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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18. 2022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 2

어쩌다 국민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추악한 왕가로 기억되었는가?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131


그녀는 해외에 나간 상태에서 여왕이 되어버린 유일한 국왕으로도 유명하다. 1952년 2월 6일 아버지 조지 6세가 암투병 도중 사망했을 때 그녀는 정작 아버지의 곁을 지키고 있지 못하고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케냐를 방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그대로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진 정도가 아니라 여왕이 된 케이스였던 것이다. 엘리자베스 2세가 묵었던 현지의 트리탑 호텔은 그러한 사연으로 도리어 굉장히 유명한 관광명소로 탈바꿈하였다. 여기에는 엘리자베스 2세와 에든버러 공작이 여기서 묵는 동안 왕위를 계승했다는 문구가 적힌 안내판까지 걸려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주변에 야생동물이 많아서 전설적 사냥꾼이자 자연보호운동가 짐 코벳 영국군 대령이 밤새 잠도 안자고 그녀의 경호를 섰던 사실도 유명한 일화로 전한다.


1971년에 찍은 가족사진.

그러나 그녀가 결혼한 지 5년도 안 되어 아버지 조지 6세가 사망하면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여왕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찰스 왕세자와 앤 공주에게 많은 애정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1953년엔 아이들을 두고 남편과 함께 영연방으로 6개월에 걸친 순방을 떠났다. 엘리자베스 2세는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하며 눈물을 보였으며, 훗날 순방을 마친 후 궁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상봉하던 순간 아이들이 자신에게 끔찍하게 예의바른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부모를 몰라보는 지경이었다며 가슴아픈 회고를 했다.


작년 4월 남편 필립 공이 99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74년간의 결혼 생활이 끝났다. 국왕의 배우자 자리가 비어있는 것은 빅토리아 여왕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영국의 입헌군주제가 이미 확립되어 근대 정치가 모두 안정된 형태로 운영하게 된 상태에서 즉위하였기 때문에 그녀의 정치적 권력은 행사하고 말고도 없는 상징적인 것이었다. 본인도 왕이 되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충분하게 학습하고 들었던 탓인지 정치에 관해서는 발언 한 마디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1965년에 거행된 윈스턴 처칠의 국장 이외에는 40년 가까이 영국 총리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다가 2013년에 거행된 마가렛 대처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 이례적이라고 보도가 되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는다고 착각해서는 금물이다. 공개적인 정치 불화를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는 국정에도 일부 관여하고 있어, 실은 영국을 움직이는 흑막이 아닐까 싶은 국민들의 암묵적 의구심이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내각불신임으로 인해 총리가 사퇴했을 때 국왕의 특권으로 총리를 2번이나 자신이 임명한 경력이 있고, 브렉시트 국민 투표에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막판에 탈퇴파들이 뒤집기에 성공하도록 개입했다는 의혹도 산 바 있는 것이 그 증거라 하겠다.


이처럼 정치에 일부 개입하는가 하면, 전쟁 등의 민감한 사안의 경우 비공식적인 공식절차로 여왕의 승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물론 여왕이 이를 거부한 적은 한 번도 없긴 했지만, 불만을 표시한 적은 몇 번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으로 마가렛 대처의 포클랜드 전쟁 개전선언인 아르헨티나 선전포고 결의안에 대해 엘리자베스 2세는 거부권까지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은 확실하게 반대한다는 불만의 의사를 표현한 적이 있다. 이른바 ‘부적절하다’하다는 의견의 표명만으로도 거부권 행사라고 볼만한 것인데, 당시 영국 여론이 전쟁 여론으로 기울어졌던 상황이라 포클랜드 전쟁을 막지는 않는 선에서 그저 ‘불만 의사’를 표시하는 정도로 그쳤다.

2021년 2월 <더 가디언>지가 ‘여왕의 동의권(Queen's Consent)’에 관한 보도를 뒤늦게 언급하며 이 부분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주목된 바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동의권이란, 국왕의 권한이나 사적 권리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법안이 입안될 경우 국왕이 동의해야 비로소 의회에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는 절차를 말한다. 이미 의회를 통과한 법안을 여왕의 이름으로 승인해 법적 효력을 갖도록 하는 ‘국왕 재가(Royal Assent)’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총리실 문서가 기밀해제되면서 여왕 또는 찰스 왕세자가 동의권을 행사하여 1952년부터 1,063건의 법안을 입법 절차 전에 검토했다는 사실이 보도에 의해 밝혀졌다. <더 가디언>지 측의 보도에 따르자면, 여왕이 왕실과 관련이 없거나 적은 법안에 대해서도 사전에 검토하는 행위 그 자체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는 것이다.


