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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17. 2022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 1

어쩌다 국민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추악한 왕가로 기억되었는가?

223번째 대가의 이야기.


1926년, 외가가 있는 런던의 브루튼가(Bruton Street) 17번지에서 조지 5세의 둘째 아들 요크 공작 앨버트 왕자와 요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의 장녀로 태어났다.

태어나고 한 달가량이 지난 5월, 버킹엄 궁전에서 성공회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녀에게는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Elizabeth Alexandra Mary)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엘리자베스는 어머니의 이름을 따온 것이고 알렉산드라는 증조할머니의 이름을, 메리는 할머니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이 긴 본명 대신 주로 ‘릴리벳(Lilibet)’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이는 아기가 자기 이름인 ‘엘리자베스’를 발음하기 어려워하며 스스로를 그렇게 불러서 그렇게 애칭이 되었다고 한다.

1929년의 엘리자베스 공주

1930년엔 여동생 마거릿 로즈가 태어났다. 당시 모든 왕족이 그러하였듯이 학교를 다니지 않고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920년대에 들어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었던 할아버지 조지 5세는 자주 병문안을 왔던 엘리자베스 공주를 매우 예뻐했다고 한다.


릴리벳이 태어났을 때만 해도 그녀가 고조할머니처럼 여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다음 왕위는 조지 5세와 메리 왕비의 큰 아들이었던 에드워드 왕세자가 이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31년 2월 2일에 찍은 가족사진.

조지 5세가 재위할 때 엘리자베스는 큰아버지 에드워드 왕세자, 아버지 앨버트 왕자의 뒤를 이어 왕위 계승 서열 3위였으나, 왕세자의 나이가 아직 젊고 나중에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의 예상대로 조지 5세가 죽자 정해진 수순대로 에드워드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가 바로 저 유명한 에드워드 8세이다. 그러나 에드워드 8세는 왕위에 오른 지 일 년도 못 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과감하게 왕위를 포기해버리는 이른바 ‘세기의 스캔들’을 일으킨다. 윈저공과 심슨 부인의 사랑이야기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 사건, 되시겠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차남이자 릴리벳의 아버지인 앨버트가 왕위를 물려받아야 할 차례가 왔다.


아무런 준비도 없던 앨버트는 당황했다. 게다가 그는 사람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말더듬이로 왕가에서 아웃사이더로 취급받던 사람이었다. 1936년 결국 앨버트가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조지 6세이다. 동시에 그의 딸, 엘리자베스는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추정 상속인이라 왕세녀에 해당하는 ‘Princess of Wales’ 작위를 받은 적이 없었지만 실질적인 차기 왕위 계승자임에는 분명했다. 만약 조지 6세가 아들을 낳았더라면 계승 서열이 밀려 여왕이 되지 못했겠지만 그에게서 아들은 태어나지 않았다.

영국 왕실 공식 초상화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 왕국의 여왕으로, 현재 전 세계에서 생존한 군주 및 국가원수들 중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군주 및 국가원수이자 가장 나이가 많은 이로,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국왕이며, 여왕으로서는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하고 있는 영국 윈저 왕조 제4대 여왕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의 이야기이다.


25세이던 1952년 2월 6일에 즉위하여 현재까지 96살의 나이로 무려 70년째 재위 중이다. 일반적으로는 영국 여왕이라고 부르지만 1952년 즉위한 이래 영국, 호주, 캐나다, 자메이카 등 15개 영연방 왕국들의 군주직을 겸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현재 재위 중인 15개국이 아닌 다른 17개국의 여왕이었다. 이 때문에 엘리자베스 2세는 역사상 왕의 칭호를 가장 많이 가졌던 군주이기도 하다.

