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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09. 2022

무엇을 어떻게 먹는가에 따라 군자와 소인을 구별한다.

공자가 음식을 취하는 방법

食不厭精, 膾不厭細. 食饐而餲·魚餒而肉敗, 不食; 色惡, 不食; 臭惡, 不食; 失飪, 不食; 不時, 不食; 割不正, 不食; 不得其醬, 不食. 肉雖多, 不使勝食氣. 惟酒無量, 不及亂. 沽酒市脯, 不食. 不撤薑食, 不多食.


밥은 精한 것을 싫어하지 않으시며, 膾는 가늘게 썬 것을 싫어하지 않으셨다. 밥이 상하여 쉰 것과 생선이 상하고 고기가 부패한 것을 먹지 않으셨으며, 빛깔이 나쁜 것을 먹지 않으시고 냄새가 나쁜 것을 먹지 않으셨으며, 요리를 잘못하였거든 먹지 않으시고 때가 아닌 것을 먹지 않으셨다. 자른 것이 바르지 않으면 먹지 않으시며, 음식에 알맞은 장을 얻지 못하면 먹지 않으셨다. 고기가 비록 많으나 밥 기운을 이기게 하지 않으셨으며, 오직 술만은 일정한 양이 없으셨으나 어지러움에 이르지 않게 하셨다. 시장에서 산 술과 포를 먹지 않으시며, 생강 먹는 것을 거두지 않으시며 많이 먹지 않으셨다. 公所(임금 계신 곳)에서 제사 지내실 적에 받은 고기는 밤을 재우지 않으셨으며, 집에서 제사 지낸 고기는 3일을 넘기지 않으셨으니, 3일이 지나면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을 적에 대답하지 않으시며, 잠잘 적에 먼저 말씀을 꺼내지 않으셨다. 비록 거친 밥과 나물국이라도 반드시 祭(고수레)하시되 반드시 공경히 하셨다.

이 장은 공자의 음식에 대한 예절을 기록한 내용이다. 세세한 부분까지 아주 상세하게 설명한 것이 특징인데, 생소한 단어와 의미를 분석하는 고문 공부 외에 이 장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동사의 표현 방식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무엇을 어떻게 했다고 표현하지 않고 이러이러한 것은 하지 않았다, 라는 금기와 삼감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잘 파악하면서 이해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주자가 하나하나 주석을 촘촘하게 달았으니 원문의 내용을 파악해보기로 하자.


‘食(사)’는 밥이고, ‘精(정)’은 깨끗이 쌀을 대낀 것이다. 소와 양과 어물의 날고기를 저며 썰어놓은 것을 膾(회)라 한다. 밥이 정하면 사람을 자양하고, 회가 거칠면 사람을 해칠 수 있다.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것을 좋게 여김을 말한 것이요, 반드시 이렇게 하고자 한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주자가 주석의 마지막에 설명하는 것과 같이, ‘싫어하지 않는다’라는 동사 표현은 이 장을 시작하는 표현으로 전체 장에서의 분위기를 만들며 시작하는 말이다. 주석에서의 설명과 같이 ‘좋아한다’가 아니라 ‘좋게 여겼다’라는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단순히 싫어하지 않는다를 최상위의 선호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해설하면서 주자가 반대의 극단적인 예를 들면서 그것이 정말로 안 좋은 이유를 말하는 것에서도 힌트는 존재한다.

그렇다면 밥에 대한 더 상세한 주자의 주석을 살펴보기로 하자.


‘饐(애)’는 밥이 습기와 열에 상한 것이고, ‘餲(애)’는 맛이 변한 것이다. 생선이 상한 것을 ‘餒(뇌)’라 하고, 고기가 부패한 것을 ‘敗(패)’라 한다. 빛깔이 나쁘고 냄새가 나쁜 것은 아직 부패하지 않았으나 빛깔과 냄새가 변한 것이다. ‘飪(임)’은 烹調(팽조, 요리하고 간을 맞춤)와 生熟(생숙, 날 것과 익은 것)의 절도이다. ‘不時(부시)’는 오곡이 여물지 않은 것과 과일이 미숙한 따위이다. 이 몇 가지는 모두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먹지 않으신 것이다.


첫 시작이, 그러한 것들을 ‘싫어하지 않았다’였다면, 바로 두 번째 단계에서는 먹지 않았다는 금지의 표현으로 바로 이어졌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상해서 먹을 수 없는 것을 먹는 사람은 없음에도 왜 상한 것을 먹지 않았다고 하면서 조금이라도 이상하거나 잘못된 것, 특히 때가 아닌 것을 먹지 않았다고 강조했는가 하는 점이다.


