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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11. 2022

네가 고위직인 것과 마을 어른이 무슨 상관이더냐?

사람들이 고개를 숙임은 당신을 향해서가 아니다.

鄕人飮酒, 杖者出, 斯出矣. 鄕人儺, 朝服而立於阼階.
시골(지방) 사람들이 술을 마실 적에 지팡이를 짚은 분(老人)이 나가면 따라 나가셨다. 시골 사람들이 나례(儺禮)를 행할 적에는 朝服을 입고 동쪽 섬돌에 서 계셨다.

이 장에서는 다시 1장에서 살펴보았던 향당(鄕黨), 즉, 부형이 계시는 고향에서 공자가 어떤 예의를 갖추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원문을 대강 보면 그냥 웃어른들에게 대한 것 같아 보이지만, 이 두 가지 사례 역시 모두 예법에 기록되어 있는 공식 행사였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경우에 대해서는, ‘마을 사람들이 함께 술을 마시다.’라고 표현했는데, 이러한 향음주례(鄕飮酒禮)는 단순히 함께 술을 마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향음주례란,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술을 마시는 의례로, 행사의 목적은 여러 가지 경우가 있는데 여기서는 마을 즉 당(黨)의 수령인 당정(黨正)이 주관하여 매년 섣달의 납일(臘日)에 모든 신에게 지내는 제사인 납제(臘祭) 때의 향음주례를 가리킨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지팡이를 짚은 분은 노인이니, 60세가 되면 향당에서 지팡이를 짚는다. 〈노인이〉 나가기 전에는 감히 먼저 나가지 않으시고, 이미 나가면 감히 뒤에 남아 있지 않으신 것이다.


60세가 되면 지팡이를 집는다는 내용은 <예기(禮記)>의 ‘왕제편(王制篇)’에서 언급된 내용에 의거하여 설명한 것인데, 해당 내용에 따르면, ‘나이 50이 되어야 집에서 지팡이를 짚고, 60이 되어야 마을에서 지팡이를 짚고, 70이 되어야 나라에서 지팡이를 짚을 수 있으며, 80세가 되어야 조정에서 지팡이를 짚는다’고 구분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나이가 많아 힘이 들다기보다는 사회적 의미에서 권위의 상징이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정말 불편하여 잡는 낮은 높이의 효율적인 지팡이가 아닌 길고 큰 지팡이라는 점에서도 유추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보다 더 나이가 위인 사람의 앞에서 지팡이를 짚는 것이 결례에 해당하므로 그에 합당한, 누구나 인정받을만한 나이를 설명한 것에 기준한 것이다. 아무리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공자라 하더라도 마을에 내려와서는 언제나 어른들을 공경했음을 강조하기 위한 설명방식이라 하겠다.


두 번째 경우에 대해서는, ‘나례(儺禮)’라는 공식 행사 때에 공자가 어떻게 행동했는가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나례(儺禮)’라는라는 것은, 역귀(疫鬼; 천연두, 염병)는 돌림병을 의미한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는 해당 병을 걸리는 순간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수순을 밟기 때문에 의학의 힘으로라기보다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기 위해 신에게 무서운 역귀를 쫓아내 달라고 하면서 백성들의 무병을 비는 연중행사였다. 


때문에 이것은 마을의 행사를 넘어서 나라에서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행사였다. 그래서 공자는 조복(朝服)까지 갖춰 입고서 행사에 임했고, 벼슬자리에 있던 사람의 입장에서 예법에 정한 대로 동쪽 섬돌에 자리 잡고 선 것이다.


이 행사에 대한 내용을 주자는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儺禮(나례)는 역귀를 쫓는 것이니, 《周禮(주례)》에 方相氏(방상씨)가 관장하였다. ‘阼階(조계)’는 동쪽 섬돌이다. 나례는 비록 고례(古禮)이나 놀이에 가까운데도 또한 조복(朝服)을 입고 임하신 것은 그 정성과 공경을 쓰지 않음이 없으신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마을행사에 최선을 다했는지에 대해 주자는 혹자의 설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선조와 五祀(오사, 門(문) · 行(행) · 戶(호) · 竈(조) · 中霤(중류))의 神(신)을 놀라게 할까 두려워서 〈그 신들이〉 자신의 몸에 의지하여 편안하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이 평범한 내용을 보여주는 장이 배우는 자들에게 일깨워주려 한 모습이 무엇인지 당신의 눈에는 보였는가? 다른 책도 그렇지만, <논어>를 읽게 되면, 쭉 이어지는 성인 공자의 언행을 보기 때문에 이 장이 크게 도드라져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논어 읽기> 시리즈에 현재의 모습을 계속 투영시켜 보여주고 언급하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가장 비근한 예를 찾아보자. 

