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은 온화하기 그지없었지만, 온통 근육으로 뭉쳐진 듯 양쪽 어깨를 드러내 놓고 다 해진 도복 같은 옷을 걸친 거대한 할아범은 어느 사이엔가 순한 양 같은 얼굴이 되어 당황했는지 귀까지 빨갛게 되어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건 아니고...”
할아범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그 앞을 쓰윽 스쳐 지나듯 남자가 문 앞에 서 있던 그녀에게 다가갔다.
“일어났구나! 아직 그렇게 걸어 다니면 안 돼. 내가 회복에 좋다는 선약(仙藥)을 좀 얻어왔어. 들어가자.”
“네? 저는...”
살짝 바람이 불어오며 그녀의 긴 흰머리가 살랑거렸다. 남자가 머리를 툭툭 쓰다듬으며 그녀의 등 쪽으로 손을 감싸며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일단 치료하고,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 할멈. 나 배고프니까 상처만 봐주고 우리 함께 아침 먹자구!”
뒤도 안 돌아보고 남자가 밝은 미소가 보이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예. 이제 준비 다 됐습니다. 얼른 하고 나오시면 돼요.”
할멈은 멍하니 서 있는 할아범의 등을 툭 치고는 손을 홰홰 저으며 상을 얼른 차리라고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서 바로 음식을 준비하던 시동(侍童)의 곁으로 가서 국자와 주걱을 들고 음식들의 간을 보며 바쁘게 움직였다.
“어디 보자. 지금은 좀 어떠냐? 어제만큼 아프진 않은 게지?”
영문도 모른 채 남자에게 안기듯이 다시 침대에 누운 채 가만히 숨죽이고 있었다.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 법도 했지만 이상하게 어제 꿈속에서 느꼈던 것처럼 그의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 강한 마법 같은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곁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그간 느꼈던 불안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따스함이 실제로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아아!”
“아프냐? 조금만 기다려봐. 자아, 이거 보렴? 이 선약(仙藥)이 녀석의 말처럼 바로 상처를 아물게 해 버리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자꾸나.”
그는 막 손에 들고 온 작은 천 바구니에서 묘하게 생긴 작은 구슬 같은 것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만히 그녀의 상처부위 위에 가져갔다. 구슬은 점점 강한 빛을 내더니 이내 그녀의 상처 속으로 쑤욱하며 녹아들어 가듯 사라져 버리고 빛만을 강하게 상처부위로 먼저 나갔다. 그녀가 너무 강한 빛에 눈이 부시다고 생각할 즈음 그녀의 봉합된 상처는 원래부터 아무런 상처가 없었던 것처럼 말끔해졌다.
“오호! 정말이네? 창상(創傷)*을 입은 것을 치료하는데 선약(仙藥)을 써본 일이 없었거든. 그런데 정말로 금방 듣는구나? 아마도 네가 가진 챠크라와 색이 같은 것을 받아오길 잘했구나. 네가 가진 챠크라의 운용과 상성이 잘 맞았던가 보구나.”
“가, 감사합니다.”
꼬르륵-
그녀의 들릴락 말락하는 말소리보다 조금 더 큰 소리로 그녀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부끄러워 배에 손을 살짝 가져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가 머리를 쓰다듬듯 흰 머리를 넘겨주며 말했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으니 배가 얼마나 고팠을고? 지금 배가 고픈 것은 네가 아니라 네 아가들이 배고픈 게야. 알고는 있었느냐? 둘이나 들어있는 것을?”
“네? 그걸 어떻게...?”
그녀는 다시 그의 얼굴을 보며 되물었다.
“얼른 나가서 아침 먹자. 괜찮은지도 걸어봐야 하니까 어디 찬찬히 걸어보겠느냐?”
겁을 먹고 침대에서 내려오며 절뚝거리는 듯하던 그녀가 가만히 다리를 툭툭 디뎌보며 신기해하는 얼굴에서 환한 미소를 흘렸다.
