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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18. 2022

나보다 못한 자를 벗삼지 않으면 내 친구는 누가 하나?

고문을 해설서만 읽지 않고 선생님에게 배우는 이유.

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가 厚重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고 배움도 견고하지 못하다. 忠信으로 주장하며, 자기만 못한 자를 벗 삼지 말고,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한다.”

사실 이 장의 내용은 주자가 주석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학이(學而)편’ 8장의 내용이 반복된 것이고 그나마 절반이 일실되어 있다. 2021년 6월 9일, 이렇게 일이 커질 줄 모르고 <논어>의 이야기를 (정말 진심으로) 가볍게 에세이식으로 풀어나가 보면 어떨까 싶어 슬쩍 시작했던 것이 이미 단행본 분량으로 한 달에 한 권꼴로 책이 컨베이어 벨트에서 떨어져 나오듯 아침마다 쓰고 있다.


처음부터 본 학도가 거의 없고, 현재 반장이 긴 잠수(?)를 타버려 아는 이들도 거의 없겠으나 ‘학이(學而)편’의 1편부터 본격적으로(?) 해제와 논평을 한 것이 아니고 13장부터 해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기에, 학이편 1장부터 12장까지의 본격적인 해제는 어디에도 없다. 행여 종이책을 발간하게 되는 날이 오게 된다면, 아마도 출판사에서는 당장 앞의 12장부터 해제의 포맷에 맞춰 채워달라고 종용할 것이다.


그런데, 하필 이 장이 ‘학이(學而)편’ 8장의 내용을 절반만 담고 있어, 이 참에 제대로 해제하지 않았던 온전한 ‘학이(學而)편’ 8장의 전문과 주석까지 그대로 가지고 와 밀린 숙제 하나를 해결해보고자 한다.


워낙 유명한 장 중의 하나인지라 고문 공부를 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익숙한 내용으로 특히 ‘자기만 못한 자를 벗 삼지 말라(無友不如己)’라던가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過則勿憚改)’라는 문구가 마치 고사성어처럼 활용되는 장, 되시겠다. 과연 그렇게 찢어서 사용하는 내용과 부합하는 내용인지 온전한 장 전체의 가르침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장에서는 君子가 어떻게 행실을 취해야만 하는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침을 담고 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본래 여기 ‘자한(子罕)편’에 일실되어 절반만 실린 것이 뒷부분에 해당하는 것이다. 먼저 앞부분 문장에서는 중후하게 행동해야 함을 설명하고 있는데 주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重(중)’은 厚重(후중)함이요, ‘威(위)’는 위엄이요, ‘固(고)’는 견고함이다. 외면에 가벼운 자는 반드시 내면에 견고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외면이 중후하지 못하면 위엄이 없어서 배우는 것 또한 견고하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내가 내면과 반대되는 개념을 ‘외면’이라 번역하였는데, 몇몇 몰지각한 현대 해설서에서 이것을 ‘외모’로 번역하여 마치 후줄근하게 하고 다니지 말라는 식의 호도(糊塗)를 자처하는 경우를 보고 어이가 없긴 했다. 여기서 말하는 군자가 갖춰야 할 외면의 중후함은 옷차림이나 가오(체면)를 중시하는 것이 당연히 아니다.

그렇다면 외면이 중후하다는 것은 정확하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고문에서 내면과 상치되는 개념의 외면을 의미할 경우, 그 의미는 대개 언행을 의미한다. 즉, 행실을 가볍게 하거나 말을 쉽게 바꾸어 그의 내면, 즉 수양이나 인간됨을 의심할 정도로 가볍게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자의 해석에서 쉽게 간과하고 넘어가서는 안될 부분이 있으니, 바로 마지막 문장이다. 마지막 문장에 보면 ‘외면이 중후하지 못하면 위엄이 없어서 배우는 것 또한 견고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중후하지 못한 외면 때문에 배우는 것이 견고할 수 없다는 것은 이제까지 배우는 것이 제대로 선행되어 그것이 외면에 드러난다는 순서에 역행한다고 읽힐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 설명이야 말로, 배우는 것과 실생활에 행하는 실천이 어떤 관계인지 당시 공부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배우고 익혀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행실이 가다듬어지고 그것이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배우는 자들은 설사 그 배움이 완전히 몸에 익어지지 않더라도 겉으로 드러나는 행실과 수양의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고 익혀 따라가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무예를 익히는 데 있어 진정한 의미를 익히고 ‘형(型)’을 잡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옳겠으나 처음 무예를 익히는 이들에게 형의 의미를 가르치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최대한 스승의 ‘형(型)’을 따라 할 수 있게끔 지도하고 노력하라고 지도한다. 그 과정에서 지속된 배움과 어느 순간 내면의 깨달음이 오게 되면 그 ‘형(型)’은 이전의 따라 하기가 아닌 배움을 완성하는 형태로 이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후반부의 내용은 다소 오해의 여지가 제법 있는 내용이다. ‘忠信을 주장하며, 자기만 못한 자를 벗 삼지 말고,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한다.’라는 내용인데, 일단 이 후반부의 내용은 다시 세분화하여 세 가지 가르침으로 나뉜다. 그 첫 번째 내용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사람이 忠信(충신) 하지 못하면 일이 모두 실상(實相)이 없게 되어 악을 행하기는 쉽고, 善을 행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반드시 이것(忠信)으로써 주장을 삼는 것이다.


