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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20. 2022

망한 데뷔작 감독이라 아무도 써주지 않았지만,

직접 쓴 시나리오를 1달러에 팔아 세계적인 감독으로 우뚝 서다.

213번째 대가의 이야기.


1954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기기술자, 어머니는 화가였다. 17살에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 50년대 B급 SF 영화에 빠져 들었고, 어린 시절부터 잡동사니로 로켓, 비행기, 탱크 등을 만들면서 미니어처 제작의 습작 기간을 거쳤다.


독서광이었던 그는 특히 자기가 좋아하는 SF물에 빠져들게 되면서, 그 시각적 상상력을 표현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아버지에게 카메라를 빌려, 16mm 영화 습작과 미니어처를 직접 만들어 특수효과도 실연해보는 상당히 실험적인 소년이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을 중퇴한 그는 결혼을 하고, 생활을 위해 트럭 운전사나 만화가 어시스턴트 등의 직업을 전전한다. 그러던 중 1977년 개봉한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를 보고 나서 엄청난 컬처쇼크를 받고, 하던 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뛰어들 결심을 굳히게 된다. 그리하여 1년 만에 친구와 함께 만든 단편 습작 영화 <제노 제네시스>가 좋은 평가를 받아, B급 영화, 저예산 영화를 흥행시켜 수익을 남기는 걸로 유명했던 로저 코먼의 뉴 월드 픽처스에 들어가게 되는 행운을 잡는다.

캐나다 국적의 감독으로, 역대 세계 흥행 순위 1위 영화인 <아바타>와 3위인 <타이타닉>을 연출한 현존하는 가장 화려한 영상제작 기술을 구현하는 감독으로 불리는 제임스 프랜시스 카메론(James Francis Cameron)의 이야기이다.


자신을 영화 세계에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던 조지 루카스와 함께 할리우드의 영상제작 기술의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한 감독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새로운 기술과 SF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영상에 완성도 높은 고전적인 이야기를 융합시켜,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는 데 성공한 스토리텔러이자 SF영상의 신세계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8년 아카데미 시상식 감독상 수상 소감으로 "I'm the King of the World!(내 이 세상의 왕이다!)"를 외친 것으로도 전설을 더했다.

로저 코먼의 밑에 들어가, <우주의 7인>(1980)의 미니어처를 제작한 것이 그의 첫 영화 작업이었다. 이 외에도 <뉴욕 탈출>(80)이나 <공포의 혹성>(80) 같은 B급 SF 영화의 디자인과 특수효과에 참여해, 제작자들에게 제법 감각이 있는 친구라는 눈도장을 찍게 된다.

그리하여 <피라냐 2(Piranha Part Two: The Spawning)>(81)에서 드디어 꿈에 그리던 감독으로 데뷔하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최악의 악몽이라는 기억만 남기게 된다.


사실 미국 영화가 아닌, 이탈리아 영화였던 이 작품은 <피라냐 1>과 전혀 상관이 없는 영화로, <피라냐 1>은 로저 코먼이 제작하고 조 단테가 감독하여 <죠스>의 인기에 힘입은 패러디 작이었음에도 적은 제작비로 만들어 미국에서만 제작비 15배가 넘는 대박을 거둔 B급 영화였다. 그런데 대박 미국 영화의 속편을 표방하며 그대로 베끼듯이 멋대로 낸 영화가 바로 이 영화였던 것이다.


제작자 오비디오 G. 아소니티스의 유명작의 이름만 빌려 돈을 벌어보겠다는 잔머리 작전으로, 감독이 확정되지 않던 와중에 카메론에게는 명분상 감독 자리를 주었는데, 그는 촬영을 시작한 지 불과 12일 만에 해고 통지를 받게 된다.


당시 미국 워너브라더스사의 제작 투자를 받아 지원된 영화엔 조건이 있었다. 감독을 반드시 미국인으로 기용하라는 조건이었다. 이에 오비디오 아소니티스는 형식적으로 계약조건을 만족시킬 감독으로 그의 이름만 감독으로 올렸다가 바로 중간에 해고해버렸던 것이다.


