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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22. 2022

매번 미국에 도움을 청했지만, 무시당하고 거절당하고,

미국을 무릎 꿇게 만들고 베트남의 국부로 추앙받다.

215번째 대가의 이야기.


1890년, 베트남 응에안(Nghệ An, 乂安) 성에 있는 호앙쭈(Hoàng Trù)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민 출신으로 가난한 유학자였고, 어머니는 서당 훈장의 딸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관직에 오른 그 해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그의 부친은 프랑스 식민지 치하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응우옌 왕조의 관리가 되어 수도 후에로 가족을 데려올 수 있었으나, 자신의 일이 식민지 경영의 주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했고 결국 그들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직된다. 현실에 실망한 그는 이후 후에를 떠나 시골에서 약제사로 여생을 보냈다.


그는 11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 밑에서 고전 공부를 하다가 아버지의 친구 부옹 툭 쿠이가 가르치는 지역 학교로 가게 된다. 쿠이는 학생들에게 고전을 달달달 외게 하지 않고 유교 경전의 인본주의적인 핵심을 전달하려고 애썼다. 아울러 학생들에게 베트남의 독립을 옹호하는 정신을 불어넣었다.


그는 아버지에게만 공부를 배우다가 새로운 스승 밑에서 배우는 새로운 스타일의 공부가 너무도 즐거웠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슬픔에 피가 끓어오른 스승은 결국 독립운동에 합류하기 위해 학교 문을 닫고 떠났다.


소년은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와 고전 공부를 계속했다. 아버지는 한문을 공부하여 무작정 공직에 나가려 하지 말고, 고전의 속뜻을 이해하고 사람들을 이롭게 할 방법을 찾도록 하라고 가르쳤다.


당시 그는 유학 경전보다는 <삼국지>와 <서유기> 같은 옛날이야기에 재미가 붙었다. 그렇게 소년은 민족주의자 부옹 툭 마우가 자살한 이야기와 판 딘 풍이 병사들을 잃고 피신했다가 이질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는 동네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 대부분 베트남 역사가 아니라 중국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국의 역사를 알기 위해 성도인 빈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그는 서점에서 베트남 역사서를 탐독하고는 중요한 구절들을 암기해와서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렇게 그는 조금씩 하지만 자연스럽게 역사적 소명의식을 키워나갔다.

베트남의 초대 주석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가이며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평가받는 우리에겐 호찌민(胡志明; Hồ Chí Minh)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본명 응우옌신꿍(阮生恭; Nguyễn Sinh Cung)의 이야기이다.


그는 베트민을 조직하여 프랑스와 일본에 의해 지배받던 식민지 베트남의 독립을 이루었으며, 이후 미국의 침략으로부터 베트남 전쟁을 통한 베트남의 통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호찌민은 가면인데, ‘깨우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가명을 사용하게 된 이유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민족주의자란 이유로 수배되어 세계를 떠돌며 살았기 때문에 호찌민을 포함 대략 196개의 가명을 사용했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스승의 영향으로 그는 물론 형과 누나도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때문에 그의 형과 누나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를 당해 수감된다. 호찌민 본인도 프랑스-베트남 학교인 국학 재학 시절인 1908년 징세 반대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만다.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판 보이 차우의 도움을 받아 잠시 민족주의자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지만, 독립을 위해서는 세계를 더 자세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1911년 사이공에 있는 프랑스 해운회사에 견습 요리사로 취직,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를 타고 프랑스로 건너간다.


그 과정에서 그는 세네갈에 있는 다카르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는데도 프랑스인들의 명령에 따라 배까지 헤엄쳐 가던 아프리카인 몇 명이 죽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서구 제국주의가 추구하는 식민주의의 잔혹성이 국제적으로 만연했을 알게 됐으며, 그리고 영국,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떠돌면서 정원사, 청소부, 웨이터, 사진 수정자, 화부 (火夫) 등으로 일했다.


그밖에도 영국, 미국 등을 전전하면서 신문물과 사상 등을 배우게 되는데 이때의 경험들 덕분에 영어, 중국어의 여러 방언과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으며 태국어,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도 능통했다.


