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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10. 2022

내 자리가 아니니 앉을 수 없다고 할 자는 없는가?

누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는가?

席不正, 不坐.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으셨다.

이 장은 다섯 자가 전부이다. 하지만 그 임팩트는 그 어느 장 못지않게 크고 울림이 길게 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장이 담아내고 있는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기 전에 먼저 원문에서 의미하는 席(자리)에 대한 정의부터 명확하게 이해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중국은 의자와 침대 등 입식 생활을 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공자가 살던 당시에는 아직 의자가 만들어지기 전이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席은 돗자리 같은 ‘자리’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리는 창포나 갈대, 황모,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 놓은 댓개비나, 볏짚 등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원문의 의미에 적용하여 해석하자면, 자리가 바르지 않았다는 해석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 해석은, 자리가 놓인 방향이 예의에 어긋났다는 해석이다. <墨子(묵자)> ‘非儒(비유) 편’에는 ‘애공이 공자를 맞이했는데, 자리가 단정하지 않자 앉지 않으셨다.(哀公迎孔子,席不端,不坐)’라는 언급이 등장한다.

진나라 애공

여기에서 正을 端, 즉, ‘단정하다’ 혹은, ‘반듯하다’는 뜻으로 새기고 있는 사례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문을 ‘자리가 놓인 방향이 예의에 맞지 않으면 앉지 않으셨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설이다.


두 번째 해석은, 자리가 놓인 배치가 예의에 어긋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설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자리를 까는 것에도 예법이 있었다.

우선 자리를 깔 때 천자는 5겹, 제후는 3겹, 대부는 2겹을 겹쳐서 까는 것이 올바른 예법이었다. 다음으로, 자리를 까는 방향에서 좌석을 지정하는 것도 중요시하였는데, 자리가 남쪽과 북쪽을 향할 때는 서쪽이 상석이었고, 동쪽과 서쪽을 향할 때는 남쪽이 상석이라는 명백한 예법에 따라 좌석도 지정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원문의 의미도 좌석의 배치나 자리배치가 예법에 어긋난 경우 아예 앉는 것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그 잘못을 지적했다고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바로 이 두 번째 설이다.


일단 고증학적인 차원에서 席(자리)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르침에는 그 두 가지 해설의 방식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자는 이 장에 대한 주석을 따로 새기지 않고 있는데, 배우는 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씨(謝良佐(사양좌))가 다음과 같은 해설을 붙여 내가 위에 말한 의미가 어떤 뜻인지를 설명해준다.


“聖人(성인)은 마음이 바른 것을 편안히 여기신다. 그러므로 자리가 바르지 않은 것에는 비록 작은 것이라도 거처하지 않으신 것이다.”


이 주석에 의하면, 결국 자리에 관련된 예법에 대한 세세한 부분을 말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은 역시 마음가짐에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자리를 잘못 놓은 것도 그렇고, 원래의 예법에서 정하는 대로 놓지 않은 경우도 그렇고, 심지어 좌석의 배치가 예법에 어긋나도 그렇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불편하여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중의적인 의미로 확장하여 그저 눈에 보이는 자리가 아닌 벼슬자리로 외연을 확장하여 자신이 처해야 할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절대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이는 단어가 갖는 중의적 의미를 통해 공자 자신을 포함하여 제자들에게 그 의미를 강조하기에는 최적의 단어 활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한자로 ‘席’이라고 했지만, 바로 옆에 붙여 넣은 괄호의 의미처럼 현대어로는 그것을 ‘자리’라고 해석한다. 고문의 한자도 물론 중의적인 의미를 갖지만, 현대 한국어에 해당하는 ‘자리’라는 단어 역시 표면적인 의미로 앉을 자리를 말함과 동시에 비유적으로 그 사람의 직분 상의 위치를 의미한다.




대선이 끝나고 드디어 취임식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즐겁게 즐기며 축하하겠다는 분위기보다는 청문회로 취임식이 이뤄지기도 전에 여기저기 불협화음이 터져 나오며 향후 5년이 상당히 소란스럽고 불안정하겠다는 우려를 금하지 못할 지경이다.


임명권자에 해당하는 이가 어떤 자리에 누군가를 임명하거나 초빙하는 것은 공자의 시대에서부터 수천 년이 지난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있어왔던 일이다. 그런데 그 시대와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가장 도드라지게 달라진 점,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없어진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고사(固辭)’이다. 고사(固辭)란, 사전적인 의미로 ‘제의나 권유 따위를 굳이 사양하다.’라는 뜻이다. 조금 더 부연설명을 하자면, 스스로 생각했을 때 명분이 없을 때, 혹은 자신이 생각했을 때 도저히 그 자리를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을 때, 예로부터 옛사람(古人)들은 완곡하게 하지만 당당하게 그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작금의 대한민국에서는 고사(固辭)는 고사하고, 불감청이 고소원이라(不敢請이 固所願이라) 즉, ‘감히 청하진 못하나 본래부터 바라던 바를 뜻합니다.’라는 의미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인사들만이 등장한다.


