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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25. 2022

잘 나가던 주식 중계인에서 돈 못 번다고 버림받고서

비참한 죽음을 맞고, 마침내 20세기의 기반을 만든 화가로 기억되다.

216번째 대가의 이야기.


1848년, 파리에서 진보 성향의 언론인이었던 고갱은 보수 성향 아버지와 페루계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다. 나폴레옹 3세가 권력을 장악하자 신변 위협을 느낀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해외로 이주하길 결심한다. 목적지는 아내의 친척이 있는 남아메리카 페루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항해 도중에 갑작스레 사망하고 만다.


어린 남매를 데리고 페루에 도착한 그의 어머니는 1849년부터 1854년까지 지역 유지인 외삼촌의 도움으로 살아가다가 프랑스로 돌아와 오를레앙에 정착하고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한다. 짧긴 했지만, 말을 배우기 시작했던 그 어린 시절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서 성장한 그의 유년기는 이후 그에게 이국적인 이미지들로 훗날 작품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17세 때인 1865년에는 견습 도선사로 상선을 타고, 그때부터 그의 라틴아메리카와 북극 등 지구촌 여러 곳을 여행하였다. 1871년 그가 인도에 있을 때 어머니 알린 고갱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그의 타고난 방랑벽은 이때가 본격적인 출발이었다.


이후 1872년에 파리로 돌아온 그는, 어머니의 연인이었던 사업가, 귀스타브 아로자(Gustave Arosa)의 주선으로 어느 증권 중개인의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다. 미술 애호가였던 아로자는 그에게 생계수단으로써의 직업뿐만 아니라 화가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873년, 덴마크인 여성인 메테 소피 가트와 결혼하면서, 5명의 아이가 생겼다. 이 무렵부터 회화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여 특히 인상파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가 미술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그의 후견인이었던 귀스타브 아로자의 영향이었다. 그는 미술품 수집뿐만 아니라 조금씩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27∼28세부터는 일요일마다 본격적으로 회화연구소에 다녔다.


생활이 한층 안정되어 여유로운 아마추어 미술 애호가처럼 주말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주말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훗날 인상파로 불린 화가 카미유 피사로 등의 그림을 팔아줬을 만큼 제법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점차 명성을 얻고 있었던 분위기에 편승하여, 미술품 수집가에서 아마추어 화가로 변신한 그는 인상주의 운동의 대부로 손꼽히는 카미유 피사로와 에드가 드가의 인정을 받으며 1876년에 처음으로 전시회에 작품을 내놓게 된다. 1876년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하여 카미유 피사로를 사귀게 된 것을 계기로 1880년 제5회 인상파전 후로는 단골 멤버가 되었다.

프랑스의 탈인상주의 화가로,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으로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고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의 실험으로 ‘종합주의’를 선도하여 이후 수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외젠 앙리 폴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의 이야기이다.


그의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非) 자연주의적 경향은 빈센트 반 고흐, 폴 세잔과 함께 20세기 회화가 출현하는 데 근원적인 역할을 했다고 인정받고 있다. 잠시긴 했지만 고흐와 함께 지내며 그림을 그린 것으로 더 유명한데, 고흐가 귀를 잘랐다는 사건에 유일한 목격자이자 유일한 증인이기도 하다.

고갱의 자화상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수많은 실업자가 발생하고 주식거래인인 그의 직업도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해고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때 고갱은 전업 화가가 되기 위해 이를 피사로와 의논하였다. 피사로의 소개로 폴 세잔, 아르망 기요맹 등과 친교를 맺어 화가가 될 결심을 굳히게 된다.


이듬해인 1883년 35세에 증권 거래점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생활비가 저렴한 루앵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는 자신의 재능으로 화가로서 성공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였다. 그러나 화가로 살아가면서 생활이 어려워지게 되었고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한때는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에 갔으나 그곳에서도 고갱이 제대로 밥벌이를 못하자 메트의 가족들이 나가 달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프랑스로 돌아와야만 했다. 결국 그는 처자식과 헤어져 파리로 되돌아왔으며 이후 한동안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아내 메테와 함께

하지만, 고갱은 가족과의 생이별에도 굴하지 않고 여전히 파리와 브르타뉴 등지를 오가며 화가로서의 경력을 추구했다. 결국 타히티로 떠나기 직전인 1891년부터 죽을 때까지 그는 10여 년 넘도록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다.


