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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20. 2022

칭찬을 꾸지람처럼 듣고 꾸지람을 칭찬처럼 들어라.

스승에게 인정받은 제자가 보여야 할 태도

子曰: “衣敝縕袍, 與衣狐貉者立, 而不恥者, 其由也與! ‘不忮不求, 何用不臧’?” 子路終身誦之, 子曰: “是道也, 何足以臧?”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해진 솜옷을 입고서 여우나 담비의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은 자와 같이 서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는 아마도 由(子路)일 것이다. 남을 해치지 않으며,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면 어찌 不臧(不善)을 행하겠는가.” 子路가 〈위의 詩句를〉 終身토록 외우려 하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이 道(방법)가 어찌 족히 善하다 하겠는가?”

이 장은 자로(子路)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자로(子路)에 대해 스승 공자가 어떤 각별한 교육방침과 가르침을 내렸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미 앞에서 공부한 바와 같이 자로(子路)는 의협심이 출중하고 다소 다혈질을 가진 전형적인 우직하고 다소 단순한 의리의 사나이였다. 그런 자로(子路)가 삶의 태도가 어떠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장에서 말하는 여우나 담비의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는다는 것은 단순히 돈이 많아 고급스러운 옷을 입는다는 것이 아니라 신분이 높은 이들만이 입을 수 있는 옷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미 ‘공야장(公冶長) 편’ 25장에서 그의 입을 통해 그렇게 고귀한 신분이 되더라도 ‘친구들과 함께 하여 유감이 없는 삶을 살고 싶다.’라고 하는 대목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敝(폐)’는 해짐이다. ‘縕(온)’은 수삼으로 만든 솜이요 ‘袍(포)’는 옷에 솜을 둔 것이니, 이는 옷의 천한(값싼) 것이다. ‘狐貉(호맥)’은 여우나 담비의 가죽으로 갖옷을 만든 것이니, 옷 중의 귀한 것이다. 자로(子路)의 뜻이 이와 같았으니, 그 빈부(貧富)로써 마음을 동요하지 않아서 道(도)에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夫子(부자)께서 그를 칭찬하신 것이다.


자로(子路)의 품성이 올곧았기에 귀한 옷을 입은 신분이 높은 자들의 앞에서 가난하고 신분이 낮아 다 해진 솜옷을 입고 있더라도 그들에게 한 점 부끄럼 없어하였다. 스승 공자는 그가 신분의 고하나 눈에 보이는 외면의 빈부 차이를 연연하지 않았던 그러한 의연함을 칭찬해준 것이다.


그렇게 칭찬해주면서 공자는 또 하나의 가르침을 주기 위해 ‘ 不忮不求, 何用不臧(남을 해치지 않으며,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라는 《詩經(시경)》 〈衛風(위풍)〉 ‘雄雉(웅치)’의 詩句를 인용하여 자로(子路)의 마음가짐과 행동이 얼마나 장한 것인지에 대한 의미를 자로(子路)는 물론이고,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제자들에게 기억할 수 있도록 권계 해준다.


이 구절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공자의 의도를 해설하고 있다.


‘忮(기)’는 해침이요, ‘求(구)’는 탐함이요, ‘臧(장)’은 善(선)함이다. 해치지 않으며 탐하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不善(불선) 한 짓을 하겠는가라고 말씀한 것이다. 이는 《詩經(시경)》〈衛風 雄雉(위풍 웅치)〉의 詩句(시구)이니, 공자께서 이를 인용하여 자로(子路)를 찬미하신 것이다.


그 시의 내용인 ‘남을 해치지 않으며,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는 단순히 다른 사람을 해하고 남의 것을 해면서까지 부자가 되려 한다는 탐욕스러운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명확하게 그것이 가진 행간의 의미를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여씨(呂大臨(여대림))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부연한다.


“가난한 자가 부자와 사귈 적에 강한 자는 반드시 〈부자를〉 해치고, 약한 자는 반드시 탐한다.”


이 해설에 의하면, 단순히 부자가 되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의 탐욕스러운 면을 뭉뚱그려 강조하려 한 것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자들이 부자를 보면서 취하는 잘못된 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행태에 대해 두 가지로 나누어 분석하여 지적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부자보다 강한 자는 부자의 것을 빼앗으려 들고, 약한 자는 부자의 것을 어떻게든 얻어내려 들러붙는 점을 적확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로(子路)의 우직한 인간됨에 대해 스승 공자의 칭찬으로 끝났다면 이 장은 여느 장처럼 스승이 제자의 장점을 칭찬하면서 그 배울 점을 다른 이들에게도 주었던 안회의 경우와 비슷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항상 투머치 언행을 보여주는 자로(子路)가 스승의 이와 같은 칭찬에 자신도 안회(顔回)와 같이 스승에게 칭찬을 들었다는 뿌듯한 마음에 스승이 남겨주신 금과옥조(金科玉條)와 같은 그 시구를 평생 외우겠다며 다시 투머치 언행을 보이고 나선 것이다.


