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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12. 2022

예의 본질이 무엇인지 직접 보여주마.

아이의 행동과 똑같아 보이지만 똑같지 않은 바로 그것.

問人於他邦, 再拜而送之. 康子饋藥, 拜而受之, 曰: "丘未達, 不敢嘗.“
사람을 다른 나라에 보내어 〈안부를〉 물으실 적에는 두 번 절하고 보내셨다. 季康子가 藥을 보내오자, 孔子께서 절하여 받으시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藥의 성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감히 맛보지 못합니다.”

이 장은 공자가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는가에 대한 부분을 묘사한 것이다.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부에서는 사신에 대해 공자가 보였던 모습을, 후반부에서는 앞에서 잠시 등장했던 계강자에 대한 언급을 통해 공자가 다른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 어떤 예를 왜 그렇게 취했는가에 대한 묘사와 설명을 통해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먼저 사신을 보낼 때, 두 번 절을 했다고 설명하는 부분에 대해서 알아보자.


예법이 워낙 까다로운 부분이 있다고 일반인들이 느끼는 것은, 절을 하더라도 그 절의 방식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본래의 절이라고 하면, 현대인들은 세배나 상갓집에 가서 하는 땅바닥에 엎드려서 하는 형태의 큰 절말고는 없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고대 중국에서 절은 몇 가지 형태가 있다.


중국 대하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손을 모아 허리를 굽혀 엉덩이와 머리가 수평이 되도록 하는 절의 방식이 있고, 그저 손만 모아서 예의를 상대에게 보이는 것도 절이라고 한다. 땅에 닿지 않으면서 손만 모으는 것을 고문에서는 ‘공수(空手)’라고 하는데, 그에 반해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바닥에 손을 닿고 엎드려서 하는 것을 ‘배(拜)’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즉, ‘배수(拜手)’라고 하면 손을 땅바닥에 대고 하는 절을 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再拜(두 번 절했다)’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공수를 배로 간주하는 사례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바닥에 엎드려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예의를 갖춘 인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그 사신이 다른 나라의 군주를 만나러 가기 때문에 그 상대를 높이는 의미에서 그러한 예의를 갖췄다는 해석과 그저 가벼운 예를 보인 것으로 볼 때, 공자가 개인적으로 다른 나라에 심부름 정도를 보냈다는 해설이 모두 존재한다.


본래 예법에서 상대가 절을 하면 함께 답배(答拜)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지금 본문의 전반부에서 공자가 보이는 예에 대해서 길을 떠나는 사신은 답배(答拜)를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가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사자(使者)를 절하고 보내어 친히 만나보는 것처럼 하심은 공경하신 것이다.


이 주석에서는 형식적인 절의 의미보다는 왜 그렇게까지 정중한 예의를 보였는지에 대해 의미를 ‘친히 만나보는 것처럼 하였다’라고 풀이한다. 단순히 사신에 대한 예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예법을 보이는가에 대한 것이 이 장의 핵심임을 넌지시 보여주는 주석이라 하겠다.


후반부에 바로 이어 계강자(季康子)의 고사가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그러한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시키기 위한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데, 계강자(季康子)와 공자의 관계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누군지 의아해하는 학도들을 위해 그 당시 상황과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 먼저 다시 간략하게 상황 설명을 하고 이해하도록 하자.


당시 노나라의 실권자였던 계강자는 예를 갖추어 공자를 맞이하겠다는 의향을 표시한다. 당시 공자는 자신이 등용될 수 없는 상황에 실망하여 노나라를 떠나 세상을 주유한 지 무려 14년 만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공자는 귀국하여 국로(國老)의 대접을 받게 되지만 벼슬자리에 나서지는 않는다. 군주와 중신들의 자문에 응해주기는 했지만, 전적(典籍)의 정리와 제자 교육에 힘을 쓰며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그런데, 그런 계강자가 공자에게 이른바 몸에 좋은 탕약을 만들어 보내오자, 孔子가 그것을 받으면서 ‘그 약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재료가 무엇인지 알 수 없기에 먹을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거절한다. 신하의 입장임에는 변함이 없을 공자의 입장에서, 군주에 대한 예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단호박 같은 이 말이 왜 진심을 다하는 것이 예임을 보여준 전반부의 내용과 함께 한 장에 담겨 있는지를 의아하게 만드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의문을 품었을 배우는 자들을 위해 범씨(范祖禹(범조우))가 먼저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풀이하고 있어 도움이 된다.


