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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03. 2022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인이라 인정받았어도 -1

자기 이익만을 위해 한평생을 살았던 민낯을 드러내고 말다.

219번째 대가의 이야기.


1880년, 아칸소 주 리틀록의 병영에서 미군 장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스코틀랜드계 이주민 출신으로, 할아버지는 위스콘신 주의 주지사였고, 아버지 아서 맥아더 주니어는 남북전쟁 때 명예훈장을 받았고 미국-스페인 전쟁과 미국-필리핀 전쟁에 참전했으며 1900년 필리핀의 군정 총독으로 재임했다.


어머니 핑키는 1852년생으로 버지니아 주 노퍽의 저명한 가문 출신으로 이른바, 금수저 집안의 3형제 중에 막내였다. 그러나 그들이 살았던 올드 웨스트는 상당히 낙후되고 비위생적인 환경이어서 가족의 삶은 상당히 고달팠고, 둘째는 1883년에 홍역에 걸려 요절했다. 그는, 장군인 아버지의 교육방식에 맞게 읽거나 쓰기도 전에, 심지어 걷거나 말하는 게 가능해진 때와 거의 동시에 말을 타고 총을 쏘는 법을 배웠다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아홉 살이 되던 해, 가족이 워싱턴 D.C로 이주해 왔고, 아버지가 다시 텍사스 주 샌 안토니오에 배속되어 중학교 때부터 그 지역 명문 사립학교인 서부 텍사스 군사 중학교(the West Texas Military Academy)에 진학했다. 학업은 물론이고 야구, 미식축구 등등 모두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여, 졸업 당시 100점 만점에 평균 97.33점에 달하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졸업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국회의원 인맥을 동원하여 추천을 받아 1899년, 그 유명한 미 육군 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하게 된다.

웨스트포인트 대학 시절 맥아더

이때 그의 극성 어머니는 사관학교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호텔의 스위트룸에 자리 잡고 아들을 그곳에 투숙시키고 일거수일투족을 감독했다. 이후 그는 급우 율리시스 그랜트 3세와 함께 일명 ‘장군의 아들’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903년, 93명의 학생들 중 가장 높은 졸업성적인 2424.12점을 기록하며 연대장 생도 겸 수석졸업 생도로 졸업한다. 가장 높은 졸업 성적을 기록한 사관생도가 미국 육군 공병 병과를 받는 것이 당시 관례였기 때문에, 공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미군은 초창기부터 상비군이 적고 격오지의 경비와 진지 구축, 영토 개척의 임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공병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래서 공병에 가장 우수한 장교들을 배치한 것인데, 그 시절에도 그 전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미국의 군인이자 정치가.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최연소 육군 소장, 최연소 육군 대장이자 육군 참모총장, 육군 원수까지 군의 주요 지위를 거쳤으며, 태평양 전쟁과 일본의 전후처리에서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였고 한국의 6.25 전쟁에서도 인천 상륙작전 등을 지휘하며 활약하여 우리들에게는 통칭 ‘맥아더 장군’으로 불리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명장으로 손꼽히는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이야기이다.


일찍이 군인이 되어서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6.25 전쟁 등 20세기에 벌어진 주요한 전쟁에 모두 참전한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 전쟁에서 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 육군 원수로서 지휘한 덕분에, ‘푸른 눈의 천황’ 혹은 ‘미국인 쇼군’, ‘일본 대통령’으로 불렸을 정도로 종전 이후 연합군 점령하의 일본에서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그 때문인지 2006년 <타임>지가 선정한 ‘60년 동안의 아시아의 영웅들' 리스트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6.25 전쟁에서도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북한군이 우세한 상황을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 성공적으로 반격하였으며 한국인들 사이에서 높은 인지도와 명성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들도 맥아더를 고평가 하는데, 점령군의 사령관인데도 일본인들이 맥아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일본에 가혹한 벌을 내리지 않고 최대한 선처해주었으며 은퇴 이후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핵 공격을 ‘잔인했다.’며 간접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다.