1986년 연어법이나 2019년 주차 관련 법 등이 그 사례에 적시되었다. 그리고 이 중 최소 4건의 법안은 왕실 측이 불만을 표시하여 그대로 통과되지 못하고 불만이 반영되어 수정되었다고 한다. 또,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통과된 신재생에너지 사용 촉진법을 사전에 검토하여 신재생에너지 사용 의무에서 국가원수를 면제하는 조항을 추가시켰다는 보도도 나왔다. 찰스와 윌리엄 왕세손이 탄소배출 절감 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스코틀랜드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여왕이 이율배반적인 모순된 행태를 보였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왕실 측 대변인은 여왕은 한 번도 동의 거부를 통해 법안을 거부한 적이 없다며 보도 사실에 대해 공식적으로 부인하였다. 또 동의권 행사 여부는 여왕의 요청이 아닌 의회의 결정으로, 해당 정부 부처가 왕실에 의견을 묻는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미 암묵적으로 사실이 되어버린 엘리자베스 2세의 실질적인 권력 행사는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영국은 전세계 역사상 통치 전략이 가장 교묘하고 정치적인 암투가 얽기섥기 얽혀있어 최첨단의 복잡다단한 정치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국가로 통한다. 때문에 이 논란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표면적인 법의 조항을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아닌, 영국 국민들의 심리에 대한 이해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영국인들은 귀족과 평민이 법적으로 평등한 신분제를 인정하고, 왕족들과 귀족들에게 사회적으로 부여된 의무를 이행한다면 그들의 권위를 인정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한 전근대적 사회제대를 현대에도 흡수하여 일정부분 국민정서상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이른바 ‘그들은 자격이 있기에 우리와는 다르다.’라는 것을 명확하게 한 것이다. 이런 개념 탓과 2차대전을 성공적으로 치루어낸 핏줄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여전히 영국 대중들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각인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법적으로 보장받는 권한과 별개로 초월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영국 총리들의 중요한 정치적 업무 중 하나가 바로 여왕을 알현하여 보고서를 올리는 것인데, 이 역시 다양한 총리만큼이나 에피소드가 많다. 그녀가 즉위하고 파트너(?)가 된 첫 총리인 윈스턴 처칠은 친한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시가를 피우면서 대담하는가 하면, 마가렛 대처가 왔을 때는 대처가 자신을 존경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15분쯤 멀뚱히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상하관계를 인식하게 하는 유치한(?) 방법을 쓰기도 했다.


포클랜드 전쟁 때 마가렛 대처의 전쟁 준비안을 승인한 뒤에 ‘내 아들이 이번 전쟁에 참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솔직히 내키지는 않았다. 그녀(대처 총리)가 너무 서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말하지 않았다.’라고 이례적인 의사를 언론에 흘리기까지 했다. 같은 여성이면서도 대처와는 상당히 미묘한 신경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녀의 신자유주의정책 등 정책 전반이 내키지가 않는다며 아침마다 “오늘은 그녀가 얼마나 내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했는가?”라고 디스하는 것이 일상이었다는 카더라 소문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마가렛 대처가 세상을 떠난 2013년 4월 17일 엄수된 그녀의 장례식에, 처칠 이후 처음으로 왕실자격으로 참석하여 조문의 의사를 표현하였다. 새로 임명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처음으로 여왕을 알현했을 때 다짜고짜 “총리직을 맡게 된 걸 축하하오. 과인은 12명의 영국 총리를 만났소만.”이라고 말해 캐머런의 기를 초장부터 죽였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영국인들에게 유명한 뒷이야기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을 앞둔 시기에 영국군 여군 부대인 ATS에 중위(subaltern)로 입대해 대위(junior commander)로, 보급차량 운행이라는 임무를 3주정도 한 것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전쟁에 참전했던 유일한 왕족으로 인정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9년에 열린 노르망디 상륙작전 65주년 기념식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초대하지 않는 사건이 벌어진 적이 있다. 당연히 자신의 업적이라고 자랑스러워하던 여왕은 격노하였고, 영국 국민들마저 국민적인 분노가 일어나는 등 외교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전쟁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정작 노르망디에서 죽어나간 건 미군과 영국군이었다. 프랑스는 정작 큰 피해를 입었다고 볼 수도 없는데 그 행사를 하며 당시 국가원수 중 유일한 참전용사이자 영국군의 총사령관인 엘리자베스 2세를 초대하지 않는 행위는, 여왕을 포함한 영국의 입장에서보면 그야말로 여왕을 패싱함으로서 망신을 준 것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그런 총체적인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에도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왕이 오는 건 환영하지만, 노르망디 기념식은 전통적으로 미국-프랑스 간의 행사이다.”라는 발언을 해서 더욱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당시 눈치가 빨랐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센스로 그가 중재에 나서면서 대강 넘어가긴 했지만, 결국 여왕은 자신이 가는 대신 장남 찰스 왕세자를 보냈다. 이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집권기인 2014년의 D-Day 70주년 기념식에서는 직접 참석하여 그 헤프닝은 겨우 넘어갔다. 2019년 75주년 기념식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고령인 점을 감안해, 영국-프랑스 간 합의를 통해 프랑스와 영국에서 나눠서 시행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프랑스 쪽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고 영국쪽 행사에만 참석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나름 1990년대까지는 국민들이 영국왕실에 대한 존경심까지는 아니더라도 노골적으로 비난하거나 폄하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정도는 아니었다. 예컨대, 1992년에 발생한 윈저성 대화재의 복구사업에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갈 것이라 추산되어 국민들의 반발이 일어나자 여왕 스스로 왕실이 가진 면세 특권을 포기했다. 때문에 그 이후로 영국 왕실은 지금까지 계속 납세의 의무를 지고 있다.