파리에서 고독한 시간을 보내던 고갱은 1886년 6월 도시생활에 지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하였다. 이사를 하게 된 동기는 보다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고갱 역시 피사로의 조언을 따라 인상주의의 기법을 시도했지만, 이후 일본의 우키요에를 접하고 어린 시절 본 페루의 도자기를 사 모으면서 그런 경험을 살려서 도자기 만드는 작업도 하면서 도자예술에 심취하고 일본 미술과 접하는 등의 색다른 경험을 통해 점차 독특한 화풍을 정립한다. 자기만의 특별한 소재를 발견하고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문명사회를 떠날 생각을 품은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곳에서 종래의 인상파풍 외광 묘사(外光描寫)를 버리고 차차 고갱 특유의 장식적인 화법을 지향하였고 토속적인 토기류 도자기 제작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 시기의 작품은 후일 폴 세뤼지에, 모리스 드니, 피에르 보나르 등, 후일 나비파(Nabis派)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토기에서 비롯된 그의 원시적인 관심은 1887년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섬으로 향하게 된다.

고갱, <베르나르가 있는 자화상>;레미제라블(1888)

매형이 파나마 운하 건설 현장에서 근무한다는 것을 알고 퐁타방에서 알게 된 젊은 화가 샤를 라발과 함께 파나마로 가지만, 매형은 파산해서 고갱을 챙겨줄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고 파나마를 떠나 마르티니크섬에 도착하지만 곧 향수병에 시달리게 되고 6개월쯤 머물다가 병든 몸으로 이듬해 파리로 돌아왔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이때 마르티니크 섬에서 고갱은 자신의 스타일을 찾는 성과를 거둔다. 그렇게 이때 제작된 작품은 원시주의적 미술로 파리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파리에서는 고흐, 로트레크 등을 알게 되었으며, 특히 고흐와의 우정이 돈독했는데, 빈센트는 화가로서나 친구로서나 고갱을 매우 신뢰했고, 테오 역시 고갱의 진가를 최초로 깨달은 화상 가운데 하나였다. 두 사람이 친구였던 것으로 유명하다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고흐가 고갱을 동경해서 그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있는 아를로 와주기를 간청했다.

고흐, <고갱에게 드리는 자화상>(1888)

1888년, 브르타뉴에 머물던 고갱은 테오의 제안으로 아를에 머물던 빈센트와 합류한다.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하고 개성적인 두 거장의 짧은 동거는 2개월 만인 12월 23일 밤, 악명 높은 빈센트 반 고흐의 ‘귀 절단 사건’이 벌어지면서 갑작스럽게 끝나 버린다. 일각에서는 빈센트를 적극적으로 돌보지 않은 고갱에게 비극의 책임을 돌렸으며, 훗날 빈센트의 명성이 더 올라갈수록 여론은 고갱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두 사람은 이후에 다시 만나지는 않았지만 오만한 고갱도 고흐의 사건이 충격이었던지 파리로 돌아간 후 귀에서 피를 흘리는 남자의 모습으로 만든 도자기가 남아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 후 다시 브르타뉴 퐁타방으로 돌아간 고갱은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고, 조각·판화·도기(陶器) 제작에 전념하였다.

<황색의 그리스도>(1889)

이때부터 고갱은 원시적이고 야생적인 것에 관심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퐁타방이 번잡하게 느껴져 더욱 한적한 바닷가의 작은 마을인 르풀뤼로 이주하였다. 고갱은 점차 파리 아방가르드 화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1889년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많은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이 전시회에 출품된 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이국적인 풍물에 열광하였고 열대지방의 원시적인 생활을 동경하였다. 점차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만 더하여 다시금 유럽을 탈출하면 영감이 솟구치는 이상향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마침내 1891년 2월 그의 작품을 처분하여 원시 세계로의 여행자금을 마련하였다.