더욱 충격적이기 그지없었던 사실은, 엽기적인 건 제작비 아끼기로 악명 높았던 로저 코먼이 제작한 <피라냐 1>조차도 60만 달러의 최저(?)의 제작비를 들였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짝퉁 영화, <피라냐 2>는 15만 달러만을 들여 만들어졌다. 그래도 극장 개봉으로 40만 달러 정도 벌어 들이며 B급 짝퉁 영화로서는 적자는 면했다.

나중에 그가 다시 재편집한 출시본

기대에 찬 첫 영화에 제대로 감독을 맡지도 못하고 잘려버린 카메론은 실망을 넘어서 좌절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갈며 절치부심 자신이 제대로 된 영화의 감독으로 데뷔할 것을 다짐하였으나 그에게 다시 기회가 돌아올 기미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피라냐 2>로 고생하던 그 시절 어느 날, 카메론은 로마에서 촬영 기간 중 머물던 어느 싸구려 호텔에서 고열로 앓아누웠는데, 끔찍한 모습의 기계 인간이 불 속에서 서서히 일어나는 악몽을 꾸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그의 전설을 시작하게 될 <터미네이터>의 시나리오를 쓰고, 완성한 후, 자신의 인생을 건 도박을 하기로 한다.


그는 시나리오를 들고 제작사를 찾아다녔다. 제작사들은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이야기에 앞다퉈 시나리오 판권을 사려했다. 하지만, 그는 퍼시픽 웨스턴 제작사에 시나리오를 1달러에 팔겠다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그 파격적인 계약을 맺게 된 이유는 바로 제임스 카메론이 시나리오를 넘기는 대신 단 한 가지 조건을 걸었기 때문이다. 바로 자신이 영화의 감독을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시나리오에 관심을 보이며 높은 가격을 제시했던 많은 제작사들이 원했던 것은 그가 쓴 쌈박한 시나리오였을 뿐, 감독이 아니었다. 희대의 망작 <피라냐2>의 감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던 제임스 카메론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할리우드에서 그에 대해 내린 평가였다.


당시 신생 제작사였던 제작자 게일 앤 허드는 그러한 제임스 카메론의 파격적인 제안을 받아들였고, 영화 <터미네이터>의 제작에 돌입하게 됐다. 하지만 또 다른 난관이 있었다. 영화의 전반을 장악하는 <터미네이터> 역을 누가 맡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주인공임에도 대사가 적고 악역인 터미네이터를 당시 이름이 좀 있다는 배우들은 아무도 연기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아놀드 슈워제네거 역시 원래 인간을 위해 싸우는 용사 카일리스 역을 맡기로 하고 계약을 맺었었다.

당시 한국 포스터

하지만 아놀드를 직접 만난 제임스는 그가 터미네이터 역에 적격이라고 판단했다. 터미네이터 역을 제안했지만 아놀드 슈왈 제네거는 거절한다. 그런데 얼마 후,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그의 제안을 수락하며 마음을 바꾸게 된다. 이유는 제임스가 보낸 그림 한 장 때문이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어떻게든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에 대한 적임자가 그라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아놀드의 얼굴을 한 터미네이터 그림을 그려 선물했고, 그림을 보고 감동한 아놀드 슈왈 제네거가 해당 역을 수락했던 것이다.


하지만 첩첩산중. 아놀드 슈왈 제네거가 이미 촬영 중이었던 영화 <코난> 촬영이 끝나지 않아 제작 과정이 늘어졌다. 그렇게 영화는 우여곡절 끝에 640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저예산에 해당하는 비용으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영화의 배급을 맡은 오라이언 사는 싸구려 액션 영화일 뿐이라며 영화를 폄하하며 홍보에 일절 돈을 쓰지 않겠다고까지 선언한다.