 

그러나 2017년 11월 여왕이 본인 사유 재산을 관리하는 랭커스터 공국을 통해서 일부 자산을 조세피난처에 투자했다는 사실이 <파라다이스 페이퍼스>의 폭로로 밝혀지자, 그녀가 이전에 쌓아왔던 국민들에게 인정받는 대인배라는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이 가고 말았다. 랭커스터 공국은 두 피난처 모두 영국의 해외 영토며 투자 자체는 불법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이미 영국 국민들은 왕실에 대한 신뢰를 모두 박살내버린 후였다.

무엇보다 왕실에 대한 민낯이 드러나고 여왕에 대한 신뢰가 박살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고부갈등으로 인한 것이었다. 맏며느리였던 다이애나 스펜서와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나라 안팎에서 여왕을 비난하는 여론이 종종 나왔고, 다이애나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직후 차가울 정도로 무관심하게 대응하자 급기야는 왕실 폐지를 주장하는 소리까지 터져나오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다소 잠잠해진 상황이지만 이때의 불씨가 아직도 잠복 중이고 특히 최근에 관련 사건을 다룬 영화들이 다시 재조명되면서, 영국의 공화주의자들도 여왕이 타계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1999년 영연방 왕국의 일원이자 영연방 주요 회원국인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여왕을 '호주의 군주'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헌법을 바꿔 공화정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운동 끝에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는 54.87% vs 45.13%로, 과반수의 호주 국민들이 왕정 존속을 선택해 호주의 군주직을 유지하게 됐다. 당시 공화정 전환 운동의 지도자였던 맬컴 턴불은 이후 공화정 전환 운동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이후 여러 정치활동을 거쳐 2015년 결국에는 호주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됐다.    


당시 선거결과에서 알 수 있다시피, 호주 국민들의 여왕에 대한 애정이 아직 식지 않았기 때문에 총리 당선 이후 계속되는 공화주의자들의 압박에도 공화정 전환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여왕이 만약 가까운 시일 안에 타계할 경우 맬컴 턴불 총리가 호주 왕정 유지에 불안 요소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다. 하지만 2018년에 턴불은 퇴임했고, 후임 총리 모리슨은 본인이 근왕파임을 밝혀 향후 호주에서 여왕의 뒷통수를 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편. 의도치않게 호주의 공화정 국민 투표의 여파가 캐나다, 뉴질랜드, 자메이카 등 다른 영연방 왕국들로 퍼졌다. 해당 국가들의 여론 조사 등을 봤을 때 여왕 사후 왕위 계승의 향방에 따라 영연방 왕국들의 군주제 폐지 여부가 결정될 확률이 높다. 이와는 별도로 2010년대 들어 스코틀랜드가 분리독립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400년간 이어온 연합왕국의 왕관이 자기 대에서 끝날지도 모른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2년 10월, 영국 정부와 스코틀랜드가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를 시행하기로 합의하면서 여왕의 우려는 현실이 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지기도 했다.

 

2014년 투표를 앞두고 영국 정가에서는 스코틀랜드 국민들에게 "앞으로 잘해줄 테니까 제발 남아줘요"하며 읍소했고, 여러 정치인들은 여왕에게 "폐하 한마디라도 해주세요."라며 호소했지만, 그녀의 개인적인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립 문제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선택에 따라야 한다"며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결과적으로 이 선거역시 부결되었다.


<더 선>의 주장에 따르면 브렉시트 투표 직전 식사 자리에서 유럽연합 잔류에 대한 회의적인 뉘앙스의 발언이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탈퇴파에서 이를 막판 캠페인에 활용하기도 했다. 여왕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영국이 유럽의 일부여야만 하는 이유 3가지를 대라."고 대놓고(?) 찔러말했다는 것이다. '여왕이 브렉시트를 두둔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구체적 언급이 보도된 것이다.   

이에 언론 규제 단체인 IPSO는 <더 선>의 기사 제목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식으로 발표했지만, <더 선>은 두 명의 소식통을 통해서 여왕이 당시 부총리였던 닉 클레그한테 말했다고 명확하게 보도를 굽히지 않았다. 닉 클레그는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마이클 고브가 <더 선>에 이와 같은 사실을 전한 소식통 중 한 명이라고 지적했으나, 마이클 고브는 그에 대한 대답을 회피했다. 닉 클레그는 여왕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일개 부총리한테 이런 중대한 사건에 대해 논평을 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고 대답하면서, <더 선>의 주장을 보증해주기를 거절했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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