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상씨의 탈> 4부 – 2

하나. 옛날 옛날에 아주 먼 옛날에 - 하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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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비가 내린 것인지 아침에 내린 이슬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인지 풀숲과 꽃잎에 싱그러운 물기가 그대로 맺혀 있었다.


깊은 산속의 정적은 조그만 움직임으로 밝아오기 시작한 햇빛을 그대로 받으며 싱그럽고 풍요로운 자태를 그대로 드러냈다. 나무는 언제부터 자라 있었는지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이나 된 듯 하늘을 향해 길게 뻗어 있었고, 기암절벽들은 마치 누군가 일부러 배치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산세의 웅장함을 가장 멋지게 보이도록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작은 다람쥐가 일찍부터 일어나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열매들을 찾아 다시 자신의 집으로 가져다 옮기며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있었고, 숲이 깨어나는 것을 알리려는 듯 창공을 가르 지르는 새들의 소리가 여러 가지로 섞여 골짜기 여기저기에 퍼졌다.


어디서부터 샘이 솟아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샘에서 나온 물이 시내가 되어 졸졸 흐르는 소리가 새소리와 어우러지며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규칙적으로 흐르는 소리가 공기의 틈새로 조용히 스며들어오는 아침이었다.


물가에 조심스럽게 다가와 목을 축이는 모습이 흡사 겨울에 내린 눈을 소복이 맞은 것 같아 보였다. 털은 만지지 않아도 손가락을 포근하게 감쌀 듯 작은 바람에도 하늘거렸다.


하지만 그 하얀 눈송이 같은 털의 한쪽에는 너무나도 선명한 붉은 핏덩어리가 엉겨 조금씩 굳어가고 있었다. 혀로 핥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몸을 어떻게 굽혀도 닿지 않을 각도였다. 겨우 숨을 돌리며 목을 축이면서도 여유롭지 못한 눈빛으로 여기저기 불안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다친 게로구나.”


갑작스러운 말소리에 흠칫 놀라 물가에서 물러서며 몸을 비틀거렸다.


“아니다. 너를 해하려는 것이 아니야. 나는 너를 그렇게 만든 이들과 다른 존재란다.”


분명히 소리가 들리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기 시작했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놀라지 말려무나. 여기다.”


속삭이는 듯한 그 차분한 목소리는 머리 위에서 나지막이 파문처럼 퍼졌다. 고개를 들고 으르렁거림을 더 강하게 하며 경계를 하려 했지만, 공중에서 눈인지 꽃비인지 함께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보며, 눈이 갑자기 부셔왔다. 그의 뒤에 후광처럼 막 떠오른 햇빛이 풀숲을 헤치며 눈앞으로 쏟아졌던 것이다.


“많이 다쳤구나.”


어느 사이엔가 눈을 잠시 찡그리며 경계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몸이 그의 품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단 한 번도 다른 존재가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던 그녀는 너무도 놀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거부할 수 없는 따스함이 그의 손길을 통해 그대로 타고 들어오는 것을 느껴졌다.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그간의 노곤함이 폭포처럼 쏟아져 온 몸의 세포를 물에 녹여버리듯 퍼쳐나갔다.


“끄으으으으”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지그시 감고 그의 품 안에, 그의 따스한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는 손에 고개를 더 깊숙이 파묻고 자신도 모르게 파고들고 있었다.


“저런. 아기를 가졌구나. 그래서 더 날카로워져 있었구나. 몹쓸 인간들이 너를 잡아 옷이라도 만들 요량이었나 보군.”


그가 하는 말은 마치 자장가처럼 귓가를 간지럽혀왔다. 이제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메시지를 그의 손에서 그의 품에서 나오는 그만의 향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기운을 확인하고서 그의 얼굴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그녀는 그렇게 가만히 눈을 감았다.




깎아지른 절벽 위의 소박한 초가로 만든 집으로 그가 그녀를 부둥켜 안은채 살포시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며 막 마당을 정리하고 있던 시동(侍童)*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그를 맞았다.


“스승님. 그건...?”


“쉬잇! 조용히. 겨우 잠들었어. 시끄럽게 하면 다시 깰 거야.”


그는 바로 그녀를 안고서 시동(侍童)의 떨떠름해하는 표정을 뒤로하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정신을 잃은 것인지 잠이 든 것인지 그녀는 긴 흰머리를 흩뜨린 채 새근거리며 숨만 몰아쉬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를 바로 침대에 가서 눕힌 그는 갑자기 바빠졌다.


“약을 만들어야 하니, 지난번에 챙겨두었던 말린 약재들을 끓이거라. 나는 수술을 준비해야 할 것 같구나.”


“스승님.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건...”


시동(侍童)이 문을 닫고 바쁜 걸음으로 밖으로 나오는 그에게 볼멘소리로 뭐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 그가 확 뒤로 돌아서 한쪽 눈을 찡끗 감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아기를 가졌다. 그것도 둘이나... 말이다.”


“네에?”


시동(侍童)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닫힌 문쪽을 쳐다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지금 아기를 받아내시겠다구요?”


시동(侍童)의 질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분주하게 한쪽 소매를 휘둘러 물을 올리고 다시 손을 닦고 시동에게 깔끔한 수술용 앞치마를 묶으라고 내밀면서 대답했다.


“아니, 아직 아기들이 나오기에는 너무 작아. 아기들이 안전하게 출산하게 하려면 이곳만큼 안전한 곳도 없지 않겠느냐? 상처가 심각한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 수술해서 얼른 아물지 않으면 아기를 낳을 수 없을 지경까지 상처가 곪아 터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단다.”


