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Apr 13. 2022

멍하니 기다린다고 봄이 그저 오는 것이 아니다.

터널 안에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어둠이 가시랴?

子曰: “苗而不秀者有矣夫! 秀有矣夫!”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싹이 나고서 꽃이 피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꽃이 피고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 장의 의미를 따로 해석하려는 무지몽매한 이들도 간혹 눈에 띠기는 한다. 이틀 전부터 설명했던 바와 같이 이 장은 앞서 안회(顔回)의 논평으로 시작된, 안회의 죽음을 애석해하면서 그의 노력이 이룬 성과를 칭찬함과 동시에 그것이 어떤 것이었고 배우는 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이자 힘써야 할 가르침을 설파하는 내용이라 하였다. 


이 장은 앞서 두 장의 내용을 총괄함과 동시에 안회(顔回)의 죽음이 갖는 의미와 그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단순한 감정에 녹인 것에서 그치지 않는 공자 수준의 총평을 담고 있는 장이다. 때문에 앞서 두 장에서 살펴보았던 안회(顔回)에 대한 공자의 이야기의 연장선상이자 마무리 총평이라고 보아야 온전하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에 대해, 南宋 때의 성리학자인 陳櫟(진력)은 100% 동의하며 해석하였다. 하지만 동의하는 의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산(茶山;정약용)은 이 장을 앞서 두 장과 관계가 없다고 보기도 했다. 이유인즉, 안회(顔回)는 비록 요절했지만 德(덕)은 이미 성숙한 사람이었으며, 만약 이 장을 공자께서 안회를 애석해하신 것으로 본다면 안회(顔回)의 덕이 성숙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본 것이 되기 때문이라며 陳櫟(진력)의 의견에 반대하였다.


그러고 나서 다산(茶山)은 이 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자신만의 의견을 제시한다.


“공자는 천지가 만물을 낳는 이치를 말씀하신 것으로, 하늘이 이 사람을 낳으시고는 시간을 주시지 않아, 확충하고 크게 할 수 없게 하시니, 이것을 일러 하늘은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학문에 비유하자면 담담하여 아무 맛이 없는 것으로, 애석하고 안타까워하는 미묘함은 없다.”


陳櫟(진력)의 의견에 반대하는 식으로 말은 시작하였음에도 해석의 행간에는 역시 공자가 애제자 안회(顔回)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움을 보이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하여, 나는 본래의 의미에도 이 장을 앞선 두 장의 총평으로 본다는 의견을 견지한다.

꽃을 통한 비유적인 의미를 사용하여, 안회(顔回)가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지 못하고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를 거두기도 전에 젊은 나이로 인생을 마감해야만 했던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아쉬움을 담는 내용은 전혀 없고 공자 특유의 방식으로 사실관계에 대한 서술만을 하고 그것에서 흘러넘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행간에 가득 채워 읽는 이들에게 여운으로 남게 하는 시적인 표현으로 대신하고 있다.


먼저 주자가 이 장에 대해 어떤 해설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곡식이 처음 난 것을 ‘苗(묘)’라 하고 꽃이 핀 것을 ‘秀(수)’라 하고 곡식이 된 것을 ‘實(실)’이라 한다. 배우더라도 완성에 이르지 못함이 이와 같은 것이 있다. 이 때문에 군자가 스스로 힘씀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싹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꽃이 피고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표현은 자연의 섭리에 따른 시간의 흐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지 못한 안타까운 경우를 설명한다. 그에 대한 감정은 그 어디에도 표현하지 않는다. 그저 그런 경우‘도’ 있다는 설명으로 이 장은 담담하게 서술한다.


가장 슬픈 영화에서 슬픔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주인공의 죽음을 결코 영상을 통해 보여주지 않는다. 주인공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이 오열하거나 눈물을 펑펑 쏟는 장면을 연출하지 않는다. 과도한 눈물 장면이나 오열하는 장면을 통해 슬픔을 끌어낼 수도 있지만, 진정한 영화 연출의 대가들은 그런 단계를 넘어선다. 그것은 문학에서, 특히 시(詩)에서 유래되었고 시(詩) 문학에서 가장 적실하게 계승된 연출 방식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장에서의 공자는 그저 자연의 한 장면을 묘사하는 것만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한 애제자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주자는 그 설명에서 배우는 자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앞서 두 장과 이어지는 논평을 끌어올린다. 자신의 의지와 달리 꽃을 피우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인생이 있다는 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여타의 다양한 이유로 자연의 섭리대로 시간이 흘러도 꽃을 피우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통해 안회(顔回)의 요절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으로 해석한 본래의 의미를 담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것에서 조금 더 나아가, 일반적으로 배우는 자들이 학문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단순히 시간을 보내며 기다리는 것만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싹마저도 자신이 성장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야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데, 그러한 의지와 노력을 하지 않는 자들은 결코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내용을 역설한 것이다. 이는 앞의 장에서 말했던 공자의 지적, 즉, 나아감과 그침, 모두가 자신의 의지에서 발현된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 강조한 것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위 주자의 주석에서 뒤의 문단에 설명하는 ‘배우더라도 완성에 이르지 못함이 이와 같은 것이 있다. 이 때문에 군자가 스스로 힘씀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이라는 설명은 배우는 자들에게 안연(顏淵)을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를 설명하고자 했던 대의(大意)를 보여줌으로써 단순히 애제자의 슬픔을 애도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보인다.


