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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23. 2022

어렵게 자수성가하여 판사가 되어 정치인으로까지 나섰지만

자신의 사욕을 위해 빨갱이 열풍을 일으켜 결국 스스로 불타버리다.

224번째 대가의 이야기.


1908년, 미국 위스콘신 주의 북동부에 있는 작은 농장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집안은 그렇게 빈곤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일곱이나 되는 아이들을 모두 대학에 보낼 만큼 여유롭지도 않았고, 당시 분위기가 대학을 그렇게 모두가 갈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채소 장사를 하며 돈을 벌어서 학비를 마련했고, 20세가 되어서야 고등학교를 갈 수 있었고, 속성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23세가 되었을 때에서야 드디어 밀워키에 있는 예수회 계통의 마케트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법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여 위스콘신 주의 지방 판사가 되었다.


지방 판사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그는 아주 유명한 낙농업에 관련된 재판의 판결을 하게 되면서 단숨에 인지도를 끌어올리게 된다. 당시 이슈가 되었던 재판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당시 미 연방정부가 농산물의 가격을 어느 일정 기준 이하로 팔지 못하도록 최저가격제를 정하고 있었다. 이때 어느 낙농업자가 기준보다 낮은 가격으로 우유를 팔다가 연방정부에게 적발되어 검찰에 기소가 되었다. 이때 재판을 맡았던 그가 다음과 같은 짧고 강력한 판결문을 써서 이 사건을 종결시킨다.


“우유를 값싸게 파는 것은 소비자에게 좋은 일인데 이런 재판을 하는 것은 시간낭비다!”


상인들의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은 지역에서 상인들에게 유리한 판결문을 작성한 것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그야말로 시골이던 위스콘신에서 그는 졸지에 큰 인기를 모으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아마도 이 즈음 그는 이미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처음에 자신의 이념이 민주당과 일치한다면 그쪽을 택했고,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열렬히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2년에 자원입대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전후로 성향이 바뀌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판사로 돌아와, 참전 이전 큰 인기를 모았던 판사였다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지역 의원으로 정계를 입문하라는 권유를 받게 되었는데 바뀐 정치적 성향을 토대로 1944년에는 공화당으로 상원의원 선거에 나선다.


여기서는 고배를 마셨지만, 다시 1946년 선거에서 본래 공화당이었다가 진보당을 만들어 나갔던 거물 라폴레트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미국을 공산주의로부터 지킨다는 명분 하에 수많은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어 매장해 버리는 행위들을 저질렀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매카시즘'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용어를 탄생시키게 된 미합중국 제80-85대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Joseph Raymond McCarthy)의 이야기이다.


그는 상원의 비미활동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레드 퍼지(Red Purge)’에 나서 반공 선풍을 일으키며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매카시즘'이라는 마녀사냥의 주인공으로 맹활약하게 된다.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극렬 반공 활동을 벌여, 조금이라도 사회 비판적 혹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성향이 있다 싶으면 무섭게 청문회에 소환하고 다짜고짜 소련 스파이로 몰아붙여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킨 것으로 악명 높았다.


그의 마녀사냥에 희생당했던 사람들 중 유명한 사람으로는 원자폭탄을 개발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을 들 수 있다.

사실 위스콘신이 지금도 중심 도시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앞서 설명했던 바와 같이 당시에는 정치계에서 보면, 촌구석에 가까운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의 당선은 진보주의자로 유명했던 로버트 M. 라폴레트와 로버트 라폴레트 주니어로 이어지는 부자의 40년 민주당 정치세력을 끝장내버린 사건으로 지금까지 그 지역에서는 회자되고 있다.


라폴레트 주니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위스콘신 지역당으로 진보당을 이끌었지만 1947년에는 선거를 위해 자신들의 지지자들과 함께 급히 공화당에 복당한 묘한 상태였다. 그렇게까지 정치에 미련을 가지고 있던 그의 세력에 대해, 이전 선거에서 낙선했던 매카시는 라폴레트 주니어를 불과 1.3%, 5천 표 차이로 꺾고 공화당 후보가 나서게 된다.


매카시는 자신이 무려 해병대원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경력을 강조하며 '테일 거너 조(Tail Gunner Joe; 전투기 뒤에 타고 기관총을 쏘는 보직을 뜻하는 단어로, 그가 전쟁 중 수행했던 보직 명칭)'가 국회에 필요하다고 선전했고 이 카피는 그가 판사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단순 명료한 메시지였기에 바로 먹혀들어간 것이었다.


