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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02. 2022

당신의 양심이 뭐라 하는지 들려줄 수 있겠는가?

당신이 불의에 침묵하면서도 혜택은  함께 누리겠다는 심보에 대하여.

어제 중간보고 글을 올리고서 시간이 한 나절이나 지나도록 아무런 댓글이나 반응은 없었다. 일부러 잘 보이지도 않는 눈을 안경을 벗어가며 일일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링크로 걸었던 것은 그들에게 자신의 브런치가 링크되었다고 알림이 간다는 것으로 보라는 의미였다.


생전 들어가 보지 않는 통계에 들어가 확인한 결과, 아마 최근 브런치에 들어오지 않는 이들을 제외하고서는 대부분 들어와서 왜 자기 아이디가 인용되었는지 확인(?)들은 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양심에 찔렸는지 엄청난 수가 읽었음에도 라이킷은 채 스무 개도 되지 않았다. 자신이 읽었다는 사실조차 숨기고 싶었던가 싶다.


그 많은 이들은 여전히 모니터, 혹은 핸드폰 뒤에 숨어서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수백 명 수천명도 아닌, 그렇게 언급된 아이디의 사람들만 한 통화씩 전화를 해도 국회의원 사무실에서는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같은 안건으로 20여 명의 각기 다른 연관성 없는 이들이 항의 전화를 하여 같은 보좌관을 찾아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라는 경각심을 그들에게 주기 때문이다.


좀 전에, 교사로 있으면서 자신의 주변 지인의 성추행 사건에 분노하여 공황발작까지 얻었던 박혜경님의 공감 댓글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브런치에 올린 그 사건에 대해 언급하며, 자신도 그때 함께 행동해주지 않는 이들에게 분노했었다며 지금 내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브런치 작가라고 하는 이들이 글만 읽고 행동하지 않는 것에 대해 여러 이유가 있을 테니 양해해달라며, 글 말미에 자신이 일말의 도움을 드리지 못하는 것에 사과를 전했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라이킷을 누르고 내가 뭔가 행동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 사건이 이미 꽤 지났다는 점과 현재 기준으로 그 사건에 뭔가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요청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위로나 공감의 라이킷을 보내달라고 한 것이 아니고 명료하게 어떤 행동을 함께 하자고 하였다.


어제 언급했던 시골에 사는 서평과 영화평 쓰기 흉내 놀이를 하는 아줌마의 말이나 삼류 신문에 자기 글이 연재되었다고 하는 한전 직원 아이 아빠, 사람들에게 도움을 드리겠다고 글을 썼다가 막상 함께하자고 했더니 자신은 그저 금융기관 월급쟁이 변호사라며 합류를 거부한 어린아이 아빠, 조직을 바로 세워야 한다며 제대로 된 조직감사에 대한 글까지 올려놓고 정작 도움을 청하는 연락을 씹어버린 전 보건복지부 감사실 직원에 이르기까지.


좀 전에 댓글로 대화를 나눈 교사 박혜경 님이 댓글에 그랬다. 자신이 다른 이의 일에 불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나섰을 때, 한 지인이 다음과 같이 말했단다.


“넌 세상의 모든 파리와 모기를 잡을 생각이냐?”


글이었지만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의 말에 그녀는 자신의 깜냥을 뒤돌아보게 되었다고 했다. 아주 잘못된 반추이다.


경찰, 검찰이 모두 썩어 들어갔는데, 심지어, 내 평생에 단 한 번도 올곧은 경찰과 검사를 만나본 적이 없지만 어디선가 불의를 바로잡고 정말로 나쁜 놈들을 잡아서 자기 본분을 다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그에게 누가 감히 ‘네가 그렇게 세상 쓰레기들 다 잡을래?’라고 하지 못한다. 아니 그 정도 자기 심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하는 것들에게 당당히 말할 것이다.


“세상 모든 쓰레기는 못 치워도, 최소한 내 눈에 보이는 쓰레기는 치워야 사람이지.”


나는 그렇게 배웠고, 가르쳤으며 그렇게 살았다.


밤길에 여자를 희롱하는 양아치들이 있는데, 놀이터에서 어린 학생들을 세워놓고 삥 뜯는 양아치들이 있는데, 어차피 내가 모든 세상 청소할 것 아니라며 자연스럽게 그 곁을 지나가는 당신들에게 묻자.


그 여자가 당신의 딸이었다면, 당신의 아내였다면, 떨면서 울먹이는 그 아이들이 당신의 조카이고 당신의 아이였다면 그들을 구해준 사람에게도 똑같이 말한 텐가?


‘당신이 세상 모든 여자와 아이들을 구할 것도 아닌데 그냥 지나가지 그러셨어요?’라고?


어제 논픽션으로 구성한 이번 사건의 전말을 연재하는 소설에 교장샘 출신의 치초요님이 댓글을 남겼다.


‘사건을 직접 보거나 확인한 것이 아니라서 함부로 나서는 것이 주저되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지금 함께 행동하기 시작한 다른 구독자에게서도 들은 바 있기에 대답을 아래의 설명으로 한다.


앞서 예로 든 것처럼 길거리에서 여자를 둘러싸고 양아치 서너 명이 어둠 속에서 그녀를 희롱하고 있는데, 아니면, 아파트 놀이터 구석에서 딱 봐도 어린 초등학생 아이들 두 명을 세워놓고 고등학교 교복 입은 양아치들이 담배 물고 삥을 뜯고 있는데, 당신은 전후 사정을 잘 모르니 내가 참견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버젓이 그 곁을 지나 행복한 너의 집으로 들어가 버리나?


