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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28. 2022

태어나자마자 눈이 멀어 세상을 한 번도 보지 못해도,

눈이 안 보이는 것은 천재에 대한 핸디캡이라며 크게 웃어 보이다.

218번째 대가의 이야기.


스티블랜드 하더웨이 모리슨은 1950년 5월 13일 미시간주 새기노에서 여섯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 생활을 하다 산소 과다 공급으로 인한 미숙아 망막증으로 시력을 잃게 된다. 즉, 그는 단 한 번도 세상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 룰라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유년시절과 방황기를 거쳐 남편에게 거의 버림받다시피 내팽개쳐진 상황에서 세 번째로 가진 아이의 이러한 상황을 겪으며 정신을 차리고 새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가 4살 되던 해, 그의 어머니 룰라는 가정을 내팽개친 남편을 떠나 아이들을 데리고 디트로이트로 이주를 하게 된다. 생활은 당연히 어려웠다. 아이들이 한겨울에 얼어 죽을까 싶어 어머니는 인근 부두에서 석탄을 훔쳐와 때면서 겨울을 나야만 했다.


그렇게 어시장에 나가 새벽부터 새벽까지 뼈가 부서져라 일하며 아이들을 먹여 살렸다. 소년은 늘 어머니의 생선 비린내를 맡고서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방탕한 유년기의 과오를 반성하며 자녀들에게는 깊은 신앙심을 가질 수 있도록 험하게 가르쳤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다른 형제들과 차별하여 싸고돌거나 잘못을 봐주거나 하지 않았다. 도리어 장애를 가졌기에 더욱 바르고 내면이 강한 사람으로 키우고자 했다.

눈이 보이지 않아 마음껏 뛰어놀 수 없었던 소년은 음악을 친구로 삼게 된다. 소리에 대해서는 상당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쌍둥이의 목소리로 누구인지 구분해내거나 동전이 부딪히는 소리로 동전이 얼마짜리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그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리듬감도 뛰어났던 그는 이미 10살도 되기 전에 이사 가며 버리고 가서 얻은 피아노, 이발소 아저씨에게 선물 받은 하모니카, 연말 파티에서 선물로 당첨되어 받은 드럼, 베이스, 기타 연주를 시작하였고, 교회에서 성가대로 활동하면서 음악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 된다.


11살이던 1961년, 소울 그룹 미라클스의 멤버 제럴드 화이트(Gerald White)의 눈에 띈 모리스는 모타운과 계약해 ‘스티비 원더’라는 예명으로 싱글 <I Call It Pretty Music, But the Old People Call It the Blues>를 발매해 음악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1963년 데뷔 앨범 <Little Stevie Wonder>를 발매, 이후 동년도에 나온 라이브 앨범 <Recorded Live: The 12 Year Old Genius>와 혼이 깃들었다는 호평을 받은 높은 음을 자랑하는 노래와 격렬한 하모니카 연주가 실린 라이브 싱글 <Fingertips - Pt. 2>로 각각 빌보드 200과 빌보드 핫 100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의 나이 당시 13살이었다.


당시 모타운의 기획사는 그를 레이 찰스의 후계자인 듯한 구도로 마케팅했다.

미국의 음악가이자 프로듀서이며 20세기 대중음악계의 산증인인, 살아있는 전설이자 거목으로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예명 스티비 원더로 우리에게는 너무도 친숙한, 본명, 스티블랜드 하더웨이 모리스(Stevland Hardaway Morris)의 이야기이다.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1억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달성함은 물론, 30곡 이상을 빌보드 TOP 10에 진입시켰고, 총 25차례 그래미상을 수상하며 1985년에는 아카데미 음악상까지 수상한 바 있다.


1983년과 1989년에는 <작곡가 명예의 전당>과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으며, 미국 대중음악계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거쉬인 공로상’까지 수상하였다.

14살이 되면서 그는 변성기를 맞이했고, 기존의 주목을 이어나가지 못한다. 기존의 레이 찰스 스타일의 노래를 벗어나야 한다는 숙제를 맞이한 것이다. 그렇게 변변한 반응을 얻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1970년에 결혼을 한 그는 이듬해에 21살이 되면서, 그는 자신의 둥지와도 같았던 모타운에서 나와 소년 가수 이미지를 벗어내기 위해 여러 가지 음악적 실험을 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기 시작한다.


당시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문화상 소속사가 가수의 이미지와 음악세계까지 모두 구축하는 상황에서 자신만의 색을 도저히 찾지 못하고 그대로 고착될 것을 우려한다는 자신만의 강한 의지 표명이었다. 그렇게 홀로서기 첫 앨범으로 그는 자신만의 색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그는 새로운 음악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뉴욕으로 길을 떠난다. 당시 뉴욕에서는 Synth Sound가 크게 가미된 음반들이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스티비는 TONTO's Expanding Head Band의 <Zero Time>이라는 앨범을 듣고 충격을 받아 당장 그들을 만나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렇게 그들과의 만남과 작업은 스티비 원더의 음악 세계의 정점을 찍을 계기가 된다.