1917년 호찌민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뒤 1918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미영프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베르사유 회의에 우국지사들과 응우옌아이꾸옥(Nguyễn Ái Quốc, 阮愛國)이란 이름으로 참가해 베트남인의 자유·민주·평등권을 요구했다.

1920년에 찍은 사진과 1911년 제출한 식민지 학교 입학허가 요청서

이 시점에서의 호찌민은 프랑스로부터의 현실성 없는 완전 독립보다는 프랑스의 평등한 구성원으로서 베트남인의 인권보장을 추구했다. 물론 이후 최종 목표는 독립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신한청년단에서 독립청원서를 발표한 것과 비슷하게 이 가명으로 사용해 ‘안남 민족의 요구’라는 8개 조항을 베르사유 회의에 제출하기도 한다. 이 사건으로 젊은 호찌민은 베트남 독립 운동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고, 향후 27년간 ‘응우옌아이꾸옥’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베르사유 회의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던 우드로 윌슨을 만나 베트남을 도와줄 것을 호소했지만 애초에 민족 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들을 해체하기 위한 의도가 컸고, 미국도 당시 제국주의 열강으로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북 마리아나 제도 등 식민지들을 보유하며 수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승전국 프랑스의 식민지인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지지해줄 명분이나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호찌민의 호소는 처참히 무시당하고 만다.

1920년에 호찌민은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당시 식민지의 수많은 혁명가들이 러시아 혁명의 여파를 받았듯이 호찌민 또한 사회주의에 입문하게 됐고, 그 시기 자본론이나 공산당 선언, 러시아 혁명사를 비롯한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을 읽었다.


1922년에는 <르 파리아(Le paria)>를 창간하여 편집인이자 중요한 기고자로 활동했고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낱낱이 비판했다. 때문에 프랑스 당국의 감시에 시달리기도 했다. 한편 프랑스에서 활동할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인사들과 만나 교류하고 서로 협조한 사실도 뒤늦게 2018년 문서로 확인되었다.


당시 호찌민을 밀착 감시하던 파리의 정보경찰 장(Jean)이라는 인물의 기록에 따르면, “호찌민은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계획을 거의 똑같이 따르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당시 호찌민과 파리의 임정 인사들 간의 교류가 굉장히 깊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23년에 개최된 제2차 프랑스 공산당 대회에서 대회 참가단 주석 자격으로 참가했다. 또한 그 해 호찌민은 프랑스 당국의 탄압과 사회주의를 배우기 위해 각국 식민지 농민 대표 자격으로 소련에 건너가 한동안 국제공산당에서 일했다.


1924년 12월 그는 중국 광저우로 갔는데, 당시 이름을 다시 리투이(Li Thuy; 李瑞)로 바꿨다. 그곳에서 그는 ‘베트남 청년 혁명동지회’를 창립했다. 이후 소련으로 건너가 공산당원 중 최고급 당원만 유학한다는 국제 레닌 학교에서 수학한다. 1926년 1월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중국 국민당 2전대회에 참가했을 당시, 조선과 베트남 그리고 인도 대표가 아시아인 대표로 연단에 올랐는데, 그때 베트남 대표가 바로 호찌민이었다. 대회 첫 번째 연설이 호찌민이었고, 두 번째 연설이 대한민국의 몽양 여운형이었다.


이 당시 호찌민은 엄연히 코민테른 요원으로, 소련 내에서는 일종의 피압박민족의 투사로서의 모델로 주로 활동했다. 하지만 이후 중국과 베트남으로 파견되었을 때에는 혁명 조직을 형성하고 통합시키는 데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여, 베트남 청년단, 안남 공산당, 베트남 공산당, 인도차이나 공산당 등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각지에서 만난 뛰어난 인재들을 소련으로 보내 교육시키는 등, 조직과 인재를 통해 혁명의 근간을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잠시 태국에 머물 때조차 그곳에 있는 베트남 이주자들과 원주민들을 통합해 공산주의 조직을 만들기도 하는 정력적인 활동 양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1930년 마침내 호찌민은 홍콩에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당하게 된다.