1903년 10월, 맥아더는 필리핀으로 파병되는 제3공병대대에 부임했다. 그런데 한 달만에 기마라스에서 일하고 있던 그는 필리핀 게릴라 두 명에게 매복 공격을 당했다. 그는 자신의 권총으로 그들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2명 모두 사살하는 활약을 선보여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1905년 10월, 맥아더는 그의 아버지의 보좌관으로서 도쿄로 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렇게 장군의 아들로서 승승장구하던 가운데, 그에게 시련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1912년, 그의 아버지가 갑자기 죽었고, 어머니가 중병에 걸렸다. 이에 맥아더는 워싱턴에 양해를 구해 허락을 받고 어머니가 입원한 존스 홉킨스 병원 근처에서 근무하게 된다.


1914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베라크루스로 미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현장에 파견된 맥아더는 베라크루스로 진군하는 군대에 대한 물류 지원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철도의 사용이 필요하다는 걸 파악하게 된다.


그러던 중 베라크루스의 알바라도에 많은 기관차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150달러 상당의 금화를 주고 3명의 무장 해제된 멕시코인으로부터 기관차를 구입했다. 그런데 베라크루스로 돌아가던 중, 그의 팀은 5명의 게릴라들에게 습격당했다.


일단 이들을 격퇴하긴 했지만, 얼마 안가 15명의 기병대 무리의 습격이 이어졌다. 맥아더는 옷에 3개의 총알구멍이 생길 정도로 공격당했지만 겨우 살아남아 돌아온다.


얼마 후, 맥아더 일행은 기병대 3명의 재공격을 받는다. 맥아더는 다시 셔츠에 또 다른 총알구멍을 얻으며 죽을 고비를 넘긴다. 그들은 말의 시체를 철로에서 제거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 하여 결국 수송을 성공시킨다.


이러한 맥아더의 죽음을 넘어선 활약상은 훈장 수여를 받을만한 사안이라고 보고된다. 그러나 이사회는 “‘맥아더가 사전에 허가를 받지 않고 무리하게 작전을 수행했다.”며 “이 상을 수여할 경우 비슷한 조건하에서 부관들이 현지 지휘관을 무시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아무런 포상을 받지 못한다.

1917년 프랑스에서.

1차 세계대전은 맥아더가 촉망받는 군인으로 두각을 보이며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서도 미국은 3년 이상 직접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며 중립을 지켰다. 맥아더는 1915년 12월 11일에 소령으로 승진해 전쟁부로 부임했다.


기간 동안 맥아더는 워싱턴의 총참모부에서 근무하며 정규군 확대나 방위계획 수립에 참여했다. 그러던 1917년 4월 6일 미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하며 미국도 유럽에 병력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많은 군인들이 전공을 세울 수 있는 유럽 파견을 희망했고 맥아더 역시 유럽 전선에 나가길 원했다.


참전 결정 이후 윌슨 대통령은 웨스턴 프런트의 방위군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맥아더는 특정 주에 대한 편애 논란이 불거질 것을 우려해 여러 주 단위로 구성된 군대를 파견할 것을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베이커 전무 장관은 제42 사단이 된 이 방위군의 창설을 승인하고 방위군 책임자 윌리엄 A. 만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또한 맥아더는 이 사단의 수석 참모가 되었다. 맥아더 대령이 이끄는 42사단은 Salient du Feys의 독일군 참호에 3차례 공격을 감행했다.


이때 그는 사단 참모였음에도 불구하고 후방 진지에서 책상에 편히 앉아 서류나 끄적이는 걸 혐오하고 전투 현장으로 가서 부하들을 지휘하기 일쑤였다. 그는 전투 시 헬멧도 쓰지 않고 가벼운 전투모만 착용한 채 전방에서 권총으로 적을 향해 쏘며 부하들에게 “전진! 전진!”을 외쳐댔다.


심지어 그는 독가스 마스크도 착용하길 거부하고 맨얼굴로 부대를 지휘하다가 2차례 가스 공격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쇼’가 그의 부하들에게 감동을 줄 거라며 이 같은 기행을 전쟁 끝까지 지속했다. 미군 국방부는 이러한 그의 무공을 기리기 위해 수훈 십자장을 수여했다. 


