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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27. 2022

25살에 에어컨을 발명하는 성과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흐름으로 빛도 보지 못했다가 결국 ‘에어컨의 아버지’라고 칭송받다

217번째 대가의 이야기.


1876년, 미국 뉴욕주 앵골라에서 태어났다. 1895년에 코넬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1901년 기계공학 학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버펄로로 가서 히터기와 송풍기 등을 제조하는 '버펄로 포지 컴퍼니'라는 제철소에서 주급 10달러를 받고 엔지니어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회사에 입사해 처음 한 일은 낡은 난방시스템을 현대식으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증기로 가열된 관을 지날 때 공기가 얼마나 많은 양의 열을 보유할 수 있는지 측정한 후,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난방시스템을 개선했다.


새롭게 개선된 난방설비 덕분에 회사는 4만 달러에 이르는 비용이 낭비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과 덕분에 캐리어는 회사에 입사한 지 불과 1년 만에 개발팀장이 되는 등 두각을 드러냈다. 이후  목재와 커피콩을 건조하는 난방 장치 개발에 투입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02년 버펄로 포지 컴퍼니의 고객이었던 브루클린의 새킷-빌헬름 석판 출판사 (Sackett-Wilhelms Lithographing & Publishing Company)에서 새로운 의뢰가 들어온다.

 

여름에는 고온과 습기 때문에 용지가 변질되어 출판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고충을 해결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기의 설계도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몇 달 되지 않아 바로 회사에 설계도와 개선안을 제출하게 된다.


뜨거운 증기를 파이프로 보내 난방을 하는 기존 난방시스템을 뒤집어 찬물(냉매)을 파이프로 보내 건물의 온도를 낮추는 냉방시스템은 그렇게 탄생되었다. 문제는 더운 여름에 찬물을 어디서 조달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안개 낀 피츠버그 기차역에서 그 답을 찾아냈다.


물이 안개로 변하면서 열을 흡수해 온도가 낮아진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를 자신이 만든 냉방시스템에 적용했다. 그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공기조화 시스템, 즉 에어컨의 탄생비화이다.

그에게 의뢰했던 인쇄소는 마침내 여름에도 책을 인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의 공학자로, 바로 이 에어컨의 기초가 되는 공기 조절 장치를 발명한 발명가이자 1902년 최초의 전자식 공기조화기를 발명하였고, 1915년에는 히터기, 통풍기, 에어컨 전문 생산 유통기업을 본인의 이름으로 창업한,  ‘에어컨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Willis Haviland Carrier)의 이야기이다.


당시 윌리스 캐리어가 제안한 공기조화 시스템이 오늘날 에어컨의 탄생으로 확실하게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습도 조절 장치가 추가되면서 온도 조절, 습도 조절, 공기 순환과 환기, 공기 정화의 기본 기능을 모두 갖춘 형태였기 때문이다. 개발을 완성한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5살에 불과했다.


캐리어는 이후로도 수년간에 걸친 개량과 현장실험을 통해 1906년 1월 2일 '공기 취급 장비' (Apparatus for Treating Air)란 이름으로 미국 특허를 등록하게 된다. 이는 세계 최초의 분무형 공기조화 장치로서, 처음에는 물을 데우고 한순간 냉각하여 공기 중의 습기를 내고 없애도록 하는 장비였다. 공기 취급 장비는 1906년 말 라크로스 내셔널 은행을 시작으로 각 회사에 납품되기 시작했다.


1906년 캐리어는 이슬점과의 온도 격차를 일정하게 유지시키면 습도도 그에 일정한 비례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일명 '일정 이슬점 강하 법칙' (law of constant dew-point depression)이라 불리는 이 법칙을 기반으로 캐리어는 자동 이슬점 조절 시스템을 설계하여 1907년 5월 17일에 특허를 출원하였고, 1914년 2월 3일에 최종 승인을 받았다.