“정말로 이제 안, 아파요.”
“그러게. 잘됐구나. 얼른 나가자. 다들 우리만 기다리겠구나.”
남자는 특유의 여유로운 눈웃음을 보이며 그녀를 이끌며 방을 나섰다.
집 앞 텃밭의 곁으로 나와 있는 연못의 곁에 넓은 정자 위로 상이 이미 차려져 있었다.
“오르시지요.”
아까와 달리 우락부락한 할아범이 겸손한 모습으로 손을 모으며 남자에게 자리를 열었다. 신기한 것은 그가 걸어가는 길마다 꽃과 풀이 스스로 길을 여는 것 같은 모습에 그의 걸음이 마치 그들을 비껴가는 듯한 인상을 보였던 것이다. 그 모습이 신기했던지 흰 머리의 그녀가 앞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그의 등에 부딪혔다.
“잠깐만, 머리가 너무 길어 그대로 밥을 먹다가는 네 털까지 다 먹어버리겠구나. 가만 있어보자. 내가 적당한 비녀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가 오른쪽 소매 안으로 왼손을 넣어 주섬주섬하더니 초록빛이 나는 옥색 막대기를 하나 꺼냈다.
“아까 선약(仙藥)을 받으러 가다가 눈에 띠길래 주웠다. 가만히 있어보거라.”
남자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뒤로 다가가 머리를 가지런히 손에 쥐고는 한껏 틀어 올려 머리가 곁으로 새지 않도록 잡아 묶어 비녀를 단단히 찔러 움직이지 않게 고정했다.
“어때 할멈? 괜찮지 않아?”
“스승님도 참. 그런 것은 남자가 할 것이 못 됩니다. 게다가 어디서 온 미물 인지도 모르는 처자에게, 아기까지 가진 것을 아신다는 분이 그리 하시면 아니 되는 겝니다.”
“그래그래. 할멈이 그렇다니까 내가 주의하도록 하지. 얼른 다들 올라와서 식사합시다. 오랜만에 식구가 하나 더 늘었으니 아침상부터 왁자지껄하여 좋네그려.”
“식구요? 컥!”
막 그를 뒤따라 정자에 오르던 할아범이 뭐라고 말하려는데 할멈이 팔꿈치로 그의 명치를 쿡 찔렀다.
“일단 얼른 먹자구. 다들 시장하지 않은가? 난 오랜만에 시장기가 도네? 하하!”
그렇게 식사를 하고 나서 상을 물리고 차를 마시며 그를 중심으로 할아범과 할멈, 그리고 흰 머리의 그녀와 시동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아, 자네는 어디에서 오던 길이었나?”
차향을 음미하는 듯 지긋이 한 모금을 머금고 남자가 그녀에게 물었다.
“네?”
그녀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할아범 말로는 이 근처에서는 자네의 체취를 느껴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구.”
“네?”
“아, 먼저 이름을 물었어야 하나?”
스승의 질문 시간에, 다들 그간 그녀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고 싶어 하던 차에 시선에 하나같이 그녀에게 쏘아 박히듯 쏠렸다.
“아, 부담 주려는 건 아니고 이제 식구로 맞이하게 되었으니까 식구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뿐이야. 말하기 싫으면 그만인데, 그래도 이름은 알아야 부를 수 있을 테니까...”
스승의 행동에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목으로 넘기려다가 뜨거운 것을 소리도 내지 못하며 참는 할아범의 모습에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풋,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우리 식구들부터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 순서겠군. 여기 가장 먼저 만났던 용(龍) 아는 동쪽 바다에서 도를 닦던 청룡(靑龍)이야. 수양을 하던 중에 기혈이 역류하면서 주화입마에 빠질 뻔했는데, 우연히 동쪽 바다를 지나던 나와 만나서 인연이 되어 내 밑에 와서 공부하고 있는 친구지. 그나마 우리 가족 중에는 가장 나이가 많은 친구이긴 한데, 나이 든 게 싫은지 평소에는 저렇게 시동(侍童)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보이는 대로 믿지 않는 게 좋아. 그대보다 몇천 곱절이나 나이가 많으니 이곳에서는 대사형인 셈이지.”