1918년 6월 26일, 맥아더는 38세의 나이에 준장으로 승진했다.

1918년 9월 프랑스 샤토에서

그는 1차 세계대전에서 15개의 훈장을 수여받았는데, 이는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미군 사단장 중 가장 많은 수상 기록이다. 맥아더는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젊고 유능하며 전선에서 솔선수범하는 장군이라는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확실히 심어줄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미군에서 전시 진급한 장성급 장교는 51명이었지만 맥아더만큼 언론의 집중적인 보도와 관심을 받은 이는 없었다.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장 시절

1919년, 맥아더 준장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장으로 부임했다. 이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그는 독일 점령지를 통치하던 미 군사정부의 많은 웨스트포인트 졸업생들이 군사학 이외의 분야에 대해 거의 또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사관학교 교육을 다양화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또한 맥아더는 시스템을 현대화하여 '군인의 정신'의 개념을 군인다운 태도, 리더십, 효율성 및 스포츠맨십을 포함하도록 확대했다.


특히, 신입생도들이 받는 가입교 훈련 및 기초 군사훈련을 고학년 생도가 담당하는 전통이 후배 괴롭히기로 변질되었다고 보아 훈련을 현역 장교들이 담당하도록 변경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포트 클린턴에서 하던 하기 군사훈련을 현역 부대인 포트 딕스로 옮겨 현역 훈련부사관에게 최신 무기 조작법 등 현대적인 훈련을 받도록 했다.


또한 맥아더는 교양 과목, 정치학 및 경제 과정을 추가해 커리큘럼을 현대화하고자 노력했으며, 군사학 이론수업에서는 오래된 남북전쟁에 대한 내용 대신 최신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내용을 배우도록 했다. 역사 수업에서는 극동 아시아에 더 중점을 뒀으며, 스포츠 프로그램을 확대하여 교내 스포츠 클럽의 수를 늘리고 모든 사관생도가 참여하도록 했다.


맥아더의 이러한 급진적인 교육 개혁은 교수진과 동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맥아더의 임기 만료 이후 그의 개혁의 대부분은 곧바로 폐기되었지만, 그 후 몇 년 동안 그의 정책이 공감을 받아 웨스트포인트는 결국 맥아더의 개혁을 받아들였다.


이 시기 맥아더는 사회운동가이자 백만장자 집안의 여식인 루이즈 크롬웰 브룩스와 사랑에 빠졌다.

어머니 핑키 여사는 남편에게 순종적인 여인을 며느리감이라고 여겼기에 이미 한번 결혼했다가 이혼한 경력이 있고 사회운동가로서 드센 성격이라고 생각되는 여자가 아들과 결혼한다는 것에 거세게 반대했다. 루이즈의 집안인 크롬웰 가문 역시 한낱 스코틀랜드계 이주민 출신인 맥아더 가문이 자신들의 귀한 여식과 결혼한다는 것에 탐탁지 않아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1922년 2월 14일 플로리다 주 팜 비치에 있는 가족 별장에서 결혼을 감행했다.


1922년 10월,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를 떠나 루이즈와 그녀의 두 자녀 월터와 루이스와 함께 마닐라 군대 지휘권을 맡기 위해 필리핀으로 향했다. 1923년 6월, 맥아더는 제23보병여단의 지휘를 맡았다. 그런데 1924년 7월, 그는 필리핀 척후병 장군 사이에서 임금 및 수당에 대한 불만으로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맥아더는 200명이 넘는 이들을 체포하여 폭동을 잠재운 후 필리핀 군대의 봉급을 향상하려 노력했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미 군부 내 인종적 편견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 후 1925년 1월 17일, 맥아더는 44세의 나이에 육군 최연소 소장이 되었으며 5월 2일에 조지아 애틀랜타의 맥퍼슨 요새에 있는 4군단 지역을 지휘했다. 그러나 그는 연방군 장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남부인들의 “다른 곳으로 가라.”는 요구에 시달렸고 몇 달 후 메릴랜드 주의 3군단 지역으로 재배치되었다.