오리지널 포스터

그러나 개봉 직후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었다.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개봉 직후, '테크 누아르'란 호평과 함께 미국에서만 3840만 달러, 해외에서는 8000만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올려서 거의 제작비 20배에 육박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그 해 최고의 영화로 등극하며 그야말로 대박을 기록한 것이다. <터미네이터>는 공상과학 액션 영화의 판도를 바꾼 영화라고 극찬을 받았고 새턴 어워즈에서 SF각본상 등 3개 부문 수상을 이뤘다. 이후 제임스 카메론은 할리우드 최고의 감독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카메론은 <람보 2>(1985)의 각본(실베스터 스탤론과 공동)을 맡은 뒤, <에이리언 2(Aliens 2)>(1986)의 감독으로 발탁된다. <람보 2>와 <에이리언 2>는 속편이 첫 편을 뒤집고 더 성공하기 힘들다는 당시 영화계의 속설을 깨부수며 대성공을 거두었고, 계속되는 흥행 성공으로 카메론은 모든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모셔야 하는 흥행감독으로 등극하여 영화 제작에 제작비를 신경 쓰지 않고 맘대로 쓸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된다.


이후 카메론은 <어비스(The Abyss)>(1989),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Terminator 2: Judgment Day)>(1991), <타이타닉(Titanic)>(1997) 등을 감독하며, 새로운 특수 효과를 개발해가면서 시각 세계의 표현 영역을 넓히는 데 주력했다.

바다를 배경으로 과학 기술의 오용이 가져올 위험성을 경고하는 영화 <어비스>는 카메론의 전작들과 달리, 역동적인 액션보다 중년 부부의 헌신적인 사랑과 미지와의 조우를 해저 심연에 펼쳐낸 카메론식의 SF 동화였다. 7000만 달러를 들인 <어비스>는 평은 좋았으나 대중들이 즐기기엔 다소 심심한 내용이 되었다. 게다가, 영화가 제작되는 동안 제임스 카메론이 심해 소재 영화를 만든다는 소문이 퍼지자, 여기저기 숟가락을 얹겠다고 비슷한 류의 심해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줄줄이 쏟아졌다.

그러한 이유에서였을까? 그의 새로운 시도는 아쉽게 실패로 좌초하게 된다. 이 영화는 카메론이 직접 감독한 메이저 영화 중에서는 처음으로 상업적으로 실패를 기록하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개발된 신기술은 이후 <터미네이터 2>에서도 아주 유용하게 활용된다.


흥행에 실패했던 <어비스>에 이어 다시 그를 또 일으킨 것은 역시 터미네이터였다. 1억 200만 달러가 투입된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Terminator 2: Judgment Day)>(1991), 1억 2000만 달러의 <트루 라이즈(True Lies)>(1994), 급기야 2억 달러 이상의 제작비를 퍼부은 <타이타닉>에 이르기까지, 카메론은 할리우드 영화의 제작비 상승을 주도한 주범(?)으로 떠올랐다.

<트루 라이즈>

흥행에 실패했다고 하지만 심해를 리얼하게 표현하겠다는 그의 장인정신이 투영되었던 영화 <어비스>의 디지털 특수 효과는 이후 그의 영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자양분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다.


의인화된 물 캐릭터는 몰핑 기법으로 창조한 <터미네이터 2>의 T-1000의 변신 장면에 투영되면서 영화팬들을 충격의 도가니로 빠뜨렸다. <트루 라이즈>의 1/4을 차지한 구분이 모호한 실사와 컴퓨터 그래픽의 합성 등 불가능해 보이는 표현의 한계에도 도전했고, 경이로운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큰 수익을 경신해나갔다.


그의 영화는 <어비스>를 빼놓고 모두 큰 성공을 거뒀다. 그 자신이 특수 효과 제작자로서 영화계에 뛰어들기도 했던 만큼, 모형 제작의 달인이자 특수 효과 제작자인 스탠 윈스턴과 함께 특수 효과 전문 업체인 '디지털 도메인'을 설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타이타닉>의 경이로운 성공을 이루어내기 전까지 그는 그저 SF 액션 영화만을 뛰어나게 잘 만드는 감독이라는 다소 편향된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만 했다. 하지만 특수 효과의 향연과 스펙터클, 멜로드라마의 문법을 결합한 <타이타닉>은 최고의 테크놀로지를 동원해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장인의 경지를 보여줬고, 1998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14개 부분에 노미네이트 되어 이 중 11개 부문을 수상하면서 그런 평가를 일축하였다.