여기서 忠信(충신)이라는 개념을 ‘忠’이라는 글자만 보고 또 본능적으로 현대적인 개념인 국가나 군주에 대한 충성을 찾는 우를 범하는 학도는 이제 발검 스쿨에 없으리라 본다. ‘忠’이라는 글이 갖는 본래의 의미가 자신의 온 마음을 다 한다는 의미이고 거기에 ‘信’이라는 단어를 붙여 어떤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온 정성을 다해 노력을 기울인다는 개념으로 사용된 용어이다.


즉, 이 단어를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배우고서도 실천에 옮기지 않는 자들에 대한 공자의 매서운 일갈이 담긴 죽비에 다름 아니다. 이것에 덧붙여 주자는 충신을 위주로 하지 않게 되면 결국 악을 행하는 것이 쉬워진다고 실제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현실을 꼬집는다.


그래서 정자(明道(명도))는 그 忠信(충신)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하여 배우는 자들이 혼란스럽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왜 전심전력을 기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사람의 도는 오직 충신(忠信)에 있으니, 성실하지 못하면 아무런 사물이 없다. 또 나가고 들어옴이 일정한 때가 없어서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만일 충신(忠信)이 없다면 어찌 다시 사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살짝 忠信(충신)이라는 개념을 오해할 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정자의 걱정이 나에게도 든다. 즉,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것과 그것을 사익(私益)을 위해 악용하는 자들에 대한 권계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의아해할 수 있다. 열심히 노력하라는 것 자체가 어떻게 선을 행하는 것과 연결되는지 의구심이 드는 초심자가 있을 수 있겠다 싶다.

‘忠信(충신)’은 그저 단순히 열심히 한다는 개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롯이 자신이 배운 것을 실천하는데 전념을 다한다는 개념이다. 즉, 배운 내용에 그 배운 것을 이용하여 출세하는데 활용하고 남보다 더 부와 명예를 추구하라는 것은 한 줄도 없다. 그것을 악용하는 사람의 악한 마음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위 주석에서 정자는 알 수 없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콕 짚어서 설명한 것이다. 배움은 언제나 옳고 바른 것을 가르쳤으나 그것을 곡학아세(曲學阿世)하고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제 배만 불리려는 사악하고 멍청한 것들만 있을 뿐이라는 뼈 때리는 영혼의 어퍼컷인 것이다.


다음으로 나온 것이,  논어 읽기를 시작했던 첫 번째 글인 ‘나보다 못한 자를 사귀지 말라?’라는 문제의 내용이다. 첫 공부를 읽지 않아 물음표를 붙인 이유를 잘 모르겠고, 왜 문제가 된다는 것인지 모르겠는 이는 다시 읽어보고 그 의미를 그대로 새기며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나보다 못한 자와 사귀지 말라는 가르침을 현대어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인다면 나와 사귀겠다는 자들은 모두 나보다 못한 자들일 것이고 나는 그들과 사귀면 안 되니 현실적인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모두가 나보다 못한 자와 사귀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나보다 나은 사람의 교유를 얻어낼 수 있단 말인가?


실제로 이 장에 대한 주자의 해석도 그러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딱 좋게 되어 있다.


벗은 인(仁)을 돕는 것이니, 자기만 못하면 유익함은 없고 손해만 있을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닌데, 현실성이 없는 모순의 가르침이다. 과연 그런 말을 공자가 하고 그것에 주자가 주석을 이리 간단하게 달았을까? 현대의 해설서 어디에도 이 어이없는 모순을 언급하고 설명한 책은 없다.(내가 보지 못했을 수도 있으나 이제까지 본 어느 책에도 이 모순을 지적한 해설서는 없었다.) 내가 워낙 어리석어 나만 모순이라고 여기는 것일 수도 있다.


