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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04. 2022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인이라 인정받았어도 - 2

자기 이익만을 위해 한평생을 살았던 민낯을 드러내고 말다.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087



193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민주당 후보는 허버트 후버를 꺾고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루스벨트와 맥아더는 처음엔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국방 예산을 줄이려는 루스벨트의 정책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육군 예산의 51%를 삭감하겠다는 루스벨트의 제안에, 맥아더는 분노했다. 그러면서 맥아더는 사임하겠다고 밝혔지만 루스벨트는 사임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필리핀의 원수로 파견된 맥아더는 1937년 여행가 겸 문필가 진 페어클로스와 재혼했다. 그 후 그해 마지막 날, 맥아더는 공식적으로 육군에서 퇴역했다. 그는 미국 정부의 군사 고문으로 대표하는 것을 중단했으나 민간 차원에서 케손의 고문으로 남았다. 그렇게 그는 필리핀 육군 원수로서 군 장군 경력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듯했다. 그러나 1941년 진주만 공습이 벌어지면서, 그의 운명은 전환점을 맞이한다.


일본과 미국 간의 전운이 감돌고 있던 1941년 7월 26일 루스벨트는 필리핀군을 연방군으로 조직하고 퇴역 장군인 맥아더를 동원 소집하여 극동군 미 육군 사령관으로 지명했다. 미국의 초기 필리핀 방어 계획은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마닐라만의 바탄 반도로 후퇴하여 일본군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필리핀 전역의 해안 지대에 군대를 배치하고 B-17 전투기를 사용하여 섬에 접근하는 일본 선박을 침몰시키는 계획으로 변경했다. 맥아더는 워싱턴 D. C. 의 의사 결정권자들에게 자신의 계획이 일본이 전쟁을 선택하는 것을 막고 전쟁이 더 악화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는 최선책을 제시했다고 설득했다.


1941년 12월, 민간 라디오로 진주만 공습 소식을 확인한 서덜랜드는 이 사실을 맥아더에게 알렸다. 맥아더는 10시가 지나서 공습을 거부하지만 몇 분 후 명령을 번복하고 늦은 오후에 있을 공습을 준비하기 위해 10시 15분부터 B-17들이 클라크 비행장에 착륙하고 전투기 편대들은 중간에 재급유를 하면서 순찰을 계속한다.


하지만 안개로 인해 늦어진 일본군의 공습이 클라크 비행장을 덮칠 때 전투기들은 완전히 이륙한 상태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일본군 항공기들의 이동을 놓친다. 진주만 공습 9시간 후인 12시 40분 일본 제11항공 함대 소속 폭격기가 이바 필드에서 클라크 필드와 근처 전투기 기지를 공습했다.


그 결과 35대의 B-17 폭격기 중 18대가 파괴되고 107대의 P-40 전투기 중 53대가 파괴되었으며 3대의 P-35 전투기와 25대의 다른 비행기들이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8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150명이 부상당했는데 몇 번의 공격에서 남은 14대의 B-17 폭격기들은 호주로 퇴각하고 극동 공군의 남은 전투기도 몇 주 안에 모두 손실되었다.


맥아더는 일본군의 상륙을 해안 방비로 저지하려 했으나 전쟁 전 계획했던 것과는 달리 해상과 공중에서 미군이 크게 밀리면서 B-17 폭격기와 미 해군 아시아 함대는 상륙을 방해하는데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고 필리핀 해안 전체를 지키려는 맥아더의 계획은 미국-필리핀 연합군을 지나치게 분산시켜 전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2월 21일 일본군 제16사단이 링가옌 만에 상륙한 후 급속히 진격해오고 마닐라 남쪽의 라몬 만에도 상륙해 북상하자 맥아더는 필리핀 군대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그는 일본군이 상륙한 지 2일 만에 바탄에서 일본군을 저지하면서 구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기존의 계획으로 되돌아갔다. 다수의 사령부 인원은 바탄에 남았고 맥아더는 소수의 참모와 필리핀 정부 인사들과 함께 방공호 속에 계속 있었는데 이에 병사들은 그를 ‘더그아웃 더그(Dugout Doug)’라고 조롱했다.