왕이 될 것이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아버지가 국왕의 자리에 오르자, 졸지에 릴리벳의 교육문제가 중요해졌다. 릴리벳의 아버지는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이 되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릴리벳은 아버지, 조지 6세처럼 되지 않기 위해 이때부터 왕에게 필요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또 큰아버지처럼 되지 않기 위해 개인의 행복보다는 왕으로서의 책임이 더 중요하다는 것도 배워야 했다. 왕이 되기 위해 필요한 학문은 훌륭한 교사들 밑에서 배우면 그만이지만 왕으로서의 책임은 교사들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 때문이었다. 그런데 릴리벳에게는 군주로서의 책임을 가르쳐주기 위한 맞춤 선생님이 등장했다. 바로 릴리벳의 할머니인 메리 왕비와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왕비였다.


할머니 메리 왕비는 엄격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무엇보다 왕실의 위엄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기 아이들에게 대중 앞에서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쳤다.

아버지 조지 6세의 왕위 즉위직후 가족사진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보다 왕실의 위엄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왕비 역시 왕실의 의무가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사람이었다. 릴리벳이 열세 살이 되던 해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났다.


런던이 독일 비행기에게 폭격을 당하자, 릴리벳과 그녀의 동생 마가렛은 버킹검을 떠나 윈저성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자 일부 사람들이 엘리자베스 왕비에게 두 공주를 캐나다에 있는 하틀리 성으로 피난시키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 왕비는 이렇게 말하며 당당히 거절했다고 전한다.


“아이들이 내 곁을 떠나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나는 왕의 곁에 있어야만 해요. 그리고 왕께서는 결코 조국을 떠나지 않으실 겁니다.”
할머니, 메리 왕비

전쟁 도중 메리 왕비와 엘리자베스 왕비는 누구보다 먼저 모범을 보이고 애국심을 발휘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했던 것은 국민들에게 선심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리 신분이 높다고 해도 시대의 요구에 맞추어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그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위가 아닌, 그야말로 왕족임을 인증받을 수 있는 생존 전략에 다름 아니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릴리벳은 열여덟 살이 되자 아버지 조지 6세를 귀찮게 졸라댔다. 자신에게도 조국에 봉사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자신도 다른 이들과 똑같이 입대하여 직접 전쟁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딸을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 보낼 수 없었던 조지 6세는 결국 타협책을 찾아내 딸의 요구를 들어준다.


1945년 3월 4일 릴리벳은 영국 여자 국방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전투부대에 배치되는 대신 구호품 전달 서비스 부서(WATS; Women's Auxiliary Territorial Service)에 배치되었다. 1938년 창설된 WATS는 젊은 여자들로 구성된 부서였다. 원래 WATS는 부대 안의 취사와 심부름, 그리고 매점 관리를 맡아보던 곳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그러나 전쟁이 확대되자 WATS의 업무도 점점 커져 운전이나 탄약 관리까지 맡게 되었다. 릴리벳의 계급은 소위(Second Subaltern)였다. 그리고 그녀가 맡은 일은 군용 트럭을 모는 일이었다. 릴리벳은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트럭을 몰거나 탄약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지금까지 거친 일이라고는 해본 적 없었던 그녀는 흙바닥에 앉아 타이어를 바꾸고, 보닛을 열어 엔진을 수리했다. 그러나 릴리벳은 아주 즐겁게 그 일을 묵묵히 해냈다. 아마 그 시절이 그녀의 인생 중 유일하게 같은 또래 여자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은 것도 전혀 일리가 없는 말도 아니었다.

릴리벳은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유일한 친구라고는 동생 마가렛뿐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야만 했었다. 그래서 참혹한 전쟁이긴 했어도, 이때의 경험이 즐거웠던지 훗날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을 가정교사에게 교육시키는 대신 일반인들과 어울릴 수 있는 학교에 보내는 방식으로 왕가의 교육방식을 개선했다.


같은 해 5월 8일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세계 2차 대전이 끝났다. 그녀는 동생과 함께 시내로 뛰어나가 군중들과 함께 승리를 축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자신에게 닥쳐올 역사적 시련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었다. 하지만 과거 대영제국의 위상은 하루가 무섭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시대의 흐름이 종전과 함께 자유의 물결로 전 세계를 뒤흔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어 독립하였다.