차관급까지의 단순 임명직은 그나마 논란이 있어도 임명권자의 제청 방식이 아닌 바로 임명을 하면 그뿐이나, 현대의 정치제도에 의거해 ‘청문회’라는 통과제의를 거쳐야 하는 ‘자리’에서는 그야말로 스펙터클한 개망신 쇼가 실시간으로 펼쳐진다.

그런데 이번 새 정부를 꾸린다고 하는 이들의 청문회 과정은 그 이전의 모습과는 또 다른 새로움을 선사하기 시작했다.


세태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인지, 문재인 정부에서는 문제가 되는 인사들이 전국 실시간 방송에서 개망신을 당하면서도 그 자리에 앉고 싶어서 고개를 조아리고 잘못했다고 하면서도 고사하지 않는 후안무치함을 보였고, 그에 응하듯이 청와대에서는 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아도 임명을 강행하여 청문회가 유명무실해졌다는 비난을 들었었다.

그런데, 이제는 한술 더 떠 개망신을 당하고 이미 전 국민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지경임에도 당당하게 자신이 기자회견이랍시고 자청하여 목소리를 키우며 자신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질 않나 청문회 과정에서 거짓 해명이 드러나더라도 당당하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법비출신 당선인의 바이러스에 그대로 전염된 탓인지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라는 멘트는 기본으로 장착하여 날려준다.


최소한 장관급의 청문회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생겨나고 그것이 TV를 통해 공개되던 즈음에는 사람들이 최소한의 부끄러움을 느끼긴 했다. 물론 어떻게 해서든 그 자리에 앉고 싶은 행태는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최소한 언론이나 청문회장에서 자료를 통해 그의 부정이 드러나기라도 하면 그들은 고개를 숙여 사죄하고 잘못을 인정하기라도 했다.


그런데 요 며칠 새 정부가 꾸리겠다는 인사들의 청문회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제 정치를 하겠다는 이들의 염치라는 것 자체가 사라져 버린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당당하게 자신들의 사욕(私慾)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더 큰 권력과 부를 재생산하겠다는 것이 지탄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착각마저 들게 만든다.

대학교수에 출신에 자기 모교의 총장까지 지낸 자가, 교육부 장관 겸 부총리 후보에 지명되고서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이 혜택을 받은 풀브라이트 재단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 변변찮은 학벌과 성적의 자기 딸에게 수억 원의 장학금을 선사하며 대를 이어 미국 유학을 하게 하는 모습은 이제 부와 권력의 대물림을 하겠다는 것이 재벌이나 경성제대 출신의 법비들이나 의사들이 아닌 마이너 대학 출신의 이들에게도 확산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나마 자기 제자의 논문까지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는 그가 자진사퇴라는 이름으로 언론에 고개를 숙였을 때는 나는 그의 눈빛부터 그의 행실 하나하나를 통해 그것이 ‘고사(固辭)’인가를 읽어보았다.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그의 태도는 고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것을 여실히 반증해 보였다.

“국가와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을 마지막 봉사를 통해 돌려드리고 싶었지만 많이 부족했다.”


그것이 말인지 소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그가 대학 총장을 하면서 카드를 분할해서 따로 대학협의회 회장직의 모임을 나눠하면서 나중에 감사에 문제가 되지 않게 술값, 밥값을 철저하게 법인카드로 계산한 것은 그야말로 애교에 가까웠다.


그의 마지막 말은 고사는 고사하고 억울해서 흘리는 분루(憤淚;분하여 흘리는 눈물)에 가까웠다. 너무나도 이 자리를 잡고 싶은데 누군가가 그의 등 뒤에서 총구를 들이대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의 말이 맞다면 그는 진작에 자신이 총장으로 있으면 총괄하던 대학에서 수많은 부정과 학생들에게 함부로 굴었다는 그 증거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지 않게 행동했어야 한다.


작은 학교의 총장 역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계속 ‘자리’에 연연했던 자가 무슨 학자이고, 무슨 교육부의 수장 역할을 할 수 있다나 말인가? 아마도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역대 교육부 장관에 지금 내가 지적하는 것과 같은 참교육자나 정말로 자격이 있는 자가 누가 있었다고 나를 이렇게 비난하는가? ‘다 거기서 거기인데 내가 좀 하면 안 된다는 것인가? 내가 그가 얼마나 바닥에서 기억 올라왔는데...’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문제 투성이 자기만 친하다는 사람들을 담아놓고 도저히 안될 것 같으니까 누굴 희생양으로 삼아야 할까를 러시안룰렛을 하는 심정으로 뽑아서 그 총대를 빼는 사람으로 당첨된 사람의 억울함, 그 자체였다는 것이 가장 정확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싶다.


