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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21. 2022

금수저 출신 도련님을 포기하고 작가의 길에 나섰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상황에서 공상과학소설의 아버지로 우뚝 서다.

214번째 대가의 이야기.


1828년, 프랑스 서부의 대서양 연안 항구도시 낭트에서 변호사인 아버지와 인자했던 어머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가문은 대대로 법조인을 배출한 법조인 가문이었으며, 어머니의 가문 역시 인근 지역에서 오랫동안 명문가로 유명한 이른바 명망 있는 가문가의 결합으로 탄생한 금수저에 해당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고향인 낭트는 18세기 초에 번영을 누린 프랑스 최대의 무역항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그가 이후, 이국적인 세계무대를 배경으로 흥미진진한 모험을 벌인다는 기본적인 패턴을 형성하여 그만의 문학 핵심 테마를 형성하는 데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로빈슨 크루소>나 <스위스의 로빈슨 가족> 같은 해양 모험 소설을 즐겨 읽었던 그는, 11세 때에 바다 밖의 세상으로 나가보겠다며 가출을 하기도 했다. 평소 연모했던 사촌누이에게 산호 목걸이를 사다 주겠다며 어느 인도 행 선박에 몰래 올라탔다가, 아버지에게 붙잡힌 것이었다. 그는 졸지에 다른 나라로 밀항하게 될뻔한 가출소동의 반성으로 다시는 그런 일을 벌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세계 여행은 꿈속에서만 하겠다는 맹세를 해야만 했다.


1847년에 19세가 되던 해, 파리의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법조 가문의 가업을 계승하라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정작 법대에 진학한 그는 법률이 아니라 문학 쪽에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발견했다고 느끼고는 그쪽으로 마음을 기울이며 노력하기 시작한다.


파리로 가서 지냈던 대학 생활 중에 그는 여러 문학 살롱에 출입하며 문단 인사들과 인연을 쌓았다. 특히 <춘희>의 저자인 뒤마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으며, 그의 소개로 <삼총사>와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저자인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극장 ‘테아트르 리리크’에서 극장장의 비서로 일하게 된다.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모험 소설의 대가로 ‘SF 소설’이라는 개념이 나오기 전부터 그 분야를 개척한 인물로 후대의 과학소설가들에게 존경받는 전설적인 SF소설가였던 쥘 베른(Jules Gabriel Verne)의 이야기이다.


그는 <지구 속 여행>(1864), <해저 2만 리>(1870), <80일간의 세계일주>(1873), 그리고 <15 소년 표류기(원제: 2년간의 방학)>(1889) 등의 작품을 썼는데 기발한 상상력과 치밀한 사실성을 주특기로 시대를 뛰어넘는 베스트셀러 소설가로 인정받았다.


비행기나 잠수함, 우주선 등이 만들어지기 전 시대였음에도 우주와 하늘, 해저 모험을 주제로 글을 썼기 때문에 공상 과학 소설 분야를 개척한 작가로 인정받아, ‘과학 소설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1850년에 쥘 베른은 테아트르 리리크에서 첫 희곡인 <부러진 밀짚>을 초연하며 작가로 첫 발을 내딛는다. 같은 해에 그는 작곡가 아리스티드 인냐르와 처음 만났고, 이후 10여 년 넘게 공동 작업을 전개한다.


1851년, 법률 공부를 마친 쥘 베른은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변호사 사무실을 이어받는 것을 거부하고, 계속 파리에 머물면서 집필 활동에 전념하는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때부터 그는 매일같이 도서관을 드나들며 자료를 조사하며, 에드거 앨런 포와 E. T. A. 호프만 같은 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소설 습작을 집필했다.


1856년에 쥘 베른은 아미앵에서 열린 친구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신부의 언니인 오노린 드비안을 보고 반한다. 그녀는 이미 두 명의 딸을 둔 미망인이었지만, 이미 사랑에 빠진 그에게 그런 사회적 통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에게 청혼해서 그는 이듬해에 그녀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그 와중에도 틈틈이 작품을 써서 잡지에 투고하고 무대에 올렸긴 했지만, 히트작도 없는 지명도 없는 무명작가로서의 생활은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쥘 베른은 생계를 위해 한동안 처남의 소개로 증권거래소에 들어가서 일하는 것으로 생계유지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글을 반드시 써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야 말겠다는 문학을 향한 열정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상태였다.


1851년 지인의 기구 설계도에서 영감을 받아 <기구 여행>이라는 작품을 썼는데, 출판을 시도하였지만 출판사에서는 현실 가능성도 없는 소설이라며 출판을 기피했다. 세월에 꽤 지난 1858년에 초창기 사진작가로 유명한 나다르가 기구를 타고 최초의 항공사진 촬영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렇게 다시 자신이 썼던 소설의 아이디어가 사람들에게 충분한 주목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쥘 베른은 다시 그 모험 소설의 원고를 가지고 출판사의 문을 두들기기 시작한다. 하지만 출판계에서는 이름도 없는 그의 소설을 거들떠보려 하지도 않았다.