그러자, 아주 작은 한 가지만을 칭찬한 것이 그렇게까지 과한 행동을 보이는 제자에 대해 공자는 다시 “이 道(방법)가 어찌 족히 善하다 하겠는가?”라고 하며 가르침을 준다. 말은 지극히 완곡하지만, 이것은 우직한 자로(子路)에게는 따끔한 꿀밤 격의 일침인 셈이다. 스승을 지근거리에서 모셨던 자로(子路)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성격이 단순 우직했을 뿐, 스승의 가르침 속에 담긴 비판이나 꾸지람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금세 깨닫고 이해했던 자로였으니 자신의 투머치 언행에 대해 꿀밤을 날리는 스승의 맞춤 지적에 다시 깨달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종신토록 외우려고 한다면 스스로 자신의 능함을 기뻐하여 다시 道(도)에 나아가기를 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夫子(부자)께서 다시 이를 말씀하여 일깨우신 것이다.


공자의 의도는 이 한 가지의 칭찬에 만족하여 오직 그 칭찬에 언급된 시구를 평생 외우겠다는 자로(子路)가 행여 그것에 멈추고 더 노력하지 않는 모습을 보일까 걱정하고 권계한 것이다. 대개 공자 같은 성인의 허여함(칭찬)을 받은 제자의 입장에서는 우쭐할 수 있다.

특히 우직하고 단순한 자로(子路)의 입장에서는 안연(顏淵)에게 스승이 했던 것과 같은 칭찬이 있었으니 나도 스승의 칭찬을 들었으니 이것이 나만의 성취라고 기뻐하며 만족했을 수 있다. 하지만, 스승은 그러한 제자의 성품이 갖는 특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기뻐하되 그 정도가 지나쳐 그것을 오로지 해서는 안된다고 따끔하게 일러준다.


재미있는 것은 칭찬에서 극찬의 의미로 강조되었던 ‘어찌 不臧(不善)을 행하겠는가?’라는 표현을 그대로 받아, 다시 ‘이 道(방법)가 어찌 족히 善하다 하겠는가?’라는 같은 형용사를 사용하여 그 말을 듣는 이가 알기 쉽게 바로 눈치챌 수 있는 문법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공자는 제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 말해주는 것이 그에게 가장 효과적인 교육성과를 거둘 수 있는지를 파악하고 그에 맞게 안배해주는 방식까지 세심한 가르침을 펼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내용을 모두 배우는 자들이 깨우칠 수 있도록 이 장에 대해 사씨(謝良佐(사량좌))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러워함은 배우는 자들의 큰 병통이니, 善(선)한 마음이 보존되지 못함은 이에 말미암는다. 자로(子路)의 뜻이 이와 같았으니, 그 일반인보다 뛰어남이 멀다. 그러나 보통사람으로서 이에 능하다면 훌륭하다 할 만하다. 그러나 자로(子路)의 어짊은 마땅히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되는데, 종신토록 〈이 詩句(시구)만을〉 외우려고 하였으니, 이는 (학문을) 날로 새롭게 함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공자께서〉격동시켜 나아가게 하신 것이다.”


앞서 처음 여우 갖옷을 직접 언급했던 ‘공야장(公冶長) 편’ 25장의 자로(子路)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안연(顏淵)은 함께 등장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자로(子路)는 나이가 많은 늦깎이 학생이었고, 안연은 나이가 어린데도 학문의 성취나 인격의 도야가 빠른 제자에 해당했다.


해당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격이 급하고 우직한 자로(子路)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어린 나이에 안빈낙도(安貧樂道)를 구현한 안연(顏淵)에 대해 스승이 허여하고 그가 요절한 후에 그만한 제자가 없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의 학문이나 인격도야의 성취가 그만 못하다는 것에 늘 마음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스승인 공자 역시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안연(顏淵)의 경지까지는 아닐지라도 다른 의미에서 자로(子路)가 보였던 기개와 빈부(貧富)나 신분의 차이정도로 부자이면서 신분이 높은 자들에게 굽신거리거나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보이는 일반인의 속 좁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자로(子路)에게 조금 더 노력하여 안연(顏淵)이 보았던 그 경지까지 노력하여 오르라는 의미로 칭찬을 건넸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 칭찬을 칭찬의 의미로만 받아들이고 자신도 스승에게 인정받았다며 아이처럼 좋아서 그 시구를 평생 외우겠다며 하고 다니니, 스승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첫머리 일부만 받아들인 이 제자에게 본 뜻을 다시 한번 강조해주는 번거로움을 다시 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자로(子路)가 보였던 그 기개와 당당함 역시 일반인이 쉽게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그랬기 때문에 스승은 자로(子路)가 가지고 자질과 선한 본성을 좀 더 키우고 더 노력하면 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 등을 두드려준 것이다.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다 보니 공자의 세심한 가르침의 방식은 늘 나에게 많은 부분을 생각하게 만든다. 중고등학교가 이미 학교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 오래되었다고들 한다.