패배의 와중에도 맥아더는 1942년 1월 1일 필리핀의 마누엘 케손 대통령으로부터 전쟁 전 공적에 대한 포상금으로 자기 참모진과 함께 50만 달러를 챙겨 큰 빈축을 샀다. 루스벨트는 바탄에서 힘겹게 버티는 맥아더가 미국인들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 그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될 경우 정치적으로 문제가 크고 미국인들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질 거라 판단해 그를 호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대통령으로부터 이 같은 명령을 입수한 맥아더는 웨인라이트 장군에게 지휘권을 넘긴 뒤 가족과 전속부관 등 소수의 인원만 대동한 채 미 해군 어뢰정 2척을 타고 심야에 호주로 탈출했다.


1942년 4월, 맥아더는 남서 태평양 지역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군대는 호주군과 미군이 주를 이루었지만, 네덜란드령 동인도, 영국, 및 기타 국가 출신도 소규모나마 가담했다. 호주군은 밀른 베이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지만 코코다 트랙 전투 초기에 일본에게 연이어 패배해 사기가 떨어졌다.


이 패배의 원인은 맥아더의 상황 파악 미비에 있었다. 맥아더는 지형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고 현지 시찰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는 초기에 병력을 배치할 때 “해당 지역으로 가면 작은 구렁텅이가 있으니 그곳에서 방어하라.”라고 지시했으나, 그 작은 구렁텅이는 7마일이 넘는 계곡으로 밝혀져 도착한 부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게다가 맥아더는 아군 병력이 적보다 훨씬 많아 전황이 유리한데도 병사들이 무능하고 용기가 없어서 진격하지 않는다는 착각에 빠져서 군대에게 진격을 독촉하기 일쑤였다. 급기야 그는 워싱턴에 무전을 보내 호주군 병사들을 투지가 없다고 비난했다.

이후 그는 미군 지휘관이 이끄는 호주군으로 구성된 제32보병사단을 부나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군대는 훈련이 잘 되지 않은 민병대였다. 이후 부나-고나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 호주인들은 미군을 비판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고집을 꺾지 않고 로버트 L. 아이켈 버거 중장에게 부나를 회복하라는 명령을 강행한다.


하지만 현지 지휘관들은 공세를 독촉하는 맥아더의 명령을 무시하고 게릴라 전술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여기에 일본군이 정글과 산악지대를 무리하게 돌파하다가 엄청난 피해를 입음으로써 전세는 미군에게 유리해졌다. 뉴기니 전역에 동원된 일본군 20만 명 중 18만 5천여 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었는데, 대다수는 전투가 아닌 질병이나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반면 미군과 호주군 연합군의 손실은 그 6분의 1도 되지 않았다.


한편, 맥아더는 대단한 이미지 어필과 홍보 능력을 발휘해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전쟁 영웅으로 각광받았다. 이에 1943년 말과 1944년 초, 공화당 내 보수파 세력은 1944년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기 위해 맥아더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려 했다.


당시 그들은 공화당의 공식 지명자인 토머스 듀이가 너무 자유주의적인 인물이라며 불만을 품고 맥아더를 대안으로 점찍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1944년 초 필리핀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전까지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후 맥아더는 힌시 만과 웨와크에 주둔한 일본군을 우회하여 자야푸라와 아이타페로 진격했다. 해안에서 600마일을 과감하게 진군하는 맥아더의 이 같은 공세는 적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일본군 사령부를 혼란에 빠뜨리게 만들었다. 이 공세는 도박성이 짙었지만 결과적으로 완벽하게 성공했다. 맥아더는 아다치 하타조 중장이 이끄는 일본군 제18군을 웨아크 지역에서 고립시키게 만들었으며 뉴기니를 짧은 시일 내에 성공적으로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미국의 일본을 향한 최후의 일격인 몰락 작전에서, 맥아더는 제20 공군을 제외한 태평양의 모든 군대와 육공군부대의 지휘를 맡았다. 이에 루스벨트가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에게 소련의 전쟁 참여 약속을 받아냈고, 소련은 1945년 8월 8일 만주를 전격 침공했다.


결국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1945년 9월 2일, 필리핀에서 있던 맥아더는 남은 일본군들이 거의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죽은 것을 확인하며 승리를 확정한다. 맥아더는 전함 미주리 함에서 정식으로 일본의 항복을 접수했다. 미 해군은 그의 해군 전략가로서의 역할을 인정하여 해군 공로 메달을 수여했다.

맥아더와 쇼와 덴노

1945년 8월 29일, 맥아더는 워싱턴으로부터 히로히토를 포함해 일본 정부 기관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도록 명령받았다. 맥아더는 GHQ 본부를 도쿄의 다이치 생명보험 빌딩에 두고 천황을 명목상 일본의 군주로 남기면서도 일본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그는 이러한 통치 방식이 일본인들을 효과적으로 복종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맥아더는 1931년 만주사변 이래 일본을 장악한 몇몇 군국주의 극단주의자들이 일본을 망국으로 이끌었고 천황은 군국주의자들을 막을 힘이 없던 친서구적 '온건파'였다고 주장하며 천황을 보호했다.