이때 그에게 일생일대의 행운이 찾아온다. 1862년 10월에 출판인 피에르 쥘 에첼을 만나게 된 것이다. 발자크, 위고, 졸라 등 거장들의 작품을 주로 펴냈던 에첼은 때마침 종교적 색채를 완전히 뺀 계몽적인 아동 잡지를 출간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베른이 내민 소설의 원고에 대해 전문 편집자로서의 에첼은 너무 과학적이라서 재미가 없다는 평가를 내린다. 하지만, 그대로 혹평을 하고 거절한 것이 아니라, 전면적인 수정을 구체적으로 조언하였고, 그의 조언에 따라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받으며 전면적으로 작품을 수정하여 문학적인 재미를 더하여 <기구를 타고 5주간>이라는 작품으로 수정하여 1863년에 드디어 세상에 발표하게 된다.


이 작품이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면서 쥘 베른은 드디어 본격적인 데뷔를 하게 된다. 바로 그다음 작품으로 <20세기 파리>를 쓰지만 20세기 파리 자체가 염세주의적인 색채가 강했던 터라 에첼은 이 작품이 출간하기에는 썩 적당하지 않은 작품이라고 여겨 결국 출간을 보류시킨다. 두 사람은 매년 2-3편씩의 작품을 쓰기로 계약을 맺었으며, 이후 20년간 여러 차례에 걸쳐 계약을 갱신해 나갔다.

피에르 쥘 에첼

그렇게 이듬해인 1864년에 <지구 속 여행>을, 1865년에는 <지구에서 달까지>를 연속 출간하면서 대히트를 치고, 이후 ‘경이로운 여행’이라는 총서명으로 나온 작품들은 엄청난 상상력을 바탕으로 54권이나 되는 시리즈로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이 시리즈로 유명해진 쥘 베른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에첼이 펴낸 잡지 <교육과 오락>에 먼저 연재되고 나서 단행본으로 발간되는 순서를 밟게 된다.


정력적인 집필 활동에도 불구하고 쥘 베른은 꾸준히 여행을 다니면서 견문을 넓히는 공부 과정을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다. 1859년에는 영국 여행을, 1861년에는 스칸디나비아 여행을, 1867년에는 미국 여행 등을 하며 자신이 그려왔던 세계 각국의 실제적인 모습을 소설에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조사와 경험을 쌓아나갔다.


1860년대 중반부터는 요트에 취미를 붙여서 배를 세 척이나 보유했고, 종종 북해와 지중해 등지로 항해 여행을 떠났다. 물론 이러한 취미활동 역시 단순한 그의 취미활동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크고 작은 경험들이 모두 그의 작품에 반영되었음은 물론이다. 1870년에는 보불 전쟁이 터지자 해안 경비대로 자원 복무해서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1871년에는 아내의 고향인 아미앵으로 거처를 옮겼다.

<해저 2만리> 오리지널 삽화

그의 삶이 계속해서 순탄하지마는 않았다. 1886년에는 자신을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줬던 편집자이자 출판인인 에첼이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맞게 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쥘 베른의 문학적 잠재력을 첫눈에 간파했던 에첼은 단순히 원고를 받아서 기계적으로 출판하기만 하던 편집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작품의 제목이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거듭해서 수정을 요구하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으며, 종종 혹독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던 진정한 매니저였고 동반자였다. 아버지의 출판사를 이어받은 에첼의 아들은 선친만큼 취향이 뚜렷한 편집자의 역량을 갖추지는 못했었기 때문에 쥘 베른의 작품이나 집필방향에 적극적인 조언을 해주는 것은 이제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시련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정신질환을 앓던 조카가 총을 가지고 그를 찾아와 난동을 부리자 그를 만류하던 중에 왼쪽 다리에 총을 맞았고, 결국 그는 남은 평생 동안 다리를 절게 되는 장애를 갖게 된다.


이후로도 작품은 꾸준히 발표했지만, 이때부터는 과거의 낙관적인 태도와는 반대로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색채가 작품에 두드러지기 시작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그가 그런 변화를 보인 것이 신체적인 장애에서 오는 우울과 비관적인 사고로 이어지게 되면서 그랬을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나는 그러한 추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이후에 보인 행보가 왜 그의 작품이 마냥 낙관적이던 형태에서 다소 비관적이며 현실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말년에 그는 문학 이외에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서 1888년부터 10여 년 넘게 아미앵 시의회의 의원으로 활동한 것이다. 이것은 이제까지 그의 문학을 연구한 이들에게는 중요한 점이 아닐지 몰라도 오늘 내가 쥘 베른을 당신에게 소개하는 가장 주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1905년, 쥘 베른은 77세를 일기로 아미앵의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생전에 간행된 마지막 저서는 모험소설 <바다의 침공>(1905)이었지만, 당시 그에게는 에첼의 반대로 출간이 보류된 장편 원고가 하나 남아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20세기 파리>가 바로 그것이다.