지난번 잠시 언급했던 외교부의 수장이 되겠다는 자는, 무조건 경성제대 법학과 끈을 꽉 쥐고서 놓지 않은 채, 청문회장에서 문제가 되는 자기 아들의 문제에 대해 ‘돈을 걸고 온라인으로 포커를 하는 것이 게임인가 도박인가?’라는 질문에 마치 준비라고 한 사람처럼 당당하게(?) ‘그건 큰 범주에서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한 것이다.

그가 행여 외교부의 수장이 된다면 외교부 직원들은 세계 각지의 대사관에서 혹은 그들이 본부라고 부르는 한국의 외교부에서 돈을 건 온라인 포커를 하더라도, 게임을 한 것 정도로 징계를 받거나 현행법에 저촉된다고 형사처벌을 받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가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전국 생방송에서 그렇게 말해놓고서 게임에 해당하는 걸 좀 했다고 형사처벌은 고사하고 징계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 않은가?


지방에서 지방 국립대병원을 장악하며 황제노릇으로 아무런 내용도 없으면서 큰소리치며 잘못된 것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의 딸과 아들은 아빠의 바람이 무색하게 어느 한 명 의대에 입학할만한 성적과 수준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기어코 아빠가 영향력을 키워가던 의대에 순서대로 편입하였다. 딸의 성적은 다른 학생들에 비해 뛰어나지 못했지만, 그 점수의 갭은 아빠의 지인 교수들이 준 면접 만점으로 모두 채워졌다. 그는 같은 지인 교수들이 만점을 준 다른 학생들도 있다며 당당하게(?) 항변했지만, 청문회장에서 그것이 거짓임이 증거를 통해 드러났다.

그의 딸에게 모두 만점을 준 심사위원들이 똑같이 만점을 준 학생은 당시 편입학 입시에 그의 딸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당황하는 기색도 미안해하는 기색도 사죄하며 거짓말이 들통났으니 사퇴하겠다는 고사(固辭)의 고자는 나오지도 않고 그냥 ‘못 먹어도 Go’만을 외쳐대며 자리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았다.


그가 양심이 있었다면, 능력도 안 되는 딸과 아들을 자신과 똑같은 의사로 만들겠다고 자신의 권력과 네트워크를 십분 활용하여 그렇게까지 설치지 않았겠지만, 최소한이라도 양심이 있어 딸을 우격다짐으로 집어넣었다면, 해당 의대가 있는 대학의 전자공학과에 다녔던 아들은 포기했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옛날이야기에서 늘 보아왔듯이 그는 딸을 성공적으로 편입시키고 만족한 것이 아니라 같은 방법으로 아들을 집어넣으려 들었다.

그 학교가 지방대이고 얼마나 바닥 수준인 것을 그 대학의 교수인 자신이 입장하는 꼴이 그의 해명에서 튀어나온 것은 진정한 블랙코미디의 정수였다.

첫해 편입과정에서 온갖 전국 명문대 출신의 스펙에 밀린 그의 아들이 그야말로 처참하게 발리고 말았다. 그렇게 떨어진 그의 아들을 보며 그는 이듬해 재도전을 한다. 제도를 새로 마련하여 이전 해에 똑같은 서류를 내서 합격을 얻어낸 것이다. 어떻게 똑같은 서류심사에서 똑같은 서류를 내고서 이전 해에는 떨어졌던 자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서류를 그대로 내놓고서는 합격했냐는 지적에 그의 변명은 다음과 같았다.


“떨어졌던 해에는 워낙 날고기는 전국 명문대 학생들과 경쟁해서 떨어진 것이고, 이듬해의 전형에서는 해당 지역 출신의 고교를 졸업한 학생들을 위한 전형이었기 때문에 선발된 것이다.”

그러면 그 지방대 의대는 서울대 출신의 1등과 지방대 출신의 100등을 고르게 뽑는 자유의 여신상이 평등의 여신상으로 옷을 갈아입을 수준의 의대란 말인가?


전술한 바와 같이 이 장의 핵심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해지기 때문에 앉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중요한 전제를, 당시에는 너무 당연해서 빼먹었는데 내가 설명하는 것을 잊었다. 그것이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인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왜 정작 최고봉 하이라이트를 언급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은가? 자고로, 특집 편은 잔챙이들과 함께 다루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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