지방에서, 혹은 시골에서 무슨 작은 행사를 한다고 하자. 그 마을의 나이 드신 분들을 위해 그 마을의 지자체장이라는 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어른들에게 예의를 갖추며 자신이 오히려 더 낮은 자리에 앉아 마을의 어르신을 높이던가? 

식사를 하러 가는데, 장내 사회자가 끊임없이 ‘귀빈 여러분’이라면서 먼저 챙기고 멀쩡한 노인들에게 일어나서 손뼉 치라고 하며 귀빈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먼저 먹을 수도 없고 모든 것을 ‘귀빈’이라고 하는 이들의 정체는 지자체장, 지역 국회의원, 중앙정부 관련 공무원들이다. 이러한 꼴사납고 구차한 모습은 저기 나라 같지도 않은 동남아의 타이완 같은 곳에서나 행하는 짓거리라면 몰라도 대한민국에서 벌어져서는 결코 안될 참람된 행위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에 대해, 주최 측은 물론이고, 그 행사의 총괄 책임자에 해당하는 지자체장이나 중앙정부랍시고 내려온 고위 공무원, 하다못해 그 마을의 장로급에 해당하는 어른들마저도 굽신굽신 하며 그들의 잘못되고 참람된 행위에 대해 지적하지 않는다. 사실 그러한 모습은 시골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법원에 가서 재판을 참관해보면, 그 꼴 같지 않은 참람함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제 갓 서른을 넘었을까 싶은 판사가 들어오는데 제복을 입은 경비가 근엄한 목소리로 협박하듯 외친다.


“판사님 들어오십니다. 모두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


판사 법비들은 그 점에 대해 구차하게 입만 살아서 변명한다. 그것이 자신들을 위한 권위가 아니라 법원에 대한 권위이고 법원에 대한 권위는 법원에서 이루어지는 판결과 그 권위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역대급 헛소리를 해댄다. 그들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항변하고 싶은가? 

아니다. 만약 그들의 말이 진정성을 담고 있다면, 그들은 나이가 한참 연로하신 어르신들이 피고인석이든 원고인석이든 어디에 앉아 있든 기본적인 예의를 취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당당히 이름 석자를 부르며 ‘~씨’라고 부르거나 짧게 ‘원고’, ‘피고’라는 식으로 하대하듯 부른다. 그들에게 ‘~판사’라고 ‘님’ 자를 빼면 어떨 것 같은가? 그들의 눈은 검은 동자보다 흰자가 훨씬 더 많아진 표정으로 어떤 식으로든 불쾌함을 표시할 것이다.


훨씬 나이 든 분들을 하대하는 버릇없는 태도를 판사들이 보인 것은 이미 뉴스를 통해 한두 번 지적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착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법을 집행하는 직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 그들의 말처럼 존중되어야 할 법원과 판결의 상징성이 자신들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법정에서 판결이라는 절대적 전권을 휘두르는 것에 이미 익숙해져 그 힘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 자신들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아예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누리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들이 판사석에 거들먹거리며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 예의를 갖추는 경우가 딱 한 순간 있긴 하다. 그것은 바로 전관이 변호사 신분으로 그 법정에 들어올 때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배가 아닌 노인은 윗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호칭도 확실하다. 전관들에게 판사 법비들은 정중하게 ‘변호사님’이라고 님자를 붙인다. 일반인들에게 짧게 하대식으로 지칭하고 말하며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뻘 되는 피고에게 태도가 불량하다며 가르치기까지 하는 말종 판사까지 등장한 것만 보더라도 지방의 행사에서 시골 지자체장들이나 그곳을 찾은 국회의원들이 마을의 어른들보다 훨씬 더 귀한 ‘귀빈’으로 대접받는 것은 이상할 것이 아니라 일맥상통(?)한 일관된 모습을 보여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엊그제 문제의 신임 대통령의 최측근 오른팔이자 책사(이걸 이런 경우 사용하는 용어인지도 불분명하다)라고 하는 이의 청문회가 새벽에서야 끝났다고 한다. 워낙 많은 말들이 있어놔서 어디에서부터 정리해야 할지 난감하던 차에 역시 다른 의미에서 신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빨간당의 원내대표직을 맡고 한참 어깨에 뽕이 들어가 있는 자의 공식적인 멘트가 나의 혈압을 끌어올렸다.


“빈부격차가 엄연히 존재하고 부모의 재력에 따라 교육을 받는 수준에 차이가 나는 건 분명하지만, 그것이 장관으로서의 결격 사유가 될 수는 절대 없다고 생각하고 민주당 의원 중에서도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해외 유학 보내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이게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지에 대해서는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물론 법비출신인 그의 입장에서라면 매우 일관된 진술이자 삶의 태도라고 분석하는 이들도 있긴 있었지만, 내 혈압이 올라갔던 이유는 이젠 이런 말까지 공식적인 직함을 가진 자가 방송에서 버젓이, 그것도 당당하게 말할 있는 시대가 되고야 말았구나 싶었다.