이와 동시에, 맥아더는 천황의 신성성을 깎아내림으로써 일본이 다시는 천황을 내세워 전쟁을 벌일 생각을 품지 못하게 만들기로 했다. 그는 히로히토를 GHQ에 불러서 시종들을 모두 물리치고 둘이서 함께 사진을 찍고 이를 신문에 실어 일부러 일본 전역에 배포했다.


이 사진 말고 천황이 맥아더에게 인사를 하며 고개 숙인 사진이 있었는데, 일본 정부의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고 미국에서도 천황의 체면을 생각하여 관련 사진을 쓰지 않게 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신처럼 모시던 천황이 직접 최고급 양복까지 차려입고 불려 간 데다가 당시 맥아더는 정복도 아닌 (당시에는 규정상 전투복을 겸할 수도 있던) 넥타이도 생략한 육군 열대용 약식 근무복 차림에 시큰둥한 표정과 짝다리 짚고 주머니에 손 넣고 찍힌 사진을 봤으니 진정한 멘탈붕괴의 현장이었다.


여기에 1946년 1월 1일 히로히토가 인간선언을 발표하면서 국가신토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었다.


이 때문에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일본인들이 맥아더를 신처럼 숭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맥아더 신토가 새로 생겨났음은 물론이며 40만 통이 넘는 팬레터에 엄청난 선물이 맥아더에게 배달되었다.

일본의 항복 조인식

그러자 맥아더도 좀 과했다 싶었는지 천황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천황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못하도록 막았고 미국 정부의 천황에 대한 어떠한 조사도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1946년 1월 워싱턴에 천황을 전쟁 범죄로 기소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천황은 살려주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맥아더는 1949년에 일본 정부에게 권력을 넘겨줬지만 1951년 4월 11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해임할 때까지 일본에 머물렀다. 1951년 9월 8일에 서명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연합군의 일본 주둔의 종말을 고하게 했다.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을 침략했다.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유엔군의 한국군 지원을 승인하는 결의안 82를 통과시켰다. 유엔은 미국 정부가 지휘관을 선임하도록 권한을 부여했으며,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만장일치로 맥아더를 추천했다.

이승만과 함께

이로서 맥아더는 일본에서 USAFFE의 사령관을 지내는 동시에 유엔군 사령관이 되었다. 여기에 모든 한국군도 그의 지휘 하에 배치되었다.


그 후 한국전쟁 초기에 한강 방어선이 붕괴될 위험에 처하자, 맥아더는 이승만이 보는 앞에서 한국군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채병덕은 "200만 남한 청년들이 모조리 징집해서 훈련시키면 침략을 알아서 격퇴해 준다."라고 대답했다.


설상가상으로 채병덕은 영어를 거의 못해 통역을 하느라 계속 끊어졌다. 맥아더는 이를 지켜보고 그의 부하인 에드워드 알몬드 육군 소장에게 "저 인간은 구제불능이야."라고 속삭였다. 맥아더는 그 자리에서 채병덕을 크게 칭찬하며 돌려보낸 뒤 그날 저녁 이승만에게 채병덕을 보직 해임시키라고 요구했다. 이에 이승만은 다음날 아침 기상하자마자 채병덕을 보직 해임시키고 정일권을 육군 총참모장으로 임명했다.

인천 앞바다에 떠 있던 USS 마운트 매킨리급 상륙지휘함 갑판에서 전황을 살피고 있는 맥아더

1949년 오마 브래들리 육군 참모총장은 “대규모 수륙 양공 작전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1950년 7월 무렵 그러한 작전을 계획했다. 맥아더는 낙동강 전선에서 고착된 전황을 확실히 뒤집기 위해서는 적 후방에서 상륙하여 조선인민군을 협공해 섬멸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가 정한 상륙지점은 인천이었다. 이에 워싱턴의 미 국방부와 합참본부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인천 상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상륙이 쉬운 군산에 작전을 수행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군산에 상륙할 경우 적의 보급선을 절단하지 못하고 적의 병력을 포위하지 못하니 비효율적이니 인천에 상륙해 서울을 단숨에 공략함으로써 적의 보급선을 완벽하게 틀어막고 적을 협공해 섬멸해야 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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