그는 툴툴거리면서도 자연스럽게 깨끗한 수술용 앞치마를 묶어주고 입마개를 묶어주는 시동을 보며 특유의 너그러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물이 다 끓은 듯 하니 가지고 들어오너라. 내가 마취 향을 써서 잠을 재워두긴 했지만, 아기들 때문에 아주 미량을 썼으니 깨기 전에 얼른 치료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야. 너도 잊지 말고 손을 깨끗이 씻고 들어오너라. 혹시 모르니 감염이라도 되면 큰일 나니 말이야.”


“스승님. 지금 너무 신나 하시는 거 아십니까?”


손을 씻으러 가면서도 시동(侍童)은 스승이 보이는 특유의 반응에 한 마디를 보탰다.


“너를 거둘 때도 똑같았다는 것을 기억하면 그리 투덜거릴만한 것은 아닐 게야.”


“에휴. 네네. 왜 아니시겠습니까? 스승님이 어디 다치고 죽어가는 것들을 그저 스쳐 지나가시는 분이십니까?”


“자아, 미안한데 조금 상처를 보자.”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의 다리에서부터 올라가는 허벅지 뒤쪽을 올리니 피가 엉긴 상처가 드러났다.


“아마도 활이나 돌에 당한 것이겠지?”


“생각보다 심각한데요.”


시동(侍童)의 표정이 그녀의 드러난 상처를 보자 일그러졌다.


“으으음”


그녀가 다시 신음소리를 내며 긴 흰머리를 움직였다.


“아니야, 아니야. 금방 안 아프게 해 줄 게다. 조금 더 자도 된다.”


그가 가만히 그녀의 긴 머리 사이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래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양이 되어 섭생이 아주 잘되어있는 아이야.”


조심스럽게 엉킨 피를 닦아내며 상처를 소독하기 시작한 그가 중얼거리는 듯 말했다. 생각보다 오래된 상처인지라 막 곪아 들어가기 직전의 죽은 살들을 과감하게 칼로 드러내고 그 부위를 봉합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지경까지 갔길래 이렇게까지 심하게...”


“이 아이는 자신이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조차도 아마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가 보더구나.”


겨우 봉합을 끝내고 송글 거리는 땀을 닦아주는 시동을 보며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마도 아까 상처를 보자마자 날카로워져 있던 시동(侍童)의 마음이 그에게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터였다.


다시 가만히 땀을 흘리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훔치며 흰머리를 가만히 귀 뒤로 쓸어 넘겨주며 그가 시동에게 다시 말했다.


“내가 곁에 있을 테니 너는 나가서 할아범과 할멈이 또 시끄럽기 굴기 전에 상황을 잘 설명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아까와는 달리 시동은 가만히 대답하고 치료한 피 묻은 천이니 물그릇을 챙겨 들고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는 가만히 그녀의 곁에서 악몽을 꾸는 듯 힘겨워하며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는 그녀의 머리를 쓸어주며 나지막이 속삭여주었다.


“이제 다 괜찮다. 아무도 너를 해하지 못한 곳에 왔으니 아무런 걱정하지 말거라. 아가들도 아주 잘 자라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잠결에 아주 잠시였지만 가까스로 실눈을 떴을 때 그녀는 흐릿하게 촛불 앞에서 가만히 책을 읽고 있는 남자의 옆모습을 언뜻 보았다고 생각했다. 꿈인지 실제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포근한 불빛 앞에서 가만히 읊조리듯 책을 읽어 내려가는 그의 목소리가 오래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아스라한 추억의 한 조각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기분 좋은 꿈을 꾸는 것 같은 느낌으로 그녀는 까무룩 다시 잠 속에 빠져들었다.




“아니 어떻게 또 이런 일을 벌이신단 말인가, 엉?”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깨끗한 절벽 위 마당을 가로질러 울렸다.


“조용히 해! 안에 깨겠어. 할아범 목소리가 너무 커!”


그를 다그치는 듯한 목소리가 나지막하지만 빠르게 깔렸다.


“이런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것도 유분수지. 내가 지금 저 아이가 깰까 봐서 목소리까지 낮추고 그래야만 하는 거야?”


“이 할아범이 정신을 못 차렸나! 스승님이 돌아오시면 어떻게 감당하려구....”


그때였다.


삐걱하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긴 흰머리를 흩날리며 그녀가 절뚝거리며 밖을 나왔다.


“어라? 그렇게 막 함부로 걸어 다니면 안 되는데?”


멀리서 막 밥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던 시동(侍童)이 기골이 장대한 할아범과 그를 때리며 말리는 할멈의 사이를 가로지르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여기가...”


“아!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겠구나. 스승님이 어제 상처 입은 너를 데리고 와서 치료해주셨어. 수술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으니 지금 그렇게 막 걸어 다니고 하면 겨우 봉합한 상처가 벌어질 수 있으니 얼른 들어가서 침대에 누워있어. 스승님도 곧 돌아오실 거야.”


“스, 스승님?


“너 어디서 굴러먹던 녀석이야? 내가 이 산 전체를 거느리고 있어도 너 같은 녀석은 본 적이 없는데...”


다짜고짜 기골이 장대한 엄청난 몸집의 할아범이 그녀에게 다가서며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다그치듯 물었다. 놀라서 방 안쪽으로 뒷걸음질 치던 그녀를 보며 할멈이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가슴을 크게 내리쳤다.


“이 할아범이 정말로 정신을 못 차렸나, 아기를 가졌다잖아! 자꾸 이렇게 무식하게 굴래?”


“아침부터 왁자지껄한 것이 가족들이 모여 사는 곳 같구나, 정말.”


온화하지만 힘 있는 분위기를 장악하는 목소리가 공중에서 울리며 그가 다시 구름을 비껴 타듯 내려서며 말했다.


“스승님. 돌아오셨습니까?”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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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시동(侍童)

귀인(貴人) 밑에서 심부름을 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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