사실 그 이면에는 그가 처음 절박한 마음으로 쓴 시나리오를 들고 감독을 하겠다고 1달러 만을 받는 조건으로 입봉 했던 이야기만큼 눈물이 서려 있다. <타이타닉>은 제작비가 당초의 예산을 애초에 초과해버렸고, 이 때문에 영화는 좌초될 위기에 처한다. 이미 최고의 감독이라고 인정받았던 그였지만, 할리우드의 현실은 냉혹했다. 그만큼 그가 공을 들인 만큼 예산이 무리하게 들어가 버린 것도 그러한 사태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그는 다시 절박함에 눈물의 승부수를 던진다. 감독으로서의 보수를 포기하는 것은 물론, 만약 <타이타닉>이 흥행에 실패하면 이후 제작할 <터미네이터 3>를 무보수로 찍겠다는 별도의 계약까지 하면서 제작이 원활할 수 있도록 올인을 한 것이다.


미국 내 수익과 해외 수익을 합쳐 1년 동안 무려 18억 4000만 달러를 벌어들인 <타이타닉>은, 총수익 9억 2000만 달러를 벌어들인 <쥬라기 공원>의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무려 2배 이상으로 넘어서며 깨버렸고, 전 세계 영화 역사상 최고의 제작비를 들여 최고의 수익을 올린 전대미문의 블록버스터로 기록되었다.


카메론도 <쥬라기 공원>, <스타워즈>, <E.T.> 등으로 10여 년간 치열하게 역대 박스오피스 1위를 뺏고 빼앗기는 경쟁을 해 온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를 멀찌감치 제치고 새로운 패왕에 등극한 것이다. 그가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며 감격에 겨운 '내가 이 세상의 왕이다!'라고 외친 것은 결코 객기나 건방진 오만에서 나온 것이 아닌, 그가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 끝에 그 상황을 뒤엎고 자신이 영화계에 투신하게 된 계기였던 감독마저도 넘어서는 쾌거를 이룬 것에 대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 기록은 아직까지도 자신의 <아바타>와 루소 형제의 <어벤저스: 엔드게임>을 빼고는 제친 작품이 없다. 2015년도 최고의 화제작이었던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조차 당시 기준으로 최종 20억 달러 가량의 흥행으로 역대 박스오피스 3위(현재는 4위)에 그쳤을 뿐이다.


<타이타닉> 당시 그 어떤 작품도 넘지 못했던 북미 5억 달러의 흥행을 넘어 6억 달러라는 전대미문의 흥행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 전설은 그에 의해 다시 기록된다. 아무도 넘지 못하던 북미 7억 달러의 흥행을 그가 만든 <아바타>로 넘어선 것이다.


심지어 <타이타닉> 첫 개봉이 지난 17년 뒤인 2015년에 개봉해 엄청난 대박을 터뜨린 <쥬라기 월드>가 전 세계 흥행 기록은 포기하더라도, <아바타>의 북미 기록만이라도 넘어보려고 갖은 용을 썼으나 <타이타닉>의 기록조차 넘어서지 못했다. 이처럼 <타이타닉>이 상상을 뛰어넘는 초대박을 치자, 제작사인 폭스와 파라마운트에서는 보수도 포기했던 카메론에게 무려 1억 달러(약 1000억 원)의 보너스를 따로 주었다.


말이 보너스지, 북미 5억 달러를 넘은 작품도 없고 월드와이드 10억 달러를 넘은 작품도 없었는데, <타이타닉>은 그 기록을 다 깨뜨려서, 북미 6억 달러, 전 세계 18억 달러를 벌었으니, 영화사에서는 그를 붙잡고 싶은 마음에 보너스의 이름으로 그의 환심을 사려고 그런 파격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카메론이 <타이타닉>을 찍은 진짜 목적이 영화 제작이 아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것이다. 그는 사실 역사 로맨스 물에는 관심이 없었고, 바닷속에 가라앉은 타이타닉호를 탐사하기 위한 목적을 빙자하여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처음부터 꾸준히 우주와 바다였고, 특히 심해는 마치 외계 생물들이 가득한 SF의 세계와 같다고 생각하여 꼭 보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직접 잠수함에 타 바닷속과 타이타닉을 촬영하고 당시 기준으로 가장 깊숙이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기록까지 세웠다.

