이해하여 그런 오독을 하게 된 것인데, 오히려 ‘巽言(손언)’은 공자가 즐겨 쓰는 방법으로 당장 듣는 이들에게 돌직구를 날리는 ‘法語(법어)’에 비해 거슬리지 않고 마음이 상하지 않는다고 여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듣는 이의 수준이 그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더욱 심한 돌려차기에 해당한다. 

자고로 무예에서도 직선적인 발차기는 당장은 그 위력이 강한 것 같지만 회심력을 이용하여 돌려차게 되기 시작하면 그 회전력이 파괴력을 몇 배나 가중시킨다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괜히 멋있어 보이려고 몸을 회전시켜가면서 어렵게 차는 것이 아니다.


같은 의미에서 ‘法語(법어)’를 그저 돌직구성 직언이라고만 이해하는 것도 20% 정도 부족한 해석이 된다. 이 장에서 굳이 ‘法語(법어)’를 먼저 이야기하여 강조한 이유는,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대개 권위를 가진 자가 그렇지 않은 지위가 낮거나 그 말에 권위가 서려있어 의미를 잘 알지 못하더라도 이해하지 않은 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저 따르는 것의 폐해를 지적하기 위해 든 예이다.


그것이 예법이든 법률이든 ‘법’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되는 것은 지키지 않을 경우 그에 응당한 체벌 혹은 규제가 가해진다. 그것은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정한 규칙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상대에게 말하는 것은 일종의 강한 경고이다. 


하지만, 공자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그 사람이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을 고치는 것에는 부족함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장 그것이 법에 저촉되기 때문에 처벌과 비난을 두려워하여 고칠 뿐이라면 근본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것을 반성하지도 않게 되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무작정 따르게 되는 오류를 경계해야만 한다는 설명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공자가 즐겨하는 ‘巽言(손언)’이라는 것이 나온다. ‘法語(법어)’에 대척 개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공자가 이것을 대척점에 가져다 놓은 착안점은 일단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공자는 ‘巽言(손언)’의 방식으로 내놓은 것이다. 


이해의 속도가 느리고 사고의 깊이가 깊지 않은 사람들은 당장에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뭔가 설명하는 것처럼 다른 이야기를 하니 그것이 자신을 꾸짖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개념 자체를 내놓은 것이 이 장의 구조에서 또 다른 이중포장임을 알아차리는 이들은 많지 않을 듯싶다. 굳이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님에도 두 가지를 비교하는 것처럼 놔둔 것에서부터 공자는 생각할 거리를 이 글을 공부하는 이에게 던져주고 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法語(법어)’가 단순한 돌직구성 직언이 아니듯이 ‘巽言(손언)’역시 단순히 완곡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완곡하게 말하는 것은 앞의 설명처럼 알아듣는 사람에게는 훨씬 더 아픈 돌려차기이고 여운이 오래 남는 뼈 때리는 방식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그것조차 알아듣지 못하고 넘어가는 이들이 당시에도 넘쳐났다는 것이다. ‘당시에도’라는 표현을 굳이 강조한 것은 달나라를 가네 화성에 이주를 하네 떠드는 수천 년이 지난 작금의 시대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巽言(손언)’에서 강조하는 것은 배움이 부족하고 역량이 부족하여 아예 이해를 못 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을지라도 조금 생각해보고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고민하고 연구하고 배우려고 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공자의 죽비 내려치기 ‘巽言(손언)’이다. 


그래서 주자는 주석을 통해 ‘실마리를 찾지 않는다면 또 은미한 뜻의 소재를 알 수 없는 것이다.’라는 해설로 상대가 그렇게 말한 것에 대해 깊이 있게 사고하고 그 은미한 의미를 반드시 탐구하라고 옆구리를 찔러준 것이다.


