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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20. 2022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 4

어쩌다 국민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추악한 왕가로 기억되었는가?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138


하지만, 이와 같은 왕실측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건강 이상설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있는 중이다. 필립공과 함께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한 여왕은 평소 머물던 윈저성이 코로나19로 폐쇄됨에 따라 건강 상태를 알 수 없었다는 내용도 보도되었으며, 지난해 1월 여왕이 매해 방문하던 샌드링엄 여성 연구소를 ‘사소한 감기’를 이유로 가지 못한 것도 건강 이상 징후였다는 의혹이 증폭되었었다.


더불어 왕실에서 독립해 미국에서 거주 중인 손자 해리 왕자가 여왕을 걱정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오면서 여왕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의혹이 계속 확산된 바 있다. 그러나 이후 런던 근교 윈저성에서 여왕이 직접 재규어 차량을 운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건강 이상설은 현재로써는 사실무근이거나 적어도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2022년 2월, 아들 찰스 왕세자가 코로나19에 재감염되었다. 찰스 왕세자가 여왕을 만난 지 48시간이 지나지 않아 양성 판정을 받았기 때문에 여왕의 감염 여부를 놓고 많은 우려가 있었지만, 다행히 여왕은 음성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며칠 후 며느리 카밀라 파커 보울스도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아 곧바로 격리에 들어갔다. 카밀라는 찰스 왕세자와 밀접 접촉자였지만, 이미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모두 마친 데다가 음성 판정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자가 격리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양성 판정을 받기 전까지 대외 활동을 정상적으로 수행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카밀라가 여왕을 만났는지에 대한 여부가 알려지지 않았으며, 버킹엄 궁전 측에서 여왕이 '의료 프라이버시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밝히면서 여왕이 코로나19 검사를 받았는지, 검사를 받았다면 결과가 어땠는지에 대한 자세한 논평을 거부했다. <데일리 메일> 보도 이후 여왕은 화상 접견 등 일부 비대면 업무를 재개했으나, 버킹엄 궁전 측에서는 여전히 여왕의 코로나19 감염 여부와 자가격리 조치 여부에 대해서 논평을 거부했다고 한다.

2022년 2월 20일, 버킹엄 궁에서 여왕이 코로나에 확진되었으며, 가벼운 감기와 같은 증상을 겪고 있다고 발표했다. 전문가들은 여왕이 코로나19 진단을 받은 후 ‘평소보다 나약해 보이기 시작했다.’고 우려했다. BBC 기자 다니엘라 랄프는 ‘궁의 분위기는 조심스럽지만 경계심이 없다.’며 ‘여왕은 95세의 나이로 작은 감염에도 매우 취약한 나이이며, 또한 지금 여왕은 1년 전보다 훨씬 더 날씬하고 허약해졌다. 여왕을 주의 깊게 모니터링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2022년 2월 28일, 여왕의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으며 가족과 함께 프로그 모어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보도되었다. 코로나19에 걸렸다가 얼마 안 가 완치되는 등 나이에 비해서 여전히 건강한 편이지만, 최근 들어서 예전에 비해 건강이 많이 악화된 상태라고 한다. 왕실 측 관계자는 “여왕은 여전히 ​​그 어느 때보다 기민하고 능력 있고 관심이 있지만 육체적으로는 예전만큼 강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3월 22일, 여왕이 오랜 시간 동안 서 있거나 걷기 극도로 어렵다며, 곧 휠체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2022년 5월 9일, 버킹엄 궁은 여왕이 5월 10일에 열리는 의회 개회식에서 연설을 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발표했다. 여왕은 참석하기를 희망했으나 주치의들의 권고로 결국 참석하지 않기로 하면서 개회식에는 찰스 왕세자와 윌리엄 왕세손이 참석하기로 했다.

사실, 제2차 대전 후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할 무렵 대영제국의 위상은 거의 무너지다시피 하였다. 1947년 조지 6세 재위 시에 빅토리아 여왕부터 차지한 인도 황제의 지위를 잃은 것을 시작으로 실론, 미얀마, 말라야, 이집트, 로디지아 등이 줄줄이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심지어 영연방의 국가들도 모국인 영국과는 큰 틀만 유지하고 독립된 정치구조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런 대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영국 내부에서도 국민들은 복지국가를 지향하면서 왕실의 존재가 과연 필요한지 의문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즈음에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2세는 어떤 형태로든 왕실이 변화하지 않으면 존속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새로운 생존전략을 모색해야만 했다.


그들은 우선 영연방 국가들만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1953년 11월부터 6개월간 이곳을 순방할 계획을 세웠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순방은 왕으로서는 전례 없는 일로 그들과 새로운 유대를 기대할 수 있는 성과를 얻었다.


