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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09. 2022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인이라 인정받았어도 - 4

자기 이익만을 위해 한평생을 살았던 민낯을 드러내고 말다.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098


미 극동사령부는 한국, 일본, 류큐 제도, 필리핀, 마리아나 제도, 보닌 제도 등 서태평양 지역의 육•해•공군, 해병대를 총지휘하는 통합군사령부이고, 당시 맥아더는 이 사령부를 총괄하는 총사령관(CINC)이었다.

평양 탈환 후 워커 장군과 함께

따라서 이 지역 내에서 벌어진 군사적 책임은 극동사령관이 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당시 한반도의 미군 역시 모두 전적으로 극동군에서 통제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 정황을 무시하고, 유엔군과 한국군의 무리한 북진을 고집하다가 일을 그르친 것은 명백하게 맥아더가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큰 실책이다.


그러나 이 명백한 실책의 원인이 맥아더 ‘한 사람 만’의 책임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예컨대 1950년 10월~11월 당시 극동사령부에 정보를 제공하는 미 중앙정보부와 합참본부의 상황 파악이 맥아더보다 나았는가에 대해 살펴보자면 그렇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맥아더의 낙관론에 대해 충분히 견제하며 조언할 정보수집능력과 권한이 있었지만 아무런 비판 없이 그저 그의 의견을 수용했고, 소련과 중공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맥아더의 견해에 적극 동조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이후 기밀 해제된 미 중앙정보부와 합참본부의 1950년 10월과 11월 자 비밀문서 중 맥아더의 결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내용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즉, 미 중앙정보부와 합참의 조언 기능이 적절히 제기능을 했다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일본에 틀어박혀 원격으로 안일하게 대처한 맥아더 휘하 참모들도 자신들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고 보기에는 한참 먼 행보들을 보였다. 가령 제10 군단장 에드먼드 알몬드 소장은 중공군의 전면 개입으로 혼란이 극에 달했던 11월 말에도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속적인 공세를 강요했다가 막심한 피해를 초래하고 현지 장교들의 강력한 항의를 이기지도 못한 채 철수를 허락했다.


그리고 맥아더의 오랜 오른팔 역할을 해왔던 부관, 찰스 윌러비도 그저 상관의 뜻에 동조해 중공군이 적극 개입할 리 없다는 낙관론을 적극적으로 제기했다. 또한 맥아더의 참모들은 현지 지휘관들의 의견을 맥아더에게 전달하지 않고 자기들 선에서 커트하기 일쑤였고 맥아더가 상황 수습을 어려워하는 시기에 자신들이 대신 맡기는커녕 같이 우왕좌왕 당황하며 어느 누구도 제 역할을 수행하는 이가 없었다.

즉, 극동군사령부의 참모들은 사령관의 잘못된 판단에 의한 부당한 명령에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기회조차 스스로 져버리며 총체적인 파멸의 길로 들어서며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져버린 것이다.


아무리 정치적 라이벌이라고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 역시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가 맥아더의 말만 믿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라는 해석을 하는 학자들도 있긴 하지만, 그가 상황을 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기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9월 30일 저우언라이가 유엔군이 38선을 도하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위협했고, 이후에도 마오쩌둥 등이 미군이 압록강까지 진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협박성 경고를 공식적으로 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맥아더가 낙관론을 제기하는 걸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고 맥아더의 압록강 진군 요청마저 수락했다.


유엔군이 압록강 근처까지 진군할 경우 중공이 심각한 위협을 느껴 자구책 차원에서 돌발 참전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예상을 충분히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맥아더만 믿고 별다른 고민 없이 그 작전에 대한 수락을 결정한 것이다.


그는 훗날 자신은 맥아더가 유능한 군사 전문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믿었다는 정말 무책임한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이는 그야말로 군 통수권자로서는 해서는 안될 구차한 변명일 뿐 그는 1950년 겨울의 파멸을 초래한 장본인의 임명권자이기 때문에 그 역시 군 통수권자로서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하겠다.


만약 평양을 점령한 채로 더 이상 진군하지 않고 겨울을 맞이했더라면 설령 중공군이 밀고 들어왔어도 그들 스스로 자멸할 확률이 높았으니 결국 누가 봐도 압록강으로 진격하겠다는 무모한 작전을 지휘한 맥아더는 실책이라고 하기에는 어마어마한 패착을 감행한 것이다. 이런 행동의 결과로 창설이래 가장 치욕적인 피해를 입은 미 해병대는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육군 원수 맥아더를 결코 잊지 않았다.