1911년 12월 3일 캐리어는 미국기계공학협회 연례 모임에서, <합리적 건습 공식(Rational Psychrometric Formulae)>이란 제목으로 공기조화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은 상대 습도, 절대 습도, 이슬점 온도의 상관관계를 밝혀내고, 업계에서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공기조화 시스템을 직접 설계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캐리어의 논문은 공기조화 시스템 설계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자료가 되었으며, '건습계의 대헌장'이라는 별명까지 붙게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버펄로 포지 컴퍼니는 에어컨 같은 공기조화 시스템 대신 군사물자를 생산하는데 집중하기로 결정하고, 근무 12년 차의 캐리어 역시 생산부문에만 집중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캐리어는 본격적으로 에어컨 전문 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하고, 동료 기술자 7명과 함께 자본금 32,600달러를 모아 1915년 6월 26일 '캐리어 엔지니어링 회사' (Carrier Engineering Corporation)를 설립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처음에는 뉴욕에 위치했던 이 회사는 이후 본사를 옮겨 뉴저지주 뉴어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1920년대 들어서 캐리어 회사는 원심형 냉장기를 개발해 판매하였고, 에어컨도 계속해서 출시해 나갔다. 처음에는 산업현장에서만 쓰이던 에어컨도 민간부문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1924년 디트로이트의 허드슨 백화점, 1925년 뉴욕의 리볼리 극장에 이어 1928년에는 미국 의회에 캐리어 사의 에어컨이 설치되었고, 1928년에는 미 의회, 1929년에는 백악관에까지 진출하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흐름은 오래가지 않았다. 1929년 10월 주가 대폭락으로 인한 대공황의 여파로 회사는 갑작스러운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승승장구하며 대박이 날 것만 같았던 아이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생각보다 에어컨의 수요는 적었고, 때문에 1929년 세계 대공황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계기가 된다. 결국 1930년 캐리어 엔지니어링 사는 번스 윅-크로셸 컴퍼니, 요크 난방 환기 회사와 합병하여 캐리어 코퍼레이션 (Carrier Corporation)이 설립되었고, 윌리스 캐리어는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공황의 여파는 에어컨의 판매에도 영향을 끼쳤다. 개인부문과 상업부문 모두 실적이 지지부진해지자, 캐리어 사는 뉴저지주와 펜실베이니아주의 4개 도시에 분산되어 운영되었다. 이후 1937년에 뉴욕주 시라큐스로 본사를 옮기고, 뉴욕주 중앙 지역에서 가장 많은 근로자를 거느린 기업으로 등극하였다. 1939년 뉴욕 만국박람회에서는 이글루관을 제작해 관람객들로 하여금 미래의 에어컨을 소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머지않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캐리어는 르하이 대학과 알프레드 대학에서 에어컨을 발명한 공로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후 1950년 향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캐리어가 사망한 뒤에는 1950년대 경제 부흥기에 접어들면서 에어컨도 비로소 엄청난 인기를 모으며 사무실은 물론 공장을 비롯하여 가정에까지 필수 기기로 붐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1955년에는 건설업자 윌리엄 레빗이 주택 기본 사양 중 하나로 에어컨을 채택하면서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같은 해 캐리어 사의 매출은 51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캐리어의 사후 캐리어 코퍼레이션은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전 세계 180여 개국에서 에어컨, 공조 설비 관련 비즈니스를 진행 중이다. 에어컨을 발명해 현대 문명을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캐리어는 1985년 미국 국립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1998년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가운데 1인으로 선정되었다.

에어컨의 발명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사실 캐리어의 업적은 단순히 에어컨만 하나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는 공기 조화 장치, 즉 공조장치라는 것을 발명한 것인데 이 시스템은 더위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인간의 생활과 세계의 역사를 그야말로 획기적으로, 영원히 바꿔버린 발명품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기 조화 장치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밀집한 공간에도 공기화 장치를 통해 실내 대기를 조절할 수 있게 되면서 대형 건물과 시설들이 생겨났고, 쾌적한 지하철 환경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더위에 취약한 것은 사람만이 아니라 전자기기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수많은 서버들이 모여 있는 데이터 센터는 에어컨 덕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냥 더위를 시원하게 보내는 것에서 그치는 발명품을 내놓은 것 정도가 아니라 인류의 활동반경을 넓히고 정보화 혁명을 일으키는데 그는 획기적인 도움을 준 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에어컨이 없었다면 거대 IT기업은 등장할 수조차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해당 기술은 냉장, 냉동고 성능을 비약적으로 향상해 식품 및 약품을 그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보관할 수 있게 되었으며 냉장/냉동 컨테이너가 제작되어 전 세계로 식품이 신선한 상태로 수출될 수 있었다. 이는 전 세계 식문화의 변화뿐만 아니라, 백신 및 치료제, 기증 장기 저장 기술과도 직결되기 때문에, 공조 장치가 없었다면 바이러스나 암을 비롯한 질병과의 싸움,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코로나19와의 전쟁도 불가능하거나 지금보다 훨씬 더 고생을 했을 것이다.