“무릇(언제나) <높은 분이> 음식을 주면 반드시 맛보고 절하는데, 약의 성분을 알지 못하면 감히 맛볼 수 없고, 받고 먹지 않으면 남이 준 것을 헛되게 한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마실 수 있으면 마시고, 마실 수 없으면 마시지 않는 것이 모두 이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이 주석은 이제까지 고리타분하고 그저 형식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유학적 사고에 대한 현대인들의 어설픈 생각에 대해 얼음물을 끼얹으며 진정한 공자의 원시 유학은 그런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본래 현대인들이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으면서 오해하는 부분이 그저 윗사람이 무언가 음식을 내려주면 감사히 받아 그것을 맛보고 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공자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명확하게 그 약의 성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저 몸에 좋은 약이라 받을 수 없다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맛보지 않는 쪽을 선택하였다.


범 씨의 완곡한(?) 설명처럼 원래는 감사히 받아서 먹어야 하는데 먹지 않는다면 확실하게 먹지 않는 것도 똑같은 예법에 해당한다는 취지로 설명한다. 주석을 읽었는데 다시 고개를 갸웃하며 모호해지기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양씨(楊時(양시))가 그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명확하게 다음과 같은 해설을 부연한다.


“大夫(대부)가 주거든 절하고 받는 것은 禮(예)이고, 알지 못하면 감히 맛보지 못하는 것은 병을 삼감이고, 반드시 말씀한 것은 정직함이다.”


알지 못한 상태에서 맛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병을 삼감이라고 하였다. 현대식으로 풀자면, 아무리 좋은 약이라고 하여도 그 성분을 제대로 알고서 먹지 않으면 자신의 몸에 맞는지 어떤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함부로 경솔하게 먹을 수 없다고 명확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그런데 위 주석의 마지막에 그것을 ‘정직함’이라고 설명한 것이 이 장에서 주는 가르침에 해당하는 예의 본질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전반부에서 사신에게 재배(再拜)했던 것은 손을 바닥에 대고 절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직접 만나고 대했던 것과 같이 정성을 다 보였던 것도 예이고, 군주에 해당하는 이가 자신에게 내려준 약을 감히(?) 먹지 못하겠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예의 하나라고 넣은 것은, 예의 본질이 형식에 치중하여 그저 보여주기 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앞서 예법에 대한 것을 설명할 때, 다소 불편한 복식을 입는 이유에 대해 자신이 편한 것이 위주가 아니라 상대방 혹은 분위기에 맞춰 그를 존중하는 의미로 몸에 불편하지만 격식에 맞춰 예복을 입는 것이라고 하였다. 물론 그것도 예이다.


하지만, 이 장에서 보여주는 예의 본질에 의거하자면,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껍데기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예의 본질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공자는 말이 아닌 몸으로 직접 보여준다.


심지어 <논어>를 제대로 읽지 않은 현대인들마저도 사장님이 내려준 약을 감동해서 황송히 받으면서 ‘이 약이 어떤 성분이 들어있는지 알지 못하니까 저는 먹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드물 것이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주석에서 본 것처럼 전혀 연관성이 없을 듯한 ‘정직함’이 예의 본질로 이어지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과 실천이 가리키는 바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장을 읽을 때마다 ‘예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곤 한다. 상대에 대한 예의를 갖춘다면서 내 의향과 상관없이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것에 중심을 맞춘 것은 아니었는지에 대한 반성과 아울러 결국 예(禮)의 본질은 나의 본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일 때만이 진정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닌가를 다시금 반추하게 된다.


사람들은 말한다, 세상을 살면서 내가 느끼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한다면 그게 무슨 예가 될 수 있으며 그렇게 사는 것은 어린 아이들이나 하는 짓이지 다 큰 어른이 할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반문한다. 언제부터 자신의 본마음을 감추는 것이 ‘어른스러운’ 행동이라고 일컫게 된 것이냐고.

이 장에서 전반부에 사신을 보낸다는 내용은 당연히 ‘외교’라는 부분을 떠올리게 만든다.

