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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06. 2022

재계를 왜 하는지 알고서 하는가?

왜 배우는지도 모르면서 인문학을 배워야 한다는 껍데기들에게.

齊, 必有明衣, 布. 齊必變食, 居必遷坐.
재계하실 적에는 반드시 明衣가 있으셨으니, 베로 만들었다. 재계하실 적에는 반드시 음식을 바꾸시며, 거처하심에 반드시 자리를 옮기셨다.

이 장에서는 공자가 재계를 어떻게 삼갔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내용이다. 이 장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재계(齋戒)’라는 개념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흔히 현대 용어로 목욕재계한다고 쓸 때 나오는 그 용어, 맞다.


현대적으로 사전적 의미를 풀자면, ‘제사를 올리기 전에 심신을 깨끗이 하고 금기(禁忌)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장에서 나오는 공자 당시의 개념은 비슷하지만 준비과정이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일단 당시의 재계는 일단 제사 열흘 전부터 시작된다. 처음 이레 동안은 ‘산재(散齋)’라고 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악하고 추한 것들을 보지 않으며, 나머지 사흘 동안은 ‘치재(致齋)’라고 하여 매일 목욕하고, 술과 고기, 그리고 냄새가 나고 자극적인 고추, 파, 마늘 등이 들어간 음식을 먹지 않으며, 거처하는 자리도 평소에 쓰지 아니하는 정결한 곳에서 조용히 기거한다.


원문의 다소 생소한 표현들에 대해서는 먼저 주자의 주석을 통해 파악해보기로 하자.


재계할 때에는 반드시 목욕하고, 목욕이 끝나면 明衣(명의)를 입는다. 이는 몸을 청결하게 하는 것이니, 베로 만들었다. 이 뒤에 앞 장의 ‘寢衣(침의)’ 한쪽이 빠졌다.


목욕을 하는 것을 단순히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깨끗이 닦으며 그 마음을 다잡는 행위를 구체화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옷도 특별한 明衣(명의)라는 것을 입어 목욕재계했던 마음을 옷을 입고도 인식하고자 함이다.


재계할 때에 왜 반드시 음식을 바꾸었으며 거처할 때도 그러했는지에 대해서도 주자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아 해설한다.


‘變食(변식)’은 술을 마시지 않고 마늘을 먹지 않음을 이르며, ‘遷坐(천좌)’는 평상시에 거처하던 곳을 바꾸는 것이다.


이 부분은 앞서 당시 재계에 대해 설명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음식을 바꾸었다는 것은 평상시 먹던 것과 똑같이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잠자리를 평상시의 거처와 달리 했다는 것은 단순히 더 정결한 장소를 택하여 머물렀다는 의미보다는 남녀가 함께 자지 않고 정숙함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이 정도까지 까다롭게 열흘이나 재계를 했다는 설명을 간략하면서도 정리해둔 이유가 무엇일까? 이 장을 배우는 자들이 읽으면서 파악해내야 하는 핵심은 공자가 왜 재계를 왜 그렇게까지 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이 장에는 그 의미에 대해 상세한 설명 따위는 한 줄도 찾아볼 수가 없다. 왜? 공자의 말씀을 담은 <논어>니까.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힌트를 주기 위해 양씨(楊時(양시))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재계는 神(신)과 사귀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끗함을 지극히 하고 평상시의 것을 변하여 敬(경)을 다하신 것이다.”


‘神(신)과 사귀는 것’. 이 주석의 핵심 내용이다. 평상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이거나 신분이 높은 사람을 만나기 위한 행위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섬겨 모시는 행위를 하는 것이 제사이다. 현대 해설서들에서는 유교에서 본래 제사를 중요시했으니 그 형식을 중요시한 공자를 모습을 보여주네 어쩌고 되지도 않은 헛소리로 책의 내용을 채우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고문을 공부하지도 않고 어디서 조선시대에 곡학아세(曲學阿世)로 활용된 성리학적 의미로 공자의 내용을 재단하는 것은 스승의 스승, 즉 사조(師祖)의 학문에 대해 한참 말석에 있는 자가 자신이 배우고 들은 내용으로 설치며 교정해주겠다고 나서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공자의 가르침은 늘 근본을 중요시한다. 의미 없는 형식을 중요시한다는 가르침은 공자의 어떠한 글귀에서도 나는 보거나 들은 적이 없다. 이후에 그것을 정치적인 활용 도구로 한 이들이 이리저리 재단하여 가져다 붙였던 것은 있을지언정, 공자의 가르침은 그렇게 가볍기 그지없는 싸구려가 아니란 말이다.