1973년 그들과의 작업으로 자신만의 색을 찾은 스티비는 따로 계약사를 두지 않고 있다가 다시 모타운과의 재계약에 나서게 된다. 본래 10년 전에 그가 맺었던 첫 계약의 조건은 4년의 녹음 계약과 3년간의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계약에 앨범 판매 가격의 2%를 인세로 받는 조건이었다.


당시 그의 어머니 룰라가 미성년자인 그를 대신해 받은 그의 주급은 단돈 2.5달러였다. 당시 앨범 한 장의 가격이 1달러가 채 되지 않던 시기였으니 얼마나 적은 수준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후 재계약을 했어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하지만 결별에 이어 거물이 된 스티비의 친정과 하게 된 10년 만의 재계약에서는 조건이 달라졌다. 스티비는 당당하게 인세 비율을 2%에서 14%로 인상하고 90만 달러의 계약금은 물론 모타운이 주식 상장을 하게 될 경우 주식 거래를 할 수 있는 옵션까지 제시하였다.


사실 이 모든 경제적인 조건의 압도적인 제안보다 그의 제안이 더욱 파격적이었던 것은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창작 권한의 완전한 위임’이었다. 이전의 문화를 모두 파괴하고 자신의 음악을 만들고 제작만을 회사에서 서포트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모타운의 독재자로 불리던 Berry Gordy는 팔리는 음악을 위주로 자신이 모든 것을 설계하고 결정하여 만들어내는 기존의 시스템을 고수하고자 했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어 있었다. 그즈음 모타운의 스타였던 마빈 게이가 이미 창작 전권을 주장하며 만든 <What’s going on>(1971)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무엇보다 이전 재계약을 뿌리치며 홀로서기를 했던 스티비가 거물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결국 스티비는 3년 동안 앨범의 모든 제작권한까지 인정받는 재계약에 성공하게 된다. 그렇게 원하던 음악을 다시 모타운에서 만들던 즈음이던 1972년 그는 첫사랑인 아내 수레타와 이혼을 하게 된다.


큰 사건이나 불화가 원인은 아니라고 했지만 당연히 민감한 그에게는 아픔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과 사회참여적인 곡들이 많이 들어간 앨범을 만들게 되는데, 이 해에 그의 명곡 ‘Superstition’도 발표된다.

그러던 중 1973년 사회비판을 담은 앨범 <Innervisions>를 발표한 직후 불과 3일 만에 큰 교통사고를 당해, 미각과 후각마저 잃어버리는 수난을 겪게 된다. 다행히 3년 정도 지나 미각과 후각은 돌아왔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앨범은 그러한 사고로 인해 그는 더욱 주목을 받으며 대박을 치게 된다.


1975년 그는 이전 계약 때보다 훨씬 더 높은 조건으로 다시 재계약에 성공하며 모타운의 슈퍼스타로 우뚝 서게 된다. 그는 어마어마한 자신만의 스타일로 다음 앨범 준비를 한다. 이른바 앨범에 수록할 곡의 10 배수 곡을 준비해서 그중에 10분의 1을 추려 앨범을 발매하는 것이다.


10장의 앨범을 만들 정도의 수준 높은 곳을 만들어 그중에서 추리고 추려 한 장의 앨범으로 압축하는 형태였으니 그의 앨범이 각광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였다.


사고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1976년도 앨범 <Songs in the Key of Life>에서는 3년 동안 완성시킨 1천여 곡 중에서 17곡을 선별해서 만드는 기적 같은 노력의 성과를 보여준다. 결혼하지 않았던 연인과의 딸이 태어난 것을 계기로, 그 귀여운 모습을 직접 볼 수 없는 아빠의 사랑을 노래로 승화시킨 명곡 ‘Isn't She Lovely’로 그 해에 발표된 곡이다.

1980년대가 되면서는 자신이 주체가 되기보다는 다른 가수들과의 협업이나 프로듀싱, 그리고 작곡가로서의 모습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다재다능하면서도 영향력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에게 연이은 홈런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79년 발표했던 <The Secret Life of Plants>는 평론계와 대중들 모두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실패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앨범을 시작으로 그는 디지털 음반을 지속하게 되었고, 새로운 방식에 대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 그는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포함한 정말 다양한 장르와 메시지가 들어간 <Hotter than July> (1980)를 발표하며 다시 인기를 회복한다. ‘Lately’도 이 해에 발표된 곳이다. 1982년에는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와의 듀엣곡인 ‘Ebony and Ivory’를 발표하며 영국은 물론 미국에서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한다.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을 때도 당시 수감 중이던 넬슨 만델라의 이름을 언급하여 그의 노래가 남아공 금지곡이 되고 그의 입국 금지령까지 내려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어 축하공연을 했을 때 그는 넬슨 만델라를 위해 기꺼이 그 공연이 참가하여 금지되었던 곡을 멋지게 부른다.