전장의 최전선에서 싸웠던 그들에게 맥아더는 독선적이고 권위적이며 오만했으며, 고집 세고, 자신의 실패에 대해 제대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그 이전에도 일선의 병사들에게 결코 감사를 표하거나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한반도에서 단 한 번도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치를 떨며 분해했다.

1951년 1월, 미군 제8군은 리지웨이 장군의 지휘 하에 중공군을 북쪽으로 밀어냈고 3월에 서울을 탈환하여 38선으로 진격했다. 이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트루먼은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낼 기회를 모색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를 반대하고 중국과의 전면전을 주장했다. 4월 5일, 공화당 하원의원 조셉 윌리엄 마틴 주니어는 트루먼의 유럽 정책과 전쟁 전략을 비판하는 맥아더의 서신을 의회에서 낭독했다.


민주당 대통령이 임명한 사령관이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의 입을 빌려 대통령의 정책결정에 공개적으로 항명하는 정치적 스캔들을 일으킨 것이다. 이 말도 안 되는 헤프닝으로 맥아더의 그간의 경력은 박살 나게 된다.

맥아더가 문민통제 원칙을 거스를 정도로 트루먼 행정부와의 정책에 대한 견해차가 크다는 점은 분명했다. 맥아더는 유럽에서의 공산주의 투쟁과 아시아의 투쟁을 분리할 수 없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중공이 소련의 위성국이 되기 위해 소련과 동맹을 맺었으며, 미국이 중국과 전쟁을 확대한다고 해도 소련이 미국과 적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의견은 트루먼 행정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공화당원들조차도 맥아더의 주장을 지지하지 못하겠다며 난색을 표했다.

또한 맥아더는 대만군의 지원을 요청하자는 황당한 주장까지 밀어붙였다.


1950년 12월 3일, 맥아더는 한국전쟁에 대만 군대를 파병하고 싶어 하는 장제스의 제안을 받아들이자는 제안을 상부에 건의했다. 맥아더는 중국 본토는 남쪽으로 대만군의 공격을 위해 널리 개방되어 있으며, 그와 같은 공격은 한국에 대한 중국군의 압력을 약화시킬 수 있기에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미 합동참모본부에서 대만군의 전쟁 참전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951년 1월 12일 각서에서, ‘대만군의 작전에 대한 제반 제한사항을 일소하여 효율적인 대공작전에 기여하게 될 군수지원을 대만군에 제공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맥아더는 후에 청문회에서 자신은 이 문서에 기초하여 대중국 확전을 주장했다고 자신의 입장을 변명했지만 조지 마샬 합참의장은 그 문서는 유엔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게 될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 아래서 작성된 것으로 잠정조치에 지나지 않으며, 1월 중순에 한국의 군사적 상황이 호전되면서 이 제안이 무효화된 것이라고 그의 주장을 일축했다.

맥아더 청문회 당시

결국 1951년 4월 6일, 트루먼은 마셜, 브래들리, 애치슨, 해리만과 함께 맥아더 해임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해리만은 맥아더의 해임을 찬성했지만 브래들리는 반대했다. 조지 마셜 국방장관은 이 문제를 고려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요청하며 시간을 벌 의도를 보였다.


애치슨은 개인적으로 맥아더를 해임하는 것에는 긍정적이었지만 이러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표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신중하게 대처했다. 그는 트루먼에게 “맥아더의 해임은 행정부의 가장 큰 싸움이 될 것이다.”라며 경고했다. 사실 그 맥락에는 이후에 그 중책을 누군가가 맡아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컸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후 정치학자와 역사학자들의 분석이었다.


다음날 두 번째 회의에서, 마셜과 브래들리는 맥아더의 해임을 공식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4월 8일, 합참본부 관계자들이 마셜과 만나, “맥아더 장군의 해임은 ‘군사적 관점’에서 바람직하며 그를 해임시키지 않는다면 민간 당국은 더 이상 군대를 통제할 수 없게 된다.”라고 설득했다. 이에 마셜은 마침내 맥아더의 해임에 동의했고 브래들리도 4월 9일 동의의 뜻을 밝히며 맥아더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으로 결론이 지어진다.