국정농단 당시 ‘돈 가진 부모를 가진 것도 능력이다’라고 말했던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발언은 멍하니 여물 먹으며 고개 숙이고 있던 개돼지들에게 기름을 퍼부었었다. 지금 저 위의 빨간당 원내대표의 말이 불과 6년 전에 최순실의 딸이 말한 것을 아주 상세하고 절절하게 풀어서 해설해준 것인데 부글부글 끓는다며 그를 욕하는 목소리를 그때만큼 찾을 수가 없다.


그의 말에 논리적 오류가 있다는 것을 굳이 분석하지 않더라도 그는 자신이 법비출신임을 여지없이 그의 논법에서 보여준다. 일단 마지막 문구에서 그는 파란당 인사들의 자식 밀어주기 방식이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지적함과 동시에, 여차하면 전수조사라는 형태로 ‘서로 있는 패 없는 패 다 까버리는 수가 있어! 내가 입 벌리기 시작하면 너희들도 마이 다쳐!’라는 조폭식 협박의 점잖은 버전이 깔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참람된 언행과 별도로 청문회라는 공식적인 검증 역할을 했어야 하는 그 날의 설전은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엊그제 청문회에서 보여준 파란당의 의원들의 추궁은 보는 이들이 딱해 할 정도로 허접하기 그지없었고, 허술했으며, 어이가 없었다. 


돈 많은 집안 출신에 경성제대 법학과 출신의 강남 키드를 쓰러뜨릴 촌철살인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시험은 잘 보고 싶다면서 시험 전날 피곤해서 그냥 잠들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 성적은 잘 받아야겠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몽니를 부리는 학생을 보는 느낌이었다.


언론에 이미 모두 등장한 내용을 답습하는 정도의 엉성한 정보 수집능력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한정된 정보를 가지고 가장 문제가 되는 곳을 가장 아프게 때려야 하는 전략적 준비마저 하지 않고 나와 앉아서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중요한 시점에 이 모 씨라는 의미의 ‘이모 교수’를 엄마의 여자 형제 ‘이모’라고 묻는 허술함은 그들이 얼마나 안일하게 사상누각식으로 지금의 위험함을 스스로 초래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아니, 내가 흥분할 이유도 우습게, 그들은 이미 정치적인 계산법에 의해 그의 임명이 강행될 것이고 그 청문회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기에 그런 코미디를 찍었을 수도 있다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였다.


그 코미디 청문회가 있기 전이던 지난주 미국에서 사는 분께서 너무 속상하고 답답하다며 연락을 해오셨다. 자신이 활동하는 미국 한인 커뮤니티에서 한 후보자의 딸과 그의 사촌에 관한 한겨레 신문의 기사를 링크하며 논란이 증폭되자 해당 글이 일방적으로 삭제 되질 않나 그쪽의 법률대리인이라는 사람이 글을 내리지 않으면 모두 법적인 조치를 하겠다며 협박성 연락을 취해오는 등 군사정권에도 일어나지 않을 입 틀어막기의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하소연이었다.


한국의 공인된 신문사에서 게재된 신문 기사를 링크하는 것이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말은 법비들에게서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그들이 무언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방증하는 사실에 다름 아니었다.


기부금을 내고 돈으로 대학을 들어가는 것이 공식화되어 있는 미국에서조차 입시비리와 관련하여 브로커와 의뢰했던 학부모들, 그리고 해당 학생들이 대거 수사를 통해 처벌받은 사건이 연전에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 있었다. 

2019년 미국판 스카이캐슬로 유명해진 사건의 당사자들

다시 말해, 만약 이 사태가 미국에서 공식적인 수사의 대상이 되는 입시부정이라는 이슈가 공론화되고 정말로 그것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이미 입학을 한 이들마저 위태로울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일 수 있는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한다.


위의 빨간당 원내대표의 당당한 발언처럼 국회의원 자식들을 필두로 좀 산다고 하는 이들은 머리 안 좋고 노력하지 않는 자식들이 경성제대를 들어가지 못한다는 현타가 확인되면 자연스럽게 더 나은(?) 미국의 아이비리그라고 하는 대학을 준비시킨다. 만약 부정한 방법으로 입학한 것이 밝혀진다면 아직까지는 청교도 정신과 대중의 공론화에 민감한 미국에서는 엄정한 법의 잣대로 그들을 처벌한다. 


그러면 아직 원서를 내보지도 못한, 이제까지 그 전철을 밟으면 무난히 미국 유명 대학을 무난히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여겼던 고등학생의 핑크빛 미래는 그대로 무너져버리고 만다. 


만약 그들의 부모라면, 아니, 그들이라면 어찌 아니 두렵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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