또 인도에는 영국 군주로서는 50년 만에 방문하는 기록도 세웠으며, 그 후로도 남아프리카와 페르시아만 연안 국가들을 꾸준히 순방하였다. 그녀의 적극적 행보는 1977년, 여왕 즉위 25주년에 35개국의 영연방 지도자들이 축하 연회에 참석하는 등의 가시적 결과로 결실을 맺었다. 결과적으로 여왕은 급속하게 추락하던 영국 왕실의 위상을 유지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왕이 정치에 관여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아닌 사실이었다. 이집트 민족주의자인 나세르 수상이 일방적으로 취한 수에즈 운하 봉쇄 및 국유화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은 이든 수상은 1956년에 무력을 행사했지만 실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여왕은 외교관 출신으로 수상에 올랐던 이든이 사태를 평화롭게 해결하지 않고 군대를 사용한 것이 권력남용이라고 괘씸하게 여겼다. 수에즈 운하 사태에 대한 무력행사는 영국의 정직성과 건실한 외교의 명성을 훼손시켰고, 작전의 실패는 영국의 위신을 크게 실추시켜, 일등 국가로 간주되던 영국의 시대가 끝났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입헌군주제에서 수상이 행한 행동이라 간섭할 수는 없었지만 당시 여론이 이든을 손절하기 시작하자 그녀가 움직였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사적인 견해임을 전제로 보수당인 맥밀런에게 차기 수상이 될 준비를 하도록 권하였다. 여왕이 맥밀런을 염두에 둔 것은 대외적인 위신을 중요시하는 보수당이 계속 정권을 유지하여야 왕권도 유지된다는 계산이었다.


여왕의 막후 조종(?)대로 맥밀런은 수상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며, 이는 여왕의 정치적 영향력을 대내외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사건으로 영국 국민들에게 기억되었다. 그녀는 맥밀런의 뒤를 이어 더글라스 홈이 수상에 오른 뒤 노동당의 윌슨 정부가 들어서는 1974년까지 강력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여왕은 보수당과의 연계 속에서 정치적으로 흔들리던 왕실의 중심을 다시 세울 수 있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여왕은 대처 수상에 대해서도 불만이 컸다. 수상이 포클랜드 전쟁을 시작했을 때는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녀는 승인을 하면서도 나름대로 전쟁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때부터 마거릿 대처는 의식적으로 자신을, 잉글랜드의 가장 카리스마적 군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16세기의 엘리자베스 1세와 동일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대처가 왕족과 같은 허세를 부리는 것을 싫어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러한 태도는 여왕 자신의 지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대처가 수상직에서 물러난 다음 엘리자베스 여왕은 “나는 무슨 일이든 강하게 밀어붙이는 그녀를 싫어했다.”고 사석에서 대놓고 말했다. 이런 여왕의 신중하면서도 정치적인 표현은 국민에게 묘한 매력을 발휘하였다. 다시 말해서 여왕의 존재는 상징적인 것 이상으로 국민과 정치를 중재해 주는 완충 역할을 한다는 느낌을 갖게 하였다.


갖은 노력을 통해 가까스로 되찾은 왕실의 위상은 엘리자베스의 자녀들에 의해 실추되기 시작했다. 딸인 앤 공주는 당시 소시지와 고기 파이를 만드는 회사를 경영하는 평민의 자녀인 마키 필립 대위와 결혼하면서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렸다. 이 결혼은 결국 이혼으로 끝을 보면서 더욱 국민들을 실망시켰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여동생인 마거릿 로즈 공주마저 1978년에 파혼을 하면서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결혼 전부터 염문을 뿌리고 다니던 왕세자 찰스는 1981년 7월, 정숙하고 가문 좋은 스펜스 백작 집안의 자녀이며 유치원 보모로 일하던 다이애나와 세인트 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으로 왕실의 권위는 다시 회복되는 듯하였다.


둘 사이에서 윌리엄, 해리 왕자가 연이어 탄생하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절정에 다다랐다. 그러나 결혼 전부터 사귀던 카밀라 파커 볼스와의 관계를 잊지 못하던 찰스는 결혼 1년쯤 뒤부터 다이애나와 불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1986년부터 심심찮게 왕세자 부처의 불편한 관계가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1992년 다이애나는 자신의 결혼생활과 왕실의 뒷이야기를 다룬 『다이애나-그녀의 진실』이란 책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밝혔다. 그 내용은 매체를 타고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이로써 그녀에 대한 동정과 왕실 및 찰스에 대한 안 좋은 시각은 커져갔다. 결국 둘은 1996년 이혼을 하면서 국민들의 실망은 더욱 커졌다. 거기에 같은 해 둘째 왕자인 앤드류도 서라 퍼거슨과 이혼을 하면서 충격을 더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사건은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가 파리에서 연인과 파파라치를 따돌리는 와중에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때 국민들의 원망이 찰스에게로 향하면서 왕실 권위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이후 찰스를 폐위하고 아들인 윌리엄을 후계자로 삼자는 제안이 많은 지지를 받았고, 심지어는 영국 왕실을 폐지하자는 말까지 떠돌기 시작하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군주로 그녀가 살아온 세월은 결코 짧지 않았다. 처음 바닥이던 왕실에 대한 인식을 다양한 노력으로 다시 정상화에 올려놓은 것은 분명히 엘리자베스 여왕의 지혜로운 처신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잘못된 교육방식은 아들 찰스의 구멍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녀가 대표하는 왕실이 페이퍼 컴퍼니까지 활용하여 부동산으로 재산을 축적한다는 스캔들에 이르기까지 최악으로 치달아 지금 영국 국민들은 왕실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여왕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 중의 한 명이지만 늘 검소함을 잃지 않는 모습을 연기했다. 하지만, 영국 국민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사람들은 이제 그녀의 표리 부동한 모습에 눈살을 찌푸린다.