기본적으로 생각해보자.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기 위해 보이는 것처럼 연기할 수는 없다. 눈에 보이지 않은 존재를 모시는 제사라는 것은 이전에 우리가 공부한 바와 같이 그가 살아계신 것처럼 해야 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최대한 인간으로서 살릴 수 있는 감각을 살려야 한다. ‘향당편(鄕黨篇)’을 시작하면서부터 핵심이 되는 예법의 근저 사상을 일러주었다시피 예절을 지키기 위한 준비들이 불편한 것은 내가 편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고 존숭 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내가 불편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제사에 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위해 열흘이나 재계를 하는 것은 상대의 무엇을 위함인가? 만약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존숭의 의미는 깨끗하게 씻고 정갈한 옷을 입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모습은, 상대가 싫어할만한 것을 피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부정(不淨)한 것을 피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장에서 설명했던 목욕을 통해 몸을 씻고 평상시와 다른 단절된 몸가짐을 가짐으로써 상대가 되는 존재와 똑같이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다.


맞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게 있어 부정한 것을 피하는 것이 재계의 목적이다. 그런데 왜 그것을 열흘이나 준비하되 7일은 약간의 워밍업처럼 준비하고 마지막 삼일 동안은 더욱 삼가는 것이었을까? 그것은 겉만 준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흉내만을 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 일반적으로 했던 것으로는 그 주파수를 맞출 수 없다는 것을 징험적으로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목욕을 한다는 행위부터가 그렇다. 몸에 지저분한 것이 묻어 있거나 머리가 간지러울 정도로 씻지 않아서 깨끗하게 씻는다는 것은 표면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종교행사에서 흐르는 물에 몸을 씻는 행위는 마음의 부정함을 씻어낸다는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사실 그것이 종교적으로 중의성을 갖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을 다지는 과정에 있다.


다시 말해, 몸을 씻으면서 몸을 깨끗이 하는 표면적인 행위를 하며 마음속의 부정함을 함께 씻어낸다는 일종의 참선(參禪) 행위에 해당하는 수양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음식에 자극적인 것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과 평상시대로 먹지 않는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평상시에 먹는 대로 먹고 맛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세속적인 부정에 해당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세속의 즐거움을 찾는 일반인으로서의 삶이지 구도자(求道者)의 수양이 아니다. 남녀가 동침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저 몸을 섞는 것이 부정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정신을 정갈하게 유지하지 못한다는 점을 욕정을 참고 절제하는 것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와 눈높이를 맞추는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상대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기본 전제에서 살아있는 일반인들이 탐욕하고 즐기는 것들을 최대한 줄이고 가장 기본적으로 본질적인 것만을 유지하며 마음을 담백하게 갖는 것이 재계의 목적인 셈이다.


옛사람들은 같은 맥락에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오롯이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작업을 함에 있어 이와 같은 재계 작업을 거쳤다. 그것은 단순히 집중이 잘 된다거나 신에게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해달라거나 하는 안일한 종교적 의미 따위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이고 부정한 것들이 어느 하나에 전념(專念)하는 것을 분산시키고 방해한다는 것을 징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풍날이 즐거운 것이 아니라 소풍 전날까지의 기다림이 훨씬 더 큰 즐거움이라는 것을 깨닫는 수준이라면, 제사의 중요성보다 제사 이전에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가다듬어 그 단계의 상태로 스스로를 유지하는 재계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재계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라던가 인간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어떤 일에 대해 신의 능력을 빌기 위한 원시종교적인 행위 따위가 아님을 공자는 이 장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결국 살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고 실제 하는 사람이 그 본질적인 의미를 충분히 곱씹고 이해하여 본질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을 얼마만큼 경주하는가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


제사가 단순히 형식적인 것이 아닌 돌아가신 분에 대한 진정한 추모가 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상대와의 비어있는 시간을 채울 준비가 그만큼 필요한 것이다. 대개 재계 과정에서 제사를 준비한다는 것은 온전히 제사를 모실 대상에 대해서만 생각을 집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눈에 보이지 않고 보이던 시기의 기억을 단절한 것이 오래되었거나 기억이 없을 수 있기 때문에 그 대상을 구현화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바로 재계라 할 수 있겠다.