사실 그는 이때 이미 훗날 ‘매카시즘’을 불러오게 될 주인공으로서의 자질과 면모를 충분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라폴레트가 자원입대하지 않은 점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그의 ‘비애국적’인 면과 자신의 ‘뛰어난 공로(전쟁에서 세운 수훈을 마구 부풀렸다)’를 대비시켰고, 또 다른 경쟁자인 민주당의 맥머레이에 대해서는 ‘빨갱이 냄새가 난다’며 색깔론까지 들고 나오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마침내 매카시는 꿈에 그리던 상원의원이 되어 워싱턴에 당당히 입성했다. 그러나 워싱턴의 쟁쟁한 정치 거물들의 눈에 그는 먼 시골에서 갓 올라온 ‘듣보잡’ 일뿐이었다.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야심이 있기 마련이었겠지만, 출신도 경력도 시원찮은 이 위스콘신의 풋내기만큼 어마어마한 야심을 가진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는 미국 정계에서 비주류인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역으로 아일랜드계 정치집단에서 많은 후원을 받았으며, 특히 소속 정당은 달랐지만, 역시 아일랜드계였던 케네디 가의 지원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원의원에 당선된 매카시는 강경 보수 성향답게 의회 내 보수연합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여기까지 보면, 나름 촌구석의 넉넉지 못한 형편의 가정에서 태어나 열심히 자수성가하여 자신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겨우 대학까지 나와 무려 지방 판사까지 올라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으며 정치계에 입성한 자수성가 정치인의 모범적인 일화처럼 포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정치계로 입문하게 되면서 그의 본성을 드러내며 바닥을 보이고 마는 패착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때까지 매카시는 정치적으로 햇병아리에 불과한 위스콘신 주를 대표하는 초선 상원의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권력기반을 튼튼히 다지고 자신을 일약 정치적 거물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획기적인 편법(?)을 모색하던 중 정말로 해서는 안될 금단의 방법을 발견하고 유레카를 외치고 만다. 그것이 바로 ‘반공 선동’이었다.

당시 미국은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국을 건국한 사실과 소련의 원폭실험 등으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심이 과대하게 퍼져있었고 마침 하늘이 도와주듯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맞붙은 6.25 전쟁이 터진다. 매카시는 그 시기적 흐름을 아주 잘 읽었고 자신이 지방에서 판사를 하던 때에 시골에서 하던 방식으로 사람들이 가장 단순한 메시지와 공격에 열광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는 자신과 사상이 다르면 바로 사상검증에 들어갔으며 그의 검증을 통과하지 못할 시 그 대상은 (적어도 판사식으로 그가 규정하기에는) 빨갱이였으며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켜버리는 방식을 취했다. 그가 매카시즘으로 알려진 극렬 반공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1950년 2월 9일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휠링에서 열린 공화당 집회였다.


“여기 바로, 내 손에! 205명의 공산당원의 명단이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국무부에서 미국의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매카시는 종이뭉치를 공중에 확 뿌리면서 위와 같이 외쳤다. 국무부가 ‘빨갱이 소굴’이라는 매카시의 선언은 정치인들에게는 새로울 게 없었으나, 그들과 다른 방식으로 평온한(?) 사고방식에 익숙해 있던 대중들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파문을 일으켰다.

앞서 간략히 설명한 바와 같이 시대적 흐름은 대중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상태였기에 매카시의 선동은 그가 그 흐름을 이용하려고 작정했던 만큼이나 쉽게 먹힐만한 조건을 충분히 숙성시킨 상태였다. 앞서 이 시리즈에서 다룬 맥아더의 실책으로 인해 한국전쟁에서 자유진영이 극동에서 계속 밀리는 것은 국무부를 중심으로 붉은 늑대들이 양의 탈을 쓴 채 암약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그럴듯하게 먹혀들어갈 만한 틈을 만들어준 것이었다.


그러나 매카시가 공중에 뿌린 종이의 내용은 정작 허접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정작 그의 선동적인 말에 반해 그 종이를 현장에서 집어 들고 읽은 사람들은 어이가 없었다. 그것은 공산당원의 명단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종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시 매카시의 머릿속에조차 그런 명단은 없었다. 매카시는 얼마 후 205명에서 57명이라고 공산당원의 숫자를 바꾸었고, 마침내 발표한 명단에는 국무부에 시험만 쳤을 뿐 직원이 되지 못한 사람, 퇴직한 사람, 국무부에서 일하기는 하지만 정책 수립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 등이 수두룩했다. 매카시는 이런 식으로 밑도 끝도 없는 과장과 왜곡을 즐겨 썼다.


사실 그가 발표한 명단은 예전에 FBI에서 조사한 명단을 토대로 한 것이었는데, 원래 명단에서 ‘사회주의자’라고 기록한 것을 ‘공산당원’으로, ‘러시아계’는 ‘러시아인’으로, ‘가능성이 있다’는 ‘확실하다’로 바꿔 놓았다.

