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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06. 2022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인이라 인정받았어도 - 3

자기 이익만을 위해 한평생을 살았던 민낯을 드러내고 말다.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091


 

이후 유엔군은 인천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동시에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삼척, 남포, 군산에 폭격을 가해 적의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또한 해리스 윌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기자회견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은 10월 중순 즈음에 총반격을 감행할 것이다.”라고 발언해 적을 속이려 했다. 또한 9월 12일에 루이스 엘리 대령이 지휘하는 미 육군 제1레이더스 중대와 영국 해병대 제41코만도 부대가 군산에 기습 상륙을 시도했다가 철수하고 9월 14일 학도병이 장사 상륙작전을 시행해 적을 기만했다.


그러나 같은 날 9월 14일, 앞서 첩보 수집을 위해 투입되었던 임병래 중위의 해군 공작조가 북한군에게 발각되자 위기에 놓였고 퇴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임병래 중위는 홍시욱 하사와 둘이 남아 북한군과 교전하였다. 그가 벌어준 시간 덕분에 해군 공작조는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북한군에게 생포되었을 경우, 고문당하여 정보를 누설할 것을 염려하여 마지막에 자결하였다. 이 내용은 2016년에 개봉하여 정치적으로 밀어붙여 욕을 바가지로 먹은 국뽕 영화 <인천 상륙작전>에서 묘사되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속의 맥아더 역을 맡은 리암 니슨

한편, 조선인민군을 은밀히 지원하고 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남포, 원산, 군산 중 하나에 유엔군이 상륙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고 저우언라이는 ‘인천을 조심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를 주의 깊게 듣지 않았고 낙동강 전선이 고착화되자 경기도 일대에 주둔했던 병력까지 모조리 투입하는 바람에 인천에 주둔한 조선인민군은 월미도의 해군 육전대 2개 중대와 인천 시가지의 2개 대대 병력밖에 없었다.


물론 북한도 이런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은 하고 있었는지, 소련 해군의 도움을 받아서 주요 항구에 기뢰를 부설했지만 너무 늦어서 몇 개 부설하지도 못했고 그나마도 거의 다 발견되어 조기에 제거되었다.


그리하여 1950년 9월 15일,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과 한국군은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서울로 진군하여 9월 28일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다. 낙동강 전선에서도 인천 상륙작전과 비슷한 시기에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었고, 조선인민군은 인천이 공략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체 붕괴되어 낙동강 전선 일대의 조선인민군 병력 중 2만 정도의 병력만이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귀환할 수 있었으며 만 명가량의 병력은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이 되었다.

9월 11일, 트루먼은 38선까지 진격하되 그 이상으로 진군하지 말고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맥아더는 동해의 원산 항에 수륙 양공 작전을 계획했지만 이래저래 지체되는 사이 조선인민군이 사전에 엄청난 양의 지뢰를 깔고 방비를 단단히 한 터라 포기했다.


그 후 9월 27일, 맥아더는 국가안전보장 회의에 ‘38선 돌파로 소련이나 중국 공산주의 세력이 개입할 위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각서를 발송했다. 이에 조지 마셜 국방장관은 맥아더에게 “우리는 38선 이북으로 진군하기 위해 전술적 또는 전략적으로 방해받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9월 30일 저우언라이가 미국에 “38선을 넘으면 중국이 한국에 개입할 준비가 되어있다.”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10월 1일 유엔군 사령부는 38선을 돌파하기로 결정하고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10월 2일, 한국군은 원산을 기습 폭격 후 상륙해 10월 9일 점령하였고 서부전선에서도 동부전선에서 공세가 개시된 뒤 10일 후에 북진을 개시했다. UN군과 한국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10월 19일 평양을 공략하고 11월 말에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이르렀다.


이에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만주에 망명정부를 세우라는 지령을 내렸고 김일성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어쩔 수 없이 따르겠다.’며 수긍했다가 중공군이 개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중단하고 다시 자신의 욕망을 위해 움직인다.