앞서 이 장의 가르침에서 시(詩) 문학의 방식이 충분히 구현되고 있다 설명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일상의 아무렇지도 않은 자연현상을 보고서 탁월한 통찰력을 통해 그것이 갖는 의미를 끄집어내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을 이 장에서 공자는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앞서의 설명(흙 삼태기 장)과 맞물려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이 장에서 공자가 한 표현이 얼마나 면밀한 관찰력과 통찰력을 통해 맞물려 있는가에 대해 확인할 수 있다.

‘싹은 돋았으나 꽃을 피우지 못했다’는 표현은 ‘싹은 피웠다’라는 인정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첫 삽을 파는 의지는 가지고 배움에 임했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그렇게 배우기만 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그것은 꽃을 피우지 못한다. 공부를 자신의 출세를 위한 도구로만 사용하게 되면 그것을 머리로만 공부를 한 것이고 실천으로 완성시키지 못하였기에 꽃을 피우지 못했다고 본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환경에 의해서나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중도에 그런 실천의지를 포기한 것이기에 꽃을 피우지 못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어서 ‘꽃은 피웠지만 열매를 맺지 못했다.’라는 의미는, 뜻을 품고 행하려고 하였으나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건 생각했던 것보다 어렵고 여의치 않게 되자 중도에 포기해버려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장의 해석을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노력해도 성과를 이뤄내지 못한 제자들에 대한 위로의 의미로 사용했다는 식의 황당한 소리를 하는 현대 해설서도 있으니 지뢰밭에 빠져 사이비 종교 집단에 끌려가 영혼 탈곡기에 들어가 본의(本意)마저 잃게 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다.

공자가 관찰하고 그 일련의 과정에서 보았던 모습은 실제로 그러하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씨앗을 뿌려도 씨앗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움트고 단단한 땅을 뚫고 싹이 피우기까지는 부단한 노력으로 이어지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어 싹이 꽃을 피우는 것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워 보이고 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꽃을 통해 열매를 맺기 위해 벌을 부르고 나비를 부르기 위한 노력이고 의지인 것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꽃을 피웠다고 하여 그저 시간이 지나면 모든 꽃이 수정을 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갑작스럽게 내린 폭우로 꽃이 피기도 전에 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고 그 꽃이 예쁘다며 수정도 되기 전에 사람의 손에 꺾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싹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 생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싹은 다시 꽃을 피우기 위해 다시 꽃을 피우고 다시 한 해를 기다리고 노력할 뿐이다. 그렇게 노력하지 않고 사그라들고 스스로의 의지를 저버리는 순간 그 싹은 꽃을 피우지도 못하거나 꽃을 피웠다 하더라도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 모든 과정에 대해서 상세하게 클로즈업하여 보여주지 않았지만, 이 장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그 모든 자연의 과정을 통해 공자가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를 눈앞에 그리고 마음에 새기게 만든다. 그것이 시(詩)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고 시인(詩人)이, 누구나 접하고 볼 수 있는 우리 주변의 일상 속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것들을 포착해내고 그것을 메시지의 전달로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그러한 점에서 공자는 진정한 시인의 통찰력을 이 짧은 한 문장의 가르침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후회란 미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늘 지나가고 난 후에 하게 되기 때문에 ‘후회(後悔)’라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후회는 미리 예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후회가 없게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나중에 후회라는 감정이 들지 않도록 오늘에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쏟아부으면 된다. 물론 말이 쉽지, 매일같이 내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는 것은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온몸에 힘을 빼라는 말도 어렵지만, 매일 매 순간 온몸에 기합이 잔뜩 들어가서야 금세 기운이 빠져버리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인간의 생에 주먹을 꼬옥 쥐고 태어나 손을 펼치며 빈손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안간 힘을 다한다는 것은 불가능처럼 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안연(顏淵)의 안타까운 요절을 접하고서 그저 한탄하고 슬퍼하는 것을 넘어 다른 배우는 자들에게 그가 했던 노력과 그가 보여주었던 실천의지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공자는 이 세 장을 아우르며 전달해주었다. 당신은 이제까지의 당신의 삶을 반추하였을 때 짧은 생을 마감한 안회를 통해, 혹은 그 삶을 보며 그리도 안타까워하고 슬퍼했던 공자가 왜 그렇게까지 슬퍼하고 안타까워했는지의 진정한 의미를 통해 어떤 생각을 하는가?