마오저뚱과 함께

1930년 호찌민과 그의 동료들이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당했을 시기, 베트남의 통킹과 안남지역을 중심으로 프랑스 식민지배에 맞서 베트남 국민당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주도 아래 노동자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응에 안 소비에트 봉기’라 알려진 이 봉기는 통킹과 안남 지역으로 베트남의 또 다른 독립운동 단체인 베트남 국민당의 주도로 신속하게 번졌고 인도차이나 공산당도 적극적으로 참가했지만, 베트남을 식민 지배하던 프랑스는 이 봉기를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아주 무자비하게 탄압했고,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그해 10월 호찌민은 공산당 내에서 큰 비판을 받았고, 1931년 6월 홍콩에서 영국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32년 12월에 석방된 호찌민은 1933년 1월 중국 공산당의 도움으로 홍콩을 탈출했다. 호찌민은 1934년 소련의 모스크바로 갔고 레닌 대학에 입학했다. 1935년 그는 모스크바에 있는 스탈린 대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이 시기 그는 교사로 지내면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레닌의 <좌익 소아병>을 베트남어로 번역했다.


스탈린의 대숙청이 한참이던 1935~37년 소련에서 지내면서 대숙청의 광풍을 잘 피해 갔고, 1938년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중국 팔로군 지역본부에서 기자 일을 하면서 보건 담당 간부로 일하기도 했다. 1940년부터는 중국 쿤밍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하다가 1941년 2월 30년 만에 고국인 베트남으로 귀국하였다.

1942년 8월, 호찌민(Ho Chi Minh)이라는 개명한 이름을 가지고 활동하다가 중국 국경에서 장제스의 중화민국 군대에 잡혀 1년 간 투옥되기도 했다. 1년 간의 감옥생활을 하며 그는 <옥중일기>를 집필했다. 1943년 9월 감옥에서 석방된 호찌민은 중국 남부에 혁명 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2차 세계대전이 사실상 끝나가던 1944년 12월 보응우옌지압의 지휘 하에 베트남 해방군이 창설됐다.


해외 생활 도중 미국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미국의 OSS는 말라리아로 쓰러진 그에게 키니네를 구해주기도 했으며, 앞서 설명한 장제스에게 체포된 상황에서 그를 구해주기도 했다. 1944년 11월에는 미군 전투기가 베트남 상공에서 떨어져 공군 조종사 한 명을 살려줌으로써 미국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또한 종전 직전인 1945년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은 호찌민의 주선으로 OSS에 들어가 여러 훈련을 받기도 했다. 미국 OSS로부터 훈련을 받은 사슴팀과 베트민 부대는 보 구엔 지압의 지휘 아래 몇 개의 일본군 외각 초소를 공격하여, 미국과의 공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훈련 경험은 훗날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또한 호찌민은 이때 도움을 준 미국과 친하게 지내려고 여러 차례 메시지를 보내지만 당시 미국은 유럽과 일본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려 했고, 유럽에서는 특히 프랑스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의 간곡한 메시지를 다시 무시해 버렸다. 그 결과가 미국에게 비운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미국은 그때 알지 못했다.

1945년 8월 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해 주석으로 선출되어 8월 25일,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정식으로 자신을 호찌민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며, 9월 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해 봉건 군주제를 종식시켰다. 호찌민이 선포한 독립선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생존, 자유, 행복의 추구 등이 그러한 권리이다.”