때가 아니라는 것은 제대로 여물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데, 주자는 그것을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하였다. 현대적인 의미로 보면 단순히 위생과 섭생의 차원에서 상하고 사람의 몸을 상하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이라고 하여 ‘당연히’ 먹지 않았을 것에 대해 왜 이렇게 강조하는가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좋은 의문이다. 그 의문을 잊지 않은 상태에서 다음의 해설 내용을 추가로 파악하고 분석하여 남은 퍼즐의 조각을 맞춰보기로 한다.

고기를 자른 것이 방정하지 않은 것을 먹지 않음은 잠깐이라도 바름에서 떠나지 않은 것이다. 漢(한) 나라 陸續(육속)의 어머니는 고기를 썰 적에 방정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파를 자를 때에 한 치를 한 도로 삼았으니, 그 자질이 아름다워 이와 은연중에 합한 것이다. 고기를 먹을 적에 장을 사용함은 각각 마땅한 것이 있으니, 얻지 못하면 먹지 않음은 구비하지 않음을 싫어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사람에게 해는 없으나 다만 맛을 즐겨하여 구차히 먹지 않으셨을 뿐이다.


이 주석에서 주자는 이제 이 장의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조금씩 구체적으로 길어 올려 배우는 자들을 일깨워주기 시작한다. 고기를 써는 모양에 대해 언급하며 바름을 이야기한다. 잠깐이라도 바름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음식을 써는 모양‘마저’도 소홀하지 않았다는 것은 평상시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강조한 공자의 가르침을 강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아울러 앞서 과일의 때를 말한 것에서 그 의미를 더 깊이 있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음식과 함께 찍어 먹어야 하는 ‘장’을 설명한다. 알맞은 장이 없으면 먹지 않았다는 것은 본래 그것과 함께 먹어야 할 ‘기준’을 말할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주자의 힌트는, 마지막 문장이다.


해가 있어서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맛의 최상을 즐겼기에 ‘구차하게 먹지 않았다’는 말에서 이 장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모양새를 보았으니 이제 이어서 음식의 양에 대해서 해설한 부분을 살펴보자.


음식은 곡류를 위주로 한다. 그러므로 고기로 하여금 밥 기운을 이기게 하지 않은 것이다. 술은 사람을 기쁘게〔合懽(합환)〕하므로 <일정한> 양을 정하지 않고, 다만 취하는 것을 절도로 삼아 어지러움에 이르지 않게 하신 것이다.


고기가 맛있는 것이기는 하나, 주식인 밥을 이기지 못하게 한 것은 조화의 기본을 깨뜨리지 않기 위함이고 술 역시 본래 가지고 있는 역할을 깨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 술에 취해 어지러워 그 맛을 향유하는 의미를 깨뜨리지 않게 하였다는 것은 단순한 절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그 음식들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의미와 역할을 향유하는 것은 결국 섭취하는 사람이기에 그 ‘본질’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에둘러 일깨워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조절하는 것으로 양을 의미하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다.

그 예를 들기 위해, 단순히 술을 많이 마셔서 술에 이기지 못하는 화학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취기로 인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통틀어 살펴봐야 한다는 의미에서 정자(伊川(이천))는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을 덧붙인다.


“‘어지러움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은 비단 마음(정신)을 어지럽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록 혈기라도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되니, 다만 浹洽(협흡, 몸을 훈훈하게 함)할 뿐인 것이 가하다.”


시장에서 파는 술과 포를 사지 않은 이유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沽(고)’와 ‘市(시)’는 모두 사는 것이다. 정결하지 못하여 혹 사람을 해칠까 두려워해서이니, 계강자의 약을 맛보지 않으신 것과 같은 뜻이다.


공자 당시는 술을 집에서 담가 먹는 것이 일반화되었던 풍습이기도 하였지만, 시장에서 산 술이나 육포가 정갈하지 않다는 것은 그것의 위생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술이나 육포는 만들어지고 난 뒤에는 어떤 것을 어떤 과정으로 만들었는지를 직접 집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면 확인할 수 없기에 본래의 재료와 방식에서의 정갈함을 강조한 말이다. 계강자에 대한 고사는 뒤에 이 편의 11장에서 다시 나오지 그때 상술하기로 한다.


한편, 생강에 대한 언급이 다시 된 것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며 그 숨겨진 이유에 대해서도 이어서 설명해준다.

