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Apr 21. 2022

송백(松柏)은 날이 좋던 춥던 크게 개의치 않는다.

군자는 그저 묵묵히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갈 뿐이다.

子曰: “歲寒, 然後知松栢之後彫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장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로 일반인들에게도 유명해진 내용이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어려울 때 진정한 친구를 알아본다는 이야기의 오리지널에 해당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푸르른 것은 모두가 푸르를 시기에는 그 안에 함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사시사철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지만, 푸르름을 뽐내던 다른 나무들이 겨울이 되면서 잎이 모두 떨어지고 초록이 없어지고 나서야 그 나무들이 사시사철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너무도 당연한 자연의 이치를 그저 언급하는 것 같이 말하지만 공자식 비유가 시사하는 바가 큰 가르침으로 추사에게 큰 울림이 있어 그림으로까지 그려 그 의미를 영구히 담고자 했던 것이다.


이 장의 내용에 대해 범씨(范祖禹(범조우))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소인이 治世(치세, 태평성세)에 있어서는 군자와 다름이 없으나 오직 利害(이해)를 당하고 事變(사변)을 만난 뒤에야 군자의 지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무런 부대낌이나 시련이 없을 때, 내가 아쉬운 것이 없을 때는 베푸는 것에도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 문제는 내가 그런 여유 있지 못한 상황에 처했을 때도 똑같이 흔들림 없는 수양으로 단련된 모습을 보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그러한 상황에 처하지 않고서는 구분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범 씨는 공자가 이 장에서 지향하고 있는 모습을 군자가 마땅히 지켜내야 할 수양의 목표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 배우고 익히며 수양한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사씨(謝良佐(사량좌))는 배우는 이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이 장의 가르침을 정리한다.


“선비가 궁할 때에 節義(절의)를 볼 수 있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 충신(忠信)을 알 수 있는 것이니, 배우는 자들이 반드시 德(덕)에 완비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서 조금 깊게 들어가 생각을 발전시켜볼 필요가 있다. 이 간단해 보이는 설명에는 역시 초심자가 그 문면의 의미를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 이외의 중급자와 고급자에게 보이는 층위별 가르침이 역시 내재되어 녹아있기 때문이다.


먼저 중급자의 수준으로 조금만 들어가 살펴보자. 군자가 덕을 수양하고 자신을 갈고닦는 것은 한결같이 이루어지는 일이다. 즉, 날이 추워질 것을 대비하여 무언가를 특별하게 준비하거나 하는 따위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날이 춥지 않을 때, 즉, 날이 좋아서 모두가 푸르를 때에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송백(松柏)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자신이 하던 대로의 본분을 지키고 그 공부를 그대로 묵묵히 하고 있을 뿐, 그것이 특별하고 대단한 군자만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날이 추워지고 나서야 보는 사람이 느끼는 것일 뿐, 날이 추워졌다고 송백(松柏)이 뭔가 특별한 마법을 부리거나 자신만의 특수한 특징을 도드라지게 발휘하여 그제서야 그 몰라봤던 능력이 두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배우는 자들이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남이 보든 보지 않든 특히, 남에게 보이기 위해 그 과정을 감내해가면서 눈에 띨때까지 참고 견딘다는 개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에 띄든 말든 내가 해야 할 도리를 해나가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는 것이다.


자아, 그럼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송백(松柏)의 입장이 그러했다면, 날이 추워지는 것은 어떠한가? 사시사철이 변화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이 장에서 날이 추워진 연후라는 점을 강조한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사시사철을 모두 설명하거나 묘사하여 그 비교를 설명할 수도 있었지만, 공자는 유독 날이 추워진 연후를 강조한다. 공자가 이 가르침을 주던 당대의 상황이 결코 그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따뜻해지는 봄이 오는 순리와는 달리, 혹독한 추위로 옥석을 가리기가 딱 좋은 시기임을 풍자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연의 순리는 돌고도는 순환이라 기다리면 봄이 오고 여름이 와서 다시 푸르름을 기대할 수 있지만, 세파의 살을 에이는 폭정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송백(松柏)의 시들지 않음, 그 푸르름을 유지하는 것은 의미를 더 크게 갖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나는 한 가지를 덧붙이고자 한다. 상황이 모두 좋을 때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았던 사람들이 상황이 악화되면 본성을 드러내고 그 바닥을 드러낸다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주변 상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복합 다단한 의미를 품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세분화하면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적인 부분이다. 이는 전쟁이 될 수도 있고, 천재지변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황이 악화되면서 불가피한 부분이 발생하여 악화된 상황에 처하게 될 경우를 의미한다. 두 번째는, 자신이 어려워짐을 의미한다. 이는 자의든 타의든 자신이 여유로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닌 상황에 처했을 때를 의미한다. 