1950년 10월 15일, 맥아더는 웨이크 섬 회의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접견했다. 대통령으로부터 다섯 번째 수훈 십자장을 수여받은 맥아더는 중공이나 소련의 한국 개입 가능성이 얼마나 되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거의 없습니다. 그들이 전쟁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달에 간섭했다면, 그것은 결정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모자를 쓰지 않습니다. 중국인들은 만주에 30만 명의 군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중 아마도 10만에서 11만 5천 명이 압록강을 따라 분포되어 있을 것입니다. 압록강을 가로지를 군대는 5만에서 6만 명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공군이 없으며 중국 공산당이 평양으로 남하하려 한다면 우리는 공군을 동원해 가장 큰 도살을 벌일 것입니다.”


맥아더는 제8군이 연말까지 일본에서 철수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브래들리가 한 부서가 유럽으로 파견될 수 있는지 물었을 때, 맥아더는 1월에 사업부를 개설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다만 그는 중공보다는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보다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그러던 10월 말 안산 전투를 수행하던 유엔군은 중국군과 접전을 벌여 큰 손실을 입고 패퇴한다.

그러나 맥아더의 부관 찰스 A. 윌러비는 중국의 전쟁 개입에 대한 증거를 애써 무시했다. 그는 7만여 명 정도의 중국군이 북한에 들어갔을 거라고 추정하면서도 그것은 전형적인 중공의 ‘생색내기’ 일뿐 중공이 진심으로 전면에 나서면서까지 유엔군과 대적할 리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11월 24일 중앙 정보국은 트루먼에게 ‘한국에 20만 명의 중국군이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중국 공산당이 주요 공세 작전을 개입한다는 증거는 없다.’고 보고했다. 그렇게 어리석은 이들의 자신들만의 잇속 차리기 식 이해관계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켜만 갔다.


한편 맥아더는 11월 24일에 워커의 본부를 방문했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 이 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5시간 동안 전선을 둘러봤다. 나는 부관들과 이야기하면서 크리스마스까지 2개의 사단이 집으로 돌아가길 희망하는 브래들리 장군의 소망을 전했다. 내가 전선에서 본 것은 나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한국군은 아직 상태가 좋지 않았고 전체 전선은 개탄스럽게도 약했다. 중국군이 실제로 강력한 압박을 가한다면, 나는 우리 군대를 철수시키고 북쪽으로 이동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정찰을 하고 내 눈으로 보려고 노력하고 내 자신의 오랜 경험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해석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회고록에서 저술한 것과는 달리, 당시 맥아더는 자신의 최전방을 시찰하면서도 중국군이 북한에 이미 대거 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하고 크리스마스 전까지 압록강 일대를 평정하라는 무책임한 명령을 내리고 떠났다.


이때 중국군은 밤에 은밀히 이동하고 낮에는 일반 북한인들처럼 행동했기에 찾아내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는 것이 그나마 그를 옹호하는 이들의 이후 해석이다. 그리고 얼마 후, 무책임한 이들이 책임을 통감해야 할 파멸의 순간은 기어코 찾아오고야 말았다.

1950년 11월 25일, 중공군 제13군단이 한국군 2군단을 청천강에서 요격하면서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당시 중공군은 산악지대를 통해 신속하게 우회하여 UN군의 후미와 측면에 있는 보급로와 퇴로 등을 차단하며 공격했으며 산지에 매복해 있다가 야간에 기습했다. 또한 그들은 모든 면에서 자신들보다 열세였던 한국군 사단부터 격파한 뒤 유엔군을 포위 섬멸하는 전술을 매우 효과적으로 펼쳤다.


이러한 중공군의 포위 섬멸 전술에 말려든 유엔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애써 탈환했던 평양은 허망하게 적들에게 도로 내줘야 했으며 미군 제8군은 계속 밀려 내려온 끝에 12월 중순에 38선 이남으로 퇴각하게 된다.


게다가 1950년 12월 23일 미 육군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면서 유엔군의 사기는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한편, 맥아더는 11월 28일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대해 ‘전투 상황은 우리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났다.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그는 중공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기 위해 압록강 건너편 다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트루먼은 고문들과 긴밀히 의논한 뒤 이를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대 선언을 내린다.