코펜하겐에 들러 그의 가족들을 만나고 그해 4월 1일 마르세이유를 출항하여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다. 심지어 타히티에 갈 때 고갱은 자신이 공식적인 초상화 화가로 파견되었다고 거짓말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도 고갱의 거짓말을 몰랐던 것이 타히티가 프랑스의 식민지이긴 했어도 머나먼 변방이었기 때문에 그런 데서 사기를 쳐봤자 아무도 따질 생각을 하지 않았던 탓이 컸다.

고갱은 때 묻지 않은 타히티의 원주민들과 교류하는 밝고 희망찬 미래를 상상했지만 현실은 그의 상상과는 많이 달랐다. 이미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타히티는 문명화가 진행된 곳이었고, 서양인들도 지배층으로 어느 정도 정착했던지라 타히티의 원주민 소녀들은 뚱한 표정으로 고갱을 소 닭 보듯 할 뿐이었다.


고갱이 이후에 유명해졌다지만 그곳에서의 고갱은 그저 흔하디 흔한 서양 아저씨일 뿐이었다. 고갱의 그림 속 파레오를 입은 원주민 여성들의 표정이 그냥 시큰둥한 표정과 모습을 취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라는 설명이 있다. 물론 그 이후로는 타히티 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정작 그즈음 그는 고독과 향수를 이기지 못하고 2년 만인 1893년 여름에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그는 자기 나름에는 의기양양하게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이 미술계에 쇼킹한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으며 돌아왔다. 하지만 파리에서 연 전시회의 반응은 그야말로 시큰둥했다. 심지어 고갱이 그림 제목으로 붙인 타히티어들을 유치 찬란하다고 비꼬는 사람도 있었다.

<안나 라 자바네즈>

흑인 혼혈 여성 안나 라 자바네즈를 모델 겸 애인으로 삼아 새로운 창작욕에 불타지만, 우발적인 폭력 사건에 휘말려 골절상을 입고 몇 개월간 병상에 누워 있는 사이 둘의 관계는 파탄으로 끝나버린다. 연이은 좌절을 겪은 고갱은 프랑스를 영영 뜨기로 작정한다. 다시 타히티로 가려는 것이었다.


1895년 6월에 파리를 떠난 고갱은 9월 초에 다시 타히티의 파페에테에 도착한다. 하지만 골절상의 후유증은 물론이고 젊은 시절에 완치되지 못한 매독의 재발로 그의 몸은 이미 크게 망가진 다음이었다. 고갱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심지어 자살까지도 시도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붓을 놓지는 않았다.


이 시기의 주요 작품으로는 새로 얻은 애인 파우라를 모델로 한 여러 점의 작품과 최후의 대작인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가 있다.

결국 다시 타히티로 돌아간 고갱의 삶은 그야말로 궁핍과 궁색의 극치로 치닫게 된다. 그림을 그려서 프랑스로 보내서 친구들에게 팔아서 돈을 부치라고 했고 친구들은 어렵게 그림을 팔아서 돈을 부쳐줬다. 하지만 고갱의 경제관념 부족으로 그렇게 받은 돈은 며칠 안돼서 날려버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생계를 위해 그 지역의 신문에 발표한 논설에는 중국인 이민자들을 향한 인종차별적인 독설이 가득했다. 원시의 순수함을 동경하던 고갱이었지만, 식민지의 백인으로서의 고정관념을 떨치기는 어려웠던 까닭이다. 이 때문에 지금도 타히티의 중국인들은 고갱을 미워한다고 한다.


1901년, 고갱은 이후 타히티보다 좀 더 문명의 손길이 덜 탄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로 옮겼지만 이곳에서는 앞서 정착해있던 가톨릭 주교와 다툼을 일으켰고 현지인을 위한답시고 총독을 비난하는 등 식민지의 백인 관료와 선교사의 전횡을 목도하고 이를 고발하여 법정 다툼을 벌이다 패소하고 만다.


이후 알코올 의존증과 악화된 매독의 증세로 인한 건강 악화로 한 달 넘게 병상에 누워 있던 고갱은 1903년 5월 8일 고갱은 히바오아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향년 55세의 젊은 나이였다. 지금도 그의 무덤은 그곳에 있으며, 덕분에 고갱의 묘는 유명 화가의 묘역 중에서 찾아가기 가장 힘든 축에 속한다.