입시에 필요한 부분은 이미 학원의 일타 강사들에게 모두 배우고 정규과정이란 선행을 이미 끝낸 아이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기 때문에, 강남 한 복판의 아이들에게는 다 배운 것을 더 수준이 떨어지는 선생들이 성의 없이 가르치는 것이 호응을 보일 리가 만무하고, 외각으로 멀어져 갈수록 어차피 선행을 통해 모두 알고 있는 최상위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 기능을 상실한 학교교육에 열의를 갖지 않게 되니 중간이 없어져버리는 악순환이 이어진다고 한다.


대학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대형 강의에서는 학생 한 명 한 명의 특성은 고사하고 그 학생의 얼굴과 이름조차 매칭 하지 못한다. 좀 심한 경우는 몇 명 되지도 않는 자신의 학과 학생이 지나가며 인사를 하는데 그 학생이 자신의 학과인지조차 모르는 교수부터 자신의 학과 학생인 것까지는 알지만 그 학생이 몇 학년인지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해 ‘어어’라며 인사를 받는 선생 소리조차 아까운 교수들이 발에 차이는 현실이다.


물론, 그런 선생 자질조차 없는 교수들이 발에 차이는 현실이 벌어지는 동안, 학생들도 만만치 않게 시대를 퇴보시키는 짓을 한다. 버젓이 술 먹고 늦잠 자고 강의에 늦게 들어오면서 미안한 내색조차 없이 뻔뻔함을 온몸에 칠하고 나타난다든지, 자신이 공부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았으면서 왜 성적을 더 많이 잘 주지 않느냐고 당당하게(?) 따지는 개념을 집의 보물창고에 담아두고 다니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악순환은 사회를 퇴보시키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공자가 수천 년 전부터 교육 현장에서 가르치며 늘 경계해왔던 것처럼 가정에서 제대로 밥상머리에 앉아 가르치지 못하는 상황은 학교로 이어진다. 그 알량한 가족을 먹여 살리는 돈을 번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제대로 된 밥상머리 교육을 통한 인성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그들은 막연히 돈을 더 잘 벌고 세상을 편히 살기 위해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같이 밥상에 앉아 인간이 되는 교육조차 대화하지 못하면서 아이들에게 ‘제대로’ ‘잘’ 배우라는 말이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에게 물건을 주고받을 때 버젓이 한 손을 내밀고, 인사를 하면서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입으로만 ‘안녕하세요.’라고 주절거린다. 부모가 있는 가정에서 그렇게 해도 어느 누구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것을 머리로는 알고 잔소리는 들어봤지만, 마음에 새기고 몸에 새겨져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의 분위기가 형성된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자신에게 누군가 뭐라고 하는 것 자체에 굉장히 날카롭게 반응한다. 사춘기라서, 시험기간이라서, 원하는 만큼 성적이 안 좋아서 날카로워져 있으니 등등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꾸짖고 올바르게 행동하라고 이야기할 타이밍에 그저 넘어가며 오냐오냐하게 된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해서 그 아이가 더 좋은 성적을 얻게 되고, 더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할 있을 것인가?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이미 부모의 나이가 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그런 아이들이 부모가 되어 돈오(頓悟)의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자식들은 제대로 키우는 기적이 벌어질 것이라 생각하는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어도 일탈하려는 이들이 넘치는 세상에 제대로 꾸지람을 듣고 올바른 것을 몸에 익히는 배움을 얻지 못한 이들이 부모가 되어 그럴 것이라는 착각은 하지 마라.

앞서 내가 이것을 ‘악순환’이라 표현한 것은, 대부분 개판 오 분 전의 모습을 보이는 이들의 부모나 그 가정을 살펴보게 되면 그들이 왜 그렇게 잘못 성장했는가를 대번에 알 수 있게 한다.


그들의 부모가 대학교수, 변호사, 의사, 판사, 기업 임원이랍시고 밖에서 있어 보이는 척 여우 갓옷을 입고 거드름을 피우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자식을 보면, 그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스스로를 다스리고 공부했으며 무엇을 지향하는 삶을 사는지 여실히 알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의 부모를 보여주는 거울이며, 당신의 자식은 당신의 인생을 오롯이 보여주는 성적표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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