이에 맥아더가 항의하자, 대통령과 합참의장은 중국의 공역을 침해하지 않는 조건하에 다리를 폭격할 수 있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이지 않은 작전이었고, 중공군에게 완벽하게 압도당한 유엔군과 한국군이 12월 말에 전면 철수하게 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만약 연합군이 청천강에서의 패배 이후 평양을 사수하며 제대로 된 방어선을 펼쳤다면 중공군의 보병 기동전을 차단하며 전세를 유리하게 펼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의 도쿄 사령부는 별다른 대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했으며, 그 결과 미군은 제대로 된 지휘체계도 회복하지 못한 채 대공황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맥아더는 한국전쟁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후방인 바다 건너 일본에 상주하고 있었으며, 그가 한국에 머문 시간은 전쟁 중 다 합쳐봐야 몇 주일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무책임의 바닥을 보여준 셈이었다.


자신이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통솔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던 맥아더는 핵 공격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사실 핵 공격은 트루먼 대통령도 고려하고 있던 것이었다. 1950년 11월 30일 기자회견에서, 트루먼은 핵공격을 암시하는 발언을 했다.


기자: 대통령님, 원자폭탄에 대한 언급을 다시 제고하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원자폭탄의 사용이 적극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상황을 분명히 이해하셨습니까?


트루먼: 늘 해왔습니다. 그것 역시 우리의 무기 중 하나입니다.


기자: 그것은 대통령님께서 군사적 목적이나 민간인에 반하여 핵을 사용한다는 의미입니까?


트루먼: 그것은 군인들이 결정해야 할 문제입니다. 나는 그 일을 통과시키는 군사 전문가가 아닙니다.


기자: 아마도 대통령님이 직접 의견을 표명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트루먼: 저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자: 대통령님은 이것이 UN의 행동에 달려있다고 말했습니다. UN의 승인이 없이 우리가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말인가요?


트루먼: 아니요, 전혀 그런 뜻은 아닙니다. 공산주의 중국에 대한 행동은 국제 연합의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현장의 군사령관은 항상 무기 사용에 대한 책임을 맡을 것입니다.



맥아더와 트루먼

대통령의 이 같은 말은 현재 핵무기를 사용할 권한이 맥아더의 손에 달려있음을 의미했다. 이에 백악관측은 ‘대통령만이 원자폭탄의 사용을 허가할 수 있고 그러한 허가는 주어지지 않았다.’며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이 논평은 여전히 국내외의 불필요한 의혹만을 불러일으켰다. 트루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간 군사 관계에서 가장 민감한 사안 중 하나인 핵무기 문제에 대해 이미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었다.


“민간인이 1946년 원자력법에 기술된 권한에 따라 핵무기를 통제한다.”


1950년 12월 9일,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핵무기를 사용할 재량권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 시도는 한국의 상황을 회복시키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치욕적인 후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해 12월 24일, 맥아더는 한국, 만주 및 중국의 다른 지역에 핵을 떨어뜨림으로써 중공군의 진군을 지연시키는 작전을 작성했는데,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34개의 원자폭탄이 필요했다.


코트니 휘트니 소장에 따르면, 맥아더 장군은 북한을 봉쇄하기 위해 방사성 폐기물을 사용해야 한다는 루이스 존슨의 제안을 고려했지만 합동 참모부에게 이를 동의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해가 바뀌어 1951년 1월 4일, 유엔군은 서울에서 후퇴했다. 이제 미국 정부는 한국을 완전히 포기하거나 핵을 사용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 그들은 핵 사용이 중국과의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1950년 2월 소련과 중국이 상대방이 공격을 받으며 전쟁에 나설 수 있는 협정에 서명했기 때문에 소련이 뛰어들어서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한 1950년 12월 미국을 방문한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는 ‘맥아더 장군이 쇼를 벌이고 있다.’는 영국 정부 및 다른 유럽 정부의 우려를 전달했다. 이에 미국 정부는 핵폭격을 감행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핵폭격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했고, 이로 인해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의 대립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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