그래서 양씨(楊時(양시))는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법언은 맹자께서 王道政治(왕도정치)를 시행할 것을 논한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요, 손언은 〈맹자께서〉 재물을 좋아하고 여색을 좋아함을 논한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말해주는 데도 통달하지 못하거나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오히려 괜찮지만, 혹 깨달았다면 거의 잘못을 고치고 또 실마리를 찾아 은미한 뜻을 알기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따르고 또 기뻐하면서도 잘못을 고치거나 은미한 뜻을 찾지 않는다면 이는 끝내 잘못을 고치고 실마리를 찾아 은미한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니, 비록 聖人(성인)인들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공자가 이 장에서 제시한 상대방이 하는 충고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양 씨는 이 주석에서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 듣고도 무시하거나 거부하고, 아예 알아듣지도 못하는 자.


둘째, 그 의미를 깨닫고 그 실마리를 찾아 은미한 뜻을 알려고 노력하는 자.


셋째, 마지못해 따르거나 직접 뭐라 하지 않는 것을 슬쩍 기뻐하면서도 정작 무슨 의미인지조차 찾아보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 자.


여기에서 양 씨는 공자가 세 번째 부류에 대한 일침을 날리기 위해 이 가르침의 방점을 두었음을 배우는 자들에게 확실하게 다시 한번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자들이 있다면 아무리 聖人이라 하더라도 도저히 가르치거나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마지막 일침에는 배우려는 자의 의지가 없다면 아무리 고명한 선생님이나 성인군자가 와서 가르치고 변화시키려고 하여도 결코 변화시킬 수 없다는 점까지도 강조한다. 이것은 앞선 장에서 배우고 변화하고 진보하려는 자의 의지를 강조했던 흙삼태기 장에서부터 안연에 대한 배울 점으로 강조했던 바로 그 의지이다.

자아, 책에 나와 있는 것은 여기까지가 다이다. 하지만, 고전의 제대로 된 공부는 나와 있는 내용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러주었다. 한 발이 아니어도 좋다. 반 걸음 정도라도 사고(思考)를 통해 조금 깊이 있게 들어가 보기로 하자.


가장 나쁜 놈은 양 씨가 지적한 세 번째 부류에 해당하는 놈들이 아니다. 두 번째에서 설명한 것처럼 모든 것을 이해하고서도 법에 따른 지적을 교묘하게 피해 가려고 꼼수를 피우고, 은미하게 돌려서 일러준 것을 다 알아듣고서도 모른 척하면서 자기가 유리한 식으로 해석하며 자기 이익에 맞으면 그리 하고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무시하는 그런 부류의 놈들이다.


그 대표적인 전문가들이 내가 그토록 성토에 마지않는 법비놈들이다.

이틀 전 기어코 대선에 승리했다며 이곳저곳 신나게 낄낄거리며 어깨춤을 추던 그가 그의 오른팔을 법무장관 후보로 지명하고야 말았다. 그가 후안무치하게 자기의 경력이 전문가로서 충분하며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다고 한 헛소리는 그나마 애교에 가까웠다. 내가 가장 어이가 없었던 대목은 그 전날 파란당에서 선전포고로 터트린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의 강행 의지에 대해 저지하겠다며 내뱉은 말이었다.


“그들의 뜻대로 그 법안이 통과되면 국민들이 고통받게 될 것입니다. 검찰은 법과 상식에 맞게 진영 가리지 않고 나쁜 놈들을 잘 잡으면 된다.”


그가 한 말이 아니라면, 그리고 앞뒤 문맥이나 행간의 의미 없이 그 말만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필요한 말이고 멋진 말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검수완박을 하겠다고 설치는 파란당의 속내 역시 정의를 구현하겠다거나 올바른 생각에서 그 법안을 처리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맞다. 매일 나와 공부한 학도들은 알겠지만, 정신 나간 빨간당도 문제지만, 파란당이 결코 정의의 편이거나 제정신으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자들이라고, 나는 결코 생각하지도 그리 믿지도 않는다. 그것은 내가 늘 강조하듯 내 감성적인 판단이 아닌, 내가 직접 그들과 부딪히고 경험하고 그들의 시커먼 속내를 그 객관적인 과정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왜 저 말이 멋질 수도 있는데, 헛소리에 멍멍 소리일 수밖에 없는가 들여다보자.