이렇게 바다와 심해를 탐사하면서 그와 관련된 소소한 다큐들을 내놓았다. 엄청난 흥행 신화를 썼기에 언제 다시 메가폰을 잡고 복귀하느냐가 할리우드의 초미의 관심사였지만, 카메론은 다큐멘터리 영화들이나 영화 제작에 잠깐 참여할 뿐 실질적인 영화감독 복귀는 하지 않았다. 이런 일들로 인하여 타이타닉의 엄청난 흥행으로 인한 부담감에 카메론이 고통받는다는 루머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런 소문과는 달리 카메론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눈을 돌리고 관심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었다. 2000년도에 일본의 SF 만화인 총몽의 영화화 판권을 사들였으며, 폭스를 통하여 도메인도 등록하였다. 그리고 2003년도에 자신이 직접 감독하여 2007년에 개봉하겠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총몽', 즉 <알리타: 배틀 엔젤>은 카메론의 또 다른 야심작인 <프로젝트 880>에 의하여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 880이 바로 <아바타>로 이어진 것이다. <타이타닉>으로 90년대 후반을 휩쓸었던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감독 복귀작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퍼짐과 동시에, <아바타>의 제작에 대한 일거수일투족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에 카메론 감독은 영화사에 남을 영상 혁명을 보여주겠다고 호언장담했으며, 3D 영화라는 점, 20세기 폭스에서 제작비에 관하여 무제한으로 허가해줘서 제작비가 자그마치 4억 달러에 달한다는 점 등이 알려지자 대중들의 반응은 엄청난 기대와 함께 이번 영화가 망하게 되면 그의 영화 인생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걱정까지 이어졌다.

2009년 12월에 드디어 카메론의 12년 만의 신작 <아바타>가 개봉했고, 초반 로튼토마토 100%를 받으며 전야제부터 대중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그리고 극장 개봉 2개월 만에 결국 12년간 흥행의 아성을 지켜오던 <타이타닉>의 기록을 뛰어넘게 된다. 끝을 모르는 흥행 기록은 계속되어 결국 최종 27억 87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수치의 흥행을 달성했다.


카메론은 <아바타>의 성공 이후 후속작 세 편을 더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하여 제작사인 20세기 폭스는 카메론에게 속편 제작의 전권을 위임하였고, 찍고 싶은 것을 맘껏 찍으라고 판을 깔아주었다. 그가 그간 직접 보여준 성과에 대한 신뢰이자 투자였다. 그러나 이후 시리즈는 계획했던 것과 달리 2021년 <아바타 2>가 완성된 것을 시작으로 조금씩 조금씩 일정이 뒤로 밀리고 있다.


한편, 그는 제작자로도 일찌감치 데뷔한다. 하지만, 흥행 대박작이 가득한 스티븐 스필버그와 달리 카메론이 감독이 아닌 제작을 맡은 작품은 <생텀>을 빼고는 전혀 흥행하지 못했다.

처음 카메론이 제작에 참여했던 영화는 전 아내인 캐서린 비글로 감독의 <스트레인지 데이즈(Strange Days)>(1995)였는데, 4천2백만 달러의 제작비로 전 세계에서 겨우 8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데 그쳤다. 물론, 아카데미 감독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경력을 가진 비글로 감독답게 작품적으로는 괜찮은 평을 받았지만 흥행감독으로서의 제작자 변신에는 인정을 받지 못할 만한 성적표가 이어진다.