현존 가장 고가(3억 달러)에 팔린 <언제 결혼하니>(1892)

뚜렷한 윤곽선과 단순화한 형태, 음영과 그림자가 없어서 평평한 느낌을 주는 색면, 실제 대상의 색깔과는 다른 강렬한 색채가 고갱 그림의 특징이다. 그는 자연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자신의 그림 속으로 녹여내서 그려냈다. 이 때문에 한때 고갱과 절친했던 카미유 피사로는 고갱을 격하게 비난했지만.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내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후대의 표현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문명을 멀리하고 원시와 자연을 예찬했다는 특징도 있다.


고갱이 사망한 지 1년 뒤인 1904년, 파리에 온 어느 젊은 영국인 작가는 최근에 타히티에서 사망한 프랑스인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을 느낀다. 그의 일생이 흥미로운 소재라고 생각한 영국인은 13년 뒤인 1917년에 타히티를 직접 방문해 고갱의 흔적을 찾아다닌다. 그 와중에 그는 고갱이 제1차 타히티 체류 시 머물렀던 오두막의 문짝에 그려놓은 그림을 찾아내 헐값에 구입해 영국으로 가져온다.

바로 이 영국인 작가는 서머싯 몸이었고, 그가 그렇게 집필한 소설 <달과 6펜스>(1921)는 발표와 동시에 큰 성공을 거두면서, 문명을 떠나 자연으로 돌아갔다는 고갱의 전설을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주인공을 통해 전 세계에 알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당시 서머싯 몸이 타히티를 방문하여 사 왔던 그 단돈 400프랑을 주고 산 고갱의 문짝 그림은, 반세기 뒤인 1962년에는 1만 7천 달러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거래가 된다. 말년의 경제사정이 궁핍했던 고갱은 돈이 없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먹을 것과 맞바꾸곤 했는데, 마을의 중국인 식품점 주인은 그렇게 해서 얻은 고갱의 데생을 주로 ‘포장지’로 사용했다고 한다.


타히티의 백인들 중에는 고갱이 그려준 초상화를 못마땅해해서 다락에 처박아놓았다가 훗날 화상에게 처분해서 거액의 차익을 남겼다고 하는데, 그가 살아 있을 동안 고갱이 그림 선물을 이들 중에는 됐다고 거절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본래 그림을 정식으로 배우지도 않고 취미로 시작했는데,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찾았다며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마흔이 다 된 나이에 전업화가의 전선에 뛰어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론 그 대가로 그는 아내에게 버림받고 처자식과 만나지도 못하고 고독한 예술가의 길을 걸었어야만 했다.


물론 당시 시대적 경기 상황이 워낙 안 좋았던 것도 그가 주식 중개인을 그만두겠다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기는 했겠으나, 그의 가족은 물론이고 교류하던 화가들조차 사실 그가 전업화가가 되겠다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예술혼을 불태우던 예술가적 기질보다는 주식 중계인으로서 다져진 감이 더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매번 자신의 새로운 미술 세계와 기법이 프랑스는 물론이고 전 유럽에서 환영받을 것이라는 부푼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는 죽기 직전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그림세계를 인정받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는 가족과 떨어지게 되면서 불안정한 경제적 상황과 아울러 안정성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그가 문명사회에 넌더리를 내며 떠났던 타히티행이 첫 번째에도 불발되었던 이유도, 고독함을 견디지 못하고 우울증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우울증이 심해져 자살까지 시도했었다.


사실 그에게 타히티행은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라기보다는 자신이 파리에 있으면서 겪은 처절한 패배감으로부터의 도피일 뿐이었다. 전업화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 것도 돈벌이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비난과 압박 속에 궁여지책으로 찾아낸 도피구였을 뿐이다. 그가 갑자기 잘 나가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예술혼을 불태우며 미술을 해보자고 했던 것도 아니고 예술을 위해 처자식을 버렸다는 내용 자체도 왜곡된 것일 뿐이다.