예컨대 돈을 잘 벌던 때의 상황과 그렇지 못하게 되었을 때의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면 그것 역시 그 사람의 본바탕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마지막 상황은 상대의 상황이 변했을 때이다. 


이것이 내가 가장 방점을 두고 인간의 본성을 지적하려고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잘 나가서 지위가 높고 내가 돈이 있고, 나에게 권력이 있을 때는 사람들은 누구나 나에게 친한 척을 하고 나와 가까워지려 한다. 그러나 내가 그렇지 못한 상황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변한다. 


굳이 이 세 번째에 내가 방점을 둔 이유는 군자를 지향점으로 삼아 노력함에 있어 자신이 묵묵히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것과 달리 자신의 교유나 사람을 판단하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는 가르침이 행간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것은 송백(松柏)이 봄이나 여름이든 겨울이든 똑같이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있을 뿐인데 사람들의 평가가 달라지는 것과는 거울과 같은 구조를 보여준다.


자신의 수행과는 달리 난관은 겪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이 극복하는 것과는 달리 세파(世波)는 그것과 달리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의 본성을 보여준다. 그것을 공자는 자연스러운 겨울의 도래로 표현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군자 같은 경지에 올라 묵묵히 자신을 가다듬고 노력하며 교학상장(敎學相長)하면 그것만큼 좋은 것은 없겠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공자는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러한 이들 속에서 배우고 익히며 자신을 다스려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 누구보다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서 일생을 보냈던 사람이었기에 그 공감은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추사(秋史)가 왜 이 문구에 격발 하여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게 되었는지 <세한도>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겠다.


이 그림은, 조선 헌종 10년(1844년)에 제주도로 유배 중이던 추사(秋史) 김정희가 그린 그림으로,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이 원소유주로부터 기탁받았다가, 현재는 완전히 기증받아서 소유하고 있다.

세한도의 크기는 23 X 69.2 cm이다. 이 그림은 추사(秋史)가 귀양 시절 제자 이상적이 북경에서 귀한 서책인 120권 79 책짜리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구해와 유배지 제주도까지 가져다주면서 탄생하게 되었다. 제자의 고마운 마음을 받은 추사 김정희가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보고 “가장 추울 때도 너희들은 우뚝 서있구나.”라면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스스로를 다독임과 동시에 유배 중인 자신을 찾아 귀한 공부 거리를 전해준 제자에게 고마움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여 그린 그림이다.


당시 추사가 왜 유배당했는지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추사가 추사체를 만든 사람 정도로 당시에도 인정받고 유명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하는 것이 요즘 일반인들의 상식의 마지노선이다. 


실제 병조참판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추사는 효명세자의 선생님으로까지 발탁되며 아무런 문제가 없이 세상을 풍미하는 듯하였으나 3년 후 효명세자가 죽자, 안동 김 씨인 김우명이 탄핵하여 파면되고 아버지는 귀양을 갔다. 당시 김우명이 탄핵한 것도 자신이 파직되었던 일에 대한 앙갚음으로 벌인 일이었다. 순조가 죽던 해에 복귀되어 아버지와 함께 겨우 조정으로 돌아온다.


1835년 풍양 조 씨가 정권을 잡자 복귀해 성균관 대사성까지 오르지만, 그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복귀한 지 5년 만인 1840년 윤상도의 옥에 관련되어 고초를 겪게 된다. 이때 김정희는 고문을 심하게 받아 목숨이 위태로워질 지경이었는데, 친구인 우의정 조인영이 ‘추사를 살려달라.’는 상소를 올린 덕분에 죽음을 면한 대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윤상도의 옥’이라는 사건도 사실 추사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순조 때 윤상도가 호조판서 박종훈, 유수 신위, 어영대장 유상량을 탐관오리라고 비난하며 탄핵한 사건에 연루되었던 것이다. 윤상도는 상소문에서 극렬하게 안동 김 씨 일족의 비리까지 언급하며 비난한 것에 대해, 안동 김 씨 일족이 분노하여 윤상도를 고문하고 귀양 보냈다가 아들과 함께 능지처참시켜버린 사건이다. 추사가 죽도록 고문을 당했던 이유는 윤상도의 상소 초안을 맡아주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제주도 추사관

결국 그 일로 죽음을 겨우 면하고 무려 8년간 제주도에 유배당하게 된 것이다. 제자가 책을 들고 찾아온 것은 그 8년의 한가운데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일반인들에게 유명한 추사체도 당연히(?) 그 당시에 탄생한 것이다. 자신이 잘 나가던 시기와 시기와 당쟁으로 인해 안동 김 씨들에게 찍혀서 고초를 겪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추사는 여러 생각이 오갔을 것이다. 