이 시리즈에서 싱가포르의 국부로 다뤘던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에어컨이 없었다면 싱가포르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 발언을 통한 캐리어의 업적에 대한 극찬을 남긴 바 있다. 싱가포르는 상당히 덥고 습하고 비가 많이 내리는 열대우림기후라 아무리 노력해도 선진국으로 발전하기에는 상당히 불리한 기후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에어컨 덕에 더위를 극복하고 작지만 강한 도시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면, 중동의 국가들이 기름만으로 그저 부자가 될 수 없었던 것처럼 사막의 열사를 극복할 수 있는 시스템은 모두 캐리어가 25살에 이룬 성과의 덕을 보고 있는 셈이다.


내가 오늘 캐리어의 삶을 당신에게 소개하는 이유는 그가 어떻게 자신에게 찾아온 시련과 실패에 대한 걱정을 덜어냈는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함이다. 그저 인터넷이나 책에서 인용된 간략한 내용만 보고 큰 어려움 없이 명문대학의 공학을 전공한 공학자이자 엔지니어였던 캐리어가 불과 25살에 짜쟌~하며 에어컨을 발명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역시나 이 시리즈에서 다뤘던 자기 계발서의 창시자, 데일 카네기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캐리어 회사의 사장인 윌리스 캐리어로부터 들은 '근심을 해결하는 공식'을 인터뷰를 통해 적고 자신의 저서와 강연을 통해 전 미국의 사람들에게 근심을 해결하는 세 단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알려주었다.


첫째, 스스로에게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무엇인가?'를 물어보라.

둘째, 필요하다면 그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

셋째, 차분하게 최악의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내라.


카네기가 이 인터뷰를 하며 듣게 된 캐리어만의 비화는 다음과 같을 일화에서부터 시작된다.

윌리스 캐리어가 뉴욕의 버펄로 포지 회사에서 일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는 회사에 의뢰가 들어온 미주리 주 크리스털 시에 있는 피츠버그 판유리 공장에 가서 가스 정화장치를 하러 출장을 가게 된다. 가스 정화장치는 새로 도입된 기술이라 시행착오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를 했지만 설치한 장비는 터무니없이 성능이 떨어져 제기능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회사일을 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능력을 인정받아 팀장까지 급속 승진했던 캐리어 입장에서는 이 실패가 자신을 다시 벼랑 끝에서 떨어뜨려버릴 수도 있는 일이라 여겨,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 정도가 심해져서, 심리적 공황으로 심한 복통과 불면증에까지 시달리게 된다. 도저히 그 상태로는 자신의 몸도 정신도 심지어 일까지도 개선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 젊은 날의 고민을 카네기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해주던 캐리어는 자신이 그 실패와 고난을 앞두고 새로운 삶의 방법을 고안하여 30년 동안 꾸준히 활용하여 삶이 확연히 개선되었다며 그 방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1단계는 앞으로 일어날 최악의 상황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장치 설비가 실패한다면 2만 달러의 손해를 볼 것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죽이거나 구속시키지는 않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는 회사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2단계는 최악의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2만 달러는 사장이 실험비로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고, 만약 회사에서 쫓겨나게 되더라도 다른 일을 찾아 새롭게 시작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작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고 받아들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3단계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 않도록 다시 한번 시간과 열정을 쏟아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는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계속 연구하고, 그 결과 5천 달러의 부속장치를 설치하면 고민하던 문제가 해결되리라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결국은 2만 달러의 손실이 아니라, 1만 5천 달러의 수익을 본 것이라고 설명하며 캐리어는 의아해하는 카네기를 보며 껄껄 웃어 보였다.