내가 오늘 그렇게 유명하다는 폴 고갱의 삶을 당신에게 소개하는 이유도, 당신을 비롯한 일반인들이 얼마나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인지하고 있지 못하게 때문이기도 하다. 한 때 잘 나가던 파리의 주식 중개인의 삶에서, 급격하게 안 좋아지는 경제적 흐름으로 인해 직장에서의 위치가 위협받고 부유한 생활에 익숙해진 아내와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가장 역할을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그에게 공포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처자식에게 버림받고, 그것을 한 번에 만회할 수 있는 복권 같은 삶으로 전업화가를 선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오늘 살펴보았듯이 그의 눈은 이미 천장 위에 달려 있었지만, 그의 몸과 손은 바닥, 아니 지하에 처박혀진 채 사람들의 외면과 무시 속에서 점점 그의 여린 마음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가 죽고 나서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인정받는 미술계의 화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살아 있을 때 예견할 수 있었다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던 그날이라도 그는 행복하게 웃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늘 하는 말이지만, 죽고 난 뒤에 대박을 치는 것은 아무런, 정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이다.


2년 여가 넘는 혹독한 코로나 정국 속에서 자영업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고통을 겪고 그로 인해 실질적인 파탄을 맡거나 힘겨운 처지에 놓이게 된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통인 상황임에도 그런 입장이 되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정작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마음이 여리고 고독을 견디지 못했던 고갱은 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누군가를 곁에 두고 그에게 의지하고자 했다. 물론 그것이 그에게 얼마큼이나 도움이 되었고 마음의 안식을 가져다주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평생을 우울하게, 그리고 죽을 만큼 고독하게 지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가 좀 더 강하게 자신의 고독을 이겨내고 새로운 예술세계를 인정받았더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이 고갱이라는 상상을 굳이 할 필요도 없다. 당신이 사랑한다고 믿었던 가족마저 당신의 능력을 의심하고 되는 일이 없고 좌절에 빠지게 되는 일은 극히 드문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라. 고갱이 정말로 그저 그런 그림이었음에도 서머싯 몸의 소설로 인해 유명세를 타고, 그저 기구하게 죽어갔다는 점 때문에 희대의 화가가 되었을까? 같은 이유로 불행하게 죽어갔던 고흐 역시 지난 그의 이야기에서 다뤘던 것처럼, 그들의 인생이 고난에 찼었고, 기구한 운명에 힘겹게 살았기 때문에 죽고 나서 유명한 화가로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미술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안다. 그들의 그림은 정말로 인정할만한 그 무언가가 있었지만, 당대에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일 뿐, 분명히 그들만이 갖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세상에 아무런 노력 없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물건이 단지 우연한 사건으로 그 가치가 올라가는 일은 지극히 아주 지극히 드물다. 심지어 우연히 가치를 높인 물건들은 나중에 진실된 가치가 밝혀지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그 지난한 실패가 연속된 삶 속에서 고갱은 분명히 자신만의 일가를 이루었고 어느 경지에 다 달았다. 그것이 그의 판단 잘못으로, 혹은 시대의 잘못된 흐름으로 인해 꺾였을지언정 이후 그는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았을 뿐이다.


당신이 그 실패에서 보아야 하는 것은, 그가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끝까지는 그는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싸우겠다며 그 열도의 섬에서 법정까지 나섰다. 만약 그가 자포자기했다면 그는 그림을 계속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가 자기 관리를 잘하지 못하고 그림을 그리는 족족 프랑스로 그림을 보냈고 그 그림을 판 돈을 하루아침에 낭비해버리는 삶을 살았을지언정 그는 자신의 노력을 헛되이 버리지 않았다.


당신은 지금 그러고 있는가?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목표점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던지며 하루하루를 불태우고 있는가? 혹여 그저 큰 톱니바퀴의 부속품으로 적당히 그 안에서 먹고사는 것만 생각하며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자신의 사람을 그저 소진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의 이제까지의 삶을 불사르면 무엇이 남을까? 생각해본 적 있는가?

위인이든 길거리에 노숙자든 단 한번 사는 삶임에는 차이가 없다.


당신에게 다음 생이 게임의 이어하기 버튼처럼 '다시'가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한번 사는 인생인데, 그리 가볍고 지저분하며 너저분하게 살면 억울해서 과연 눈이나 제대로 감고 죽을 수 있겠는가?


그러지 마라.


내 어깨를 보고 자랄 자식에게, 나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부모님께,


결코 부끄럽지 않은 삶을 남기고 가도록 끊임없이 반성하며 노력하라.


그리하면 그 결과는 결코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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