1951년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은 브래들리의 서명하에 맥아더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리면서 그를 해임한다.


나는 당신을 연합군 최고사령관 직에서 교체하는 것이 미국 군대의 사령관으로서 내 임무가 된다는 것에 깊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매튜 B. 리지웨이 대장에게 즉시 지휘권을 넘기십시오. 귀하는, 귀하가 선택한 장소로 여행하는데 필요한 명령을 발급할 권한이 있습니다. 귀하의 교체 사유는 상기 주문에 대한 귀하의 확인과 동시에 공개되며, 다음의 메시지에 포함될 것입니다.


1973년 12월 3일, <타임>지 기사는 트루먼과 1960년대 초에 인터뷰한 내용을 실었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한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그가 대통령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고했다. 그는 개자식이었지만, 개자식이었다는 이유로 그를 해고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장군들 중 4분의 3이 감옥에 있었을 것이다.”

맥아더의 해임은 미국인들에게 있어 큰 충격이었다. 여론 조사에서 미국인 대다수가 맥아더를 해임한 결정에 반대했으며 해임 9개월 후인 1952년 2월까지 트루먼의 지지율은 22%까지 떨어졌다.


1951년 5월 3일부터 민주당의 리처드 러셀이 주재한 상원 의원위원회는 맥아더의 해임에 대한 전반적인 과정을 조사하고 ‘맥아더의 해임은 대통령의 헌법 권한 내에 있었지만, 그 상황은 국가의 자존심에 큰 충격을 줬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에 점점 더 인기 없는 한국 전쟁이 계속되었고 여러 차례의 부패 스캔들까지 발생하면서, 결국 민주당은 다음 선거에서 공화당에게 크게 패배했다.


현재까지 맥아더가 해임된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이, 중공군을 몰아내기 위해 핵 공격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었지만, 2020년을 기해 기밀이 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이는 사실과 달랐다는 분석도 있다.


오히려 처음에는 트루먼이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적극 언급했으며, 극동사령관을 겸직한 맥아더는 핵무기 사용 여부를 놓고 신중하게 접근했다는 것이다.


문건에 따르자면, 맥아더는 한국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상황이 아니라면 핵무기 사용이 필요하지 않다는 전략도 고려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워싱턴에서 이뤄진 핵무기 사용 논의를 바탕으로 실무적인 사용 계획을 준비한 것은 사실이었다.


1950년 12월 22일에 작성된 미군 문서에 구체적인 논의 과정과 내용이 담겨있다. 즉,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에서 쓸 카드 중 하나로 고려‘만’했을 뿐 그간 알려졌던 것과 같이 막무가내로 핵무기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트루먼이 핵무기 사용을 반대했기 때문에 핵 사용을 고집하는 맥아더를 해임하려 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다만, 기밀 해제 문서를 토대로 한 논문이 발표된 시기가 2020년이다 보니, 그전까지는 맥아더가 한반도에 핵을 떨구려 한 인물로 인식되었고, 이는 좌파 진영에서 맥아더를 부정적으로 보는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맥아더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대대적 환영

그렇게 해임된 맥아더는 1951년 4월 18일, 미국을 떠난 지 14년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는 하루 만에 바로 워싱턴 DC로 날아와 1951년 4월 19일에 한국 전쟁 수행에 대한 트루먼과의 의견 차이를 밝히고 미 의회에서 은퇴 연설을 했다. 그가 그 은퇴 연설을 하는 동안 청중들이 지나치게 흥분하는 바람에 50차례나 연설이 끊기는 방해를 받았다. 그의 연설문 중엔 대중들에게 이미 널리 알려지게 된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다.


... but I still remember the refrain of one of the most popular barrack ballads of that day which proclaimed most proudly that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And like the old soldier of that ballad, I now close my military career and just fade away, an old soldier who tried to do his duty as God gave him the light to see that duty.


... 그러나 나는 당시 군대에서 유행하던 노래의 후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후렴의 자랑스러운 구절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이 노래에 나오는 노병처럼 나는 이제 군인생활을 그만두고 신의 계시를 따라 자기 임무를 완수하려고 노력하여 온 한 사람의 노병으로서 사라져 갑니다.

1951년 4월 19일 미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 발표한 맥아더 원수 퇴임연설 중에서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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