그는 10대 시절 만난 마틴 루터 킹과의 만남을 인연으로 그의 유지를 이어나가듯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마틴 루터 킹의 생일을 국경으로 만들자는 1980년대의 움직임에 1981년 <Happy birehday>라는 노래는 큰 인기를 얻으며 국경일 지정 캠페인에 힘을 불어넣었고,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은 마틴 루터 킹의 생일을 국경일로 지정하게 된다.


2005년의 <A Time To Love> 앨범 이후 신곡 발표가 뜸한 편이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명곡, 명반을 내놓았고 신곡 발표가 뜸하던 중 2009년 싱글 ‘All About the Love Again’을 발표했고, 오바마를 응원하는 데에 쓰도록 하였다.

2010년에는 현대카드에서 주최하는 ‘슈퍼콘서트 11’로 내한공연을 한 바 있는데, 티켓이 10분 만에 매진되며 그에 대한 한국에서의 사랑도 확실하게 증명하였다. 2013년 11월 22일에 방송된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에도 출연하여 곽부성, 효린과 합동 무대를 가지기도 했다.


2014년 1월 27일. 56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다프트 펑크와 퍼렐 윌리엄스와 나일 로저스와 Get lucky의 콜라보 무대를 선보였다.


2020년 새로운 싱글 2개를 발매하며 두 장의 앨범을 작업 중임을 밝혔다. 하나는 이전에 언급한 Through The Eyes Of Wonder이고 다른 하나는 가스펠 앨범이라고 한다.


2021년 2월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 가나로 영구 이주할 계획임을 밝혔다. 이미 1990년대부터 자신의 뿌리인 아프리카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는 해왔으나, 미국에서 점점 불거지고 있는 인종차별과 Black Lives Matter 운동 등이 이러한 생각을 굳히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는 지금까지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흑인음악계에 있어서는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늘 밝고 행복해 보이는 특유의 움직임과 비트로 사람들에게 음악이라는 선물을 주었던 그의 삶을 오늘 당신에게 소개하는 것은 그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순탄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명확하게 그의 삶을 통해 오늘 당신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점은 바로 그가 자신이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장애로 여기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이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귀가 더 발달했다던가 음감이 더 뛰어나졌다는 식의 평가를 받는 것에 굉장한 거부감을 보인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고자 함이다.


1982년 그가 일본 공연의 포스터로 사용했던 내용에 다음과 같은 그의 언급이 담겨 있는데 그의 생각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대목이라 인용한다.


“인생이란 결코 좋은 면만으로 가득 차 있지 않지요. 당신도 그렇지요?

좋은 면 나쁜 면으로 인생이 성립되는 것 아니겠어요?

나는 맹인이 나쁜 면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인생의 본질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방식 사용 방식에 따라 인생이 좋기도 나쁘기도 하지요. 역으로 눈이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방식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인생이 좋기도 나쁘기도 하는 법이잖아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이미 10대 때부터 이른바 세계적인 스타로 주목받으며 빵 뜬 케이스에 속한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음악에 전념하기 직전 그는 자신이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과 불우했던 가정환경에 자연스럽게 슬럼가의 흑인 형들과 어울리며 어슬렁거리며 방황하던 시기가 잠시였지만 있었다.

그의 어린 아들이 이상한 형들과 어울려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방황하는 것을 본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아들을 만류하려 길에 달려들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물론 큰 교통사고도 아니고 손이 부러지는 정도라 깁스를 하고 말았지만, 막 10대가 된 스티비에게는 당시 자신 때문에 깁스를 하고 집에 돌아온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자신 때문에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이제 막 10살을 넘긴 아이가 무슨 대단한 방황을 했고, 무슨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운명적인 계기는 이미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결정되는 경우를 우리는 아주 자주 접하게 된다.


어찌 보면, 그가 스타가 되고 그렇게 존경하던 마틴 루터 킹을 만났을 때, 킹 목사가 눈이 보이지 않는 자신을 먼저 알아봐 주며 자신을 포함한 자기 가족 모두가 스티비의 팬이라고 말해주었을 때 그는 평소 존경하던 킹 목사가 자신을 인정해준 것만으로도 음악을 하는 보람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음반사의 기획으로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롤모델 레이 찰스가 맹인이었던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다가 그 음반을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고, 어느 날 무대 뒤에 찾아와 “네가 하는 음악을 그대로 해나가면 돼.”라고 말해주는 것을 들었을 때 자신의 음악 인생이 나아갈 방향을 정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이미 너무 어린 나이에 스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앞서 상세히 비교해준 바와 같이 그에 대한 처우는 초창기 비참하리만큼 착취에 가까운 계약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재능을 옭아맨 기획사 사장에게 휘둘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돈을 위해 더 돈을 주겠다는 기획사로 옮기는 것을 마다하고 자신의 음악 수행을 위해 그저 막연히 새로운 음악을 만들겠다며 뉴욕으로 떠났다.