여기서 당신이 확실히 이해하고 넘어가야만 할 당시 사회 분위기와 사실이 있다. 매카시즘이 일어나기 훨씬 전인 1930년대부터, 미국 정부와 부속 기관에 상당수의 사회주의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워싱턴의 정가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주의자 공무원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런 공무원이 국익에 반하는 행동을 했느냐이다.


사실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였던 미국에서 젊은 시절 사회주의 서적을 접하고 그 주장에 공감한 사람들이 있다고 근본적으로 문제 될 일은 없었고, 그런 사람이 행정부에서 근무한다고 특별히 법에 저촉되거나 큰일이 일어날 것도 아니었다. 모스크바의 간첩으로 국가에 대한 이적행위를 하고 있다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으나, 미 연방수사국(FBI)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수사를 해도 이렇다 할 문제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아무런 문제가 없는 내용을 가지고 말도 안 되는 각본을 짜고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가 단순 무식하게 저지른 만행이 한 나라를 마녀사냥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말게 된 것이다.


그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서류가방에 그 명단이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는 이후에도 기자들의 질문에 항상 웃으면서 이 안에 모든 이름이 있다!라고만 계속 주장했다. 물론 가방을 열어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중의 초미의 관심 속에서 여러 차례 청문회가 열리고, 굵직굵직한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빨갱이라는 혐의를 받고 불려 나왔다. 그중에는 전후 서유럽의 부흥을 가져온 ‘마셜 플랜’의 주인공인 조지 마셜 전 국무장관과 미국 원자폭탄 개발의 주역이었던 오펜하이머도 있었다.

매카시즘의 대상도 국무부를 넘어 연방정부 전체, 그리고 여러 기업이나 사회단체까지 뻗어나갔다. 불안과 의심의 문화가 사회 구석구석에 젖어들면서, 자유국가 미국의 국민은 마음 놓고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저런 말을 하다니, 빨갱이 아냐?”하는 의심을 받을 수 있었기에. 빨갱이 노이로제가 심해지면서 심지어 이웃조차 못 믿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으로 치닫고 한국전쟁의 끝이 가까워지며 매카시즘은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매카시의 폭로가 주로 알맹이가 없는 억측임이 뚜렷해지기도 했고, 이를 민주당 정부를 공격하는 호재로 삼았던 공화당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오히려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 자신이 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서 자신과 함께 싸웠던 전우들을 매카시가 마구 공격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1954년 6월 9일, 매카시는 이후 ‘육군-매카시 청문회’라고 불리게 되는 청문회장에서 평소처럼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청문회가 열린 지 30일째였던 그날, 그는 육군 내부에 ‘빨갱이’들이 우글거리고 있다는 그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육군의 법률 고문인 조셉 웰치를 걸고넘어졌다.


웰치는 프레드 피셔라는 젊은 변호사의 후원자인데, 피셔가 대학생이던 때 ‘좌파적인’ 법률인 조합에 잠깐 몸담았다는 것이다. 매카시는 이처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야기로 웰치를 보기 좋게 낚았다고 믿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때 웰치가 목소리를 높였다.

오른쪽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웰치이다.
“의원님, 저는 이제껏 꿈에도 몰랐습니다. 한 무고한 젊은이를 그렇게 갈가리 찢을 정도로 당신이 그토록 잔인하고, 그렇게나 무지한 사람이라는 것을. (…) 저는 스스로를 신사라고 생각합니다만, 당신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을 누가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얼굴이 벌게진 매카시가 뭐라고 반박하려 하자, 웰치는 무시해 버리고 말을 이었다.


“죄 없는 사람을 정치적으로 살해하려는 짓은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의원님, 그만하면 충분히 하셨습니다. 당신은 예의도 모르십니까?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겁니까?”


매카시는 뭐라고 다시 반박하려 했다. 그러나 웰치는 청문회 의장에게 고개를 돌리고 그만 퇴장하고 싶다고 요청해버렸다. 의장이 허락하고 휴회를 선언하자 웰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매카시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걸어 나갔다.