이 아이러니한 선언은 1776년 미합중국의 독립선언문에 나오는 것을 원용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에는 북위 16도선을 기점으로 북에는 중국의 국민당군과 남에는 영국군이 들어왔고, 영국군이 들어오는 동시에 프랑스 또한 같이 들어왔다. 이후 호찌민은 중국을 경계하여 권토중래를 노리는 프랑스와 협정을 체결하고자 했기 때문에 ‘프랑스 연방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프랑스의 요구에 응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바로 ‘퐁텐블로 협상’이다. 1946년 호찌민을 비롯한 베트민 지도 세력들은 프랑스 퐁텐블로에서 회담을 가졌다. 퐁텐블로 협상은 지지부진했고, 그 결과 호찌민은 별다른 성과 없이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 호찌민은 내심 미국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프랑스 편이었던 미국은 이를 또다시 무시했다. 프랑스는 호찌민이 폐위시킨 바오다이를 지도자로 내세운 괴뢰 정부인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세움으로 베트남을 계속 식민 지배하겠다는 속내음을 드러냈고 협상은 애당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46년 11월 프랑스가 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을 무차별 포격하여 민간인 6,000명이 학살당하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초반기인 1947년 10월 프랑스군이 비엑 박을 공격하여 프랑스군에게 체포될 뻔하기도 했으나 호찌민과 그의 수하들은 무사히 탈출하였다.

1949년 마오쩌둥의 중국이 통일을 이룩하자 중국 공산당은 베트민을 지원했고, 1950년 10월 말에는 베트민이 홍강 삼각주 인근까지 프랑스군을 몰아낸다. 그 시기 마오쩌둥의 중국과 스탈린의 소련은 호찌민의 베트남을 독립 국가로 인정해준다. 화력에서 우세한 프랑스였고 뒤에서 미국이 빵빵하게 지원했지만 모든 베트남 국민들은 독립을 원했고 호찌민은 베트남 국민들의 영웅이었다. 그리고 호찌민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를 통해 프랑스에 큰 타격을 주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는 총 7만 명 이상이나 되는 병력을 전투에서 잃었다. 1954년 56일간 지속되었던 디엔비엔푸 전투 기간 동안 프랑스군은 총 2,000명에서 3,000명 정도가 전사하고 10,000명 이상이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이후 제네바 합의를 체결하게끔 하여 프랑스군을 베트남으로부터 완전히 몰아내고 프랑스 식민통치 종결, 베트남 독립. 1954년 전투 지역으로부터 수도 하노이로 개선했다.

디엔비엔푸 전투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철군했고, 제네바 협약에 따라 1954년 베트남은 17도선을 기점으로 분단됐다. 남북 베트남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2년 이내에 통일을 위한 선거를 해야 했으나 모든 베트남 국민들은 호찌민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상황이었다.


호찌민의 압승이 예상되었고, 사실상 미국의 괴뢰정부였던 응오딘지엠 정권은 당연히 베트남인들에게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제네바 협약을 파기하고 독재를 시작한다. 그러나 모든 베트남 국민이 호찌민을 지지하는 상황에서 독재의 권력 기반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고, 독재자들이 늘 그렇듯이 친인척들을 주요 요직에 앉히면서 각종 부정부패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며 남베트남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한편 호찌민과 북베트남 정부는 1954년 독립 이후부터 토지개혁, 식량배급제 등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토지개혁의 경우 시행하는 과정에서 농지를 소유하던 농민들을 북베트남 정부 측에서 가혹하게 죽이거나 탄압하며 농지들을 강압적으로 국유화시키는 일이 벌어졌고, 토지개혁의 시정을 요구하는 농민과 노동자의 시위와 파업이 일어나 이로 인해 군경의 시위 무력진압으로 수많은 부상자와 사망자들이 발생하면서 호찌민 본인이 스스로 자아비판하고 토지개혁을 주도했던 책임자 쯔엉찐이 해임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 와중에 1956년에 호찌민의 토지개혁이 일단락이 된다. 독재정권 입장에서는 토지개혁 정책을 성공으로 볼 수도 있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2백만 에이커(80만 헥타르) 이상의 토지가 2백만 이상의 농민 가족에게 분배되었다. 마을에서 토지를 독점했던 향신 계급의 오랜 지배 체제는 붕괴되었고, 빈농과 중농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도력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토지개혁에 공감하는 사람들까지 포함되면서 최소 3천 명에서 5천 명이나 되었다. 1만 2천 명에서 1만 5천 명에 이르는 사람이 방해 활동이나 다른 방식의 반혁명 활동 지원이라는 엉터리 혐의로 부당하게 처형되었다는 설도 있다.