조금 소극적인 해석이긴 하지만, 이 모순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는 벗하다(사귀다)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점과 ‘나보다 못하다’의 목적어를 무엇으로 보는가에 대한 숨은 그림 찾기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벗한다는 개념은 단순한 교유, 즉 사람의 만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좁은 의미에서 ‘배움을 위한 교유(交遊)’를 의미한다. 스승에게도 배우지만 배우는 자는 교유를 함에 있어 당연히 자신의 배움을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는 교유를 택한다. 자신의 목적이 더 배우고 익히고자 함인데 그저 단순히 친한 친구를 사귄다는 개념으로 벗한다는 의미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현대에 오면서 넓은 의미의 ‘친하게 지내다’로 확장되기는 하였지만, 최소한 이 장에서의 의미나 고문에서 말하는 ‘벗하다’의 의미를 단순히 현대어의 의미로 해석하면 위에서 지적한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이 장에서 말하는 ‘나보다 못하다’의 정확한 분야를 파악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두고 나보다 못한 자라고 판단하는가? 앞서 첫 번째 이유에서 먼저 설명한 바와 같이 이 문장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학문적으로’라는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생략은 대개 말하는 자나 그것을 듣는 자가 당연히 알고 있을 때 생략한다.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 이유를 설명하면서 등장한 이 장의 ‘벗하다’의 의미가 그러하듯 ‘나보다 못한’이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은 결국 학문적인 분야에 한정하여 설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어에서의 나보다 못한 자는 경제적인 부분을 필두로 전반적으로 나보다 밑에 있는 자를 폄하하는 용어로 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학문적인 것으로 한정될 경우에는 공부에 단계에 있어 나보다 먼저 뒤에 달려오는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공부에 매진해야 하는데 나보다 앞서 달려가는 이의 뒷모습을 보며 쫓아가는 것이 맞지, 나보다 뒤에 오는 사람을 보며 달려가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지금 내가 한 설명은 공자 당시는 물론이고 주자가 주석을 달던 시기까지 상식으로 통용되던 내용이었기에 아무도 모순이라고 느끼지 않아 특별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현대로 오면서 의미 전성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타성에 젖어 고문이니 으레 그러려니 하며 간과한 자들이 표지만 근사하게 만들어놓은 자신의 책에 설명을 담지 않았을 뿐이다.


다음은 본 장에서 나온 고사성어로 유명한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 되시겠다. 바로 주자의 해설을 통해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憚(탄)’은 두려워하고 어렵게 여기는 것이다. 자신을 다스림이 용감하지 못하면 惡(악)이 날로 자라난다. 그러므로 허물이 있으면 마땅히 속히 고쳐야 할 것이요, 두려워하고 어렵게 여겨서 구차히 편안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굳이 내가 ‘憚(탄)’이라는 글자의 해제까지 그대로 담은 이유는, 그 본래의 의미를 다시 한번 제대로 새기라는 의도에서이다. 단순히 ‘꺼리다’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두려워하면서 어렵게 여긴다’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잘못을 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일단 잘못한 저지른 대상에게 정식으로 진심을 담은 사과를 해야 한다.

그리고 사과의 기본은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비아냥거리듯 개 사과 따위를 하며 사과했다고 하거나 ‘남편이 어쩌구~’ 하면서 구구절절 변명부터하는 것이 사과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이유이다.


그런 짓(?)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여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내려가거나 자신이 혼이 나야 하는 상황으로 인해 무시당할까 싶은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한 두려움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를 망치고 그 잘못을 잘못이 아닌 것으로 덮고 꾸며나가려고 더 큰 사고를 치게 된다.


그래서 정자(伊川(이천))는 다음과 같이 이 가르침을 강조한다.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없다. 그 不善(불선)을 알았으면 속히 고쳐서 선(善)을 따르는 것일 뿐이다.”


첫 문장에서 학문을 강조한 것은, 실생활에 대한 것과 배우고 익히는 것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앞서 충신(忠信)의 개념과 ‘벗하다’로 이어지는 대전제에 배움이 있어 그것이 모두 한 맥락임을 강조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이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군자가 스스로 닦는 도리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씨(游酢(유초))는 이 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군자의 도는 위엄과 厚重(후중)함을 바탕으로 삼고 배워서 이루어야 할 것이요, 배우는 道(도)는 반드시 충신(忠信)으로써 주장을 삼고 자기보다 나은 자로써 돕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혹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하면 끝내 德(덕)에 들어갈 수 없어서 賢者(현자)들이 반드시 善(선)한 道(도)로써 말해주기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허물을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는 말씀으로써 끝을 맺으신 것이다.”


결국 이 문장의 모든 것을 완성시키는 것은 마지막에 집약되어 있다는 것이다. 잘못한 것이 많은 이들이 뉴스에 너무 많이 나온다. 그들이 늦었지만 얼른 잘못을 고칠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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