내가 긴 댓글을 달긴 했으나 그 글을 읽는 이가 한정적일 듯하여 말 나온 김에 여기에 다시 설명한다.


내가 이 프로젝트에서 함께 행동하자고 한 것은 변호사 비용으로 쓸 돈을 기부하라는 것도 아니고, 펀딩으로 돈을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었다. 국회의원 사무실에 가서 직접 항의하라고도 하지 않았고, 피켓 들고 경찰청 앞에 가서 정인아 미안해 어쩌구 시위를 하자고 한 것도 아니다.


직접 뭘 하라는 것도 아니고 양아치들을 경찰에 신고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제시한 사안의 근거가 특정인에 대한 비난이거나 나의 주장이 아닌, 현역 목사라는 자의 행동, 즉 사실관계만을 그대로 제시하고 그 사실에 대해 대한민국 경찰이, 정인이가 죽어서 특별히 신설된 서울경찰청의 아동학대 특별수사팀이라는 곳의 경찰이라는 작자들이 감추고 감추다 못해, 사건을 캐비닛에 넣고 꺼내지 않는 ‘실’에 대해 모두에게 알리고 그것이 사실인지 밝혀달라는 목소리를 내자는 것이었다.


사건의 진실은 모든 녹취와 사실관계의 확인을 통해 이미 경찰에서 조사를 다 했다. 당신에게 사안을 판단해달라고 하지 않았고, 누군가를 비난해달라고 같이 죽창을 들어달라고도 안 했다.


‘현역 목사가 자신의 돌 갓 지난 아기를 말싸움 중에 일부러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들고 나와 상대에게 던지려고 했다.’


이게 주장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진술인가?


그 사건을 최초로 수사하고 무혐의로 덮어준 수사관이 직접 쓴 보고서 사본이 내 손에 있다.


“아기를 던지려고 한 행위는, 임대인과 임차인의 관계를 고려해볼 때 특별히 위협이 될만하다고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이게 말이라고 생각하나? 이게 당신들이 말하는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상황의 정체인가? 임대인과 임차인 관계가 돌 갓 지난 아기를 던지려고 한 것과 무슨 상관성이 있단 말인가? 게다가 현직 경찰이라는 자가 그게 아기를 던지려고 한 행위의 면죄부로 입에 올릴 말인가?


그걸 감찰해달라고 했더니, 같은 경찰 조직인데 그런(?) 걸 가지고 옷 벗게 할 수 없다며 덮어주겠다고 악다구니 쓰는 여자 감찰 수사관이 정상이란 말인가?


당신이 어떤 대단한 이유와 핑계가 있어서 이 천인공노할 사실을 인지하고서도 그 목사나 경찰들과 행동을 똑같이 하는지, 나는 정말로 알고 싶다.


어제 한 명 한 명 언급한 사람들의 브런치를 통해 그들의 내면을 분석한 신랄한 정신분석 리포트를 올리려고 하다가 꾹 눌러 참고 이름만을 나열한 순한 맛 버전으로 뭉둥그린 글로 대신하며, 들었던 칼을 잠시 놓았다.


혹여 그럴 리도 없겠으나 피드백을 주지 않고 뭔가 행동한 사람이 있다면 내게 말해다오. 함께 힘을 공조하지 않고서 혼자서 중얼거리는 소리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나는 지난 1년여간 매일 같은 글쓰기로 나의 진정성을 행간에 담아 당신들에게 전했다.


그 진성성을 가지고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묻는다.


최소한 왜 당신이 침묵하는지, 아니면 정말로 뭔가 하고 싶은데 구체적으로 지시를 해줬으면 좋겠는지 그 의견을 밝혀달라.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기로 한 이유가 희미해져가고 있다.

오늘부터 이 나라에 와서 시작한 중량 치기 시리즈 중 하나였던 <술 이야기>의 연재를 잠정 중단한다.

나는 당신의 양심없는 쾌락에 동조할 것을 거부한다.


당신들의 행태가 이 지경인데 재미있는 정보를 전해주는 글을 쓰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왜 공짜로 날름날름 재미난 글을 날로 먹으려드는 당신을 위해 글을 발행해야 하는가?


맞다. 변명이든 뭐든 움직임이 없다면 하나씩 연재하던 글들을 중지할 생각이다.

뭐 대단한 글이라고 그걸 협박이라고 하고 있냐고 비아냥거리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지금 적당히 글 같지도 않은 낙서를 쓰며 서로 ‘작가님’이라 부르고 평생 자신이 오르지 못한 지위를 놀이로나마 누려보려는 당신들의 그 저급함에 동조해주지 못하겠단 말이다.


글쓰기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글쓰기가 엉망인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으나 양심은 배워 익혀 가방끈 길이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내가 글을 통해 함께 배워나가고 공부하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하는 안목을 갖춰, 잘못된 우리 사회를 어떻게 하면 함께 바르게 세워나갈지 고민해보자는 것이었다.


죽어나가는 독립투사들을 보면서 너무 쉽게 시를 쓰는 자신이 부끄럽다고 했던 윤동주의 마음으로 당신들에게 마지막으로 묻는다.


왜 당신들이 침묵하는지 그 여러 가지 같잖은 이유가 있다면, 당신 스스로에게 먼저 답해보고 그것이 스스로 납득할만한 이유가 된다면 그 양심의 소리를 내게 들려다오.



오늘 <인생에 실패한 대가들의 이야기>는 쓰지 못하겠습니다. 당신들에게 대가들의 인생을 촘촘하게 보여주며 이야기해주면서 당신의 마음을 위로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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