한편, 호찌민은 1957~58년 사이에 중국, 북한, 동독,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한 사회주의권의 여러 국가들을 방문하며 경제적 지원을 요청했다. 1959년부터는 북베트남 정부는 공식적으로 남부 통일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남베트남은 애당초 제네바 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총선을 거부해서 남베트남 내에서조차 반정부 세력이 대부분이었고 이것은 결국 1960년 남베트남 안에서 남부인들 출신들로 구성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이 응오 딘 지엠 정권 타토라는 목표 하에 창설되기에 이른다.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배후였던 미국은 도미노 이론에 따라 남베트남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남베트남 정권을 지원했다. 그러나 미국의 막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혼전 양상이 지속되었고 결국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면서 본격적인 베트남 침략을 시작한다.


미 대통령 린든 존슨이 사실상 선전포고를 하고, 베트콩과 남베트남군의 내전에서 미국의 침략전쟁으로 변화하였다. 이에 따라 절대적으로 친미반공국가였던 대한민국, 필리핀, 태국, 호주, 뉴질랜드가 미국을 따라 의미를 왜곡시킨 채 자유를 수호한다는 미명 하에 젊은이들을 파병하며 이 부도덕한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1964년 대한민국 월남파병 당시

1965년 3월 미 해병대가 다낭항에 상륙하고, 미국 항공기들이 북베트남에 대한 융단폭격을 시작하면서 미국의 베트남 침략이 가시화되었다. 1966년 7월 호찌민은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라는 지금까지 그의 명언으로 언급되는 말을 남긴다. 이 역사적인 말은 북베트남인들의 통일전쟁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는 주제, 구호가 되었다.


구정 공세가 일어나기 한 달 전인 1967년 12월 호찌민은 당 지도부가 계획한 ‘총 공격과 봉기’를 승인했고, 그의 최종적인 승인이 떨어짐에 따라 1968년 1월 31일 땟(tết) 공세가 시작되었다. 구정 공세 결과 북베트남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남베트남의 응우옌 반 티에우 정권은 무너지지 않았고, 전투의 결과만 놓고 보았을 때 구정 공세는 베트콩에게 있어 치명적인 피해를 안겨 주었다.


그나마 눈에 띄었던 건 수도 사이공에서 미 대사관 1층을 잠시나마 점령했던 것과, 대략 1달간 후에를 점령했던 것 그리고 77일 동안 케산에 있는 미군기지를 포위하여 제2의 디엔비엔푸 전투를 연상시켰던 것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생중계로 구정 공세를 지켜본 미국인들의 반전 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었고, 이는 베트남 전쟁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1968년 3월 구정 공세로 인한 반전 운동으로 미국이 고민에 빠져있을 당시 호찌민은 베이징에서 구정 공세의 결과를 보고받았고, 베트남 정치국 국원인 레둑토와 함께 베트남으로 들어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고 한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시기 건강상 문제가 생겼던 호찌민은 요양 차원에서 중국을 자주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었기에 직접 남부로 내려가 활동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1969년 9월, 염원이었던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심장병으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향년 79세였다.


그가 죽고 3년 후인 1972년 부활절 휴가 기간, 남베트남에 미군이 5만 명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하노이 정부는 새로운 군사작전을 다시 한번 개시했다. 1973년 1월 베트남은 파리 평화 협정을 통해서 미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75년 3월 “남부를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4월 30일 사이공을 점령함으로써 전쟁을 마무리지으며 베트남은 통일을 이룬다. 공교롭게도 호찌민이 사망한 날은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세운 날인 9월 2일이었다.

호찌민의 묘소

사망 전 유언으로 화장 후 재를 3 등분하여 베트남의 북·중·남부에 한 줌씩 뿌려 줄 것을 요구했으나 베트남 정부는 하노이 바딘(Ba Dinh) 광장 앞에 대규모 영묘를 짓고 호찌민의 시신을 방부 처리한 뒤 안치하여 참배객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레닌 이후 시신이 미라로 보존되고 있는 두 번째 공산권 지도자가 되었다. 호찌민의 유언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남긴 유언 중 하나가 전쟁에서 승리 시 남베트남 사람들을 탄압하지 말라는 유언도 있었다.