생강은 신명을 통하고 더러움과 악취를 제거한다. 그러므로 거두지 않으신 것이다. 적당하면 그치고, 탐하는 마음이 없으신 것이다.


'公所(공소)', 원문에 괄호로 설명한 것과 같이 ‘임금 계신 곳’을 의미한다. 왜 그곳의 제사에서 받아온 고기까지 언급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주자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公所(공소)에서 제사를 도울 적에 얻은 제사 고기를 돌아오는 즉시 나누어 주고 밤이 지나기를 기다리지 않으심은 神(신)의 은혜를 지체하지 않는 것이다. 집안의 제사 고기는 3일을 넘기지 않고 모두 나누어 주셨으니, 3일이 지나면 고기가 반드시 부패해서 사람이 먹지 않을 것이니, 이는 귀신이 흠향하시고 남은 것을 함부로 하는 것이다. 다만 군주가 내려준 제사 고기에 비해서 다소 늦출 수 있을 뿐이다.


제사음식이란 제사를 모시는 영혼이 먼저 흠향한 음식을 그 제사를 모신 이들이 나눠먹음으로써 의미를 다지는 것이다. 이것 역시 그 음식이 갖는 본질적인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을 상기한다는 것으로 나라의 제사와 집안의 제사에 날짜 차이를 둔 것도 예법에서 두고 있는 차이 정도만 해석할 뿐, 본질은 같다고 설명한다.


지금도 우리 관습에서 금기시하는 음식을 먹을 때 왜 말을 하지 않는가에 대한 설명인데 먼저 주자는 원문에서 두 가지 표현이 다르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대답하는 것을 ‘語(어)’라 하고, 스스로 말하는 것을 ‘言(언)’이라 한다.


그리고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은 주자의 주석 때문에 배우는 자들이 혼란스러워할까 싶어 범씨(范祖禹(범조우))가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을 해준다. 원문에 굳이 잠잘 때의 설명이 나온 것은 음식에 대한 부분만 언급하는 이 장의 내용에서 벗어나지만, 그것이 왜 함께 나오는지에 대해서도 이 설명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성인은 마음 두기를 딴 데 하지 않아서 먹을 때를 당하면 먹고 잘 때를 당하면 자니, 이때에 말하는 것은 적당한 시기가 아니다.”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특정 행위이기 때문에 잠을 잘 때 온전히 잠만 자고 다른 것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하는데 행여 오해가 있을까 싶어 구체적인 설명을 양씨(楊時(양시))의 해설을 통해 주자가 다음과 같이 부연해준다.


“肺(폐)는 숨〔氣(기)〕의 주가 되어 소리가 여기에서 나오니, 잠을 자고 음식을 먹으면 숨이 막혀 통하지 않으므로 말을 하면 폐를 상할까 두려워해서이다.”라고 하였으니, 또한 통한다.


표준어로 고수레라고 하고 민간에서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 ‘고시레’라고도 하는 현대까지 이어온 풍습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한다.

옛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적에 모든 종류를 각기 조금씩 덜어내어 豆(두, 그릇) 사이의 바닥에 놓아서 선대에 맨 처음 음식을 만든 사람에게 祭(제)하였으니, 이는 근본을 잊지 않은 것이다. ‘齊(제)’는 엄숙하고 공경하는 모양이다. 공자는 비록 하찮은 음식이라도 반드시 제하시고, 제할 때에 반드시 공경하셨으니, 이는 성인의 정성이다.


반드시 훌륭하고 제사를 위해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행위를 거쳤던 것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잊지 않고 행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선대에 맨 처음 음식을 만든 이에게 감사의 의미로 올렸다는 것이 바로 그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세세하게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 의미가 갖는 행간의 본질은 그 행위가 갖는 본질의 의미를 이해할 것, 그리고 시중(時中), 즉 때에 맞춰하는 것이 갖는 의미에 대한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그 두 가지를 기본 전제로 하여 부족하지도 않고 과하지도 않아야 하는 행하는 자의 마음가짐을 강조한다.

그래서 사씨(謝良佐(사양좌))가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聖人(성인)이 마시고 먹기를 이와 같이 하셨으니, 이는 口腹(구복)의 욕심을 다하려고 한 것이 아니요, 기체를 길러서 생명을 상하지 않게 함을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 먹지 않으신 것을 구복의 욕심을 다하는 자들은 도리어 먹으니, 이는 욕심이 앞서서 가릴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행간 저 밑에 있는 뾰족한 것을 길어 올린 느낌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설명하고 강조한 이유. 제 욕심을 차리겠다고 그것을 어기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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