본마음과 겉으로 행동이 다른 분야의 으뜸은 ‘외교’를 빼놓을 수가 없다. 서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으르렁거리던 사람들이 ‘외교’라는 명분 하에 서로에게 온갖 격식을 차리며 서로를 존중하는 듯하는 예를 선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예인가를 생각해보면, 이미 그들은 서로를 깍듯이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그것이 존중이나 공경의 의미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래서 공자는 이 장을 통해서 당시 최고의 권력자라는 계강자에게마저 형식적인 예의를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오히려 그것이 예의 가장 본질에 해당하는 행동임을 역설적으로 몸소 실천해준다.


심지어 계강자는 기존에 노나라를 떠나기 전 공자가 넌더리를 내며 비판했던 대부들의 참람된 행동을 한 이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기 조국을 떠나 부유하던 자신을 다시 정중하게 청하여 어른으로서 불러준 고마운 상대 아니었던가?


여기서 우리는 조금 더 들어가, 공자가 다소 충격적일 정도로 예의에 어긋나는 듯한 솔직한 모습을 보였는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처음 언뜻 이 내용을 접하게 되면 공자가 계강자를 너무 만만하게 보았다거나 자신을 국로(國老)로 대하는 계강자에게 오히려 너무 거만하게 군 것은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논어>를 껍데기만 읽은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의를 갖춰 선물을 받으면서 그 성분도 알지 못하는 약을 먹지 못하겠다고 대답한 공자의 솔직 담백함은 상대인 계강자를 가장 높이하고 공경하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해설을 하고 앉아 있느냐고 의아한가?


가만히 잘 생각해보자. 공자는 예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곁조차 안주는 깐깐하고 단호한 시대의 성인이었다. 예법에 어긋나 참람된 행동을 하는 이들에게 ‘나는 그들이 하는 짓을 잘 알지 못하겠다.’라며 아예 언급조차 기피했던 사람이었단 말이다.


그런 그가 자신을 생각해주는 군주의 따뜻한 마음에 대해 이러한 이유가 있어 이 약은 먹을 수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반대로 자신이 말하는 솔직한 거절의 이유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공자가 가르치는 예의 본질은 상대가 그것을 이해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공자가 자신이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여,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 상대가 자신을 이해하든 하지 못하든 오만하게 자신의 방식대로만 세상을 살았다면 결코 진정한 성인이라고 추앙받기 어려워을 것이다.

즉, 공자가 보인 거절의 행동은 그의 행동이 갖는 의미를 군주였던 계강자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일 것이라는 전제에서 가능했던 행동이다. 그리고 이제까지 공자의 실천을 통한 가르침을 통해 배우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행동하는 예의 본질을 이해할만한 수준으로 계강자를 허여(인정)하여 보여주는 방식에 다름 아닌 이중삼중의 고도의 가르침이 담긴 실천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앞서 말한 아이가 하는 행동과 성인이 하는 행동이 성인의 경지에 이르러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이유이다. 아이의 행동은 솔직 담백하고 정직하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는 담고 있지 않다. 즉, 자신의 감정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에 상대에 대해 의식하지 않는 것이 아이의 행동이다.


하지만, 성장하고 예의에 대해서 배우게 되고 그것을 깨닫고 수양을 통해 실천에 옮기게 되면 성인의 입장에서 보이는 정련된 태도를 보이게 된다. 하지만 어설프게 배운 자들은 예법에 정한 것을 자신의 의향이나 상대가 누구인지 상황이 어떠한지와 상관없이 그저 그 매뉴얼에 맞춰서 할 뿐 이른바 ‘영혼이 없는’ 접대 수준의 예의를 보일 뿐이다.


그런데 이 장에서 보여주는 공자가 강조한 예의 본질은,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솔직 담백함을 끄집어내어 상대를 존중하고 공경하는 형태에 게이지를 맞추는 것, 그것이 진정한 어른스러운 예의 본질임을 보여준다.


그 정수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단순하게 아이가 하는 행동처럼 솔직 담백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어찌 예의라고 할 수 있겠느냐며 반문을 던질 그 상황이, 오히려 그 솔직 담백하게 우러나오는 감정 자체가 상대를 존중하여 나와야 한다는 예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공자는 늘 똑같은 행동을 하고 실천을 통해 보여주지만, 자신의 낮은 수준에 갇힌 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저 예의범절이 어렵다 말하고 공자의 예가 고리타분하다며 근거 없는 소문을 퍼트리는 것이다. 당신은 과연 어느 쪽에 해당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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