순간, 카네기는 그의 표정과 연륜에서 30여 년 동안 그 원칙을 고수했던 그가 왜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실수와 실패에 대해 그저 걱정만 하고 지레 포기했더라면 정말로 실패하고 큰 손해를 보았을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윌리스 캐리어는 사업과 삶의 지혜를 얻어 대성하고, 이후 발명과 함께 창업을 하게 되어서도 수많은 근심과 고난이 있었지만 그것들을 모두 이기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당신에게 닥쳤던 어려움이나 시련, 고난을 어떻게 이겨냈는가? 늘 말하지만, 당신이 아무 걱정도 없을 거라며 부러워하는 그에게마저도 근심과 염려는 있기 마련이다. 사람의 감정과 삶이 그렇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이 세상을 마냥 편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근심이나 걱정들은 본래 당신이 가지고 있던 지혜와 능력을 마비시켜 버리고, 당신이 누리던 행복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좀먹고 앗아가 버린다. 캐리어가 에어컨을 발명한 25살에서부터 창업을 하게 된 39살까지의 그 14년 동안 그가 무엇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당신이라면, 그만한 훌륭한 물건을 개발하고 발명해냈으니 바로 회사를 내자고 투자자들을 모으고 흥분해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대표 명함을 뿌렸을지도 모르겠다. 누가 봐도 훌륭한 아이디어이고 대박 아이템임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말아먹고 빌딩에서 줄을 묶지도 않고 번지점프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로 많았다. 그들은 스스로 인생을 포기할 때에서야 자신의 성급함과 어설픈 준비에 대한 한탄을 해야 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캐리어는 같은 회사에서 자신이 발명한 물건을 무려 14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개량하고 또 연구하고 새로운 관련 실험을 해나가면서 경험을 쌓았고 위의 사례처럼 다양한 경험으로 자신을 다져나갔다. 그가 그저 회사를 내는 것을 겁내 하던 새가슴이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그가 몇 안 되는 친구들과 얼마 안 되는 자본금으로 과감하게 회사를 차린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이후 대공항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세계적 부침에도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자신의 회사를 유지하고 키워나갈 수 있었다. 물론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전쟁이 끝나고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경제적 부흥기가 왔고, 그 시대적 흐름이 에어컨의 시대를 도래하게 만들긴 해서 그가 그 빛을 모두 누리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그는 서툰 발길질로 자신의 성공을 망치지도 않았고, 시대의 부침에 자신의 발명품이 대박이 나지 않았다고 하여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회사는 그대로였지만, 기업주가 그렇게 많이 바뀐 것만 보더라도 그가 경영했던 시기의 회사는 오히려 지극히 안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누구에게나 고민과 걱정거리는 있다는 삶의 진리와 누구에게나 시련과 고난은 닥치기 마련이라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느냐 좌절하고 무너지는 결정타를 맞느냐이다. 언제나 부정적인 의미만을 담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걱정, 고민, 시련, 고난 등은 부정적인 언어라고 생각되지만, 그 와중에도 그것을 자신의 성장 기회로 여겨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더 업그레이드되는 경우를 우리는 이후 '성공'이라 부르는 것이다.


올림픽에서 자신의 목에 거는 메달의 색깔을 결정하는 것은 심판도, 다른 선수도, 코치도 아닌 바로 선수 자신이듯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시련이나 고난이, 그 실패가 당신을 무릎 꿇게 만드는 포기로 이어질지 나중에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성공한 자만이 말할 수 있는 추억담이 될지는 당신이 결정하는 것이란 의미이다.


힘들고, 괴롭고, 잠을 잘 수도 없고, 분해서 숨이 가빠올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힘겨움이 파도처럼 당신을 집어삼키려고 든다는 느낌에 어쩔 줄 몰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차분히 자신을 찾아내서 자신과 마주하고 캐리어가 했던 대로 세 단계를 조용히 거쳐보라.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된다.


하늘은 결코 당신이 할 수 없는 고난을 던져주지 않는다.

당신은 진정한 큰 그릇으로 쓰기 위해 좀 더 강하고 단단한 그릇으로 만들기 위해 시험하고 있을 뿐이다.

이겨내라.

당신이 이겨낼 것이라 믿고 내는 시험이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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