조셉 웰치 변호사

그때 박수 소리가 터졌다. 몇 년 동안이나 미국을 의심과 불안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장본인, 그의 면전에 대고 마침내 속 시원한 소리를 내뱉은 사람에게 보내는 열렬한 환영과 지지의 박수였다. 미국 전역에 생중계되던 청문회 현장을 지켜보던 미국 국민들도 그 박수 소리를 또렷이 들었다. 조셉 매카시는 그때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육군-매카시 청문회를 고비로 매카시의 영향력은 급락했으며, 개인적으로 저지른 비리가 폭로되면서 그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사망했다. 실의에 빠진 그는 술로 나날을 보내다 간염에 걸려 1957년 5월 2일, 48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단순하고 무식한 방법으로 자신의 사욕을 채우겠다는 매카시는 빠르게 부상했다가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매카시즘은 쉽게 죽지 않았다. “우리 내부의 빨갱이들을 조심하라”는 것은 이후 배리 골드워터,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등 중요한 보수 정치인들의 모토였으며 냉전 시대 내내 다른 자유진영 국가에서도 광풍을 초래했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 매카시즘을 망나니의 칼로 사용했던 나라가 당신들의 대한민국이었다.


분단과 전쟁을 경험한 한국은 “설령 이적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사회주의를 따르는 자체가 범죄다”라는 매카시즘의 강령을 너무도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국민의 기본권에서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는 대한민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바리 정권에 맘에 들지 않는 이들을 처단하는 아주 좋은 도구로 활용되었다.


군바리 정권이 사라져 버린지 어언 몇 년이나 지났지만 군바리의 딸이 대통령이 되어서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나름 보수주의자라고 하는 것들은 빨간당의 이름으로 지금 이 시간까지도 좌파 운운하며 매카시즘을 활용하지 못해 안달이다.

빨간당에 속해 있는 자들 중에 특정 시골 촌구석에서 향판(한국에서는 시골 지역에서만 오래 판사 역할을 한 자들을 이렇게 부른다) 출신으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매카시와 같은 행보를 보이는 자들이 꾸준히 있어왔다. (‘꾸준히’가 이런 때 쓰는 말이 아닌데 참 슬퍼하겠다.)


결국 대한민국에서 개돼지로 이미 정의된(?), 대중들의 의심과 야심과 증오심이 어우러져 매카시즘이라는 마녀사냥을 탄생시켰다. 오늘 내가 이 시골 출신의 무식하기 그지없는 자의 일생과 그 처참한 최후를 실패로 보여준 것은 당신은 전혀 그런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콕 짚어주기 위해서이다.


이른바 브런치파 <사회 정의 실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인생에 실패한 대가들 이야기>시리즈에 언급하기 시작한 이들이 긍정적인 시선으로 당신의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보여주는 사례가 아님을 눈치챈 이들이 있기를 바란다. 오늘 살펴본 매카시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물론이고 맥아더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시작부터가 그렇게 썩고 잘못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살펴보았다.


어느 시점이 있다. 그들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사욕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삐뚤어지기 시작하며 아슬아슬한 실패의 노선으로 올라타게 되는 순간이 말이다. 처음부터 타고난 악인이 없듯이 어느 순간 어떤 잘못된 판단은 조금씩 아주 서서히 그 사람을 그릇된 실패의 길로 물들이기 시작하고, 그 잘못은 단순히 한 사람의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주변과 그 사회를 좀 먹어 들어간다.

당신이 선량한 소시민으로 누군가의 것을 욕심내거나 탐하지 않고 착실하게 살아왔다고 자위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불안해하는 것 다 안다.


아무도 모를지라도 당신이 알고 하늘이 알고, 내가 안다.


아주 작은 사회의 부정을 바로 잡자고 하는 목소리에도 움찔하며 실천을 보이지 못하는 당신이 과연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라고 생각하나? 아니 당신의 삶이, 그 옳지 못했던, 적당히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라며 당신이 슬쩍슬쩍 조금씩 이탈했던 정도(正道)에서의 이탈이 당신의 마음에 부담으로, 불편함으로 다가오는 것임을 당신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당신의 가족에게 안 그랬고, 당신의 직장에서 사람 좋게 인정받았다고 자위하며 부정하고 싶은가?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만약 정말로 당신이 그렇게 선량한 소시민이었다면, 잘못된 일에 대해 탄원서 한 장 쓰고, 항의 전화 하나 하고, 그 일을 서로 공유하기 위해 인터넷과 SNS에 글 옮기는 것 하나에 ‘죄송합니다. 함께 하지 못해서.’라던가, ‘죄송합니다. 제가 나이 먹고 다시 취직했는데 위치가 위치인지라...’라는 따위의 가당찮은 핑계를 대며 눈을 감고 근사한 어른인 척 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크고 작은 불안과 불만을 안고 살아간다. 그 불안과 불만이 어떤 악의 세력이 꾸민 음모가 아닌가 하는 상상이 일고, 그것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세력들이 있을 때, 오늘 봤던 매카시는 몇 번이고 저 불구덩이 지옥에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악마를 키워주고 부활시키는 자양분은 언제나 배운 대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구차한 변명을 대는 당신과 같은 이들의 비겁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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