하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수많은 남베트남인들이 고문과 착취로 죽었고, 230만 명 이상이 강제로 이주당해서 굶주림과 착취로 고통당했다. 1975년 베트남이 통일된 이후 대략 100만 이상의 보트피플들이 발생했고, 100만 명 이상이 재교육을 받았다. 물론 말이 좋아 재교육이지 경우에 따라선 몇 년 이상 감옥생활을 하게 되는 경우가 적잖게 있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나 중국에 머물던 시절에 중국 여자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이후 혁명동지이자 애인이었던 응우옌 티 민 카이하고 결혼하려 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호찌민이 체포되면서 이들 역시 실종되었고, 북베트남 주석이 된 이후 호찌민이 이들을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는 뒷얘기가 전할 뿐이다.




베트남전은 우리에게 있어 남의 역사가 아니다. 하지만, 그 전쟁이 왜 있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이른바 베트콩(베트남 공산당)을 무찔러 자유를 수호한다는 미국의 포장된 미명하의 비도덕적인 미국의 이익을 위한 전쟁에 애꿎은 한국의 젊은 피가 희생되었을 뿐이다.


미국에 그렇게 호소하고 도움을 청했지만, 미국은 냉혹한 국제 외교의 생리에 따라 단 한 번도 호찌민의 호소에 응하지 않았고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며 미국 최초의 패전을 역사에 새겨야만 했다. 호찌민은 내내 해외를 떠돌고 잡히고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일을 일상처럼 하면서도 결코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포기하지 않았다.


오늘 그의 인생과 그 인생에 녹아들어 있는 베트남 독립사를 당신에게 소개하는 것은 당신이 무언가를 제대로 알고서 그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서 말을 하는지 묻고자 함이다.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알량한 지식은 정말로 눈곱만치도 되지 않는 것이고, 하다못해 다른 사람에 대한 일조차도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이 다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당신은 늘 경계해야만 한다. 한 나라의 독립사임에도 미국의 입김으로 포장된 역사를 배운 대한민국은 베트남이 공산국가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비난하곤 했다.


다각적인 정보와 양측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않은 채 너무도 쉽게 SNS에 배설 수준으로 떠들고 댓글을 달며 마치 의식 있는 자인 것처럼 무책임한 언행을 보이는 이들은 맘 카페에만 서식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런 의도도 아니었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오히려 더 잘못한 이들이 당신을 모함하여 공격하고 천하에 몹쓸 쓰레기로 매도하는 일을 당해보면 알 것이다. 진실은 내가 내민다고 해서 사실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미국은 우리나라의 우방국이 아니다. 그 나라는 그 나라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우리나라를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다른 이들은 당신의 이익이나 당신의 입장을 고려해주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그들이 유리하다거나 그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언제든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당신을 몇 번이나 난도질하고도 남는단 말이다.

그가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인정받으며 ‘호 할아버지’라는 애칭으로 모든 국민들에게 숭상을 받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므로 오늘 다소 긴 글로 당신에게 보여주고자 하였다.


프랑스로 독립하는 것이 목적이던 그가 처음 유학을 떠나 배운 외국어가 프랑스어였고, 그렇게 처절하게 싸웠던 미국은 처음엔 우방이었고 그가 그렇게 기대고 싶었던 대상이었다. 그가 공산당을 배우지 않고 미국의 원조를 받았더라면 그의 사상은, 그리고 지금의 베트남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훨씬 더 나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의 인생도 그러하다. 다른 사람에 의해 좌우되는 삶으로 전락시키지 마라. 끊임없이 노력하고 갈구하여 목표를 향해 나아가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잘못을 인정하고 수정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자세를 견지해라.


자기 주도적인 사람이라는 것, 생각보다 쉬운 게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러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다. 자신의 의지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자가 무슨 재주로 사회를 움직이고 세상을 바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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