이미 기자와 할 말 못할 말 다해서 얼마나 지저분한 자이고 어떻게 그 검찰과 법무부 주요 보직이라는 자리에 올라갔는지 만천하에 밝혀지고서도 저리 뻔뻔할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무엇보다 최근 무혐의로 종결지어진 사건은 그가 무죄라고 끝난 것이 아니었다. 조금만 관심이 있는 이라면 알 수 있는, 증거를 인멸하여 증거 불충분으로 종결된 것이다.


그는 어찌 되었든 지금 현직 검사이다. 누군가 어떤 논평에서 그가 자신을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하는 후배 검사들을 비아냥거린다며 메이저리거와 동네 야구단의 꼬마가 싸우는 수준의 법리다툼이 지리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적확하기 그지없는 논평을 낸 적이 있다. 


내가 적확하다고 표현한 것은 그 논평을 낸 자의 의도처럼, 그가 상당한 법리 전문가라서 그렇다는 평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수사를 전문으로 했던 자로서, 어떻게 하면 그 예봉을 피해나가는지를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는 법비라는 의미이다.

순조롭게? 개뿔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잘 와닿지 않는다면 그의 앞에 화려한 개인기를 펼쳐 보인 자들을 예로 들어보자. 박근혜 정부에서 차마 청문회를 하면 개망신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법무부 차관에 임명하려 했던 자가 있었다. 


그런데, 청와대는 고사하고 경찰에 심각한 범죄가 연루되어 있다며 임명을 강행하면 불똥이 튈 정도라는 제보가 들어간다. 검찰과 경찰, 그리고 고위층에 연줄을 만들어 원주에 아방궁을 꾸며놓고 로비라는 것을 하던 건설업자의 별장에서 성접대가 있었다는 문제의 동영상이 다른 애먼 사건의 증거품에서 툭 하고 터져 나왔던 것이다. 

그 낯 뜨겁고 역겨운 동영상에는 노래방 기계를 틀어놓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여자를 유리하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또렷하게 나왔다. 그런데 기소권은 물론이고 수사권까지 버젓이 가지고 있던 당시 검찰은 그를, 그 사건을 어떻게 했던가? 결국 무혐의에 공소시효가 완료되었다는 법 조항을 내주며 그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막판에 검찰의 내부 정보까지 받아 해외로 도주하려던 그를 긴급 체포한 검사들에게 절차를 어겼다며 괘씸죄까지 엮어 그 반대파의 인물들에게 도리어 칼을 들이댔다.


버젓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거래되기도 전의 주식을 받고 그 주식이 수백 배가 뛰어 어마어마한 돈을 손에 쥔 검사는 직접적인 대가성이 증명되지 않았다며 같은 법비인 판사의 ‘지음(知音)’이라는 참람된 고사를 써가면서까지 면죄부를 주었다.


평상시에 거대 범죄조직이 경찰청장과 검찰총장에게 매번 돈과 향응을 제공하고 그들은 직접 수사를 하지 않으니 뇌물공여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고 처벌할 수 없다고 하면, 미국이나 유럽, 아니 가까운 일본에서도 콧방귀를 뀌며 그래서 한국이 동남아 수준의 검찰 수준이라고 욕하지 않을 것 같은가?

증거가 될 수 있는 자기 핸드폰에 비밀번호를 가르쳐주지 않겠다고 버티고, 그것은 법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2년을 버텨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를 받은 자가, 감히 ‘검찰의 본분이 나쁜 놈만 잡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내 입장에서’ 혹은 ‘우리 편 입장에서 생각할 때’라는 중요한 단서 문장이 빠져있는 결문(缺文)이다. 이 장에서 언급한 ‘法語(법어)’에 준하는 ‘巽言(손언)’방식의 논평으로 이 장의 가르침을 되새긴다.

매거진의 이전글 진정 두려운 것은 젊음 따위가 아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