그 후 실론, 버마, 말라야, 이집트, 로디지아가 잇달아 독립했다. 한때 영국은 전 세계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렸지만 이제 영국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이 엄청난 역사의 변화가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의 가운데에 들어가 몰락의 속도를 최대한 늦추어야 했다. 영국은 영국 연방을 통해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의 연대를 이끌어내려는 편법을 강구하여 최대한 과거의 영광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1949년 조지 6세는 영국 연방 국가들에 의해 영국 연방의 수장으로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53개국이나 되는 영국 연방 국가를 돌아다니며 결속을 다지기에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 대신 그 일을 맡은 것이 그의 후계자였던 릴리벳이었다.

말더듬이로 유명했던 아버지 조지 6세

시간이 흐를수록 조지 6세의 병은 점점 악화돼갔다. 1952년 마침내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죽음을 미처 슬퍼할 틈도 없이 의회는 그날로 그녀의 왕위를 인정했다. 그러나 대관식은 조지 6세의 장례식과 애도 기간이 끝난 뒤에 치르기로 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러나 안 좋은 일은 늘 손을 잡고 함께 다닌다고 했던 말처럼, 대관식을 치르기도 전에 그녀에게 또 한 차례의 슬픔이 찾아왔다. 엄격했지만 그녀를 매우 사랑했던 할머니 메리 왕비가 죽은 것이다. 끝까지 단호함을 잃지 않았던 할머니 메리 왕비는 죽으면서 이렇게 유언을 했다.


“절대로 내 장례식과 애도 기간 때문에 릴리벳의 대관식이 연기되는 일이 없도록 해라.”


그렇게 그녀의 유언은 지켜졌다. 연이은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속에서 릴리벳은 1953년 6월 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그녀는 그곳에서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영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신 앞에 맹세했다. 거기에는 이제까지 왕실을 뛰어다니던 귀여운 소녀, 릴리벳은 더 이상 없었다. 군주의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엘리자베스 2세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그녀의 사랑에 대해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시절 필리포스 왕자

엘리자베스는 1934년과 1937년에 그리스와 덴마크의 필리포스 왕자를 만났다. 두 사람은 크리스티안 9세를 기준으로 7촌, 빅토리아 여왕을 기준으로 8촌인 친척이기도 했다. 1939년 13살이던 엘리자베스 공주는 필립 왕자에게 사랑에 빠져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1947년 7월 9일 약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녀의 약혼은 몇몇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일단 필립 왕자는 지지해 줄 재정적인 기반도 없었고, 누나들은 나치당원과 결혼하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 라이언은 필립과의 결혼을 반대하였고, 특히 필립이 독일 혈통인 걸 항상 의심했으며 그를 ‘독일 놈’이라고 부르며 폄하했고 전한다.

1947년에 거행된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 공의 결혼식.

결혼 전 필립 왕자는 그리스 왕국과 덴마크의 왕자 작위를 포기하고 외가의 성인 ‘마운트배튼’을 사용하였으며, ‘에든버러 공작’ 작위를 받았다. 두 사람은 1947년 11월 20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민들의 반독일 감정이 심했던 상황이었던지라 필립 공의 누나들은 아무도 참석할 수 없었다.


결혼 후, 1년 만인 1948년에 첫 아이이자 후계자인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손을 낳았고, 2년 뒤인 1950년에는 둘째이자 장녀 앤 엘리자베스 앨리스 루이즈 공주를 낳았다. 둘째 앤 공주를 낳은 지 10년 만인 1960년에 차남이자 셋째인 앤드루 왕자를 낳았고, 셋째를 낳은 지 4년 후에 막내아들 에드워드 왕자를 출산했다.

1948년, 장남 찰스 왕세자를 안고있는 엘리자베스 2세.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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