집필 시점인 1863년으로부터 한 세기 뒤인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미래소설인데, 한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원고가 한 세기 뒤인 1989년에야 재발굴되었다. 결국 이 작품이 첫 간행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지 90년이 지난 뒤인 1994년의 일이었다. 다소 염세주의적인 색채가 강하다고 에첼에게 출간 보류 판정을 받은 이 작품은 지금 읽어도 소름이 돋는 부분들이 적지 않았다.

<20세기 파리>

이 소설에 등장하는 쥘 베른의 예견 중에는 심지어 컴퓨터며 인터넷과 유사한 기술까지 등장하여 그의 상상력이 단순한 공상에 의한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증명하고 있다.


가령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보다 무려 한 세기 먼저 세상에 공개된 <지구에서 달까지>(1867)와 그 속편인 <달나라 탐험>(1873)이 그렇다. 쥘 베른은 이 작품들을 통해서 잠수함, 입체영상, 해상도시, 텔레비전, 우주여행, 투명인간 같은 개념들을 사상 최초로 제안했거나, 또는 기존의 개념을 더욱 혁신시켰다.

쥘 베른의 작품은 상상력 못지않게 사실성으로도 주목을 받는다. 단순히 기발한 상상에만 근거해서 이야기를 만들었다면, 그의 소설이 이처럼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백과사전이 있는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엄청난 자료조사와 그 지식을 활용한 철저한 실증을 통해 매우 생생한 배경 묘사를 선보였다.


그의 고백 같은 이 언급은 중요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가 과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공부하지 않은 사람으로 과학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가 아주 높지는 않았음을 방증한다. 그랬기 때문에 소설의 중요한 부분에서는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상상이나 신비적인 요소에 의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그 눈높이가 대중들에 맞아떨어지며 설득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뛰어난 상상력으로 동시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그의 작품들은 이후 다양한 매체의 상상력과 표현으로 영감을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후 과학소설을 쓰는 후배 작가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오랫동안 연극과 영화, 심지어 애니메이션으로도 각색되어 최근까지도 대중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예컨대 최초의 SF 영화인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1902)이라던가 특수효과의 신기원을 이룩한 디즈니 스튜디오의 <해저 2만 리>(1954), 감미로운 영화 음악으로 더욱 유명한 <80일간의 세계일주>(1956)들이 그렇다. 이 대가 이야기 시리즈에서 등장하여 언급되었던 일본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1989)도 모두 쥘 베른의 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심지어 2008년에는 <지구 속 여행>이라는 작품은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었다.


미지의 세계로의 모험과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다루는 SF,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이 두 가지 테마는 인간의 진보에 강한 확신을 품고 있던 당시 서구권에서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심지어 서구 제국의 진출에 고생하던 아시아권에서도 그의 작품들은 일종의 대리만족 내지는 추구해야 할 목표를 제시하는 작품으로 여겨졌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가 생각해 냈던 공상적 도구들의 일부는 정말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서 보고 온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21세기에 와서야 실용화되었을 정도니 그야말로 대단한 상상력이었던 셈이다.

앞서 내가 오늘 쥘 베른을 소개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를 그가 말년에 보인 인간에 대한 혐오와 염세적인 세계관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사실 말년에 그는 실제로 사교성이 무척이나 떨어졌으며 사람과의 접촉도 거의 피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염세주의적이며 어두운 모습이 바로 그의 본모습이었음을 사람들은 연결시키지 못한다. 그 증거가 바로 그가 초창기 써두고 출간하지 못한 미래의 파리를 묘사한 디스토피아적 소설 <20세기 파리>이다.


사실 에첼에 의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낙관적이면서도 재미를 추구하는 작품으로 일관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가진 일부분이자 출판시장의 구미에 부합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단련의 과정이었고, 실제로 그가 가지고 있던 세계관은 인간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더 컸다.

쥘 베른의 작품 세계를 흔히 ‘재미와 교양을 추구한 대중문학’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정작 그는 다른 작가들에게 같은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예컨대, 지나치게 단순화되고 도식적인 줄거리, 구체적인 배경 묘사와는 대조적으로 빈약한 심리 묘사 등으로 그의 한계를 지적한 작가와 평론가들은 많았다. 그 역시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의 작품에 드러나는 세계관에서도 작가와 평론가들의 비판은 이어졌다. 쥘 베른은 인간의 무한 진보를 낙관한 19세기의 인물로 과학기술을 동원한 인간의 능력으로 자연을 정복한다는 기본적인 당대의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했다.