<타이타닉> 흥행 이후 5년 뒤에 나온 카메론 제작 영화 <솔라리스>는 스티븐 소더버그가 감독한 작품으로, 평론가들의 평은 좋은 편이었으나 흥행 면에서는 미국 첫 주 수익이 7위(675만 달러)라는 초라한 기록을 달성하여 미국 흥행 수익은 1,497만 달러에 그치며 큰 손해를 남긴다.


<아바타>의 흥행 2년 후, 제임스 카메론이 제작하고 알리스터 그라이슨이 감독한 <생텀>은 미국에서 첫 주 2위로 개봉했지만, 흥행 성적은 944만 달러로 부진했다. 이 영화는 <솔라리스>와 달리 평론가들에게도 혹평을 받으며 미국 흥행에서 참담한 실패를 기록한다. 하지만, 전 세계 흥행 1억 800만 달러가 나오면서 겨우 수익은 올렸다. 참고로 이 영화 제작비는 3000만 달러로 꽤 저렴하게 만든 영화이기에 수익을 올렸다고 상대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2019년에는 <알리타: 배틀 엔젤>이 개봉했다. 카메론은 그동안 누구에게도 총몽 감독직을 주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고 아바타 촬영장에서까지 갈 리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을 정도로 애정을 과시했다. 그러나 5편까지 제작 결정된 아바타 속편과 일정이 겹치며 감독직을 로버트 로드리게즈에게 넘기고 자신은 제작자로 참여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개봉한 알리타는 극장 개봉 흥행으로 본전 치기 수준에 그치며 그가 제작하게 되면 흥행에서 멀어진다는 공식(?)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해 말에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가 개봉했다. 2편의 직계 후속작임을 내세우고 <데드풀> 실사영화로 능력을 인정받은 팀 밀러에게 메가폰을 넘겨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그 결과물은 터미네이터 팬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고 흥행에도 완전 실패하고 만다. 그를 일으키고 늘 지지해줬던 <터미네이터> 시리즈 역사상 처음으로 제작비조차 건지지 못한 최악의 흥행을 기록한 것이다. 그 역시 그가 제작을 맡았다는 저주(?)를 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신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제임스 카메론의 인생을 오늘 당신에게 세밀한 돋보기를 통해 보여준 이유는 단 하나이다. 그가 처음부터 승승장구하며 잘 나가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 무엇보다 그가 그러한 시련과 실패와 좌절 속에서 지금의 성공을 만들어낼 극적인 계기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자신이 감독을 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직접 시나리오를 쓴 사례는 약간 변용되어 지금은 전설이 된 멧 데이먼과 벤 애플릭이 배우로서 등장하고 싶어 쓴 <굿윌 헌팅>의 사례와 아주 비슷하다. 그들에게 있어 절박함은 자신들을 믿고 배우나 감독으로 고용해주지 않는 현실을 시나리오라는 창작물로 뛰어넘고자 했던 노력으로 발현되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그 한 방으로 자신을 알리고 일어설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는 그의 인생사가 아주 잘 녹아들어 가 있다.

카메론은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특히나 주체적이고 강한 여성 캐릭터를 많이 만들어냈고, 그 캐릭터들이 호평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에일리언 2>의 엘렌 리플리부터 시작해서 <터미네이터 2>의 사라 코너, <타이타닉>의 로즈 등 적극적이고 활동력 강한 여성 캐릭터는 카메론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 카메론 감독은 여러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부터 강한 여성이었던 어머니와 할머니를 존경하며 자랐었고, 자신이 커리어를 시작했을 때의 영화계에서는 주로 전형적인 강한 남성 주인공이 넘쳐났기 때문에 이런 현실에 대한 반발심으로 강한 여성 캐릭터를 많이 만들게 되었다고 밝혔다.


다만 오늘날에 와서는 주체적이고 강한 여성 주연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작품들이 많아졌다 보니 굳이 이런 부분에 대해서 고집하지는 않다고 하며, 그보다는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지 않고 강한 주체성을 가진 캐릭터를 만들어 나가는 것에 대해 더 흥미가 있다고 한다.