이제 한 달여 있으면 대통령이 정식으로 바뀐다. 전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나는 이번에 청와대에서 나올 대통령이 제대로 정치를 펼친 사람이라 보지 않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물론 그의 실정(失政) 때문에 눈꼴이 시어 정권을 연장시켜주어서는 안 된다는 몽니를 부려 반대쪽에 표를 던질 정도로 막 나갈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취임식 선서 당시

하지만, 이제 그가 5월에 청와대에서 나올 그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그와 그가 총수권자로서 경영했던 정부와 그가 당대표까지 했던 그 여당이 저지른 수많은 잘못과 그것으로 인해 벌어진 안티들로 인해 그 안티들이 새로 대통령 자리에 오를 자에게 표를 국민의 절반 이상 주었다는 점에서 결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전 장사꾼 정부의 공조를 통해 국정원을 동원한 지저분한 언론조작과 댓글 방해공작이 있어 분패(憤敗)의 눈물을 삭히던 그가 국정농단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만 하더라도, 연이은 총선에서 그 인기를 힘입어 180여 석이나 되는 거대 여당을 만들어줬을 때만 하더라도 그와 그의 정당에 표를 몰아주었던 국민들은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바랐을 것이다. 


물론 그가 이전에 자신이 따르고 지지하고 함께 일했던 스스로 생을 마감해야만 했던 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이 그에게 유산처럼 흘러들어간 것도 무시할만한 요소는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전 대통령의 적통 계승자였고, 그가 억울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에 대한, 못다 이룬 그것을 완성시켜야만 한다는 사명감도 분명히 가지고 출발했던 정부였다. 그가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의지가 아무리 있다 하더라도 청와대의 주인 한 명만 바뀌어서 복지부동하는 이전 10여 년간의 정권에서 고르게 깔려 자기 멋대로 구는 관료들과 공무원들의 썩은 바탕을 바꾸지 못했을 것이다.

검찰총장 임명식 당시

하지만, 그 모든 점을 감안하더라도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부동의 진리를 구태어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그는 서툴고 엉성하며 엉망이면서도 반성하지 않는 모습으로 정부를 운용하였다. 국민들의 눈높이 맞지 않는 자들을 연이어 임명하였고, 썩어 빠졌다며 국민의 심판을 받았던 빨간당을 쇄멸시키지 못하였으며, 무엇보다 자기 진영의 썩어빠진 부정과 부패에 메스를 제대로 대지도 못하고 그저 조금씩 좀 먹는 것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성과라며 고장 난 스피커들을 계속 틀어대기만 했다. 


그 결과 자신이 임명한 감사원장과 검찰총장이 희대의 역성혁명에 준하는 사표를 내면서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관철시키겠다고 그들의 발등을 대차게 찍었다. 그런 이들을 임명하고 키운 것도 바로 그였고, 그의 정부였으며, 그의 여당이었다.


무엇보다 아직 기간이 제법 남은 국회의원이라는 180여 석을 그저 빨간당에게 딴지를 거는 용도로만 사용하고 곧 있을 지방선거에 활용하려고나 드는 무능을 넘어선 반성하지 못하고 몽니를 부리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대선의 패배를 패배라고 인정하고 반성하기는커녕, ‘졌잘싸’로 포장하며 영혼 승리로까지 승화시키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어디까지 무너지고 망하고 비극을 반복해야 부족함을 인정하고 보수의 망치와 못을 들고 나설 것이란 말인가?

열매는 커녕 꽃도 피우지 못한 싹들이 있었다.


당신이 이 장을 공부하며 왜 공자가 싹을 보며, 그리고 꽃을 보며 한탄하였는지 다시금 마음을 다지는 아침이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자는 왜 안회의 죽음을 그리 애석해했던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