동시대의 다른 작가에 비해 환경 파괴나 빈부 격차나 제국주의 같은 중대한 문제에 대해 비교적 둔감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러한 작품과 세계관의 괴리는 그를 현실정치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그가 단순히 총기 오발사고로 인해 얻은 다리를 저는 것 정도로 이전의 낙관적인 세계관을 접어버리고 비관적이고 염세적으로 변했다는 분석은 근거가 빈약하기 그지없다. 무엇보다 그랬다면 그가 정치로 세계를, 그리고 자신이 속한 사회를 바꿔보겠다고 10년간이나 현실 정치에 참여했던 것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세상에 대해 비관적인 사람은 정치를 하지 않는다.


맞다. 내가 추정하건대 그는 자신의 작품을 읽고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동안 세상이 오히려 편협하고 비뚤어져만 가는 현실을 낙관적인 공상 세계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처음 공상과학소설을 빙자하여 염세주의적으로 당대 파리의 미래 시대를 예견하며 쓴 그의 소설이 그러한 생각을 방증한다. 그는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고 기술이 생활의 윤택함을 가져오더라도 결국 그것을 결정하고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라는 점에 늘 주목했다. 그의 작품이 단순히 새로운 세계에 대한 예언과 풍부한 상상력만으로 점철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작품을 꼼꼼하게 읽은 이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그가 과학을 전공한 과학자이거나 과학기술이나 지식을 연구하기보다 세계를 여행하면서도 풍물이나 다양한 이채로운 사실 속에서 그 안에 살아가는 군상들의 생각과 모습에 집중했던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의 작품에서 세밀한 심리묘사가 없는 것은 그의 글쓰기가 갖는 철저한 보여주기의 방식이었을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쥘 베른 박물관

법조 명문가문의 금수저로 태어나 버젓이 법대를 졸업하고 탄탄한 가업을 잇는 것을 포기하고 무명작가로 애가 둘이나 딸린 자신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미망인과 결혼하는 일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론 당시 유럽의 철딱서니 없는 이른바 재벌가에 해당하는 이들이 그런 젊은 날을 보낸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결국 그 방황을 끝내고 다시 원래의 자신이 속해 있던 그룹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의 생계를 제대로 부양하지 못할 정도의 무명작가로서의 삶에 고뇌하며 주식거래인으로 월급쟁이까지 했던 쥘 베른의 인생은 그가 자신이 선택한 인생에서 결코 도망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통해 다른 철딱서니 없는 도련님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당신은 언제나 금수저를 동경하고 그들이 당신이 가져야 할 것을 빼앗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을 질시하고 그들이 뭔가 틈만 보이면 함께 강한 턱으로 잘근잘근 씹으며 심리적인 자괴감을 위로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당신의 삶이 더 윤택해지거나 그렇게 이룬 정의가 당신에게 혜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금수저였음에도 그 혜택을 활용하거나 그것을 누리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이 가려는 길을 걷는 것은 굉장히 힘들고 지치는 일이다. 그들은 심지어 어려서부터 헝그리 정신에 익숙해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이 무언가를 노력해서 얻지 못한 것을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돌리고 당신의 게으름과 당신의 노력이 수반되지 않아 이루지 못한 것을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구시렁대고 적당히 당신의 삶을 뭉개며 지내고 있지는 않은가?


쥘 베른은 자신이 무명작가로 팔리지 않는 것에 대한 혹독한 비판과 함께, 어떻게 하면 대중들에게 부합하는 글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한 조언을 해준 전문가 에첼에게 평생을 감사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글이라고 썼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았고 그 현실에 대해 맞춤 조언을 해준 이에게 기분 나빠하지 않고 원고의 방향을 전면 개고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쥘 베른은 냉정하게 그 현실을 받아들였고 혹독한 비판 어린 조언을 감사히 받아들이며 자신의 인생을 이제까지와는 다른 역전으로 뒤집었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냉정하게 평가하는 분석력은 물론이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과감하게 고쳐나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그 비판이 좋게 들리는 사람은 결코 없다. 하지만, 그것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온전히 자신의 발전을 위해 새롭게 걸러내고 꼭꼭 씹어먹는 사람도 드물다. 그래서 성공하는 대가들이 적은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은 분명히 그저 좋은 말만 듣고 싶어 하며 실패를 반복하는 고집쟁이들 사이에서 당신의 인생을 성공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 냉정하지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해주는 사람을 만난다면 결코 눈살을 찌푸리며 그에게 고개를 돌리는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않길 바란다.

당신은 결코 당신의 등 뒤에 옷이 찢어진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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