그가 당당하게 자신이 눈이 안보였던 것이 대단한 장애나 불행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자질 그리고 그 용기에 비하면 찌질했던 일반인들에 대한 아주 작은 핸디캡 정도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잃지 않고 새로움을 만들어나갔고,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가 가진 강한 신앙심에 의거하여 설명하자면 그가 게으르거나 방탕하거나 사고를 칠 것 같을 때 하느님은 그에게 크던 작던 사고를 통한 계시로 그가 결코 다른 길로 엇나게 않도록 인도해주었다고 한다.

대부분 똑같은 현상에 대해서도 감사하게 여기며 깨닫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 위기나 사고가 주는 교훈을 그저 자신이 운이 좋았다며 반성하거나 계기로 삼지 못하여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 결국 똑같은 사고를 당하거나 똑같은 안 좋은 일을 당해도 그것을 계기 삼아 자신의 삶에 자양분으로 삼는 사람이 성공하게 되는 것이고, 오만하게 감사할 줄 모르고 반성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글을 읽고 있는 동안, 당신은 그저 끄떡이면서 다 맞는 말이라고 자신도 그렇게 겸허하게 살고 있다는 식으로 자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이 지금 보이는 그 안일함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내가 스티비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가 그저 무겁기만한 사회비판적인 시각을 음악에 담아내는 스타일이 아니라 얼마든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가벼운 음악을 만드는 것 같지만, 그가 사회에 보이는 관심의 끈을 끊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눈이 보이지 않는 흑인이면서 차별이 심했던 남부에서 자라면서 충분히 사회 부조리와 차별의 부당함을 온몸의 세포로 접했던 사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사회비판적 메시지는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 충분히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그저 흑인들을 옹호한다거나 사회에 대한 욕설을 내뱉는 힙합과 차별되는 것도 그만이 할 수 있는 형태의 음악으로 그만이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이 잘 먹고 잘 살면, 다른 사람의 일이나 사회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게 될 가능성이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더 집중할 시간과 정력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성공한 사람들은 사회의 부조리에 늘 눈을 크게 뜨고 그것을 변혁시키기 위한 자신의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아무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듯 하지만, 공통적으로 그런 이들은 결코 인생에 있어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끝내 성공으로 자신의 삶을 이끈다.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과 당신의 가족 친지들만 행복한 사람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사회의 부조리가 다른 사람의 일이라며 고개를 돌린 자들은 늦던 빠르던 그 사회적 부조리를 자신의 재앙으로 맞닥뜨리는 시기가 온다.


그때가 되어 자신이 그 입장에 처했으니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후안무치하면서도 어리석기 그지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나는 보아왔다. 돈을 후원해달라, 기부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신이 살고 있는 주변에 눈을 크게 뜨고 잘못된 것에 목소리를 내라는 외침에 움직이지 않으면서, 같잖은 겉멋 들어간 글을 쓰고 마치 아픔을 공감하고 사회참여적인 인간인척 코스프레하는 이들이 이 브런치에도 여기저기 널려있는 꼴을 본다.


https://brunch.co.kr/@ahura/1052


지난주 토요일에 내가 시작한 프로젝트도 캠페인까지는 아니지만, 그런 경험이 없는, 하지만 그런 마음은 가지고 있는 이들과 함께 우리 자손들에게 물려줄 사회를 조금이나마 나은 것으로 바꿔나가자는 아주 작은 외침의 시작이었다.


아직 보지 않은 이들에게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보고도, 심지어 습관적으로 라이킷을 눌러놓고서도 피드백이 없는 자들을 본다. 그들이 그저 가짜 뉴스가 가득한 유튜브를 보는 탑골공원의 노숙자급 노인들과 무엇이 다른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선행을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사회를 바꿔나가자는 외침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가식에 넘치는 모양새로 나는 글을 쓰는 브런치의 작가 입네 하면서 정작 뭔가 움직여서 우리가 바꿔보자고 하는 소리를 듣고서도 아무런 일도 없이 가던 길을 가면서 ‘내가 그 일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뭐 그런 일에 내가 낄 필요가 있나?’ 따위의 뻔뻔한 생각으로 오늘 하루는 보내는 당신의 양심에게 묻고 싶다.


거울을 보라,

그리고 당신의 양심에게 물어봐라.

그렇게 모른척하고 지나치면 쪽팔리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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