그 열흘간의 준비과정은 결국 마지막에 이르게 되면 보이지 않던 것을 기억하고 보이는 것처럼 구현화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기 위한 노력 과정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요즘은 그런 집들도 없지만, 조선시대에 그 형식화된 제사라는 것을 격식에 맞춰 지내려면 자정이 되는 시각까지 잠을 자지 않고 기다려야 하고 제사음식을 위해 재료 구매에서부터 모든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만 했다. 당연히 어린 아이들에게는 고역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특히나,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상태라면 더더욱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없다. 그래서 제문을 들고 ‘유세차~’를 읽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모르는 아이들은 웃음을 터트린다. 앞서 내가 조선시대에 형식을 강조하는 정치적인 의미가 스며들면서 예법의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힐난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행위의 의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것을 강요하거나 흉내 내는 것처럼 의미 없는 짓이 없다. 마찬가지로 그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으면서 그것을 잘 못한다고만 꾸짖고 억압적인 분위기로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처럼 허망한 일도 없다.




2주 전 사회의 부정한 부분에 대해서 직접 바로잡을 수 있음에도 왜 행동하지 않는가에 대해 캠페인성 프로젝트를 시작한 바 있다. 이번 달을 채우면 브런치에 뿌리를 내린 지 1년이나 되는데도 알지 못했던 진실들을 요 2주 사이에 많이 알게 되었다.


예컨대, 라이킷을 누른 자들이 내 글을 정독했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라던가 아침마다 논어를 읽었다고 라이킷을 누르고 감탄의 댓글을 단 자들이 그 의미를 진정 이해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무엇보다 ‘사회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은 곧 악이다’라는 문구를 표제어로 삼은 서평을 읽으며 마치 깨어있는 양심인 양 댓글을 달고 라이킷을 누르는 이들이나,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며 그럴싸하게 작가 소개란에 글을 쓴 갑을 훌쩍 넘은 자의 말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들이 그러하다.


이 장의 보이지 않는 저 깊은 행간에 담긴 공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했나? 그것은 재계가 바로 배움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브런치에서 가식이라는 가면을 쓰고 글로만 말로만 떠드는 것들과 이 장에서의 공자의 재계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도저히 감이 안 오나?

모든 행위에는 목적이 있다고 하였다. 재계를 하는 목적은 제사에 있다. 제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모시는 것이다. 하지만 재계 자체도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다지고 수양의 또 다른 상태로 자신의 수준을 고양시킬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배움이 바로 그러하다.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는 것에는 목적이 있다.


그런데 브런치에서 말로만 글로만 정의를 떠들고 서평을 통해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감동받은 척 연기하는 이들은 내가 그 사이에 당신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고 직접 행하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물으면, 저마다 딴 소리를 했다.


소위 학생들에게 바르게 살아야 한다며 대학에서 선생 짓을 한 자가 그러했고,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며 한 편으로는 의미 없는 구독자가 곧 네 자리가 된다며 지극히 세속적인 그 바닥을 드러낸 이도 있었다. 매번 라이킷을 눌러대 놓고서는 정작 링크를 달며 물어보니 그제서야 그 글을 읽었다는 어이없는 반응을 보여 내게 라이킷이 그냥 기계적인 품앗이임을 알려준 이도 있었다.


왜 배우는지 모르는 자들이 그저 진정으로 배우는 이들의 흉내만 내고 있음을 나는 요 2 주간 아주 적나라하게 목도하였다. 본래 배우고 익히는 이유이자 목적은, 시비를 깨쳐 실천하고자 함이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주제에 인문학에 관심이 있어 좀 배웠다는 둥 헛소리를 하며 자기는 참여하지 못하지만 뒤에서 응원하겠다는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인다.

배움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들이 당신과 같은 세상에 산다고, 평등한 존재라고 아직도 착각하고 산다면 정신 차려라. 깨닫고 배움을 행하는 자들은 입만 살아 정작 자기 잇속에만 움직이며 실천하지 못하는 자들을 동등한 존재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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