그의 소개에 시동(侍童)이 가만히 차를 들어 입술을 적시며 눈을 지그시 감아 보였다. 그제서야 어리고 작은 시동의 눈매의 끝자락에 길게 뻗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매가 예사롭지 않게 반짝거리며 그녀를 보며 가만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여기 할아범은, 이 산이 생겼을 때부터 이곳 정령들을 다스렸던 산신령이야. 흑호(黑虎)지. 이곳에서 태어나 여태까지 자랐기 때문에 이곳의 풀 하나 꽃 하나 돌 하나까지도 흑호의 책임인 셈이지. 천제(天帝)가 그에게 맡긴 유일한 사명이 이 산맥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다른 지역의 인간들이 오며 가며 살생이 많아지면서 자기 천성을 자제하지 못해 살생에 살생으로 갚으려 들었다고 찍혀서 산신령 자리에서 박탈당할 뻔한 것을 내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천제(天帝)가 알려주면서 내게 숨겠다고 와서 그냥 숨겨주고 내 밑에서 수양하는 조건으로 벌을 유예받았어. 워낙 다혈질에 성격이 급해서 그렇지 천성은 참 좋은 녀석이야. 실제로 이 산의 모든 것들이 믿고 따르는 터주대감이지.”
“흐흠”
어색한 듯 찻잔을 다시 마실 생각은 하지 않고 들었다가 놓았다가를 반복하며 할아범이 헛기침을 계속했다.
“할아범! 산신령이면 이제 좀 근엄하고 권위 있게 굴어야지 언제까지 그렇게 직접 얘들 다 다그쳐가며 직접 산에서 쩌렁쩌렁 포효하며 지낼래? 그렇지 않아도 얘도 무서워하지 않느냐?”
다시 빈 찻잔에 차를 따라주려고 차호를 들자 할아범이 가만히 자기 앞에 찻잔을 내려두며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헛기침만을 반복했다.
“고작 새끼를 밴 여우 한 마리 식구로 들이겠다고 스승님이 이렇게까지 하시는 것을 저는 잘 이해가 안 갑니다.”
“아직 난 소개도 안 했다. 좀 기다려라.”
할멈이 다시 할아범의 등을 툭 하고 두드리듯 때리며 말했다.
“우리 할멈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며 차를 만드는 재주가 특별한 가루라(迦樓羅)야. 지금은 저렇게 온화해 보이지만 천제(天帝)와 싸움이 있을 때, 다른 천상계의 신선들에게 힘을 빌려줄 정도로 차크라의 수양 정도가 상당하고 왕년에는 할아범보다 훨씬 더 다혈질에 싸움을 좋아했었던 전사(戰士)였어. 지금도 그렇지만 날개 달린 존재들 중에서는 할멈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지. 당시에 천상계의 존재들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박제시켜버려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형벌을 내리자고 하는 상황이었기에 내가 그럴 수 없다고 했더니 더 이상 무력을 사용하지 않게 한다는 조건으로 우리 식구가 된 사람이야. 할아범에게는 천적이나 다름없는 존재이지. 굳이 할멈의 형신(形身)을 드러내게 된 것은 연륜도 연륜이지만, 그녀가 가지고 이는 공격성을 모두 누그러뜨리겠다는 그녀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거야.”
“그렇다네. 여기서 여자는 나밖에 없으니 자네는 나와 함께 저쪽 거처를 쓰면 되네. 어제야 스승님이 환자라고 하여 스승님의 거처를 내어주시긴 했지만, 이제 이곳에서 지내려면 자네도 그게 편할 게야. 곧 몸도 풀어야 할 테니 말이야.”
설명을 듣고 바로 보니 할멈의 눈매와 예의 그 날카로운 시선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