게다가 권력의 정점까지 올랐던 사람이 8년이나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보냈을 그 시간과 고뇌들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세한도>였던 것이다.


그렇게 스승의 그림을 받아온 이상적은 다시 청나라에 가면서 그 그림을 가져가 장악진(章岳鎭), 조진조(趙振祚)를 비롯한 청나라 문인 16명에게 제찬(題贊)을 받아 조선으로 가지고 돌아온 후 문인 3명에게 또 제찬을 받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세한도>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었다.

<세한도>는 이상적 사후에 흘러 흘러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 고미술 수집가이자 완당 마니아였던 경성제대 중국 철학과 교수 출신이던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의 손에 들어갔다. 후지츠카는 완당의 서화나 그에 대한 자료를 매우 많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서예가 소전 손재형(孫在馨)이 그에게 간곡하게 부탁한 끝에 <세한도>를 양도받았다고 한다. 


손재형이 <세한도>를 양도받고 3달 뒤인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으로 후지츠카의 서재가 모조리 불타버리면서 그가 수집한 완당의 수많은 작품들도 함께 사라져 버렸는데, 그야말로 운명적으로 다시 대한민국에 돌아온 작품이다.


손재형은 <세한도>를 매우 귀하게 여겼으나 정치에 입문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어쩔 수 없이 이를 매각한다. 당시 이를 매입했던 개성 출신의 부호이자 고미술 수집가였던 손세기의 아들 손창근이 물려받아 소장하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추사는 실제로도 중국의 소나무 중 하나인 백송(白松)을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중국에서 묘목을 가져와 심은 것 밖에 없을 정도로 귀한 나무였지만 젊은 시절 부친을 따라 중국 연경에 갈 무렵 현지에서는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에 감탄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결국 이후 백송의 씨앗을 중국에서부터 얻어와 고향 예산의 고조부 김흥경(金興慶)의 묘소 앞에 심었고 이후 살아남아서 현재 천연기념물 1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잘 나가다가 실패로 인해 혹은 여러 가지 사유로 인해 가세가 기울고 자신의 입지가 좁아져 재기조차 꿈꾸기 어려운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언젠가 자신이 다시 이전처럼 잘 나가는 때가 오게 되면 사람들이 다시 자신들에게 굽신거리게 만들겠다고.


이 장의 가르침을 인용하자면, 그것은 아직 수양이 덜 된 자들의 지극히 세속적인 복수심이고 자격지심의 발현일 뿐이다. 결국 당신이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을 때 굽신거리던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인성을 가진 사람들이고 그런 자들에게 자격지심을 느끼며 그것에 대해 복수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당신이 재기를 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당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바는, 그리고, 그 지향하고자 하는 바는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어서는 안 된다. 공자가 그러하였고, 공자의 행간을 읽고 자신의 인생 역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던 추사 역시 자신이 지향해야 할 바를 제대로 설정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마음을 다져나갔을 것이다. 


추사는 8년간 제주도에서 그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며 결코 다시 정계에 복귀할 마음을 다지지 않았다. 스스로를 다스렸고, 자신의 학문을 더 옹고히 다졌으며 만고에 길이 남길 추사체라는 글자를 쓰고 또 써서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한 노력들은 결코 다시 권력을 잡게 될 것이라는 기대나 절치부심 정계로 복귀하려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다스리고 자신이 지향해야 할 바를 배우고 익히며 수양하는 것에서 찾았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힘겨운 시기는 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잘 나갈 때는 물론이거니와 그렇지 못하고 시련에 실패에 힘겨워하고 있을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노력들을 경주해나가며 스스로를 가다듬고 다져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그 하루하루가 쌓여 결국 당신의 인생을 완성시킨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새기며 잊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칭찬을 꾸지람처럼 듣고 꾸지람을 칭찬처럼 들어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