이후 맥아더는 1929년 루이즈와 이혼했다. 그리고 이듬해, 50세에 미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이는 미 육군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대장이 된 사례였다. 이후 맥아더는 1930년 9월 19일 필리핀을 떠나 샌 프란시스코와 9군단 지역 지휘부를 이끌었고 11월 21일 미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이렇듯 승승장구하는 군 경력을 보내고 있던 그는 무한한 자부심에 빠져들었다. 그는 남들과 대화할 때도 스스로를 ‘맥아더’라 불렀고, 자신의 이미지를 미국 대중들에게 홍보하기 위해 홍보 직원들을 고용했다. 맥아더는 공산주의를 혐오했고 그들이 미국을 좀먹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강건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러한 그의 오만과 이러한 생각들은 그를 좌절하게 만드는 사건의 계기를 제공한다.

보너스 군대 진압작전 당시

1932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퇴역한 병사 2만 5천여 명이 보너스 지급을 요구하며 워싱턴으로 상경했다. 정부는 퇴역병들에게 기차표를 주며 돌아가라고 했지만 약 6천 명만 돌아가고 나머지는 남아서 시위를 계속했다.


맥아더는 이 시위가 공산주의자들과 평화주의자들에 의해 진행될 가능성을 우려했지만, 실제로는 극히 일부만 공산주의자였고 나머지는 일반 퇴역병들이었다. 맥아더는 수도를 무질서로부터 지키기 위해 비상 계획을 검토했다.


그러던 1932년 7월, 경찰이 진압을 시도했다가 대규모 폭력 사태가 벌어졌고 경찰관 두 명이 건물에 감금되었다. 그중 한 경찰관이 겁먹은 나머지 발포해 시위대 두 명을 살해했다. 이로 인해 사태가 악화되자,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연방군을 동원하기로 결정하고 맥아더 대장에게 시위대를 가능한 평화적으로 진압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선동당하고 있는 시위대’를 강경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소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6대의 탱크와 조지 S. 패튼 소령이 지휘하는 3 기병대를 선두로 1개 보병연대를 투입해 강경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병사들은 비록 총을 쏘진 않았지만 총검과 세이버를 앞세워 시위대를 공격했다. 또한 최루가스가 사용되어 보너스 군대 캠프에 뿌려졌다. 그 와중에 가스통이 폭발해 화재가 발생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아기 2명이 최루가스에 질식사했고 임산부 한 명은 유산하는 등 5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1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진압군에서도 6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조사 결과, 시위대의 95% 이상은 진짜 퇴역병과 가족들이었고 5%는 신원 확인 불가 또는 사회운동가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후버는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유혈진압을 감행한 맥아더에게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고, 공화당 골수 지지자들로부터 ‘미국을 공산혁명에서 구해낸 위대한 장군’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1091



 



그럴싸한 글로 자신을 포장하며 나는 바르게 살고자 하며 그렇게 살았다고 자기 최면을 걸며 살았는데, 정작 아주 작은 실천 하나 앞에 두고서 스스로의 인성이 바닥을 드러내는 것에 두렵고 따갑고 아리고 불편하여 외면하고 싶고 목을 쑥 집어넣고 싶은 마음, 이해합니다.


오늘, 기존의 대가들의 이야기와 다르게 여러 편으로 나눠 연재를 시작한 이유는, 당신이 알고 있던 맥아더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어, 한국을 비롯해 심지어 그들을 장악했던 일본에서조차 훌륭한 장군이자 영웅으로 칭송받는 삐뚤어진 모습을 통해, 지금 당신이 그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https://brunch.co.kr/@ahura/1084


 https://brunch.co.kr/@ahura/1052

이 글을 읽고 당신의 양심이 아직도 건강한지, 그리고 어렵지만 꼭 필요한 첫걸음을 뗄 용기가 있는지 직접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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