한편, 거대 자본을 가진 대기업들이 악역으로 잘 나오며, 결말에는 좋은 꼴을 못 보여준다는 공통점도 그가 가지고 있는 전반에 깔린 심리를 잘 보여준다. 이는 대기업과 연관된 상류층에 대한 조롱과 풍자에 다름 아니다. <에이리언 2>의 웨이랜드 유타니,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사이버다인 시스템즈, <아바타> 시리즈의 RDA, <타이타닉>의 화이트 스타 라인이 하나같이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할리우드 감독 중에서도 스탠리 큐브릭 감독과 더불어서 가장 괴팍하면서 완벽주의적인 성격으로 유명하다. <에일리언 2>를 촬영할 때 초반에 영국 스태프들과 호흡이 잘 맞지 않자 책상을 뒤엎을 정도로 싸웠다는 얘기가 있으며 딕 부시 조명 감독은 자기 입장에선 듣보잡인 카메론을 무시하고 일부러 자기 입맛대로 작업했다. 결국 제작자인 허드가 그를 해고해야 했다. <타이타닉> 촬영 때도 뭐 하나 맘에 안 들면 육두문자부터 시작해서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달달 볶아대었다고 한다. 제 아무리 몸값 높고 유명한 배우라 할 지라도 인정사정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아무튼 그 불같은 성격 때문에 촬영장의 스태프들은 그를 촬영장의 폭군, 혹은 촬영장의 조지 S. 패튼 장군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카메론은 패튼 장군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막말을 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스태프를 가차 없이 해고해버렸지만, 카메론은 당당하게(?) “그래도 나는 패튼 장군처럼 몽둥이로 당신들을 두들겨 패지는 않았다.”라고 응수했다.

굳이 그의 성격이 좋은 것이라고 당신에게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이후 NASA의 과학자들과 함께 심해 탐사를 다녀오면서 성격이 크게 바뀌는 과정을 겪게 된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전의 성격을 설명한 것이다. TED에 나와 그가 고백하듯 설명했던 내용에 따르면, 카메론은 그 탐사 과정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며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유대감'을 배웠고, 이를 <아바타>의 제작 과정에 도입해서 매우 좋은 결과를 냈다고 밝혔다.


실제로 <아바타>의 촬영은, 이전까지 카메론이 찍은 영화들과는 다르게 굉장히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에일리언 2>에서 출연했던 시고니 위버가 카메론이 순해졌다고 증언할 정도로 그는 큰 변화를 보였다.

이것은 그가 뭔가 대단한 극적인 계기를 겪었다기보다는 그가 끊임없이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발전을 겪게 된 것을 의미한다. 가난하고 가진 것도 없었으며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해 어떻게 해서든 성과를 내야 하는 입장에서는 그가 가진 단단한 세계관을 표현하기 위해 제대로 따라주지 못하는 이들에게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그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도 계속 그랬다면 그에게 전설적인 <아바타>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 나는 장담한다.


그가 이전의 자신이 부족했던 점을 깨닫고 그것이 결국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성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가장 효율적인 자신의 변화를 택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철학적 내용이나 영상미에 치중하는 영화 감독이 아닌 철저하게 대중들의 의중을 읽는 것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감독이기 때문에 가능한 추론이기도 하다.


당신이라면 가족 때문에 결혼까지 먹고 사는 직업을 과감하게 던지고 당신의 꿈을 찾아 새로운 일을 바닥부터 시작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정점에 올라 망한 영화를 통해 배운 기술들이 이후 출세작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그의 유일한 흥행 실패작은 그의 이후 초대박작의 자양분 역할로 충분한 자기 몫을 했다. 지금 당신의 실패가, 뼈아픈 시행착오가 당신의 대성공을 위한 자양분임을 잊지마라. 당신이 이제까지 했던 노력은 어디가지 않고 당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그렇게 되려면 당신이 포기하지 않아야 하고 당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모습으로 밀고나가야만 가능하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당신의 삶이 삼진아웃으로 끝날지 만루역전홈런을 때릴지는, 환경의 요인따위가 아닌, 당신의 선택과 의지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제임스 카메론의 인생을 통해 읽어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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