영국의 40번째 군주인 엘리자베스 2세가 이끄는 영국의 입헌군주제는 이제 21세기로 넘어왔다. 오늘 이 순간에도 여왕은 직접적 통치하지는 않는다고는 하지만 군림하고 싶어 한다. 그녀의 대리로 등장하는 큰아들 찰스는 버젓이 불륜녀였던 여자를 옆에 끼고 행세하여 더욱 국민들의 신뢰를 잃고 비아냥거림을 들을 뿐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왕은 국가수반으로서의 의회를 소집하고 해산하며, 매년 가을 영국 정부의 정책을 요약하는 개회사와 함께 의회의 새로운 회기를 연다. 또한 그녀는 선거를 통해 수상이 선출되면 그를 임명한다. 그리고 정치에도 일정 부분 관여하고 있다.


매주 화요일, 그녀는 수상과 개별 회의를 하며 영국의 미래를 풀어나간다. 지금까지 여왕은 토니 블레어 총리를 포함한 10명의 총리와 함께 일해 왔다. 대외적으로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모든 영연방 54개 회원국의 명목상의 수장으로 인정되며, 다수의 영연방 회원국들에서는 여왕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정한 입헌군주제의 의미는 정서상 국민들의 존중을 받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나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대놓고 총부리를 들이대며 대통령이 된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이 할 말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이 젊어서 일궜던 왕실의 권위를 자신의 잘못된 욕망과 그릇된 가정교육과 처신으로 다 망쳐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짧지 않은 인생을 오늘 당신에게 4일간에 걸쳐 소개하면서, 왕실을 존치하게 하는 정작 중요한 가치는 무엇이었을까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게 된다.


처음부터 그녀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퍼포먼스이긴 했지만 그녀가 3주간 군대에 입대했던 전통은 그녀의 손주들이 전쟁터에 파견되는 퍼포먼스로 이어져 마치 왕실이 진정한 국민의 모범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기 아들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고, 아들의 부정을 단호하게 혼내지 못하고 정작 며느리를 내치고 이혼으로 그 굴레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며느리의 죽음에조차 반성과 사과를 비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나라를 상징하는 여왕도 결국 여자이고 어머니이다. 자신의 가정을 제대로 건사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이에게 나라를 잘 다스리는 모습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코미디임을 영국 국민은 물론이고 우리도 안다.


하지만, 아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다르다.


오히려 자기 자식에게는 부정을 취해서라도 좋은 대학을 보내고 부를 계승하기 위해 의사나 법비를 만들고자 별 짓을 다하면서 ‘내 자식이고 그게 부모니까’라고 말하는 정신 나간 아비어미들이 있는 이상 사회는 결코 발전하거나 맑아지지 못한다. 특히 그들이 자신은 여유가 없어 그런 짓을 못하는 것일 뿐, 언제고 그런 짓을 하면서도 다른 이들이 그런 짓을 벌인 것에 대해 가혹한 잣대로 칼날을 들이대는 꼴은 언제 보더라도 추악할 뿐이다.

조만간 영국은 여왕의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암암리에 장례식 리허설도 갖는다고 한다. 그들이 중시하는 대영제국의 영광이나 여왕의 보이는 권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정말로 존경받을만한 모습을 보이며 그녀의 죽음을 진정으로 국민들이 추도할 수 있는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여왕의 삶뿐만 아니라 평범한 소시민을 자처하는 당신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아주 작은 사회적 실천에도 외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잘못을 바로잡자는 외침에 고개를 돌려놓고서, ‘내가 사는 범위에서 나는 착하고 올바르게 살았지’라고 끊임없이 자위하는 이유는, 그렇게 구독해지만이 아니라 차단까지 하면서 도망가는 그 꼴을 보이는 것은 당신도 당신이 여왕이 했던 짓처럼 자기 합리화를 하려고 해도 당신의 양심 어느 한 구석이 쑤시고 아파옴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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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나마 양심이 본능적으로 아파오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당신이 사람이라는 의미이니 다행이다. 아무런 느낌도 없이 그저 귀찮고 내 일이 아니라고 스쳐 지나가버리는 것을 넘어서 그 일을 바로잡을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적당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눈감거나 뭉개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자식에게 바르게 행동하라며 표리 부동한 언행을 보이는 짐승들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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